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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0 회


제4장 한성에서


3


김정환이 돌아간 다음 고익재는 일진회 부회장인 차동철이가 기다리는 객주집으로 향했다.

으슥한 뒤골방에 들어서니 차동철이가 이미 기다리고있었다.

벌써 취기가 올라 눈정기가 풀어진 차동철이를 바라보는 고익재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프러졌다.

《고형, 참 오래간만이요.》

고익재는 차동철의 수인사에 머리를 끄덕여보이며 그와 마주앉았다. 그리고나서도 고익재는 한동안이나 차동철을 외면하고 앉아있었다.

주색에 빠져 인간의 체모를 상실한 이런자들은 고익재가 가장 증오하는 인간들중의 하나였다.

고익재는 웬간해서는 이따위것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차동철이를 통하여 일진회의 움직임을 알아내려고 종종 이런 자리를 마련했던것이다.

대대로 문화재보를 관리하는 일을 한 조상들 덕에 고익재에게는 고려의 이름난 자기들과 력대 우리 나라 명필들의 필적을 담은 족자들이 더러 있었다. 고익재의 이러한 재물들에 눈독을 들인지 오랜 이자는 어떻게 하든 그것을 손에 넣을 기회를 마련하느라 무던히도 애를 썼다.

고익재는 차동철의 이러한 약점을 리용하여 여러차례나 중요한 정보를 알아내군 했다.

지금도 일진회것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지라 그것을 알아내려는 생각에서 역스러웠지만 차동철이와 마주앉은 고익재였다.

고익재와 마주앉자마자 차동철은 지금껏 홀로 식탁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입에 감질을 만난 봉창을 하려는듯 서둘러 씨벌여대기 시작했다.

《고형, 난 고형을 존경하우. 박식하구 또 사리에도 밝구… 그러나 형님은 대세를 따르는데서는 이 차동철이 발뒤축에도 닿지 못하우다.

대한협회가 이젠 일본사람들의 꼭두각시로 둔갑을 하고있는 판에 거기서 민족수양이나 떠들면서 힘을 키울것을 호소나 해가지구야 일본사람들을 당해낼수가 없지요. … 고형이 그 잘난 평의원자리에서 밀려난것두 바로 그때문에가 아니겠소.》

이 말은 취중의 객담이 아니였다.

이미 대한협회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던 왜놈들이 반일감정이 짙은 남궁억을 회장직에서 사퇴하도록 탄압을 하고 그 자리에 친일적경향성이 강한 김가진을 들여앉혔던것이다. 뿐만아니라 다른 상층인물들도 김가진의 측근들로 교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통에 고익재도 평의원의 직에서 밀려나게 되고말았던것이다.

이리하여 하나의 지향으로 나가던 대한협회에 균렬이 생기게 되였는데 친일타협적인 세력은 김가진을 비롯한 량반관료출신인물들로 이루어졌고 반일애국적인 세력은 남궁억을 비롯한 량심적인 지식인들로 구성되였다.

이 두 세력은 자기들의 견해의 차이로 말미암아 처음부터 대립이 심하였다. 남궁억 등 반일애국적인 세력들은 협회활동의 반일적인 성격을 고수하려고 하였으며 반면에 친일타협적인 세력들은 일제와 친일주구들과의 타협의 궤도에로 협회사업을 이끌어가려고 시도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 대한협회활동의 기본방향은 협회의 회장, 부회장, 총무 등의 요직을 독차지한 친일타협세력에 의해 친일적인 경향이 우세하면서 그 파동으로 심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김가진을 우두머리로 하는 친일타협세력들은 협회사업을 일제와의 정치적타협, 일진회와의 정치적제휴의 방향으로 이끌어가려고 집요하게 책동하였다. 그들은 또한 신문, 잡지를 통하여 반일투쟁에 일떠서 피흘려 싸우던 의병부대들에게 투쟁을 그만둘것을 호소하는 행위까지 감행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민족적지조와 량심을 지닌 많은 문인들이 무시할수 없는 세력을 유지하면서 초기의 협회성격을 고수하기 위하여 무진 노력을 기울이고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도 일진회의 움직임을 제때에 알아내여 폭로하고 대중을 불러일으키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것이다.

고익재는 차동철의 넉두리를 귀등으로 들어넘기며 곧장 본론에 들어갔다.

《그런데 요즘 리용구가 이전 고문인 우찌다에게서 무슨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고 하던데 그건 어떤건가?》

차동철의 거슴츠레하던 눈이 번뜩했다. 이어 그는 손가락을 급히 입으로 가져다댔다.

《쉿, 그건 알 필요도 없수다. 알아야 괜히 우환거리나 되지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익재의 얼굴에 노여운 빛이 어리자 차동철의 입에서는 다음 말이 이어지고야말았다.

《우찌다의 강박을 받았지요. 후유, 나라가 아예 기울어졌수다. 형님도 대세를 바로 보시우. 우찌다의 강박이 무엇인지 아시유?》

차동철이 주위를 한바퀴 둘러보고나서 고익재의 옆에 바투 다가앉았다.

《형님, 내 말을 듣고 발설하면 둘 다 끝장이요.》

《뭔지 들어보구나 다짐을 두세.》

《지금 가쯔라를 비롯한 일본의 거두들이 전 고문인 우찌다에게 비밀지령을 내렸다나 봅디다. 이 나라를 일본에 병합시키는 청원서를 바로 일진회가 2천만의 명의로 일본〈천황〉에게 바치게 하려는거지요.》

고익재가 저도 모르게 상을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라구? 이놈들아, 너희들이 지금 무슨 대역죄를 짓고싶어 그리두 지랄발광이냐? 이 천벌을 맞을 놈들아, 네놈들 몇놈의 역적무리들이 어떻게 2천만 백성을 대변한다더냐?…》

차동철이 두눈이 퀭해있다가 화닥닥 놀라서 고익재의 입을 막으려고 했다.

고익재는 그의 손을 뿌리쳐버리고 밖으로 달려나왔다. 그리고는 달렸다. 고익재는 제정신이 아니였다.

세상천지 간악무도한 역적의 무리들로 하여 나라가 망한 례를 어느 하나라도 놓침이 없이 통달하고있는 고익재로서 고금동서에 있어본적 없는 이 파렴치하고 극악한 배신행위에 경악하여 분별을 잃었던것이다.

고익재는 자기가 어디로 달려가는지도 분간하지 못했다.

그의 앞에 일진회청사가 나졌다.

고익재는 일진회청사로 무작정 뛰여들었다.

정문을 지키던 힘군들이 달려왔지만 그들을 뿌리치고 리용구의 방으로 뛰여들었다.

의자에 앉아 머리를 싸쥐고있던 리용구는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며 뛰여드는 사람을 보고 덴겁을 하였다.

하지만 문앞에 떡 벋치고 서서 자기를 노려보는 사람이 당장 자기 목숨을 앗아갈 흉기를 든 어떤 자객이 아니라 곰팡이내가 풀떡풀떡 이는 책장이나 번질줄 아는 대한협회의 고익재라는것을 안 다음에는 안도의 숨과 함께 의아스런 빛을 띠였다.

《고선생이 웬 일이시오?》

고익재는 온몸을 후들후들 떨며 부르짖었다.

《이놈아, 이 역적놈아… 이제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지지 않나 두고봐라. 당장 병합청원을 걷어치우지 않으면 천벌이 떨어질게다. 걷어치워라. 민족이 네놈때문에 욕을 당한다. 이놈아…》

고익재가 앞에 놓인 의자 하나를 버쩍 들어 리용구에게 던졌다.

의자가 리용구의 머리우를 지나갔다.

리용구는 아연실색하였다.

아직은 몇명의 심복들만이 알고있는 사실을 다른 누구도 아닌 일진회의 가장 위험한 정치적적수의 입에서 낱낱이 흘러나오고있으니 기절초풍할 일이였다.

고익재가 자기의 가슴을 쳤다.

《아- 이놈아, 나랄 팔아 기름진 음식쪼각이나 몇가지 더 먹고 땅속에 묻힌 다음이라도 네놈이 편히 있을상싶어 고금동서에 없는 역적질에 그리두 몸살이냐? 이놈아-》

고익재의 두눈이 푸들푸들 떨렸다. 그의 절규는 계속되였다.

《이놈아, 개도 제 집에 똥을 눌 땐 문짝부터 살핀다고 했다. 네놈이 민족의 얼굴에 똥칠을 하라구 우리 백성들이 그냥 있을상싶으냐. 네놈의 몸뚱이가 이천만쪼각으로 찢어질게다. 내 네놈의 죄행을 만천하에 발가놓을터이다. 당장…》

고익재는 몸을 돌려 밖으로 뛰쳐나갔다.

리용구는 고익재가 사라진 문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대한협회가 끝내 자기의 발밑을 파헤치고있는것이다.

지금 김가진을 비롯한 친일적인 경향을 가진자들을 상층부에 들여앉혔다고 하지만 여전히 협회의 지회들과 량심적인 회원들속에서는 일제와 그 친일주구단체인 일진회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가 줄어들지 않고있었다.

바로 그러한 인물들중의 한사람인 고익재야말로 친일로 명줄을 이어가는 리용구를 비롯한 역적들에게 무시할수 없는 위험천만한 인물인것이다.

고익재는 이미전부터 일본의 강도적본성을 폭로하고 리완용을 비롯한 내각거두들을 저주하였으며 일진회의 비렬하고 더러운 매국배족행위에 대하여 언제나 신랄한 비난을 하여왔다. 그리하여 리용구를 비롯한 친일역적들은 그를 항상 눈에 든 가시처럼 여겨오던터였다.

리용구는 이미 일본사람들의 초점에 놓인 대한협회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것을 알고있었다.

하기에 이제는 대한협회라는 적수가 두려운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업신여기던 나무가지에 상투꼭지가 걸린다고 대한협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는 날에는 세상에 공개될것이고 그러면 백성들이 들고일어날것이다. 그 후과는 참으로 무서웠다. 병합청원이 순종황제의 의사를 대변하여 일진회가 일본《천황》에게 제출하는것으로 되여야만이 백성들의 분노한 돌팔매질이 향방을 잃게 되는것이지 일본거두들의 각본에 따라 다 거덜이 난 일진회가 꾸민 날조라는것이 사전에 알려지는 날에는 2천만 백성들의 분노를 몇갑절로 폭발시켜 지금까지 면밀히 준비해온 모든 노력이 허사로 되고마는것이다. 일본의 조선병합이 물거품이 되건말건 그따위것은 리용구에게 중요치 않았다. 다만 일이 그렇게 번져진다면 일본의 거두들이 극비밀리에 진척시키고있는 흉심을 사전에 발로시킨 책임으로 자기의 목숨이 더는 붙어있지 못할것이라는 우려가 사지를 저려들게 할뿐이였다. 리용구의 등골로 식은땀이 쫙 내돋았다.

고익재가 자기들의 일을 내탐한 이상 그를 살려둔다는것은 자멸을 의미하였던것이다. 그를 그냥 두면 다음날 아침에는 자기들의 행위가 온 나라에 알려질것은 자명한 일이였다.

리용구는 소스라치듯 놀라 문밖을 향하여 자기도 알아듣지 못할 괴성을 내질렀다.

부회장 차동철이가 술에 푹 절은 얼굴에 당황망조한 빛을 띠우고 나타났다.

그를 보는 순간 리용구는 이자가 고익재에게 비밀을 루설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이 순간에는 그걸 먼저 따질 경황이 없었다.

《당장 저자를 없애버려라.》

리용구의 악청에 차동철은 사나운 눈빛을 띠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고익재는 자기의 뒤에 위험이 따르는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길을 따라 달리듯 걷고있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무서운 분노로 하여 불이 붙는듯싶었다.

너절한 놈들… 짐승같은 놈들… 내 네놈들을 그냥 두지 않을테다.

갑자기 앞을 막는 놈이 있었다.

술내를 확 풍기면서 차동철의 낯짝이 나타났다.

《비켜라, 이놈아- 헉.》

갑자기 숨이 꺽 막혔다. 온몸으로 찬 기운이 쭉 퍼지는듯 한감을 느끼며 고익재는 가슴을 붙잡고 옆으로 기울어졌다.

밤어둠속에서 불쑥 나타난 여러명의 일진회 회원들이 피를 뿜으며 길바닥에 쓰러진 그를 둘러메고 어디론가 달리기 시작했다.

한동안이나 달려 검푸른 물결이 흐르는 한강가에 이르렀다.

그자들은 아직 숨이 붙어있는 고익재를 한강물속에 던져버렸다.

사품치는 한강, 민족이 왜적에게 짓밟히면서 곡절많고 수난당한 생명들을 수없이 삼켜버린 한강물이 또 한사람의 아까운 생명을 안고 절통한듯 소리없이 흘렀다.

일진회가 귀신도 모르게 저지른 이날밤의 죄행은 그 다음날에 대한협회에 알려졌다. 량심적인 문인 고익재의 죽음과 함께 일진회의 병합청원의 내막이 알려짐으로 하여 일제의 비밀거사는 세상에 공개되였다. 이로 하여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던 대한협회와 서북학회가 일진회와의 련합에서 탈퇴하였으며 일제가 조작하는 《합방》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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