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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회


제2장 역적놈을 잡아라


1


한낮이다. 해볕이 제법 재글거렸다. 봄냄새가 완연한 행길로 호화롭게 꾸려진 마차 한대가 나타났다. 마차곁에는 곁붙은 사람만도 서른이 넘는다. 대개가 다 새파란 젊은것들인데 먼길을 달려온양 하나같이 지친 기색들이였다. 아직은 날씨가 쌀쌀한 기운이 돌았건만 온통 뚝비 맞은 강아지마냥 땀에 푹 젖은 얼굴들에서는 뜬김을 말아올렸다. 그랬어도 눈찌들만은 하나같이 메토끼를 물어메칠 새끼밴 삵처럼 사납기 그지없었다.

마차는 행길을 따라 평양쪽에서부터 황주를 지나고 어느새 봉산땅도 넘어 서흥을 가까이하고있었다.

마차안에는 일진회 회장인 리용구가 앉아있었다.

평안도지방의 일진회정형을 료해하고 돌아오는 리용구는 부처님뒤에서 밤오줌을 누는 아낙네처럼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도 그럴것이 바로 한해전에 궁내부 회계심사국장 박용화가 이름모를 자객의 손에 맞아죽었고 권중현이 낯모를 청년 두명의 저격을 받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와 함께 리완용과 리근택의 집들이 통채로 불타버려 재더미가 되는 일이 있었다.

나라를 팔아 제 살을 찌우는데서 박용화나 권중현이는 물론 리완용과 리근택이와 한짝지발끝에 걸터앉아도 조금도 기울지 않을 리용구로서는 밝은 세상에 마음놓고 얼굴도 내밀수 없는 신세에 이르렀다.

더우기 가슴을 조이는것은 바로 여기가 지난해 평안도일대를 돌아보고 오던 자기를 알아보고 50여명의 농민들이 몽둥이와 쇠스랑들을 들고 달려드는 바람에 몸서리치는 참사가 벌어질번 했던 곳이였기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이날껏 리용구는 참으로 아슬아슬한 인생길을 걸어왔다.

동학의 2세교주 최시형의 제자로부터 시작하여 갑오농민전쟁에도 참가하였는데 그때 일제에게 체포되였다가 놓여나온 다음에는 특등친일파가 되여버리고말았다.

일제의 사촉을 받은 리용구는 역적들을 긁어모아 진보회를 만든데 이어 얼마 안 있어 일본에서 10여년동안 길들여진 친일주구 송병준이와 같은 무리들로 무은 일진회에 통합시켜 친일매국역적으로서의 흉체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일진회는 발족한 첫날부터 《황실의 존중과 국가기초의 공고화》, 《국민의 생명재산보호》, 《정치의 개선》, 《군정과 재정의 정리》 등 기만적인 이른바 《4개조강령》이라는것을 들고나와 나라를 일제에게 팔아넘기는데 협력하였다.

일제침략자들은 일진회의 우두머리 송병준, 리용구 등 매국노들에게 일진회결성자금으로 5만원을 주었으며 그후에도 제놈들의 수족으로 만들기 위하여 계속 자금을 쥐여주었다. 이 대가로 일진회는 상전의 요구에 따라 온갖 매국배족행위를 서슴없이 감행하였다. 일제가 도발한 침략적인 로일전쟁을 《조선의 독립을 확고히 보장》하기 위한 전쟁이라고 떠벌이면서 백성들에게 일제침략군의 군사행동을 협조할것을 설교하였을뿐아니라 《북진대》라는것을 만들어 수만명의 인민들을 일제의 군용철도부설공사와 군수물자운반에 강제동원시켰다. 더우기 일진회는 1905년 11월 조선의 외교권을 일제에게 넘겨주어 일제의 《보호》를 받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러한 매국행위는 백성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심산오지에서 평생 부대기를 뚜지고 산 파파 늙은 령감쟁이들도 땅을 뚜지다가 한성쪽 하늘을 무섭게 쏘아보며 쇠스랑을 틀어잡았고 한뉘 봉건의 울타리속에서 손바닥만 한 부엌칸을 세상살이의 전부인듯 생각하는 려염집의 아낙네들까지도 문득 손에 든 식칼을 틀어잡고 분을 참지 못해했다. 그러니 일본놈들의 앞잡이가 된 자기에게 있어서 산골짝의 손바닥만 한 화전에 명줄을 걸고 목숨을 부지하는 산송장같은 늙은이든 빨래방치로 개구리도 때리길 저어하는 연약한 아녀자이든 모두가 무서운 《자객》이고 《의병》이 아닐수 없었다.

리용구의 등골로 서늘한 랭기가 쭉 스치였다.

행길과 잇닿은 산탁의 덤불속에서 금시 새빨갛게 달아오른 철알이 자기의 염통으로 날아드는 환각이 드는가 하면 황토색먼지를 풀떡풀떡 걷어차며 지게를 지고 가는 농군의 손에 쥐여진 낫날도 당장 자기의 살진 목덜미에 푹 박히는듯 한 끔찍한 몽상을 불러내며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리용구는 눈을 꾹 감고 자기 위안을 하였다.

하지만 딴 일이야 생길라구.

주위를 따르는 호위병들이 다소나마 마음속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생김생김들이 하나같이 날탕패두목들처럼 소름이 끼치는 작자들로 골라모아 품들여 꾸려놓은 호위원들이다. 흰 명주바지에 양복을 걸친 꼴들이 우습긴 하지만 괴춤에는 서양의 신식피스톨(권총)을 꾹 찔러넣었다.

바로 그런 호위원들이 둘러막은 이 마차로 분별없이 뛰여들 놈이 있을것 같지는 않았다.

더우기 마차앞에서 성난듯 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강수길이라고 부르는 경찰관은 혼자서도 십여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식은 죽 먹기로 해제낄수 있는 보통내기가 아니다. 이번에 평안도순시길이 안심치 않아 종로경찰관주재소의 일본인경시에게 부탁하여 《차관》받은 경찰관의 믿음직스러운 뒤모습을 바라보니 마음속의 불안이 조금이나마 가셔지는듯싶었다.

리용구는 손바닥만 한 마차시창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행길로 오가는 농민들이 걸음을 멈추고 어마어마한 호위속에 든 마차를 쳐다보고있었다. 생각탓인지 그들의 눈빛들이 몹시 불길했다.

리용구는 마차뒤에 붙어 재빠르게 따라오고있는자를 손짓하여 불렀다. 이발이 넉대나 빠져 볼품은 없지만 무척 교태있게 생긴자였다.

《영달이…》

어딘가 모르게 몹시 떨리는듯 한 부름소리에 그자가 황겁히 다가왔다. 서흥과 평산지방에서 솔선 일진회를 조직하고 자칭 평산지구 일진회 회장이 된자로서 자기 회장의 안녕을 지킨다며 자진하여 두명의 심복들을 끌고 봉산지경까지 달려와 마중해준 면목이 있는 심복이였다.

《회장님, 무슨 분부이나이까.》

리용구는 불안스런 눈빛을 감출 심산으로 눈을 내리감았다.

그리고는 조는듯 한동안이나 지루한 시간을 흘려보내고서야 뜨직이 입을 열었다.

《평산의병대가 어디에 있는가?》

맹영달은 리용구와 첫 대면을 하는 자리에서 평산을 중심으로 서흥과 해주일대에서 맹활동하는 의병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때 맹영달은 산속에서 불시에 나타나 벼락같이 전투를 하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리는 평산의병대의 묘연한 행방에 대하여 분명히 말해주었다.

그런데 의병대의 행처를 다시 묻는 상전의 심사가 외로 꼬였는지 바로 꼬였는지 서당개처럼 눈치빠른 영달이였지만 알수가 없었다.

영달은 이발이 넉대나 빠져 휑해진 입을 쩍 벌리고 헤식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헤헤… 평산의병대의 행방이라는건 고정된 곳이 없소이다. 그저 여기서 나타났다가는 또 저쪽에서…》

별안간 리용구는 식은땀이 와짝 내돋아 몸살을 떨었다.

상전의 심기가 극도로 불안스러워진것을 느낀 맹영달이 다시 벌리려던 입을 꼭 다물고 물러갔다.

리용구는 두눈을 꾹 감고 조금전에 영달이가 말한 평산의병대에 대하여 다시 상기하였다. 평산의병대가 새로운 지휘체계를 갖추었단 말이지?…

리용구는 심장이 졸아드는것을 느꼈다.

그러면 이 일대에 큰 무장대가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들에게 자기의 행적이 드러나는 경우 아무리 뛰여난 사격술과 용력을 가진 경찰관이며 염라국의 지옥사자들처럼 생긴 일진회원들이 호위한다고 해도 어느 순간에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쳐들지 알수가 없는노릇이였다.

리용구는 지난해 바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황주땅을 지나다가 무지렁이같은 백성들에게 당한 봉변을 다시금 생각하였다. 자기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들었던 50여명의 백성들…

그때는 천만다행으로 목숨을 건지였지만 잘 째이고 총으로 무장한 의병대와 맞다들리는 날엔 목없는 송장귀신이 되지 않는다고 어이 장담할수 있으랴. 더구나 평산의병대로 말하면 조직될 때부터 한성에 무서운 화근으로 소문을 낸 무장대가 아닌가.

평산의병대! 이름부터가 왜서인지 섬찍스러웠다.

평산… 고려의 개국충신인 신숭겸이의 본관이라고 했더라… 고려왕조의 후손들이 개성으로부터 시작하여 이곳 일대에까지 많이도 널려져있는 까닭이여서인지 평산땅을 가까이하면서부터는 더욱 속이 졸아들었다.

이제 한성에 당도하면 조선주둔군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를 만나 여기 일대에서 활약하는 평산의병대에 대한 통고를 하여 아예 송두리채 없애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한성에 무사히 당도하는것이 급선무였다. 목없는 송장귀신이 된 다음에야 평산의병대가 없어지든말든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차가 서는 바람에 리용구는 생각에서 깨여났다.

시창으로 내다보니 어느새 서흥군청앞에 당도하였던것이다. 저절로 숨이 활 나갔다.

리용구는 마차를 곧장 군청안으로 몰라고 일렀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군청대문앞에서 파수를 서던 일본경찰 두명이 잡담을 하다가 리용구의 마차를 보고 거들먹거리며 세웠다.

《오이, 세우라. 웬 마차인가?》

영달이가 앞으로 달려나가 공손히 말했다.

《예, 일진회 리용구회장님의 행차이올시다.》

《오! 일진회.》

짐짓 알은체를 하던 일본경찰이 금시 위협적인 상을 지으며 되물었다.

《근데 여긴 왜 왔는가?》

《날도 저물어가서 회장님을 모셔야겠기에…》

일본경찰이 대바람에 두눈을 세모지게 떠올리며 손을 홱 내저었다.

《안된다. 가라, 가라!》

닭쫓듯 손을 내젓는 경찰에게 울상을 짓고 사정하는 영달이의 목소리가 리용구가 앉은 마차안에서도 처량하게 들리여왔다.

했건만 일본경찰들은 매정하기 이를데없었다.

《에- 지금 통감부의 차관어른이 영국기자 맥켄지상과 여기에 류숙하였는바 일체 잡인은 엄금이다. 빨리 가라.》

리용구는 눈을 감았다. 속에서 울컥하니 밸이 치솟았다.

뭐? 잡인이라구… 감히 이 일진회 회장을 무엇으로 알구.

하지만 왜놈들 속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리용구였다. 바로 이 행차도 일진회 고문인 우찌다의 걸죽하고 모욕적인 야유끝에 전국적으로 일어번지는 의병대를 사멸하는데서 일진회원들의 역할이 매우 저속적이라는 일장훈시에 따라 단행된것이였다.

극악한 매국배족행위로 하여 도처에서 의병들과 인민들에게 많은 일진회원들이 처단되였고 분노한 백성들이 집까지 들부셔버리는통에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해도 한지에 나앉아 쪽박신세가 된 일진회원들의 수는 부지기수였다. 이렇게 이르는 곳마다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데다가 일단 일진회원이라고 판명만 되는 날에는 집기둥이 뿌당구까지 뽑혀져나가는지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도리여 신분을 감추기에 급급하고있는 판이였다.

거기에다 최근에 한성에 본부를 두고 급속히 득세하고있는 대한협회의 상층인물들을 비롯한 회원들의 정면도전으로 일진회의 력량이 약화되고있는 사정과도 관련되는것이다.

안팎으로 죄여드는 적의의 압박감에서 헤여나오려고 발광을 하였지만 그럴수록 사태는 점점 더 험악하게 번져지고있었다.

그런 궁상스런 상황에 처한 일진회라는 명분이 이 일본족속들에게 아량있게 통할리 만무하였다. 더구나 이또를 비롯한 일제의 우두머리들이 지금까지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잔등을 두드려주고있으나 이미 나라를 배반하고 백성들의 버림을 받은 역신들에 대해 일본의 중진들은 물론이거니와 하급관리들까지도 로골적으로 멸시하고 조롱하는것이 보편적인 일로 되고있음을 모르는바가 아니였던것이다. 파렴치하고 철면피한것을 체질로 하고있는 일본족속들도 배반자들의 가치가 털빠진 강아지가죽 한장 값도 못된다는것을 자명한 사실로 여기는 까닭이리라.

리용구의 입에서는 한탄소리 같은 한숨이 저도 모르게 새여나왔다.

불뚝거리는 밸 같아서는 당장 졸개들을 내몰아 대문을 지키고 선 왜놈경찰들을 두들겨패여 반병신을 만들어놓고싶었다. 감히 일진회 회장을 거리낌없이 모욕한 쪽발이족속들에게 본때를 보이고싶은 충동이 속에서 굴뚝같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따위 객기가 어디에 필요하단 말이냐. 괜히 불집을 일으켜 요즘에 들어와 가뜩이나 일진회를 곱지 않게 보는 통감부의 우두머리들에게 불리워가서 친아들의 따귀를 갈긴 이붓자식을 대하듯 할 그 랭대를 받기가 끔찍스러웠다. 다른 한편으로는 막무가내로 객기를 뽑아 군청에 들어가서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반갑지도 않은 왜놈종자와 쓰거운 술을 마시며 자기에게 향한 멸시의 눈초리를 못 본척 하고있기도 땀나는 일인것이다.

하여 리용구는 차라리 선손을 쓰는것이 아래것들앞에서도 위신을 지키는것이라는 타산으로 점잖게 목소리를 뽑았다.

《됐다, 마차를 돌려라. 내 그렇잖아도 번잡한 군청보다 끼끗한 려염집이 되려 낫다고 생각던중이다. 그러니 어디 아늑스런 집 하나를 물색하거라.》

이 넓다란 군청이 번잡하다고?

부하들이 퀭해진 눈들을 마주하고 뻥하니 서있다가 회장의 뒤틀린 헛기침소리에 황황히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마차는 서둘러 돌려지고 군청에서 멀어져갔다.

행차는 서흥군청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가서도 한참이나 더 움직여서야 어느 한 주막집앞에 멎어섰다.

영달의 말이 이 주막이 그중 깨끗하기로 소문난 새 주막이라고 했다.

바로 이 주막집이 널리 소문이 나서 마을이름도 신주막이라 부른다고 아뢰이는 영달이의 말소리가 분명히 들려왔지만 리용구는 방금전에 일본경찰들에게서 받은 울분이 끓고있는지라 대척도 않고 눈을 지그시 감고있었다.

요란스런 행차가 집앞에서 멎어서자 주인이 웬 일인가 해서 달려나왔다.

방금전까지만도 군청대문을 지키는 일본경찰들앞에서 고양이앞의 쥐처럼 보살을 떨던 영달이가 위엄을 제법 돋구어 주인을 다불러댔다.

《이보게 주인, 한성에서 큰어른님이 왕림하시와 천품이 하도 겸양하시여 군청도 마다하시고 하찮은 곳이지만 이 집에서 쉬시겠다고 하셨으니 임자네 같은 집에서야 마땅히 금옥으로 비를 만들어세울만큼이나 황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러니 일체 외인들을 들이지 말라구. 알겠나?》

영달의 어마어마한 장황설에 주인이 못마땅한 인상을 지었다.

《그렇겐 못하겠소. 그럼 서흥땅을 지나는 길손들이 한지에서 밤을 새라는거요. 우리 집을 찾는 사람들은 바로 이 집을 바라고 수십리길을 걸어오는 사람들이란 말이요.》

《뭐라구, 저 어른이 뉘신줄이나 알고 상놈들과 섞겠다는거야? 령감이 내가 누군줄 모르진 않겠는데…》

리용구는 맹영달이가 저러다가 자기가 누구라는것을 드러낼것만 같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일렀다.

《그럴것이 없느니라. 예가 주막집이라니 길손들이야 들여야지. 난 그저 조용한 방이 한칸 있으면 되겠다.》

《…》

잠시 리용구쪽을 바라보던 영달이가 그 아량에 감심한 태도를 보이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여 리용구일행은 눅거리길손들을 들이는 주막에 행장을 풀게 되였다.

리용구는 자기일행의 신분을 불문에 붙일것을 부하들에게 몇번씩이나 단단히 신칙하였다. 그리고는 자기가 든 방주위에 부하들로 장사진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나서야 방에 들어선 리용구는 일본족속들에게 서양의 기자나부랭이보다도 못한 괄세를 받아야 하는 자기 처지에 대하여 끙끙 속앓이를 하며 방가운데 틀고앉았다.

괘씸하도다. 내가 서양의 기자나부랭이보다도 못하단 말이냐? 어허, 일국의 열손가락안에 드는 인물인 이 리용구를 괄세해도 류만부동이지. …

밖에서 문기척소리가 들렸다. 한성에 있는 자기 집 같으면 심기가 꼬여드는 이런 때 시끄럽다고 꽥 소리를 질러 쫓아버리련만 여기가 객지이고 또 자기의 일신상의 크고작은 모든것이 심복들에게 달려있으니 내심을 보일수가 없었다.

리용구는 애써 언짢은 기색을 숨기며 점잖은 목소리를 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영달이가 조심히 들어왔다.

맹영달은 들어와서도 무슨 일때문인지 한동안이나 오밀조밀하며 상전의 눈치를 살피다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조심히 여쭈었다.

《저… 회장님, 이 주막집에 생김새가 과히 밉지 않은 기생이 하나 있길래 불렀사온데 한번 보시겠소이까?》

리용구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런 초라한 주막에 기생이라구?

놀라운 일이다. 아니, 그보다는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봉산과 서흥땅의 기생들이 한성은 말할것도 없고 평양기생들과도 당당히 견줄만 한 인물들이라는 소리는 이미 들어 알고있던차이다. 이번 걸음을 떠날 때에도 황해도땅을 지나는 기회에 이곳 기생들을 상대해보리라 벼르어오던 리용구로서 참으로 반가운 소리가 아닐수 없었다. 더구나 심기가 울적한 때임에야…

상전의 얼굴에 화기가 도는것을 눈치챈 영달이가 뒤걸음으로 재빠르게 물러갔다.

인츰 문이 열리더니 자그마한 주안상을 든 기생이 들어섰다.

생신하고 향긋한 냄새가 방을 가득 채웠다.

두눈을 가늘게 뜨고 점잔을 빼던 리용구의 눈길이 기생에게로 향했다. 나이가 좀 들어보이기는 하나 눈부시게 하얀 살결에 깨끗한 용모를 가진 기생은 한성에서 늘 상대하던 기생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비쳐들었다.

리용구는 저도 모르게 입귀가 돌아갔다.

방금전에 군청대문앞에서 받은 창피 같은건 벌써 날아버린지도 아득한 옛일같았다. 기생과 있는 동안은 울적한 심기를 달랠수 있고도 남음이 있을듯싶었다.

리용구는 주안상을 앞에 놓아주고나서 사뿐히 절을 하는 기생에게 한무릎 나앉으며 당장 끌어안기라도 할듯 들썩거렸다.

기생이 생글거리며 하얀 사기잔에 맑은 술을 공손히 부어 눈처럼 하얀 손으로 받쳐올리자 리용구는 가까스로 자기를 눅잦히며 점잖게 잔을 받았다.

그러고나서는 걸탐스럽게 술을 마셔버렸다. 술이 참 달기도 했다. 리용구는 너무도 흡족하여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 네 이 집에 매인 기생이냐?》

기생이 빈 잔에 다시 술을 가득 부으며 고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와요. 소녀는 서흥군청 기적에 오른 관기옵나이다. 버들이라고 하나이다.》

버들이라구? 맑은 물이 돌돌 흐르는 시내가에 풍치를 돋구는 버들이라… 과시 어울리는 이름일지고…

리용구는 저도 모르게 버그러지는 입을 다물지 못하며 다시 물었다.

《그런데 어째 군청에서 탈가하여 이런델 와있느냐?》

《지금 그곳에 왜놈들이 왔기에 수청을 거절하고 잠시 몸을 사렸나이다.》

《허- 그것 참, 듣구두 모를 소리로다. 수청을 거절하다니… 그게 기생에게도 절개가 있다는 소리가 아니냐?》

리용구가 혀를 낄낄 차며 어이없는 기색을 지었다.

그러는 리용구를 잠시 바라보던 버들은 두눈을 내리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같은 하찮은 기생에게 어이 절개가 있다 하리오이까? 하오나 기생에게 녀자의 절개는 없사오나 이 땅의 백성으로서 나라의 수치만은 알고있소이다.》

《거참, 기생년에게 그런 어여쁜 마음이 있을줄은 내 미처 몰랐구나. 그래, 왜인들 내놓고 또 누구에게 절개를 지키려느냐?》

버들은 바깥동정에 귀를 기울인듯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 방에 틀고앉은 량반의 심복들이 마당가에서 분주히 오락가락하는 발자욱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그는 리용구의 지꿎은 시선을 느끼고나서 몸가짐을 바로하더니 무엇인가 매우 의미심장한 지어는 비분강개한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다음엔 나라를 팔아먹은 오적이 아니라면 그가 오작인(조선봉건왕조에서 지방관청에 소속되여 고을원이 죽은 사람의 시체를 부검할 때 시중을 드는 심부름군)일지라도 소녀는 허락할수 있나이다.》

그의 말에 리용구는 속이 뜨끔했다. 이 천하디천한 기생이 말한 오적이란 항간에서 돌아가는 새 내각각료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것을 그도 모르지 않았건만 짐짓 모르쇠를 하고 례사로운 말투로 조용히 따졌다.

《오적이라구? 오적이란 대체 뉘들이더냐?》

버들은 나긋나긋한 손가락들을 차례로 꼽았다.

《왜놈들과 짝자꿍이 하여 나라님을 허재비로 만들고 섬오랑캐들에게 나라구 백성이구 몽땅 섬겨바쳐 부귀영화와 바꾼 리완용, 리지용, 박제순, 리근택, 권중현이란 가련하기 그지없는 대감마님들 그리고 부랑배 송병준과 일진회의 대가리노릇을 하는 우필이옵나이다.》

리용구는 머리꼭뒤로 피가 솟는것을 느꼈다.

나라의 대신들의 이름을 지방고을 향청의 하인방 잔심부름군 점고나 하듯 불러대는 기생의 입아귀에서 송병준이와 더불어 마지막에 흘러나온 우필이란 바로 동학란 이전에 불리워지던 자기의 이름인것이다. 울컥하니 올리치미는 분을 억지로 눌렀다.

그리고는 몹시 불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네 입으로 지껄인 량반들이 수청을 들라면 어쩔테냐?》

《목숨을 버리여도 결단코 허락치 않겠나이다.》

리용구는 입이 쓰거워졌다. 가슴이 터질듯 끓어올랐다.

어허, 어찌 천한 기생년의 입에서 자기의 이름이 주인없는 늙은 도적개 부르듯 거리낌없이 불리운단 말인고…

분명 자기가 어떤 인물이라는것을 눈치채고 하는 수작질인듯 한 생각이 갈마들면서 더욱 부아통이 치밀어올랐다.

당장 이년을 마당가에 끌어내여 아가리를 분질러놓고싶었다.

하지만 한갖 기생년의 기강을 바로잡겠다고 소동을 벌려놨다가 자기가 항간에서 일컫는 《을사5적》들과 대등한 명물인 리용구라는것이 이 집 담장밖으로 알려지는 날이면 혹시 래일 아침 뜨는 해를 보지 못하게 될지 어이 알랴.

참았다. 참자니 부아통이 치밀어 견딜수가 없었다.

큰 대접에 꿀럭꿀럭 술을 부어서 거퍼 세번이나 들이마셨다.

술이 쓰겁기 그지없었다.

리용구는 자기를 지그시 쳐다보고있는 기생을 피발이 돋은 도끼눈으로 쏴보며 소리를 쳤다.

《이 죽일년, 당장 물러가지 못할가.》

빈 대접이 기생에게로 날아갔다.

기생은 얼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달아났다.

맹영달이가 웬 일인가 해서 달려들어오다가 리용구가 내던진 사기접시에 얻어맞고 사라져버렸다.

리용구는 요강만 한 술항아리를 통채로 기울여 꿀꺽꿀꺽 소리를 내며 바닥이 나도록 마셔버리고는 자리에 벌렁 누워버렸다.

점점 취기가 오르며 눈앞이 어질거렸다. 리용구의 입에서 신음소리 같은 한탄이 쏟아져나왔다.

《어허, 세상인심 더러울지고… 야박할지고… 괘씸할지고…》

리용구의 넉두리는 인츰 잦아들고 대신 코고는 소리가 청승맞게 울려나왔다. 하기야 맹물에도 술기운이 있다는 흥수물에 알쭌히 찹쌀로 담근, 불이 펄펄 붙는 찹쌀술 한동이가 항상 목숨걱정에 염통이 밤알만 해진 리용구따위를 꼬꾸라뜨리기에는 너무도 많은 량이였다.


× ×


요란스런 한성량반행차가 초라한 주막에 들자 길손들의 처지가 난처해졌다.

그 유들진 인물이 손님방을 독차지한터이라 신용있는 주인은 길손들을 자기 가족이 사는 방에 들여야 했다.

날이 저물자 그 한칸방으로는 길손들이 계속 찾아들었다.

맨 아래목이 이 집주인내외와 여라문살 난 아들의 자리였는데 마음씨고운 주인이 황주에서부터 평산막바지 재등이라는 곳으로 간다는 수염을 한발이나 내리드리운 로인과 그의 아들인지는 알수 없으나 함께 동행한 애리애리하게 생긴 총각에게 내여주고 저희네가 웃목으로 올라갔다. 그 웃목에는 이미 송도 인삼밭에 품팔이를 간다는 평양나그네 두엇과 흉년을 만나 보짐장사길에 나섰다는 고성내기 네명이 비좁게 자리를 잡고있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날탕패두목처럼 생긴 웬 사나이 하나가 또 들이닥쳤다. 목부위에 덴 자리같은 넙죽한 기미가 있고 몸집은 억대우였는데 집주인이 어디로 가는 길손이냐고 물어봤지만 대답도 하지 않고 마치 제 집에 들어선듯 길손들 짬사이를 사정없이 비집어 틈을 만들어놓고는 벌렁 누워버렸다. 방안은 그야말로 콩나물시루가 되고말았다.

하지만 로독에 지친 나그네들이라 집주인들 내놓고는 모두가 요란스런 코풀무질을 겨끔내기로 불어대며 깊은 잠에 빠졌다.

이 시각 밖에서는 어둠속에서 주막집을 향하여 소리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틀전에 돌망골을 떠난 한정만과 그의 일행이였다.

날이 저물무렵에 봉산과 서흥일대의 왜놈수비대배치정형과 헌병초소, 새로 생겨난 경찰관주재소들과 곳곳에 들어앉힌 파출소들까지 속속들이 내탐하고 돌아가려던 한정만은 봉산쪽에서부터 서흥쪽을 향하여 나타난 큰 행차를 보게 되였다.

시골에서는 보기가 힘든 호화마차와 그를 호위하는 수많은 인원들…

돌망골을 떠날 때 일진회장 리용구가 평안도쪽을 돌아친다던 의병장의 말이 불쑥 뇌리를 때렸다.

한정만은 즉시 사람을 파하여 행차가까이에 다가가 살펴보게 하였다. 얼마후 그가 돌아와 하는 말이 마차에 탄 량반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수 없지만 그일행에 평산일진회의 두목인 맹영달이란 놈이 껴묻어다닌다고 했다. 예감은 확신에 거의 가까와졌다.

더구나 지금 같은 세월에 일본놈들과 짝자꿍이를 하지 않고서는 행차가 저리두 요란스러울수도 없으며 또 지은 죄가 없이는 호위에 그런 품을 들이지도 않을것이다.

틀림없이 그놈일것이다. 일진회장 리용구… 그놈이다.

이것을 기어이 확인하고 기회를 봐서 손을 쓸 구멍을 찾아봐야 했다.

잘만 하면 한성과도 멀리 떨어진 여기서 일본놈들의 일등앞잡이이며 민족의 오물인 일진회무리의 우두머리를 제껴버릴 기회가 생길지 어이 알랴.

하여 한정만은 의병대원 두명을 다시 보내여 마차를 따르게 하였다.

그런데 마차가 서흥군청앞에 잠시 섰다가는 그대로 지나쳐 일반나그네들이 드는 주막에 들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리용구는 일진회라는 큰 세력을 거머쥔 인물이다. 지방장관 같은건 나이에 구별없이 반말질로 상대하는 인물인 리용구가 고을군청에도 들지 못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정만은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리용구가 옳은가? 그렇다면 주막에는 왜?

그에 대하여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었다.

그리하여 한정만은 한밤중까지 기다렸다가 의병들을 산자드락 으슥진 곳에 숨어있게 하고는 혼자서 주막집쪽으로 소리없이 다가갔다.

주막집 뒤울가까이로 다가서는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그림자 두엇이 그를 에워쌌다.

《서라.》

그들의 손에 쥐여진 시꺼먼 서양피스톨들이 이마빡이며 가슴노리를 선뜩하게 했다. 뒤에 붙어선자의 한쪽손이 한정만의 허리춤을 훑었다. 산자락에 은페시킨 의병들에게 화승대를 맡겨두지 않았더라면 순식간에 이마빡에 구멍이 날번 했다고 생각하니 등골로 식은땀이 쭉 흘렀다.

《어, 이거 왜들 이러시오. 난 주머니가 텅 빈 사람이요.》

《이 작자 봐라. 우릴 밤세상에만 사는 좀도적패쯤으로 아는게 아니야.》

《허, 그렇지 않다면 밤중에 어찌 길가는 행인의 간담을 이리 놀래운단 말이요?》

《우리가 누구인지는 알게 돼. 여, 이녀석을 헛간으로 끌고 들어가 왜 밤중에 도적고양이처럼 여기서 어물거리는지 토설을 받아내자구.》

두놈이 량쪽에 붙어서 한정만을 우격다짐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제길, 시작부터 재미가 적은걸… 할수 없지.)

경솔했던 자기를 후회했다. 대문쪽으로 뻐젓이 가던 걸음이면 이 집이 주막집이라 길가던 나그네라고 하면 그만이였을것이다. 그런데 집뒤로 접근했으니 이놈들의 눈에 길손으로 보일리 만무했다.

그러면서도 한정만은 바로 이 주막집에 나라의 원쑤, 민족의 배신자가 들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리용구가 아니면 이렇게 신식총으로 무장한자들의 요란스런 호위를 받을리가 만무했던것이다.

빨리 손을 써야 했다. 이놈들에게 끌려가면 빠져나올수 없으리라는것은 뻔한 일이였다.

그러자니 속에 걸리는것이 있었다. 이제 이놈들을 제껴버리느라면 소리가 날것이고 그러면 이 일대는 살벌한 수색망으로 뒤덮이고말것이다. 그렇게 되면 오늘 밤같은 기회는 다시 없을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더이상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다.

한정만이 둘중 제일 가깝게 붙어선자의 명치를 곁눈질하며 주먹에 힘을 주는데 앞쪽에서 인기척소리가 들렸다.

《밤중에 웬 소란들이냐?》

곁에 붙어선자들이 자세들을 바로 취하며 곰상스레 괴여올렸다.

《예, 경찰관나리. 뒤쪽담장에서 어물거리는 수상한 놈을 붙들었소이다.》

경찰관복을 입은자가 다가왔다. 일이 점점 꼬여들었다.

한정만은 신경을 도사리며 그를 주시하였다.

경찰관의 모색이 드러나는 첫 순간 한정만은 깜짝 놀랐다. 저쪽에서도 어마지두 놀라는것이 확연히 알렸다.

《강수길?》

《한형이?》

두사람은 더 말을 못하고 한동안 바라보기만 했다.

한정만의 곁에서 눈만 껍적거리던 한자가 그들의 침묵을 깨뜨렸다.

《저, 아는 사람입니까?》

수길은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였다.

《너희들은 자기 일을 계속해라.》

수길의 말에 두 작자가 짙은 어둠속으로 빨려들듯 사라졌다.

이제는 둘뿐이였지만 여전히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후에 수길이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이 벽촌에서 우리의 상봉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오? 난 지금쯤 한형이 고향에서 생업에 힘쓰겠거니 생각했는데…》

한정만은 증오로 번뜩이는 눈길로 강수길을 쏘아보며 나직하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역시 네가 이런 곳에서 나랄 팔아 살찌우는 천하역적놈의 도장수노릇을 하고있을줄은 몰랐다.》

수길의 입가에 쓰거운 웃음이 비꼈다.

《역시 한형이 우연히 나타난게 아니였구만. 내가 도장수노릇을 하는 량반에게 그리두 관심이 있을적에야…》

강수길의 입을 통하여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자 한정만은 서뿔리 덤빈 자기의 행동을 더욱 질책하게 되였다. 차라리 의병대에 알려 한성으로 가는 어느 길목이라도 막고 몇날이든 기다렸더라면 민족이라는 거대한 혈맥에 붙어사는 회충같은 역적 한놈을 결딴냈을것이 아닌가.

때늦은 후회가 가슴을 쳤다.

한정만은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며 자기를 주시하는 강수길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거친 숨결이 두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두사람이 뿜어대는 거친 숨소리에 놀란듯 저편 산자드락에서 밤새 한마리가 푸드득 날아났다. 그쪽에 귀를 강구고 날카로운 눈빛을 번뜩이던 수길이가 싸늘하게 말했다.

《밤새가 화약내를 싫어하는구려. 괜히 밤새만 놀래우지 말구 저쪽에서 어물거리는 농군들을 데리고 여기서 사라지오. 지금 이곳은 신식피스톨로 무장한 일진회원들이 장사진을 치고있소. 당신들이 극상해서 메고 다니며 덤덤탄이나 날리는 한대(화승총)따위론 어림도 없소. 옛정을 생각해서 곱게 보내겠다만 다시 무모하게 접어들 땐 가만두질 않겠소.》

《뭐, 옛정이라구?》

한정만이 격해서 주먹을 움켜잡았지만 수길은 랭소를 짓고 몸을 천천히 돌렸다. 몇걸음 옮기던 강수길이가 다시 돌아서며 한정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여하튼 한형, 이렇게라도 보게 된게 다행이라고 생각하오. 한번 맺은 인연은 어느때든 꼭 다시 만나게 되는가보오. 하지만 그것도 목숨을 아낄 때만이 가능한것이지요. 내 말뜻을 알아들었소? 한형을 다시 못 보게 되는 일이 생기는걸 난 원치 않소. 부디 잘 가시오.》

수길은 돌아서서 밤어둠속으로 사라졌다.

한정만은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수길의 뒤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그의 머리속에서는 불쑥 저 강수길이를 알게 되던 때가 떠올랐다.

안개짙은 밤, 왜놈들에게 모진 매를 맞고있던 두 늙은이, 여기에 무작정 뛰여들어 늙은이들을 빼돌리고 벌어진 격투… 왜놈의 군도에 네곳이나 찔리우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일, 어둠속에서 나타나 온통 피칠갑을 하고 쓰러진 자기를 애타게 흔들던 미모의 처녀, 후날에 알게 된 이름이지만 진희라고 부르는 그 처녀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온 강수길이가 정신이 혼미해지는 자기를 업고 의원을 찾아 달린 밤길, 그후 그들사이의 우정과 함께 수길이와 진희사이에도 애틋한 련정이 싹텄지만 나라를 위해서라는 막연한 말로 처녀를 배반한 강수길이였다. 그 다음엔 환멸, 결별…

그렇게 헤여졌던 강수길이가 지금은 역적놈의 가병이 되여 눈앞에 나타났던것이다.

이 순간 한정만은 저런 너절한자와 의형제까지 맺을 생각을 했던 자기자신이 가증스러워짐을 느끼였다.

한정만은 수길이가 사라진쪽을 하염없이 쏘아보았다.

산기슭쪽에서 소쩍새소리가 들렸다.

자기를 부르는 그 소리에 정신이 든 한정만은 주위를 살피고나서 의병대원들이 은페된 산기슭쪽으로 조심히 맥없는 걸음을 옮기였다.

속에서는 수길이에 대한 분노만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주막집에 든 행객이 리용구라는것을 확신한 한정만의 분노는 갑절로 커졌다.

하지만 어찌하랴. 수길의 말대로 이제 들이쳐야 섶지고 불속에 뛰여드는 격밖에는 다른 결과를 얻을것이 없었다.

빨리 이 주변에서 멀찍이 빠져나가야 했다. 필시 강수길이가 이 일대를 수색할것이며 거기에 걸려들면 무모한 희생만 낼수 있다는 생각이 가슴을 때렸다.

그러고나니 강수길이가 더더욱 가증스러워짐을 금할수 없었다.

(너절한 역적놈, 네놈을 다시 만날 땐 절대로 살려두질 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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