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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회


제4장 한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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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환과 기봉대가 려인숙을 향해 골목길을 걷고있던 그 시각 대한협회 고익재의 딸 고려은은 진희와 강수길을 의아한 눈길로 지켜보고있었다.

그들의 사이가 별로 서먹스러워보이였다.

강수길의 표정을 보는 려은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는감을 느꼈다.

(무슨 사람 인상이 저럴가? 꼭 성난 사람같이…)

사실 려은이는 여기까지 오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었다.

좀전에 려은은 자기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터놓고싶어 친자매처럼 가까운 사이인 진희를 찾아나섰다.

그들이 서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진희의 얼굴에는 밝고 명랑한 빛이 어려있었다.

오래간만에 만나게 된 그들은 만나자마자 한몸이 되여버렸다.

《진희야…》

《아이, 려은이로구나. 어딜 가던 길이니?》

《널 찾아가던 길이다.》

진희는 너무 반가와 려은이의 두손을 꼭 잡고 놓을줄 몰랐다.

신녀성을 표방하는 진희와는 달리 아직도 녀인의 삼강오륜을 숙명처럼 알고있는 려은이가 이렇게 인파가 바글바글 끓는 거리에 홀로 나선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였다.

《그새 잘 지냈니? 아버님은 앓지 않으시구?》

려은은 진희의 련이은 물음에 고개만 알릴듯말듯 까닥였다.

그때에야 려은의 얼굴에 수심이 깃든것을 알아본 진희는 의아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생겼니?》

려은은 호- 하고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매파가 찾아오질 않았겠니.》

진희의 얼굴에 웃음이 확 어리더니 한손으로 려은의 어깨를 살짝 밀었다.

《그건 좋은 일이구나 뭐.》

《좋을게 뭐니? 매파를 내세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아마 그런 소릴 다신 못할게다.》

려은의 안타까움이 슴배인 말에 진희는 웃음을 거두고 의아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누군데?》

《저 동대문쪽에 살고있는 송지갑이란 량반집자제인데 한성바닥에서 소문난 난봉군이란다.》

진희의 입이 딱 벌어지였다.

《아니, 그럼 그 난봉군? 어쩜 너한테 그런 일이…》

그 송림이란 젊은 량반집 도령에 대한 기괴한 소문은 진희도 여러번이나 귀동냥으로 들은바 있었다. 그에 대한 말은 아무리 신녀성을 표방하는 진희라고 해도 차마 귀를 열고 뻐젓이 들어주지 못할 상스러운 소문이였다.

그런 난봉군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천하에 순박하고 마음고운 려은이가 걸려들었다는것이 자기가 당한 모욕만큼이나 분하게 들리였다.

《어쩌다 그런 난봉이와 상종하게 됐니?》

《상종? 난 그 사람 그림자도 본적이 없다, 얘…》

려은은 머리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였다.

사실 그가 언제 그 난봉군의 눈에 걸려들었는지는 딱히 알수 없으나 여하튼 려은을 한번 본 이후에 그 송림이란 량반집 도령은 정신이 나갈 지경이 되였다는것이다.

한성바닥에서도 제일 유명한 수다쟁이매파를 수십번이나 처녀의 집에 보냈지만 려은은 매번 목숨을 끊더라도 그에게는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겠다는 완강한 대답만을 보내였다.

하긴 어느 얼빠진 규수가 그렇듯 소문난 난봉군에게 시집을 가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

송림으로 말하면 한때는 그래도 글방에 곱게 앉아서 애국명장들의 전기들과 우리 나라의 력사가 기록된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탐독했고 목침통같은 《경국대전》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면서 어느 글줄이나 막힘없이 통달하기도 했으며 삼사년전엔가는 당시의 유명한 수학자 리상혁의 수학론문집인 《산술관견》을 정신없이 파고들어 많은 사람들이 듣고도 모를 미지의 오묘한 리치를 터득하기도 하였다.

얼마전에는 또 한성에 세워졌던 《척화비》를 찾겠다고 장안의 안팎을 무른 메주밟듯 하며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1871년에 있은 신미양요이후에 전국도처에 세워졌던 《척화비》를 임오군인폭동이 실패로 끝난 다음 명성황후일파들이 모조리 뽑아서 깨버리거나 땅속에 묻어버렸던것이다. 한성에 세웠던 《척화비》도 그때 뽑히여 어디엔가 묻혀있으련만 그 위치를 누구도 모르다나니 끝내 찾아내지 못하고말았다.

생긴것이 멀쩡한데다 머리속에 글까지 있고 거기다가 의협심까지 있는듯 하다나니 딸가진 지체높은 대가집들에서 은근히 눈독을 들인적도 한두번이 아니여서 매파들이 꼬리를 물기도 했었다.

그런 송림이가 갑자기 못된 살이 끼였는지 모든것을 팽개치고 돌연 유명짜한 난봉이가 되여버렸다.

한성사람들속에서 쉬쉬- 하며 돌아가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명문가집자손으로서 부친과 의가 맞지 않아 티각태각하다 못해 요즘에 와서는 서로 만나기도 꺼려한다는것이다.

아무리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이 세상을 개화하려던 일이 엊그제일일지라도 오래동안이나 가법처럼 여겨오던 삼강오륜의 첫번째 항목에 심히 어긋나도록 아비와 아들간에 적의가 꿈틀거리니 이는 필시 후생의 불효가 아니면 있을법이나 한 일이겠는가며 혀를 내둘렀다.

죄목의 두번째 항목은 송림이가 아주 우습기 그지없는 작자라는것이다.

조선팔도에 널리 알려진 당대 명창들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목소리를 제법 흉내도 곧잘 내여 량반의 기풍을 어지럽히는 기괴한 일도 거리낌없이 저질렀던것이다. 하여 한성바닥의 기와집들속에서는 그를 두고 반상의 마지막뿌다귀까지 말짱 뽑으려드는 천벌맞을 놈이라고 격분한 욕설들이 때없이 울려나오군 했다.

이렇게 대대로 어길수 없는 도덕군자의 행실로 간주되여 전해온 삼강오륜과 량반의 법도를 무시한 두가지 죄목은 세번째 죄항목에 비하면 그래도 퍼그나 가벼운 죄목이였다.

그의 죄중에 제일 용서받기 힘든 죄목은 바로 그의 주색잡기에 있는것이였다.

말을 보태기 좋아하는 대가집 마님들이 입을 비죽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가 기생방출입은 배탈 만난 놈 뒤간출입만큼이나 잦고 지어는 어떤 명문가집 귀동녀의 침방에 뛰여들었다가 그집 하인들의 모두걸이에 들어 하마트면 사등뼈가 부러질번 한적도 있는 기갈든 난봉군이라는것이다. 그 기생방출입비용으로 집돈을 뽑아쓰다 못해 자기의 모친이 남긴 치레거리들을 다 팔고도 숱한 빚까지 지게 되였다. 그때문에 부친이 금방 사놓았던 수원의 기름기가 찰찰 도는 전답 두개를 떼우기까지 했다는것이였다.

바로 이러한 난봉군인 송림은 그야말로 도덕군자의 수양을 쌓은 배필을 그려보는 요조숙녀인 려은이에게 당치도 않았던것이다.

려은의 이야기를 들은 진희는 따지듯 물었다.

《그런데 너의 아버님은 뭐라시던?》

《성을 내시면서 찾아오는 매파를 쫓아냈지만 비위가 얼마나 좋은지 또 찾아왔더구나.》

《그런데 네가 그를 피해 밖에까지 나서야 할 까닭이 뭐니? 다시는 발길질을 못하도록 따끔히 말해줄노릇이지.》

《매파의 말이 이제 그 난봉이가 집에 찾아온다는거야. 아버님은 들어서기만 하면 머리통을 박살내겠다며 펄쩍 뛰시는데 어디 앉아있게 됐니? 그래서 자리를 피해 너를 찾아가던 길이야.》

머리를 끄덕이던 진희가 려은의 손을 정답게 잡아쥐며 말했다.

《그렇다면 잘됐다. 나랑 같이 좀 가주렴.》

《어딜?》

《경찰관주재소에 가던 길이야.》

《그럼 네가 말하던 그 강수길이란이에게? 아이구머니, 내가 어떻게 그앞에 나선다고 그러니?》

《아유, 넌 아직 봉건이 심하구나. 너의 아버님은 대한협회신문에 민족이 점점 죄여드는 대국들의 예속에서 벗어나자면 낡은 봉건의 유습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쓰시던데 넌 왜 아직 그 모양으로 놔두시는지 모르겠다.》

진희의 말에 려은은 더이상 거절할수가 없었다.

이 한성바닥이 아무리 넓다한들 려은이가 갈 곳이란 진희가 있는 곳뿐이였다. 이렇게 되여 려은은 할수없이 진희를 따라나섰던 걸음인데 지금 그들의 표정을 보면 자기가 괜히 이 자리에 서있는것만 같았다.

강수길은 갑자기 앞에 나타난 진희에게 매우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표정이 마치도 나무로 깎아만든 목석과 같은지라 서로의 인사말도 한참이나 동안이 지난 다음에야 진희의 주동에 의하여 오고가는것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어딜 가던 길입니까?》

역시 퉁명스런 물음이여서 잠시 머뭇하던 진희가 조심스레 말했다.

《수길씨를 만나러 파출소에 가던 길이예요.》

수길은 말이 없었다. 그저 방금 만났던 사람들이 사라진쪽만을 바라보면서 진희를 외면했다.

려은은 수길이가 저렇게 무뚝뚝한것이 방금전에 웬 사람들과 마주서서 좋지 못한 일이라도 겪어 그러는듯싶었다.

경찰관주재소로 찾아가던 진희와 려은이가 길거리에 서있는 수길을 발견했을 때 왜서인지 마주선 사람들과의 인상표정이 좋지 않았던것이다.

차츰 려은이에게는 수길의 태도가 그들때문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갈마들었다. 그는 분명 진희와 마주서길 꺼려하는듯싶었다.

진희도 그것을 느껴서인지 잠시 바재이다가 말했다.

《저… 오늘 저녁에 저의 아버님께서 한번 만나자고 하시길래…》

려은의 입에 웃음이 사르르 피여났다.

그랬었구나. 그래서 자기 혼자 오기가 쑥스러웠던 모양이지. …

려은은 자기가 당하는 일처럼 귀뿌리가 빨개지며 콩콩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살며시 수길을 곁눈질하였다.

그러던 려은의 두눈에 의혹이 비꼈다.

수길은 여전히 돌부처모양이였던것이다.

진희를 외면한채 말없이 생각에 잠긴 그를 바라보느라니 려은은 왜서인지 가슴이 불안스러워지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왜 저럴가? 저 사람은 도무지 달가와하는 기색도 없네. …)

려은의 의문을 깨치며 저쪽에서 수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희씨, 난 진희씨의 그 진정을 고맙게 생각하며 일생 잊지를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건 내가 바라는바가 아니니 마음을 돌려주시오.》

《뭐예요?》

려은이에게는 진희의 그 말이 비명소리처럼 들렸다.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어떻게 그럴수 있단 말인가.

귀가 윙윙하였다. 심한 모욕을 느낀 진희가 얼굴을 싸쥐고 몸을 돌려 달려갔다. 려은은 달려가는 진희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자기도 그를 따라가는것이 옳았으나 진희가 달아나면서 떨군 목수건이 발목을 붙잡았다. 수길이라도 발길을 돌리면 얼른 목수건을 집어들고 이 급한 모퉁이를 넘길수 있으련만 그 무정한 《돌부처》는 장승처럼 그 자리에 떡 버티고 서서 진희의 뒤모습을 멍청히 바라보고있었다.

그러던 수길이 천천히 허리를 굽혀 목수건을 집어들고 려은이 앞으로 다가왔다. 려은은 몸을 외로 돌리고 수길이가 넘겨주는 진희의 목수건을 받았다.

목수건을 넘겨주고나서 강수길은 려은이에게 대번에 늙어버린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내가 혐오스럽겠지요?》

혐오스럽느냐구? 아직 거기까지 생각이 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희에 대한 그의 랭정한 태도는 전혀 리해되지 않는 의문이였다.

려은이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수길은 큰숨을 내쉬고나서 말했다.

《난 나때문에 한 녀성이 불행해지는것을 바라지 않으며 또 한가정에 매여 사나이의 본분을 다하지 못하게 되는걸 원치 않습니다. 나를 리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어떻게 리해한단 말인가? 그처럼 아름다운 용모에 대바르고 고상한 성품을 지닌 진희에게 어떻게 그런 불행이 생길수 있단 말인가.

강수길은 할 말을 다했다는듯 머리를 약간 숙여보이고는 돌아섰다.

성이라도 난듯 몇걸음 옮기던 그가 문득 멈추어서더니 다시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는 려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참, 제가 알기에는 아가씨가 대한협회 고익재선생의 따님이시라던데… 그러면 혹 송림군을 알겠군요?》

려은은 파들짝 놀랐다.

이 사람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어떻게 튀여나오는것인가?

려은은 자기의 귀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수길은 려은의 심정에는 아랑곳없이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명분도 없고 또 이런 자리에서 체면도 없습니다만 한가지 꼭 말해주고싶은건 사람은 자기가 지내보기 전에는 결코 진가를 따지지 말아야 한다는겁니다. 그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 아가씨가 심중히 생각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수길은 그 자리를 떠났다.

그가 사라진 다음에도 려은은 아연하여 한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고상한 인격을 소유한 순진한 처녀를 배척하는 자리에서 난봉군의 진가를 높여주는 그를 어떻게 리해해야 한단 말인가?

그와 송림과는 또 어떤 관계에 있는것인가?

혹시 이자 만났던 몸집이 황소같은 사람이 그 송림이란 난봉군이 아닐가?

려은은 숨길을 딱 멈추었다.

맞았어, 그가 날 보더니 어딘가 당황해하면서 황황히 가버리지 않았는가.

려은은 꼭 자기가 배반이라도 당한듯싶었다.

그를 알려면 친구를 보라는 말이 생각났다.

진희를 차버린 수길과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사람 송림… 려은의 눈에 비낀 두사람은 다같이 녀성으로서 용납할수 없는 인간들인것이다.

려은은 몸을 돌렸다. 진희가 사라진쪽으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여기저기 진희를 찾아보았으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기진하여 발길을 돌려 집쪽으로 향하는데 이웃에 사는 녀인을 만났다.

빨래임을 인 그 녀인은 려은을 붙들고 한동안이나 사설을 늘어놓았다.

잘사는 집 삯빨래를 해주고 근근히 살아가는 그 녀인에게 동정이 가서 별다른 음식감이 생기거나 색다른 물건이 생기면 아낌없이 주군 하여 려은의 일이라면 언제나 극성스런 녀인이였다.

좀 수다스러운편인 녀인은 려은에게 조금전에 송림이라는 난봉군녀석이 대문안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고 쫓겨갔다는 사실을 방불하게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려은은 이런 생각을 했다.

(난 그만하면 일이 잘됐는데 진희는 어쩐담. 우린 왜 다 이렇게 기박할가?)

그런 생각을 하며 대문가로 들어서던 려은은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웬 사람이 마당가에서 아버지와 마주서있었던것이다.

그 사람을 바라본 려은은 가슴이 순식간에 졸아드는것 같았다.

분명 그 사람이였다. 아까 강수길과 마주서있던 사람…

조금전에 강수길이의 말을 듣고 난봉군이라고 단정해버린 송림이라는 사람이 자기 집마당가에 서있는것을 보게 된 려은의 가슴은 몹시도 활랑거렸다.

또 왔구나. 이웃집아주머니의 말이 분명 아버지가 쫓아버렸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아버지의 태도는 어떻게 저리두 부드러울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아버지가… 목침통으로 머리통을 박살내겠다고 벼르던 아버지가 저리두 돌변할수 있단 말인가. …

아버지가 웃으며 그에게 이야기하는 소리가 귀가에 똑똑히 들려왔다.

《내가 그럼 딸애에게 이야기해놓겠으니 그렇게 락착을 짓자구.》

《그렇게 해주시면 저도 마음을 놓겠습니다. 그런데 따님이 선뜻 응낙하시겠는지…》

《그앤 애비말이라면 다네. 그리구 그게 무슨 큰일이라구.》

《그렇다면야… 정말 고맙습니다, 평의원님.》

《이젠 평의원이 아니라는데 그러누만. 그저 고선생이라고 부르게.》

《알겠습니다. 고선생님… 허허.》

마당가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려은의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아버지와 저 사람사이에 약조가 이루어졌으니 제가 무슨 힘으로 아버지의 분부를 거역한단 말인가. 몸이 휘청거렸다.

인기척을 느낀 아버지가 그에게 얼굴을 돌리였다.

《이제 오냐?》

려은은 말없이 도고한 자세로 아버지와 마주서있는 사람을 쏘아보았다.

그 사람이 어리둥절하여 마주 바라보았다.

아버지의 민망스러운 목소리가 울려왔다.

《너 왜 그러고 섰느냐? 어서 이리 와서 내 말을 들어라.》

려은은 이를 옥물고 머리를 숙인채 아버지앞에 다가가 섰다.

두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가 신고있는 고무신코숭이에 떨어졌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먼곳에서처럼 들려왔다.

《네가 이 사람일을 좀 도와야겠다.》

려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제 곧 저 왕십리에 있는 우차군에게 다녀오너라. 가서 내가 일전에 부탁한것을 오늘 밤중으로 실어다놓으란다고 일러라.》

《?》

《그리구 래일 아침에는 그가 갔다온 곳을 알아서 간혹 내가 없어도 네가 이분에게 꼭 알려주어야 한다. … 알겠느냐?》

려은은 머리를 들었다. 지금껏 자기 생각에 옴해서 아버지를 곡해하고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려은은 그제야 아버지와 마주선 사람을 눈여겨보게 되였다.

그러고보니 나이가 퍽 들어보였다. 려은이는 자기도 모르게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제까지 새침해있던 처녀가 갑자기 얼굴에 웃음을 비껴담자 마주선 사람이 거북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평산사람 김정환이라고 합니다. 전번날 밤에도 뛰여들어 페를 끼쳤는데 이번 걸음의 일이 여의치 않아 또 페를 끼치게 되였습니다.》

뭐? 평산사람 김정환? 그럼 전번 겨울밤에 부상당해서 집에 업혀왔던 그 의병이로구나. 그런걸 난 또…

그런데 어떻게 수길이와 마주서있었는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가 송림이라는 난봉군이 아니라는 그 하나만으로도 려은의 입에서는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안도의 숨이 새여나왔다.

지금껏 억측으로 손님을 박대한 자기가 민망스러워 려은은 얼른 나부시 절을 했다.

《전에 제가 놀란김에 푸대접했어요. 아버님에게서 꾸중을 듣고야 깨우쳤으니 용서하세요.》

《아니, 이거… 이러지 마시오.》

김정환이 두손을 마주 내저으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고익재가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자넨 그럼 들어가 저녁을 하고 가게. 객지에서 더운밥이 그리울터인데… 난 좀 나가봐야 할가보네. 일진회에서 부회장을 하는 차동철이란자와 만나기로 했네. 리용구네 무리들이 고문으로부터 가쯔라를 비롯한 일본의 정객들이 꾸민 무슨 엄명을 받았다고 하네. 그것들이 리용구같은 페물을 부릴 때는 필시 민족을 욕보이는 황당한 일뿐이니 이번에도 아마 끔찍스런 일이 날듯싶네. 그걸 빨리 알아내여 지사들에게 알려줘야겠네.》

김정환이 그의 호의를 사양하였다.

《전 아무래도 빨리 가봐야 할것 같습니다. 거기에 함께 온 사람이 기다리고있어놔서… 이거 안됐습니다.》

고익재는 정환의 고집스런 표정을 보고 더 권하지는 않았다.

《그럼 래일 정오에 은방앞에서 만나자구. 일이 생겨 혹 만나지 못하게 되면 저녁에 집으로 오라구.》

《알겠습니다.》

김정환은 고익재와 려은이에게 례의를 표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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