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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회


제2장 역적놈을 잡아라



3


아침에 안개가 자욱했다. 안개발을 헤치며 수길은 밖을 거닐고있었다.

끝없는 생각이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어제밤 리용구를 노리고 왔었을 한정만이의 적의에 찬 눈길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참으로 이런 곳에서 한정만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수길이였다.

한성에서 그를 처음 알게 되던 때가 눈앞에 삼삼했다.

그때도 안개가 자욱한 밤이였다.

생사를 함께 하자고 사생동고를 맺은 의형제들인 리달삼과 박태영이가 기다리는 한성려인숙으로 향하던 강수길은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처녀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였다.

그 비명소리를 들은 수길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한밤중에 울리는 녀인의 비명소리는 언제나 상서롭지 못한 일을 빚어내군 한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어둑침침한 골목길어구에서 녀인의 비명소리를 듣게 되였던것이다.

《누가 없어요?…》

애원섞인 비명소리는 계속 울려왔다.

수길은 안개발을 헤치며 무작정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거뭇한 두사람의 형체가 시야에 안겨들어서야 수길은 자리에 우뚝 멎어섰다.

뜻밖의 광경이였다.

웬 처녀가 한 남자를 붙잡고 모지름을 쓰고있었던것이다.

상상이외의 현실에 잠시 주춤했던 수길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가씨, 무슨 일입니까?》

《좀 도와주세요.》

처녀는 쓰러진 웬 사나이를 일으켜보려고 애를 쓰고있었다.

쓰러진 사나이는 머리에 피가 랑자하니 내배였고 가슴팍과 다리에서도 피가 흘러나오고있었다.

수길이 얼결에 사나이를 붙잡아주자 녀인은 부끄럼도 잊고 자기의 속치마를 부-욱 찢어내여 상처를 감싸기 시작하였다.

수길은 주춤했다. 가슴속에서 까닭모를 불안이 떠돌았다.

상처는 분명 칼에 란도질당한것이였다.

한밤중에 칼에 찔리울 리유가 무엇인가?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한가지만은 명백했다. 이렇게 칼에 란도질을 당한걸 봐선 뭔가 상서롭지 못한 일을 저지른 사람이 분명했다. 요즘 빈번히 일어번지는 상서롭지 못한 일이란 열에 아홉은 필경 현재 한성에 감도는 정세와 관계되는것이였다.

더구나 그때로 말하면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관련하여 한성의 공기가 터질듯 팽팽한 때였다. 한성의 군인들과 백성들의 반일기운이 극도에 달하자 일본군은 세사람만 모여도 가차없이 붙잡아서 취조실로 끌고 들어가 격검채로 반주검이 되도록 만들었고 더우기 야밤통행에 대한 단속을 우심하게 벌리던 때였다.

괜히 나섰다가 일본군의 눈에 띄여 그 어떤 행위가 있었다는것이 밝혀지는 날에는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수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큰뜻을 품고 동료들을 규합하여 한성으로 올라온 한 친구를 만나 중요한 문제를 론의하기 위하여 송림이와 리달삼, 박태영이가 자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당한다는것은 어느모로 재미가 적었다.

그리고 강수길은 경찰관으로 되기 위한 검정시험을 금방 치른터여서 괜히 시끄러운 일에 말려들었다가는 경찰이 되기 위해 지금까지 기울인 모든 노력이 허사로 될수 있었던것이다. 경찰관의 감투를 따내지 못한다면 동료들을 규합하여 은밀히 진척시키고있는 비밀거사를 단행하기 어렵게 되는것이다.

수길은 잠시동안이지만 착잡한 생각에 빠져들고말았다.

그렇다고 사경에 처한 사람을 놓고 발길을 돌릴수 있는가? 더구나 애젊은 녀인이 혼자서 역사질을 하고있는것을 외면한다는것은 도의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처녀가 어찌할바를 모르고 서있는 수길에게 단마디로 말했다.

《의원에게 가야겠어요. 빨리.》

수길은 얼결에 사나이를 업었다.

그리고는 가까이에 있는 의원집으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거기 서세요.》

처녀가 수길의 앞길을 막았다.

《왜 그럽니까?》

수길이 의아스럽게 묻자 처녀는 어둠속에서 더더욱 희게 느껴지는 얼굴에 착잡한 빛을 띠우며 잠시 생각을 굴리다가 말했다.

《거기로 가다간 왜놈들에게 걸려들수 있어요. 왕십리로 가자요.》

수길은 어이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왕십리가 어딘가? 시오리길이다.

길이 먼것은 둘째이다. 우선 일본군을 피해야 할 까닭이 있다는것이 확실해지자 수길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분명 일본군에 무슨 앙심을 먹고 어떤 일을 저지른 이 낯모를 사람을 도와나섰다가 혹시 계획된 일이 뒤틀려질수 있다는 불안감과 함께 자기를 하인부리듯 하려드는 처녀에 대한 반발심이 일어났다.

하지만 어쩔수 없었다. 그의 잔등에 업힌 사람의 입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던것이다. 이왕 업었으니 도로 내버릴수도 없었다.

하여 수길은 발길을 돌려 왕십리를 향해 목에서 겨불내가 일도록 달렸다.

어느 한 의원이 차려놓은 외딴집에 이르러서야 수길은 부상자를 방바닥우에 내려놓을수가 있었다.

밖으로 나와 토방에 풀썩 주저앉아 땀이 질벅한 얼굴을 훔치는데 의원과 몇마디 말을 하던 녀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돈을 건사한것이 있어요? 치료비를 물어야겠어요.》

수길은 어이가 없었다. 고맙다고 코잡고 절을 해도 씨원치 않겠는데 마치도 빚진 돈을 재촉하듯 손을 내미는 처녀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입을 다셨다.

수길은 주머니를 뒤집어 있는 돈을 말짱 처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처녀는 자기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합쳐 세여보더니 남은것을 돌려주었다.

수길은 머리를 저었다.

《남았으면 그걸루 남편인지 애인인지 알수 없으나 저 사람의 몸보신에 쓸만 한걸 사서 대접하시오.》

그리고는 자리에서 훌쩍 일어나 인사말도 없이 밖으로 나와버렸다.

밖으로 나온 그는 마치 처녀가 따라나와 또다시 자기를 붙잡기라도 할듯 서둘러 동료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그후 수길은 경찰관검정시험결과를 알아보기 위하여 거리로 나섰다. 어느 가게방앞을 지나려는데 앞을 막아서는 사나이가 있었다.

조선군대의 군복을 입은 사나이였다.

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왔다.

《시위대 한정만이요. 당신을 여러날동안 찾았소.》

밑도 끝도 없는 그 말에 수길은 의아해졌다.

《날 찾았다구요? 그건 어째서…》

《같이 가기요.》

그는 절룩거리며 앞서 걸었다.

수길은 몹시 의아해났으나 그대로 따라가지 않을수가 없었다.

사나이는 어느 한 작은 술집앞에서 멈춰섰다.

《자, 여기로 들어갑시다.》

수길은 사나이의 뒤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 한 식탁에서 미모의 신녀성 하나가 수길을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두눈이 시원하고 생김생김이 유순하면서도 여돌차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본 순간에야 수길은 그날 밤이 생각났다.

사나이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수길이앞으로 내밀었다.

《날 구원해주어 고맙소. 잊지 않겠소.》

그때에야 수길은 그날 밤에 있은 일을 자세히 알게 되였다.

그날 밤 사복차림으로 무기도 없이 시위대본부에 다녀오던 한정만은 대여섯명이나 되는 왜놈들에게 애매하게 붙들려 무참하게 매를 맞고있는 두명의 늙은이를 보게 되였다. 장을 보다가 늦게야 집으로 돌아가던 늙은이들을 세워놓고 사정없이 치고받는 왜놈들의 만행에 격분한 한정만이 두주먹을 틀어쥐고 달려들었다. 무서운 싸움이 벌어졌다. 온갖 기운을 다 써가며 왜놈들과 싸움을 벌리던 한정만은 그만 놈들이 휘두르는 군도에 맞아 쓰러지게 되였던것이다. …

수길은 한정만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자기앞에 마주앉은 처녀 역시 생판 알수 없는 사이였지만 한정만이 왜놈들에게 부상을 입은것을 보고 도와나섰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처녀의 이름은 진희였다.

이날 그들은 십년지기나 되는듯이 마주앉아 마음껏 술을 마셨다.

그로 하여 그들은 친혈육처럼 가까운 사이가 되였으며 이후부터 래왕도 잦아지게 되였다.

어느날 한정만이 그를 찾아왔다.

《이보게 수길이, 내 자네 중매쟁이로 나서야 할가보네.》

《그건 무슨 소리요?》

《진희씨의 눈치가 아무래도 다르거던. 자넬 대하는품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

수길은 별안간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아직까지 애정에 대해서는 생각도 못해본 그였다.

그런데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들줄이야. …

달이 뜨는 저녁이면 진희와 수길이가 한강기슭을 거닐었고 그럴 때면 한정만이 의례히 보호자가 되여 그들의 뒤를 지켜주었다.

진희와 함께 있는 날이면 수길이는 마치도 별세상사람이 된듯 모든 시름을 잊고말았다. 아름다우면서도 다정다감한 진희는 그야말로 수길이에게 있어서 세상의 전부인듯싶었다. 그가 없이 지나보낸 세월이 아깝기 그지없었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이 어둑컴컴해서 어떻게 여태 살아왔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였다.

두사람의 관계가 점점 무르익어갔다. 그럴수록 수길의 가슴을 괴롭히는것이 있었다. 자기야 가슴속에 품은 뜻이 있지 않는가? 가슴속에 품은 청운의 뜻을 버리고 한 처녀와의 애정에만 빠져있는것이 과연 사나이가 할짓이란 말인가. …

그때 수길의 마음을 괴롭히는것은 바로 부친앞에서 다진 맹약이였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고 철이 들어서는 일본으로 건너가 류학을 한 그였다.

돌아오는 길로 친로파세력의 한사람인 부친에게 이끌려 고종황제가 있는 궁성앞에 가서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를 격살할데 대한 맹약을 다진 수길이로서는 모든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수도 없었다.

나라의 원쑤인 하세가와를 격살하고 자기의 생도 기꺼이 바쳐야 할 그가 한 처녀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것은 부친과 다진 맹약을 지키자고 해도 그렇고 처녀를 위해서도 당치않은 일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진희는 수길에게 있어서 넘기 힘든 고개였다.

언제나 맑고 깨끗한 그런 처녀의 정을 어떻게 외면할수 있단 말인가.

며칠밤을 모대기였다. 눈앞에는 온통 진희의 맑고 청신한 모습만이 얼른거리고 가슴속에서는 그에 대한 애틋한 정만이 흘러넘치는것 같았다.

그러나…

경찰관검정시험에서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은 날 드디여 수길은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더 힘들기 전에… 그와 단호히 결별해야 한다.

그래서 어느날 그가 하숙하는 집에 찾아와 진희를 대문밖에까지 모셔왔노라며 너스레를 떠는 한정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냥 돌려보내주오.》

《그건 왜?》

《난 그와 관계를 끊기로 결심했소.》

한정만의 두눈에 무서운 홰불이 타올랐다.

《뭐라구? 어째서?》

《난 나라를 위해서 할 일이 있는 사람이요.》

《걷어치워. 뭐? 나라를 위해서라고… 그럼 왜 처음부터 나랄 위해 그럴수 없노라고 말을 못했어. 왜 지금에 와서 나라타령이냐? 엉, 이 천하에 너절한 자식, 네놈이 무슨 정승대감이나 되길래 나라를 위한다더냐?… 그건 다 한 처녀의 진심을 헌 짚신짝처럼 우습게 여기는 네놈의 흉심때문일거다.》

수길이 침묵을 지키자 한정만은 추상같이 소리쳤다.

《왜 말 못해. 너절한 놈. 순진한 처녀를 유혹하고 나중엔 차버려. 네깟놈이 친구인들 배반하지 않겠니? 내 너 같은 자식과는 다시는 상종하지 않을테다.》

한정만은 와락와락 주머니를 뒤집어 동전까지 깡그리 털어내여 수길의 발치에 던졌다.

《받아라. 네가 물어주었던 내 치료비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버리였다.

그것이 수길이와 한정만과의 마지막작별이였다.

다음날 조선군대해산이 선포되고 군인들의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에 참가한 한정만이 왜놈군대를 여섯이나 때려죽이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말았던것이다. …

강수길은 한정만이가 고향에 돌아갔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필시 어느 의병대에 들어 일본군과 싸울것이라고 그는 생각해오던터였다.

그런데 자기가 리용구의 호위를 책임지고 따라나선 이 길에서 의병이 된 그와 만나게 되리라고는 정말 생각지 못했었다.

어느날엔가는 자기의 동료들과 더불어 뜻을 같이할수 있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런데 한정만이로부터 절교를 선언받은데 뒤이어 오늘은 이렇게 역적으로까지 규탄을 받고나니 가슴속에 커다란 응어리가 들어앉은듯 강수길의 마음은 괴로왔다.

발에 무거운 연추가 매달린듯 휘청거렸다.

강수길은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는듯 길게 한숨을 내쉬였다.

문득 뒤에서 귀에 선 억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나라는 가는 곳마다 정기가 청신하구만.》

소리나는쪽으로 머리를 돌리던 수길은 놀랐다.

그와 가까운 곳에 서양사람이 서있었다.

서양사람이 그에게 웃으며 다가왔다.

《난 영국기자 맥켄지요. 엊저녁에 군청에서 류숙하고 산책을 하는 길인데 하도 정기가 맑고 청신하여 어느새 발길이 여기에 닿았구만. 허허.》

그의 류창한 조선말에 수길이 자못 신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맥켄지가 그의 의문을 알아차린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이 조선이란 나라에 매우 흥미를 가지고있었소. 그래서 조선의 말과 글을 익혔고 그 덕분으로 오늘 이렇게 여기에까지 오게 된것이요.》

수길이 머리를 끄덕이며 여전히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맥켄지는 먼 산천을 감심깊게 둘러보며 옛 시 한구절을 입가에 떠올렸다.


물만 있고 돌이 없으면

물이 평범하고

돌만 있고 물이 없으면

돌이 신기롭지 못하리


그러나 이 땅엔 돌이 있고

또 겸하여 물이 있으니

천지는 조화를 이루고

나는 시를 짓노라


강수길은 맥켄지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 나라 사람인 김삿갓의 시군요.》

《참 훌륭한 시조요. 신비로운 산천이 훌륭한 시를 낳았지요. 난 이곳의 문물과 사람들을 관망하고있는데 때없이 경탄하게 되더란 말이요. … 조선이란 나라는 정말 흥미있는 나라요.》

맥켄지의 입에서는 련이어 경탄이 습관처럼 흘러나왔다. 아마도 맑고도 청신한 이 땅의 방방곡곡을 돌아보면서 버릇된듯싶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난 맥켄지가 례사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본사로부터 일본군과 견결히 맞서싸우고있는 조선의병들에 대한 글을 우리 잡지에 실을데 대한 위임을 받고 며칠전에 여기로 왔소. 이곳의 의병을 만나려면 어딜 가야겠는지 좀 알려줄수 없겠소?》

맥켄지의 물음에 강수길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왜 이곳에 있겠소. 그들은 산속에 있소.》

맥켄지가 머리를 끄덕이며 빙그레 웃었다.

《난 여기서 멀지 않은 남사리라는 곳에서 의병〈토벌〉에 나섰던 십여명의 일본군대가 전멸당하고 무기들을 빼앗긴 사실을 알고있소. 그리구 일전에 어느 한 지역의 의병들이 통감부에 보낸 투서를 봐도 조선사람들의 애국정신에 대해 알수가 있었소.》

그 투서의 내용은 수길이도 알고있었다.

4개의 조항으로 된 투서였다.

첫째는 일본놈들의 로골적인 조작에 의하여 강제퇴위된 고종을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혀 정치를 하게 하자는것이였고 둘째는 일제의 통감부를 없애치우자는것이며 셋째는 일본관리를 전부 파면시키자는것이고 넷째는 일제가 1905년에 빼앗은 외교권을 도로 찾아내자는것이였다.

수길의 생각깊은 얼굴을 바라보며 맥켄지는 미묘한 웃음을 짓고 말을 이었다.

《내 어제 본사로부터 한통의 전보를 받았는데 며칠전에 조선정부의 미국인외교고문이였던 스티븐스가 일본의 보호통치를 찬양하고 조선민족을 모독하며 돌아치다가 미국 쌘프랜씨스코의 페리에서 장인환이라는 조선사람의 총에 맞아죽었소. 조선사람들은 이렇게 머나먼 타향에서도 민족의 존엄을 지키기 위하여 용감하게 싸우고있소. 조선사람들의 그러한 무력활동이 자국인 이 땅에서도 더욱 광범하게 벌어지리라는건 자명한 일이라고 생각되오.》

수길의 눈에 번뜩이는 빛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그는 매우 박력있는 목소리로 마디마디에 힘을 주어 말했다.

《그렇소. 우리 조선사람들은 기어이 자기의 존엄을 되찾을것이요.》

맥켄지는 이 경찰관의 발언을 놀랍게 들었다.

잠시 수길을 빤히 쳐다보던 맥켄지가 또다시 물었다.

《참, 내가 어제 저녁 함께 동행한 통감부의 사람에게서 듣자니 당신이 호위하는 저 사람이 당신네 나라 황제가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직접 양도하도록 하려는 일본사람들의 속궁냥을 실현하는 그 무슨 도구라던데 그건 이자 말하는 민족의 존엄에 맞는 처신이라고 할수 있겠소? 더구나 그 인물이 일본인하급경찰들에게까지도 천대를 받더란 말이요.》

강수길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더이상 맥켄지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속에서 무엇인가 울컥하니 올리치밀었지만 말이 목구멍으로 나오지 못했다.

일본의 거두들이 모여들어 그 어떤 큰 음모를 꾸미고있으며 그것으로 하여 일진회 고문 우찌다의 사촉이 불원간 리용구에게 내리워지리라는것을 이미 예감했던 그였다. 그런데 맥켄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내용이라는것이 바로 새로 황제로 된 순종이 《통치권》을 왜왕에게 스스로 양도하도록 조작하는것이란 말인가. 세상에 인피를 뒤집어쓰고 태여나서 그런 천하에 무도한 대역죄를 어떻게 감행한단 말인가. 아무리 두터운 짐승의 털가죽을 뒤집어썼다고 해도 그런 대역죄는 차마 감행할수 없을것이라는 자기 위안이 마음속 한구석에 생겨났지만 무섭게 끓어오르는 격분을 누를수 없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두주먹을 저도 모르게 피줄기가 펄떡 살아일어나도록 꽈악 틀어쥐였다.

바로 이때였다.

주막집이 있는쪽에서 복닥소동이 일었다.

리용구의 심복졸개들이 부산스레 뛰여다니는걸 봐선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것이 분명했다.

수길이뿐아니라 맥켄지까지도 숨을 죽이고 그곳을 바라보았다.

그쪽에서 영달이가 숨넘어갈듯이 달려왔다.

그의 낯빛이 꺼멓게 죽어있었다.

《무슨 일이 생겼는가?》

수길의 물음에 영달은 숨꺼져가는 소리로 말했다.

《금방 자객이… 어떤 놈이 회장님을 노리고 활로… 다행히… 머리우로 스쳐지났으니망정이지…》

영달이의 두서없는 말에 의하면 대체로 이러했다.

리용구가 아침세면을 하려는 때에 담장밖의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들었다고 한다. 밤새 집울타리를 뺑뺑 돌아가며 세겹으로 치고있던 철통같은 호위진을 날이 밝으면서 탕개를 풀고 늦추자마자 그런 일이 벌어졌던것이다.

리용구는 자기의 멱줄을 노리고 날아든 화살을 보고 눈이 뒤집힐 지경이 되였다.

다행히 세면대야에 몸을 숙이는 순간에 화살이 날아들었으니망정이지 조금만 어물거렸어도 화살은 틀림없이 그의 멱줄을 꿰였을것이다.

화살을 날린 놈을 잡아들이라는 리용구의 불호령이 떨어지고 밤새 호위를 서고 눈을 좀 붙일가 했던 일진회원들이 선불맞은 메돼지들처럼 여기저기를 쑤셔대기 시작했다.

영달의 말을 마지막까지 들은 수길은 속이 철렁하였다.

리용구에게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면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에게 접근하기 위한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만다. 그걸 위하여 모든것을 참고 역적을 따라 천리길을 묵묵히 걸어온 수길이고보면 강건너 불보듯 구경만 하고있을수가 없었다. 역적 리용구는 민족을 위하여 일각이라도 빨리 죽어야 했지만 지금 당장은 부친앞에서 다진 맹약을 기어이 지켜야 할 강수길에게 있어서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줄다리였다.

수길이 한걸음 다가서며 따지듯 물었다.

《그래 누가 그랬느냐?》

영달은 턱을 덜덜 떨며 머리를 저었다.

《모릅니다. 그저…》

수길의 눈앞에는 불현듯 한정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나 수길은 곧 머리를 흔들었다.

그들이야 이미 이곳 상황을 알고 물러가지 않았는가?

어제 그를 돌려보내놓고 수길은 일진회의 졸개들을 풀어 주변을 참빗질하듯 훑어보았었다. 그때는 이미 그들의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하다면 리용구를 노린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맥켄지가 이상야릇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참 흥미있소. 이보시오, 난 객관으로서 그들의 행위에 감동하며 찬성을 금할수 없소.》

《…》

수길은 그에게 머리를 약간 숙여보이고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주막집 울타리 뒤쪽에서 평산일진회원 두명이 허리춤에 찼던 무장을 해제당한채로 뻐드러져있었다. 리용구의 호위원들이 날이 밝자 눈을 붙이려고 침방으로 들어가면서 맹영달이가 끌고 다니는 평산일진회원들을 대신 세워두었던것이다.

둘중 한놈은 이미 저승의 문턱을 넘어선 상태였고 다른 한놈이 마지막숨을 몰아쉬고있었다.

수길이가 그자의 덜미를 잡고 흔들었다.

《대체 어떤자들이였느냐? 어서 말해.》

《한놈이였습니다. 괴나리보짐을 지였는데 키가… 크고… 목에 손바닥만 한 검은 기미가… 있습…》

그자는 말끝을 맺지 못한채 두눈을 까뒤집으며 서둘러 저승길을 갔다.

《목에 검은 기미가 있다구? 그럼 혹시 그자가…》

맹영달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강수길은 얼굴을 획 돌렸다.

《그를 아는가?》

《그런게 아니라… 방금 주막집에서 싸움을 벌린자의 목에 큰 기미가 있었소이다. 손바닥만 한…》

곧 주막집주인과 그때까지 남아있던 길손들이 끌려왔다.

아침에 소동을 벌린 그 《도적》이 한성의 큰 량반을 겨누고 활을 쏘았다는 소리에 주막집주인과 길손들은 두눈이 뗑그래졌다. 그 사람의 손에 죽어 너부러진 담장밑의 두사람을 보고는 몸들을 으시시 떨었다.

영달이가 마치 그들이 활질을 한 장본인이기라도 한듯 기가 펄펄 살아서 한사람, 한사람을 앙큼스럽게 따지고들었다.

정말 재수없는 사람들이였다.

모르는걸 모른다고 대답했는데도 영달이에게 멱살을 잡혀서 귀쌈까지 빠짐없이 얻어맞고야 풀려나오게 되였던것이다.

이런 판에서는 늙은 령감도 사정을 보지 않았다. 금방 미역장수와 엿장수의 기막힌 인연에 대해 눈물이 글썽하여 이야기하던 늙은 령감이 맹영달이에게 길다란 턱수염이 잡혀 이리저리 휘둘리우다 못해 뼈밖에 없는 엉덩짝이 발길에 채워 벌렁 나자빠지고말았다.

한성의 량반은 금방 벌어진 무시무시한 일이 있는지라 밥상도 받지를 않았다. 맹영달이가 불리워갔다. 리용구는 맹영달이를 당장 잡아먹을듯 노려보며 평산일대의 일진회가 무능한 밥통들이라고 한참이나 달구어댔다. 그러고난 후에는 당장 이곳 의병대의 거점을 내탐하여 수비대와의 협동하에 소멸하라는 불호령과 함께 일진회가 직접 의병대 지휘성원들을 살해하라는 엄청난 오금까지 박았다.

그리고나서 리용구는 얼마 멀지 않은 곳에 도사리고있는 일본군 지구수비대 대장인 오까노모중좌에게 사람을 띄워 일본군병력을 데려다 호위진을 몇배로 늘구고 한성을 향해 황겁히 줄행랑을 놓았다.

그로써 평산지구 일진회 회장인 영달이가 애써 잘 보이자고 계획한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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