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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8 회


제4장 한성에서


1


한성에 이르니 정오때였다. 먼길을 걸었더니 배가 몹시 출출했다.

관청에 온 촌닭처럼 몸을 빙글빙글 돌려가며 한성구경을 하는 봉대의 배에서도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김정환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마침 맞은켠에 있는 국수집이 눈에 띄였다.

《봉대야, 우리 저기 들어가 요기나 하구 갈가?》

《좋지요. 히야! 형님, 이거 밤에 왔을 때하군 완전 딴판이구려. 한성이 이런 번화가였는가? 사람들이 막 바글바글 끓는구만요. 이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뭘 먹구 사오? 일전에 듣자니 이곳 사람들이 말이요, 뒤웅박에다 김치를 담가먹는 한이 있더래두 장안을 떠나 시골에서 살기 싫다 한다우다. 별 우스운 사람들이지요.》

눈에 본것이 고작 고을이 전부인지라 봉대의 입은 다물릴줄 몰랐다.

김정환이가 그에게 앞에 있는 국수집을 가리켜보이자 봉대가 날듯이 먼저 달려들어갔다.

한성구경에 성수가 난 모양이였다. 지난번 한성공격때 창의문부근까지 왔댔다고는 하지만 새까만 밤중인데다가 큰 싸움을 앞둔 때라 주변경개에 눈돌릴 짬이 없었던것이다. 그러니 봉대에겐 오늘의 한성구경이 생전처음인셈이다.

김정환이 빙그레 웃으며 그의 뒤를 따라 국수집으로 들어서려는데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허줄한 괴나리보짐을 어깨에 걸터멘 웬 사람 하나가 그를 바라보고있었다.

잔뜩 성난 인상이였다.

생긴품이 곰살스럽지 못하다 했는데 목소리 또한 퉁명스럽기 그지없었다.

《여기 주막집이 어디요?》

그의 말투가 황해도억양인지라 김정환은 그를 세세히 뜯어 살폈다.

그의 모색을 훑어보던 김정환의 눈길이 목부위에서 멎었다.

(이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인츰 생각났다. 어디서 본 얼굴이 아니라 귀로 들은 모색이였다. 서흥주막에서 화살로 리용구를 저격했다던 사람의 용모에서 특이한 목부위의 손바닥만 한 기미가 바로 앞에서 길을 묻는 이 사람의 목에도 있었던것이다.

《아니, 길을 물었는데 사람은 왜 그리 뚫어지게 쳐다보시우?》

그제야 자기가 무례한 행동을 했다는것을 깨달은 김정환이 호인스럽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거 참, 미안하게 됐네. 그런데 나도 여기에 처음 오다나니 알려줄수 없구만.》

그 사나이가 머리를 끄덕이며 두리번거렸다.

《제길, 한성바닥이 넓긴 꽤 넓구만.》

사나이가 옆을 지나쳐갔다.

김정환은 그의 뒤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형님, 빨리 오라구요. 국수가 다 풀어지겠어요.》

국수집안에서 봉대의 목소리가 울려나와서야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봉대가 벌써 국수를 받아놓고 군침을 삼키고있었다.

그들은 마주앉아 정신없이 먹어댔다.

국수맛이 좋았다. 배가 주려서인지 세그릇씩이나 청해서 단숨에 먹어치웠다.

《내가 일전에 평산군청곁에 차려놓은 막걸리집에서 평양랭면이라는걸 먹어봤는데 여기 국수맛도 그 비슷하게 맛이 좋구만요. 형님, 우리 한그릇씩 더 먹을가요?》

봉대가 흡족해서 배를 쓸어만지며 하는 소리였다.

《됐다. 그러다 배가 터지겠다. 저녁 먹을 배도 남겨놓아야지. 이젠 빨리 가기나 하자.》

김정환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자 봉대도 입을 다시며 따라섰다.

국수집앞을 나서자마자 봉대가 정환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형님, 돈 좀 주오.》

《돈은 갑자기 어따 쓰려니?》

《댕기를 사려구요.》

《댕기값이야 아까 주질 않았니?》

봉대가 뒤머리를 문질렀다.

《그건 꼭 열개 값밖엔 안돼요.》

《그럼 몇개를 사겠다는거니?》

《열다섯개…》

김정환은 어이없어 웃고말았다.

(이녀석이 솔매에게 단단히 빠져버렸구나. 음.)

솔매가 부탁한 한개의 댕기가 열다섯개로 불어났으니 이제 그걸 다 쓰자면 할머니가 되여서도 빨간 댕기를 매고 다녀야 할가부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솔매가 한개만 부탁했다고 말하기가 멋적어졌다. 하기야 댕기 열다섯개가 솔매와 봉대를 이어놓는다면 아까울게 뭐란 말인가.

김정환은 봉대의 손에 돈잎 몇개를 놓아주었다.

봉대가 날듯이 가게방으로 뛰여갔다.

그의 등뒤를 바라보며 김정환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어찌나 급하게 달려가는지 하마트면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칠번 하였다.

《이거 정말 안됐수다.》

봉대는 그 사람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부리나케 몸을 돌렸다.

(원 녀석, 저리두 성수가 나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봉대를 바라보던 정환이 금시 의아해졌다.

방금 봉대와 부딪칠번 한 사람이 그의 어깨를 턱 붙잡았던것이다.

어떻게나 우악스레 틀어쥐였는지 힘꼴이 어지간한 봉대가 쩔쩔매고있었다.

《미안하다고 하지 않소. 근데 이걸 좀 놓구려.》

봉대가 팔을 뽑으려 했지만 그 사람은 놓아줄 생각을 않고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김정환이 그쪽으로 다가가 그 사람의 어깨를 건드렸다.

《여보시오, 그를 놔주시오. 모르고 좀 덤빈건데…》

그러면서 그를 바라보던 김정환은 일순 굳어졌다.

무척 낯익은 얼굴이였다.

어디서 봤을가? 틀림없이 어디선가 보던 모색인데…

김정환은 그 사람을 주시했다.

그도 김정환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날렸다.

두사람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정환의 뇌리를 때리는것이 있었다.

(아, 저 눈빛… 그날밤…)

비로소 정환은 한성공격을 위하여 창의문부근에 돌입했던 음산한 1월의 밤이 떠올랐다. 그때 골목의 갈림길에서 덧옷주머니에 감추어진 권총을 자기에게 겨누었던 그 경찰관이였다. 이름이 강수길이라고 한 기억이 생생했다.

그도 김정환을 알아본 모양인지 눈시울을 떨었다.

한동안 서로 노려보기만 했다.

그통에 손아귀에서 벗어난 봉대가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잠시 머리를 기웃거리던 봉대도 드디여 그를 알아보았는지 입이 딱 벌어지였다.

《아니, 이놈이?…》

경찰관이 봉대에게 차거운 눈길을 돌렸다.

봉대를 잠시 노려보던 경찰관이 싸늘한 웃음을 지으며 씹어뱉듯 말했다.

《그 말버릇은 여전하구만. 어디 주리를 비틀어놓아도 다시 말버릇이 살아나는가 한번 볼가?》

《뭐야?》

봉대는 얼결에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손에 잡히는것이 없었다.

한성으로 오면서 화승대를 떼여두고 왔으니 있을리 만무하였던것이다.

봉대는 입술을 악물며 그를 노려보았다. 금시 이마빡에 뿔이라도 달린듯 육박으로 날아들 판이였다.

경찰관이 배포유한 표정으로 그를 기다렸다.

김정환이 봉대에게 눈짓을 했다. 김정환의 제지를 받은 봉대는 씩씩 거친 숨을 내쉬며 경찰관을 쏘아보았다.

김정환의 뇌리에는 착잡한 생각이 맴돌았다.

이제 이놈이 여기서 소동을 일으키는 날엔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가고만다. 하지만 이놈의 입을 어떤 수로 틀어막는단 말인가?

여기서 때려눕히기는 곤난한 일이고 또 그럴 조건이 된다고 해도 쩍 벌어진 체구와 단단한 주먹 그리고 매우 날카로운 눈빛만 보아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것이 첫눈에 알렸던것이다.

한정만이가 뭐라고 했던가?

사격술이 귀신 같아서 참새눈알도 맞힌다고 했지. 게다가 동방의 세가지 전통무술을 소유했다고 했더라…

봉대에게서 눈길을 돌린 상대가 김정환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당신들은 대체 어디 토배기요? 그날밤을 내놓고는 이 한성에선 보지 못했는데…》

김정환은 침착하게 그를 주시하며 말했다.

《난 이미 말했소. 왜놈들과 결산할것이 많은 조선사람이라고 말이요. 당신이 우리 일을 방해하면 천추에 씻지 못할 역적죄를 짓게 된다는걸 알아두시오.》

《그날밤의 란동이 당신들의 결산이라는것이겠소? 나라도 막지 못한 왜적을 화승대나 몽둥이를 든 당신들이 몰아내겠다니 참 가소롭소.》

김정환의 눈에 분노의 빛이 번뜩이였다.

결김 같아서는 당장 그자의 면상을 향하여 주먹이 날아갈것 같았다.

김정환은 가까스로 자신을 억제했다.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지 않는가. …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 이 대처 한가운데서 소동을 벌리는 날에는 자기들에게 리로울게 조금도 없다.

한동안 거친 숨결소리만 흘렀다.

이때 저쪽에서 지나가던 웬 처녀 둘이가 그들쪽을 바라보고 걸음을 멈추는것이 눈에 띄웠다. 잠시 망설이던 처녀들이 그들쪽으로 다가왔다.

머리를 다소곳이 숙인 한 처녀는 얼마쯤에서 떨어지고 얼굴이 붉게 상기된 신식옷차림의 처녀만이 이들쪽으로 다가왔다.

그를 띄여본 경찰관의 눈에 당혹감이 어리는것이 알렸다.

몇걸음밖에 이른 처녀가 그들의 랭랭한 분위기를 감촉하고 그 자리에 오똑 서서 바라보았다.

김정환의 눈길은 다가오는 처녀가 아니라 뒤쪽에 서있는 처녀에게로 쏠렸다.

(저게 고익재의 딸이 아닌가?)

옳았다. 김정환이 부상을 입고 고익재의 집에 몸을 피했을 때 잠간 띄여본적 있는 려은이라는 처녀가 분명했다.

자기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눈길과 마주치자 처녀는 덴겁을 하며 얼른 고개를 돌려버렸었다.

세상은 넓고도 좁다더니… 어쩌면 이 넓은 한성에 들어서는 첫 순간에 낯익은 얼굴과 이리도 많이 맞다들린단 말인가?

빨리 이 자리를 떠야 했다.

물론 그날밤 피범벅이가 된 자기에게 눈길 한번 돌린적 없는 처녀여서 알아볼수는 없을것이다.

그래도 이 자리에서 그를 대한다는것이 별로 반가운 일은 아니였다.

김정환이 착잡한 생각을 굴리고있는데 강수길의 내쏘는듯 한 목소리가 낮게 울려왔다.

《내 지금은 당신을 그냥 보내주겠소. 그때 우리에게 불질을 하지 않은 값이요. 하지만 다시 내 눈에 띄우면 그땐 기회가 없소.》

김정환은 쓰거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불이 황황 이는듯 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며 씹어뱉듯 찍어 말했다.

《내 말을 명심하시오. 다시한번 내앞을 막아서면 그땐 내가 당신을 죽여버리겠소.》

그리고는 몸을 돌렸다. 잔뜩 받을 소처럼 자세를 취하고있는 봉대의 팔을 나꾸어챘다.

봉대는 김정환의 손에 끌려가면서도 눈길은 강수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강수길의 차거운 눈빛도 그들의 등뒤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지꿎은 시선을 느끼며 그 자리를 벗어난 김정환과 봉대는 한식경이나 골목들을 돌고돌다가 려인숙을 찾아갔다.

려인숙의 조용한 방에 들어서서도 김정환은 진정할수가 없었다.

강수길의 차거운 시선이 계속 머리속에 떠올랐던것이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였다.

리진룡은 자기가 한성에 아는 사람이 없는 점을 고려하여 이곳으로 보냈다.

그런데 한성에 들어선 첫 순간부터 자기를 아는 작자와 맞다들리게 되지 않았는가. 더우기 분명 강수길을 만나러 왔을 대한협회 고익재의 딸인 려은이라는 처녀의 얼굴이 상기되면서 착잡한 마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가 강수길과 어떤 연고가 있을가. 있다면 과연 어떤 관계일것인가. …

옆에서 부시럭거리던 봉대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형님, 그 경찰관놈팽이를 그냥 두고 일없을가요? 혹시 그놈이 무슨 말썽을 일으키는 날엔…》

그것이 바로 정환의 심신을 불안스럽게 하는 제일 큰 골치거리였다.

하지만 김정환은 봉대를 안심시키며 말했다.

《아직 좀 두고보자. 너두 만단의 준빌 갖추고있어라. 무슨 일에 부닥칠지 알수 없으니까.》

《알겠어요.》

봉대는 생콩을 씹은듯 잔뜩 얼굴을 찌프리고 두덜거렸다.

《너절한 자식, 그따위 자식을 그냥 두자니 이거야 어디… 형님, 아까 봤지요? 밴밴하게 생긴 계집들을 둘씩이나 달구 다니는걸…》

《너 말이 참 상스럽기 그지없구나. 그럼 못쓴다. 그 아가씨들이야 아마 아는 사이가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 왔겠지.》

김정환의 퉁을 맞은 봉대가 제풀에 웃으며 뒤머리를 문질렀다.

《하긴 그 녀인들이 척 보기에 두눈이 바루 배긴 신녀성들이 분명한데 그따위 녀석과 어울리자고 할수가 없지요. 그 녀인들이 선녀처럼 곱던데요. 둘이가 다… 에에, 하지만 솔매에게 비하면 뭐라구 할가? 활짝 핀 목련화와 할미꽃? 아니아니, 백로와 비둘기?… 여하튼 솔매에 비하면 아무것두 아니요.》

김정환은 허허 웃었다.

제 눈에 들면 천하곰보도 하늘의 선녀로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한성바닥에서도 손에 꼽힐만 한 미인들을 할미꽃에 비기다니…

솔매가 산천의 옹달샘터에 피여나는 진달래처럼 순결하다면 이 처녀들은 아늑한 뜰안에서 피여나는 방울꽃처럼 청신했다.

김정환은 솔매에 대한 생각을 하는지 벙글거리며 웃는 봉대에게 정색한 목소리로 물었다.

《봉대야, 내가 부상당한 날 찾아갔던 집이 기억나느냐?》

잠시 머리를 기웃거리던 봉대가 도리머리를 저었다.

《기억날게 뭐예요. 얼마나 많은 집들을 지나구 또 얼마나 많은 골목들을 지났다구. 오불꼬불… 나야 그저 두남이의 뒤만 정신없이 따라갔지요.》

김정환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김정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이 저물기 전에 그 집을 찾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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