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제 12 회


제3장 평산유격장


2


처음에 리진룡은 서흥군청의 서기인 신표가 나타나자 의아해졌다.

김정환의 휘하에 있는 두남이와 함께 한성의 어느 부자집에서 종노릇을 했다는 명재를 앞세우고 나타나자바람으로 그는 마치도 리진룡을 오랜 막역지우나 되는듯이 얼싸안으며 돌아갔다.

초면은 아니라고 해도 그닥 밭은 사이도 아니여서 의병에 나서기전에 이따금 만나게 되면 고개나 끄덕이고 지나치던 신표와 마치 절친했던 사이처럼 너나들이를 하자니 리진룡으로서는 무척 거북스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가 들고 온 소식은 귀가 번쩍 트이는것이였다.

검단면 일리와 백운면 오담리사이에 왜놈들의 군수물자가 저장되게 되였는데 지금 거기에 물자만 쌓여있지 수비력량은 불과 몇놈의 왜놈군졸들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신표가 꼽아대는 군수품의 수량은 참으로 리진룡의 마음을 커다란 흥분으로 들끓게 하였다.

탄약과 식량, 의복부족으로 많은 고생을 겪고있는 평산의병대에 있어서 신표가 꼽아대는 군수품의 반수만 있어도 한해는 아무런 걱정없이 싸움에 전심할수가 있었던것이다.

신표는 흥미진진한 리진룡의 표정을 일별하고는 제잡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의병장어른이 의병대를 인솔하고 나서면 내가 동행하여 그곳으로 길잡이를 서겠소.》

리진룡은 몹시 구미가 동했지만 선뜻 대답을 못했다.

생각 같아서는 자기자신이 당장 의병대의 일부를 이끌고 신표의 뒤를 따라가 그 군수물자들을 순식간에 해치우고싶었다. 참으로 외면하기 힘든 유혹이였다.

그러나 리진룡은 류린석도총재의 서신을 기다려야 했다. 로씨야 연해주에 가있는 류린석도총재가 보낸 사람이 도성제에 이르렀는데 곧 이리로 온다는 기별이 왔던것이다.

하여 리진룡은 그곳을 신모정의 돌격대에 맡기기로 결심을 내렸다.

신모정은 바로 이날 한정만네와 협동하여 세북면 광진일대에서 의병대진압에 날뛰고있는 왜놈《토벌대》를 때리기로 되여있었다.

늦은 오후가 아니면 저녁쯤에 왜놈들이 광진일대의 자그마한 산기슭에 모여들어 숙영준비를 한다는 정보를 알아내고 계획을 세웠던것이다.

왜놈들은 평산의병대를 없애기 위해 많은 《토벌》력량을 동원하여 의병대거점으로 될만 한 지역들에 대한 수색을 진행하고있었다.

점점 가까이 다가드는 왜놈들의 《토벌》의 위기에서 벗어날 방안으로서 평산의병대는 왜놈《토벌대》의 한개 부대를 타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리진룡은 그중 기승을 부리며 수색에 열을 올리고있는 광진일대의 왜놈부대를 때리기로 하였던것이다.

하지만 신표의 말을 들은 리진룡에게 있어서 무엇보다 선차적인 싸움이 검단면일대에 쌓아놓았다는 군수물자에 대한 습격이라고 생각되였다.

현재 의병대에 절실히 요구되는것은 무기와 탄약이였다.

왜놈들과의 싸움에서 제일 힘겨운것이 너무도 대조되는 무장상태였던것이다. 왜놈들이 쓰는 5련발신식보총에 비하여 의병들이 쓰는 화승대는 그야말로 굵고 긴 몽둥이를 든 적수에게 얇고도 짧은 회초리를 들고 대적하는 격이라고 할수 있으리만치 한심한것이였다.

그래서 리진룡은 이미전부터 의병들의 무장을 왜놈들이 쓰는 신식보총으로 바꾸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고있던터인것이다.

그런 면에서 신표가 들고 온 왜놈들의 군수품에 대한 정보는 참으로 놓쳐버릴수 없는 반가운것이 아닐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 의병들의 수가 부쩍 늘어나 식량과 의복을 마련하기가 헐치 않은 상황에서 왜놈들의 군수품은 그야말로 평산의병대에 있어서 명줄과도 같은것이라고 할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광진일대의 왜놈《토벌대》를 치는 싸움을 중지할수는 없었다.

이제 광진일대의 왜놈《토벌대》를 답새기지 않으면 인차 그 《토벌》력량이 의병대의 거점이 있는 곳으로 수색마당을 옮기게 될수 있었던것이다.

그리하여 리진룡은 신표가 전해온 검단면일대의 왜놈들의 군수물자에 대한 습격과 함께 이미 계획되였던 광진일대의 왜놈《토벌대》에 대한 습격을 동시에 진행할것을 결심하였다.

검단면일대에는 거리상 제일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는 돌격장 신모정에게 맡기는것이 가장 빠르고 합당했다.

신모정이 맡기로 되여있던 한정만과의 협동은 김정환에게 맡길 생각이였다. 신모정과 한정만이 광진의 왜놈들을 칠 때 김정환의 유군은 탁영대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없애버림으로써 해주쪽에 있는 왜놈들의 이목을 분산시킬 계획이였으나 지금에 와서는 탁영대를 치는것이 별로 큰 의의가 없어진것이다. 한것은 검단면일대를 습격하게 되면 탁영대를 쳐서 거두려던 성과까지 이룩하는것으로 되기때문이였다.

리진룡은 조급해지는 마음으로 김정환을 기다렸다.

이제 김정환이가 두남이를 데리고 여기에 나타날것이다.

리진룡은 이미 신표가 나타났을 때 두남이의 친구가 찾아왔으니 그를 데리고 곧 오라는 련락을 바리산에 있는 김정환유격장에게 보내였었다.

바리산에서 이곳까지는 의병들만이 아는 지름길로 삼십리정도밖에 안되니 거의 도착할 때가 되였다.

그가 온 다음에 광진일대에 대한 습격협동을 맡기기로 작정한 리진룡은 검단면의 그중 가까이에 의병들을 거느리고있는 신모정에게 군령을 써서 자기의 호위원 두명을 파발로 띄웠다.

리진룡이 신모정에게 보내는 서신을 주어 호위원들을 떠나보내자 신표는 입을 쩝쩝 다셨다.

《아니, 의병장은 그래 글개나 읽었다는 유생으로서 그런 평민에게 공을 사양할셈이요? 내가 공연히 이 험지를 찾아왔구려. 참…》

신표는 더 말하려고 했으나 김정환이와 두남이가 들어서자 입을 다물어버리고말았다.

리진룡은 두남이에게 밖에 신표와 같이 온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명재를 만나보도록 하고는 김정환을 탁자앞으로 이끌었다.

《자네는 이제 곧 유군을 이끌고 광진일대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게.》

김정환은 의아해졌다.

탁영대에 있는 경찰관주재소를 료정낼 준비를 갖추고있던 김정환이로서는 의병장의 갑자기 달라진 의도가 무엇인지 알수가 없었다.

김정환의 의문이 당연하다는듯 리진룡은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신모정돌격장은 검단면일대에 있는 왜놈들의 군수물자를 습격하라고 방금 련락을 떠나보냈네.》

《검단면일대에 왜놈들의 군수물자가 있다구요? 어떻게 왜놈들이 그곳에 군수물자를 저장할수 있단 말입니까?》

김정환이 놀라운 표정을 짓자 리진룡은 방금전 신표가 전한 검단면일대의 군수물자에 대한 자료를 알려주었다.

김정환은 가느다란 눈을 쪼프려뜨리고 까치다리를 하고 앉아있는 신표를 힐끔 바라보고나서 말했다.

《그걸 우리가 확인해보지도 않고 신모정이네를 파한건 잘한 일 같지 않습니다. 설사 그곳에 진짜 군수물자가 있다고 해도 왜놈들의 병력배비상태를 사전에 내탐하지 못하고 전투를 벌리는건 참으로 위험한 싸움입니다. 이제라도 급히 그곳으로 지원을 보내야 합니다. 우리가 방차대로 따라서겠습니다.》

명재를 만나러 나갔다가 왜서인지 인차 들어온 두남이도 그들의 말을 들으며 불안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리진룡이 대신에 신표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거드름스러운 억양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는 없네. 그곳은 왜놈들이 거기에 두개 중대이상의 수비대무력을 주둔시키기 위해 금방 군수물자를 운반해놓았을뿐이지 현재의 병력은 두개 분대정도의 경비력량밖에 안되네. 또 그곳에 군수물자를 운반한것은 엄밀한 비밀로 실행하였으니 벌써 의병대가 알아차렸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걸세. 그러니 남은 몇놈의 왜놈들도 경계를 늦추고있으니 불의에 들이치고 빠지면 련락을 받고 지원병력이 달려와도 닭쫓던 개 지붕쳐다보는 격이 되고마오.》

김정환이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에 어린 의문을 느끼고 리진룡이 말했다.

《서흥군청 서기인 신표어른이시네. 그곳 정황에 대해서는 저 어른이 이미 확인을 한것이라고 하네.》

김정환은 신표를 외면하며 리진룡에게 머리를 돌렸다.

《만약의 경우에 이것이 왜놈들의 계략이라면 거기서 입게 되는 손실을 무엇으로도 메꿀수 없습니다.》

신표가 언짢은 기색을 력력히 드러냈다.

《뭣이? 왜놈들의 계략이라구? 그럼 내가 왜놈들이 들여보낸 렴탐군이란 말인가? 감히 뉘앞에서…》

김정환의 뒤쪽에서 두남이가 한걸음 나섰다.

《누가 렴탐군이라구 했소이까.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심중하자구 말하는게 아니오이까. 이미 작정한 싸움을 깨끗이 마무리짓고 의병들이 통채로 가면 등탈이 없겠는데 하필 력량을 분산시키면서 위험한 싸움을 벌리게 하는 까닭이 뭐냐 말이오이다.》

신표가 발칵 하여 벌떡 일어났다.

《뭐야? 너 이놈! 감히 어따 대구 삿대질이냐? 근간에 들어와 반상의 구별이 없어졌다고 하여 천한 상놈이 량반에게 망탕 삿대질을 해도 무방하다는거냐? 엉, 이 고현놈.》

두남이의 두눈에 불꽃이 번쩍 튕길듯 했다.

《뭐라구? 대체 당신의 벼슬품계가 얼마나 되길래 그리두 땅땅 큰소리요? 다 말라죽은 량반소리를 꺼들면서 상놈, 상놈 하는가 말이요?》

《난 일곱해전에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이 심히 어지러워졌기로서니 천한 상놈이 량반의 따귀를 때려도 된다더냐?》

《쳇, 말시키지 마우다. 내가 언제 당신의 따귀를 때렸다구 그따위 횡설수설이요?》

《이놈, 누굴 보구 횡설수설이라는거냐? 이… 이놈.》

신표가 발을 구르며 목에 피대를 돋구었다.

그의 고함소리에 두남의 주먹이 불끈 쥐여졌다.

《왜놈들이 나라를 통채로 앗아내자는 때에 아직도 빌어먹을 량반타령이야.》

김정환이 그의 팔을 잡았다.

《그만두거라.》

그리고는 신표에게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며 오금을 박았다.

《사람을 함부로 멸시하는 말을 삼가하시오. 두남이도 의병이니만큼 자기의 생각을 말할수 있을진대 그것을 상놈의 발언이라고 모욕하는것은 참을수 없는 일이요. 다시한번 그럴 땐 나부터가 가만있질 못하겠소.》

그리고는 리진룡에게 머리를 숙여보이고 발길을 돌렸다.

두남이가 다시한번 신표를 쏘아보고나서 김정환을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서서도 두남은 말 한마디 없었다.

방금 받은 멸시가 속에 맺혀 내려가지 않았던것이다.

그를 보며 김정환은 두남이가 평산의병대로 오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던 일이 상기되였다.

두남은 《을사5조약》당시 참정대신이였던 한규설의 집에서 창두로 있었다.

언제인가 한번은 두남이가 이또 히로부미의 초청을 받은 한규설을 부축하고 통감의 집으로 간적이 있었다. 이또가 저희네 일본의 강도적요구가 속속들이 내포되여있는 《을사5조약》날조에 가장 위험한 인물인 한규설과 민영환 등 일부 대신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을 하였던것이다.

두남이가 몸이 불편해하는 한규설을 부축하고 이또의 방으로 들어가니 금방 종이우에 무슨 글을 쓰던 이또가 붓을 놓고 각근히 맞이하였다.

《참정대신께서 와주시니 참으로 고맙소이다.》

한규설은 이또의 사례에 머리를 약간 숙여 답례하고는 두남이에게 의지하여 자리를 잡고 앉으며 탁자우를 바라보았다.

한규설이 두눈을 뚝 지릅뜨고 탁자우를 어찌나 뚫어지게 바라보았던지 곁에서 그가 편히 앉도록 거들어주던 두남이의 눈길도 저도 모르게 그리로 향했다. 탁자우에는 방금 글을 쓰다만 종이와 붓, 벼루와 연적이 놓여있었는데 그중 연적이 류별나게 눈에 뜨이였다. 연적은 누런 룡의 몸통이 휘감아돌아간 아주 보기 드문것이였다. 두남은 참정대신이 제일 신임하는 창두인 덕분으로 대신들의 집에 안 가본데가 없었지만 저런 연적은 처음 보는 진귀한것이였다.

일본식으로 된 미닫이문이 스르르 열리는 소리에 두남은 연적에서 눈길을 떼고 돌아보았다.

시중군 하나가 들어와 이또에게 일본말로 지껄이는 소리가 들렸다.

두남은 참정대신 한규설에게 찾아드는 일본사람들이 적지 않아 일본인하인들과 상종이 잦았던 덕분에 왜말을 뜯개말정도는 능히 가려들을수 있었다.

《각하, 본국에서 황실박물관 총장각하가 보낸 사람이 도착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또는 희색이 만면해지는듯싶더니 한규설에게 각근하게 말했다.

《참정각하, 내 잠간 자리를 실례하겠소이다. 이제 학부대신(리완용)과 외부대신(박제순) 등 여러 대신들이 도착하면 곧 시작하겠으니 잠시 쉼을 하시면서 기다려주십시오.》

한규설이 알릴듯말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또는 두남이에게 아량있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일렀다.

《참정각하께서 몸이 몹시 불편해하시는듯 한데 곁에서 잘 돌봐드려라.》

이또는 이내 몸을 돌려 시중군을 달고 다른 방으로 나갔다.

한규설은 굳어진듯 연적만을 뚫어지게 바라보고있었다. 두남은 이때 늙은 대신의 볼편이 실룩거리는것을 볼수가 있었다.

한규설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방금 이또가 앉았던 자리로 다가가 연적을 집어들었다.

한규설의 볼편이 또다시 푸들거렸다. 그러더니 그 연적이 별안간 한규설이 입고있는 도포의 넓은 팔소매안으로 쑥 들어갔다. 두남은 너무 놀라와 두눈을 흡떴다.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저건 훔치는게 아닌가? 일국의 정승이라는 량반님이 남의 집 물건을 훔친다는게 말이나 되는가. 더구나 한뉘 사리사욕이란 모르고 살아온 량반님이 아닌가. 세상이 정말 우습겐 변해가는구나. 나라에 망조가 들더니 령감님이 망녕을 하신게지. …

《우린 그만 돌아가자.》

이또의 초청을 받고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다며 거절하였고 몇번의 거듭되는 청탁에 마지못해 나선 때로부터 이 방으로 들어서기전 까지만 해도 두남의 부축을 받았던 한규설이건만 이 순간에는 제 먼저 성큼성큼 마당가로 나섰다.

두남은 당장이라도 이또네 집 하인배들이 도적잡이에 떨쳐나설것만 같아 가슴이 쿵당쿵당 뛰였다.

아닌게 아니라 이또네 집의 하인배들이 연회가 금시 시작할 참인데 벌써 마당가로 내려서는 한규설을 의아스럽게 바라보고있었다.

한규설은 도포자락을 펄럭거리며 마당가운데로 나와 사인교에 오르며 이또의 하인들에게 일렀다.

《내 갑자기 몸이 불편하여 먼저 갔다고 너희 주인에게 아뢰여라. 어험! 얘들아, 어서 가자.》

한규설의 재촉하에 사인교는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온 한규설은 곧 두남이를 불렀다.

두남이 그의 방으로 들어가니 그가 앉은 탁자우에 그 연적이 놓여있었다. 그걸 바라보는 한규설의 눈에 물기가 번득이는것을 본 두남은 어찌할바를 모르고 그냥 서있기만 했다.

잠시후 한규설이 두남에게 눈길을 돌렸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두남이가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한규설은 또다시 한참이나 말없이 앉아있다가 천천히 자기앞에 놓여있는 연적을 두남이쪽으로 밀었다.

《이걸 이또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네가 잘 간수하거라.》

두남은 영문을 알수 없어 멍청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의문이 실린 눈빛을 느꼈으련만 한규설은 그를 외면하고 한동안이나 그냥 앉아있다가 물기에 푹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걸 자세히 봐라. 그것은 황제페하께서 쓰시던 연적이니라. 얼마전에 황제페하의 편전에 놓여있던 저 연적이 없어져 내시들이 소동을 일으키는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바루 저 쪽발이놈의 집에 뻐젓이 놓여있으니 통탄스런 일이 아니냐. 왜놈의 종자들이 이젠 황제페하의 편전에 놓인 기물에까지도 거리낌없이 손을 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나라는 이미 기울어졌구나.》

한규설의 눈가에서 물기가 번득하였다.

두남은 말없이 주인량반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것이 일국의 대신이라는 내가 할수 있는 마지막일인듯 하구나.》

한규설의 얼굴에 침통한 빛이 어리였다.

《쪽발이 왜놈들에게 국권을 빼앗기는 때에 이 작은 물건 하나가 뭐겠냐마는 우리 민족의 슬기와 재능이 깃들어있기에 그 하나만이라도 찾아내지 않고서는 견딜수가 없구나. 군력이 없으니 나라의 대신이라는 내가 민족을 위하여 고작 할수 있다는것이 남의 집에 놓인 제 집안 물건도 당당하게 찾지 못하고 이렇게 팔소매에 감추었어야 했으니 이 수치를 어떻게 씻을수 있단 말이냐. 두남아, 네 그걸 가지고 여길 떠나거라. 그리구 다시는 그것을 쪽발이놈들에게 빼앗기지 말거라.》

한규설의 말은 마치도 마지막길을 가는 사람의 당부처럼 들려왔다.

두남은 한규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규설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고 두남이를 돌려보냈다.

한규설의 이러한 행동에 대한 두남의 의문은 얼마후에야 풀리게 되였다.

다음날인 1905년 11월 17일 오후부터 18일 새벽까지 일제놈들은 자기들의 무력을 총동원하여 황궁안팎에 삼엄한 포위경계망을 늘인 후 황제를 위협하고 친일매국역적들을 사촉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탈취하기 위한 조약을 토의하는 회의를 열게 하였던것이다.

이날 한규설을 비롯한 일부 대신들은 일제의 《을사5조약》을 강경하게 반대하였다.

사태가 이같이 조성되자 이또는 한규설을 체포감금하고 일본헌병들로 하여금 조약의 조인을 반대하는 대신들의 행동을 엄중히 감시하게 한 후 학부대신 리완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리근택, 내부대신 리지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등 다섯놈의 매국역적들을 강박하여 조약을 날조해내였다.

그리고 이또는 강압적으로 날조한 조약을 선포하였다.

두남은 청렴관리가 늦게나마 지킨 황제의 연적을 가지고 여기저기 숨어지내다가 대한협회 평의원인 고익재의 주선으로 평산의병대를 찾아왔던것이다.

그러니 지방군청에서 서기노릇이나 해먹던 작은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천시하고 거들먹거리는 꼴이 두남이의 눈에 역스럽게 보이지 않을수가 없었다.

두남이는 여전히 속이 내려가지 않아 씩씩거렸다.

《정말 참을수 없는건 저 사람이 병서를 탐독하고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분명한가 하는거요. 뻔한걸 가지고 우기다 못해 이젠 입에도 올리지 않는 고망년적 반상의 구별을 내두르며 막무가내로 억누르려는 저따위를 의병장님은 어떻게 믿고 큰 싸움을 벌리려 하는지 모르겠구려.》

《의병장에게도 무슨 생각이 있어 그랬겠지. 됐다. 넌 명재라는 친구나 만나보고 오너라.》

《싫수다. 친군 무슨 놈의 친구요. 한성에서 군부에 있는 량반집의 종노릇을 하던 그녀석이 주인이 다른 량반들의 시기를 받고 모함에 걸려 쫓겨갈 때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진걸 내가 거들어주었댔지요. 그게 인연이 되여 평산의병대의 행방을 찾느라고 이곳 산판을 헤맬 때 고향에 내려와 살림을 편 그녀석네 집에 얹혀 한동안 신셀 진것밖에 없수다. 엎음갚음이니 구태여 신세랄것두 없어요.》

두남이는 골이 나서 계속 엇드레질을 했다.

《그 자식, 의병대가 있는 곳을 절대로 발설말랬는데 저따위들을 끌고 나타났으니 이거야 어디 밸이 치밀어 견딜수가 있어야지요. 만나면 한주먹 줴박으려댔는데 어디로 꼬리를 사렸는지 보이지도 않더군요. 하긴 내가 어리석었지요. 요전날 소금을 얻어오느라 그 마을에 내려갔다가 짐이 많아 바로 그놈의 등에 나누어지고 이 근처에까지 와서 떼버렸댔지요. 돌아갈 때 나를 따라온 로정을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고 오금을 박아놓았는데 끝내…》

김정환은 두남이에게 말했다.

《그러게 네가 그를 다시한번 단단히 신칙해야겠다. 어떻게 신표에게 그 로정을 밟게 했는지두 알아보고… 나도 여기로 신표가 나타난게 어째선지 께름한 생각이 드는구나.》

두남은 잠시 생각을 굴리더니 머리를 끄덕이였다.

《그럼 그리하리다. 내 그녀석의 정갱이를 아예 분질러놓겠소.》

《너무 윽윽하지 말구 차근히 대하거라. 그리구 난 빨리 가야겠으니 넌 여기에 떨어졌다가 광진으로 출동하라는 령이 떨어지면 제꺽 오거라.》

《알겠수다.》

김정환은 두남을 뒤에 남겨두고 바리산으로 향했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