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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정 창 모 (미술가)

 

                        • 1931년 12월 16일 전라북도 전주에서 출생.

                        • 1950년 가을 인민군대 입대.

                        • 1957년 평양미술대학 입학.

                        • 1974년 6월 만수대창작사 미술가.

                        • 2010년 7월 12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인민예술가, 예술학박사.

                                                           

 

 

재능은 타고난다는 말이 있다.

하여 이 세상 명인, 재사들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이야기하는 많은 일화들이 전해져오는것이다.

허나 아무리 뛰여난 재능과 비범한 용기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그 재능과 용기가 다 빛을 본것은 아니다.

여기에 우리 나라의 이름난 조선화화가의 한사람이였던 정창모가 생의 말년에 남긴 말이 있다.

《좋은 종자도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내리고 태양의 열과 빛을 받아야 알찬 열매를 맺는다. 내가 미술가로서 성공했다면 특별히 재능이 있어서보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우리 민족의 위대한 분을 스승으로 모시였기때문이다.》

 

 

북녘땅에서 다시 찾은 어린 날의 꿈

 

미술가 정창모의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이다.

민족의 머리우에 검은구름이 드리운 1931년 12월에 그는 가난한 로동자가정의 둘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정인성은 표구술에 능하였고 외할아버지 리광렬(호는 효산)은 전라도 300년 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서예가, 문인화가였다.

리광렬은 전주시내에서 전도유망한 젊은 화가들을 키우기도 하였는데 그중에는 민족회화사에 이름을 남긴 리응로도 있다.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서였던지 정창모는 어려서부터 그림그리기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있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정창모는 같은또래의 아이들처럼 철없는 장난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고 어른스럽게 올방자를 틀고앉아 어른들의 그림시중도 들어주었으며 외할아버지가 그것을 기특하게 여기여 붓과 종이를 주어 그림을 그리게 하면 너무 기뻐 어쩔줄을 몰라하였다.

어린 창모의 눈에 비껴지는것은 언제나 아름다운 산과 들, 꽃과 새들이였다.

어지러운 세월속에서 오직 그림만이 아름다웠고 그래서인지 그의 마음에도 미술이라는 아름다운 꿈이 조용히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어린 그는 때로 자기의 팔뚝보다 더 긴 붓을 들고 부지런히 무엇인가 그리군 하였다.

그의 재능을 제일먼저 알아보고 기뻐한것은 외할아버지였다.

리광렬은 외손자가 별로 배워주지 않았는데도 그림을 신통하게 그리는것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기였다.

그는 외손자에게 매일 붓과 종이를 주어 그림을 그리게 하고는 품들여 그것들을 보아주며 일일이 평가해주군 하였다.

비록 서당이 아니라 초라한 집안의 초가밑이라 해도 이것은 엄격한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였다.

같은또래의 아이들이 장난으로 바지를 꿰치고 손발이 진흙범벅이 될 때 어린 창모의 손과 옷은 색감에 젖어있었다.

창모는 5살때에 벌써 그림을 어찌나 잘 그렸던지 그가 그린 해돋이며 국화꽃, 앞산 등 고향의 산천과 꽃들을 보고 어른들은 혀를 찼으며 마을사람들로부터 《꼬마명인》이라는 칭호도 받군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유년시절에 잠시잠간 있었던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창모의 가정에서는 어린 창모가 그림에 애착을 가지는것을 재롱스레 보았어도 장차 이름난 미술가로 키울 결심은 하지 못했었다.

정창모가 7살 나던 해인 1938년에 전주 완산국민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할 때였다.

그는 크레용화 《아침해》를 그렸는데 그림이 너무나도 신통하여 당시 아동미술전람회에 출품되였다.

이것을 계기로 사람들은 정창모의 재능을 알게 되였고 그는 학교에서 《꼬마화가》로 불리웠다.

일찌기 시인 리상화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고 노래한적이 있다.

정창모라는 미래의 새싹이 미술이라는 푸른 하늘을 향해 아무리 잎새를 펴보려고 해도 일제에게 빼앗긴 이 땅이라 그 싹이 피여날 곳이 없었다.

언제인가 정창모가 소학교때 도화교과서의 그림을 모사한것이 있었는데 왜놈선생이 괜찮다고는 하면서도 얄밉게 쳐다보며 찢어버리였던 일도 있다.

조선아이가 재간이 있다는것이 심보사나운 일본놈의 심술을 다쳤던것이다.

부모들은 어린 아들이 기특하여 재능을 꽃피워줄 생각은 간절했으나 방도는 없었다.

외할아버지 역시 어린 외손자를 미술가로 키워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또 바라지도 않았다고 한다.

여러가지 리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중요하게는 집처지가 그것을 용인할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탓이였을것이다.

가난은 어린 창모의 손에서 붓과 종이를 점점 멀리하게 하였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경치수려한 고향산천이건만 거기서 흘러보낸 어린시절에 대한 추억은 정창모에게 눈물겹도록 아픈 상처만을 남기였다.

나라가 해방된 이후에도 정창모는 미술공부를 할 생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성인이 거의 다된 중학시절에도 그는 시내에서 열리는 미술전람회나 학교내의 미술소조에도 다닌 일이 없다. 전북중학교에도 유화가인 미술교원이 있었고 미술소조도 운영되여 소묘도 하고 수채화도 그리는것을 알고있었지만 거기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박병수라는 대부호가 자기 돈으로 화구를 사서 미술애호가들을 받아들여 미술연구소를 운영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병수는 드문히 거리나 학교마당에서 풍경을 그리였다. 정창모는 호기심에 이끌려 다 리해되지는 않았지만 화면과 대상을 번갈아보면서 기법도 생각하고 그림으로 표현되는 효과가 어떤것인가 하는것을 느껴보려고 하였다. 아마도 천성적으로 가지고있는 미술가로서의 재능이 고개를 쳐들었던것 같다.

그리고 미술연구소에 들어가 공부를 해서 미술가가 될수 없을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였으나 이내 아쉬움을 안고 돌아서고말았다.

그때 정창모는 형의 영향을 받아 사회정치과목에 열중하고있었던것이다.

그의 형은 미제와 리승만역도의 반인민적정치를 반대하여 지하투쟁을 하고있었는데 정창모도 그의 영향을 받아 계급적으로 각성하였으며 남조선민주학생동맹에 가입하여 학생운동에 참가하였다.

차츰 철이 들면서 그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자면 미술이 아니라 무엇인가 실질적으로 사회에 이바지할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순수 미술만을 갈망하던 그는 참다운 사회가 없이는 배움도 없으며 설사 미술을 배웠다 하여도 진정한 삶이 없다는것을 깨닫게 되였다.

그의 세계관형성에서 전환적계기로 된것은 참다운 민주주의가 보장되고있는 북조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반부의 현실을 알게 되였을 때부터였다.

정창모는 공화국북반부의 출판물들을 통하여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의 령도아래 인민정권이 세워지고 사람들 누구나 참다운 생활을 누려가고있는 공화국을 동경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대에 의해 전주가 해방되자 제일먼저 인민군대에 찾아가 자기에게도 일을 맡겨달라고 제기하였다.

그는 전북중학교 민청부위원장으로 사업하면서 혁명적으로 더욱 각성되였으며 그후에는 빨찌산부대에 입대하였다.

어려서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건만 일제식민지통치시기 그것은 가슴속에 묻어만 두어야 했던 꿈이였다.

전쟁의 준엄했던 그날엔 붓이 아니라 총을 먼저 잡았던 화가에게는 아직도 화판이 너무도 멀리에 있었다.

이 땅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왔으니 그것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된것이다.

시련은 사람들을 검증한다.

승리에 대한 신념이 부족한자들은 남으로 갔고 오로지 김일성장군님 한분만을 믿고 따른 사람들은 북으로 향했다.

정창모도 추위에 새빨갛게 언 맨주먹을 움켜쥐고 북행길에 올랐다.

누가 그를 강요한것이 아니였다.

하지만 그는 김일성장군님을 따르는 길이 이 민족이 살고 조국이 하나가 되는 참된 애국의 길임을 알고 스스로 후퇴하는 인민군대를 따라 멀리 강계까지 걸어갔다.

1950년 11월 정창모는 강계에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영웅적조선인민군에 입대하였다. 이렇게 그는 병사가 되였다.

그는 자기의 키만 한 장총을 메고 때로는 전호를 파고 피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영영 꿈을 버렸다고는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화가는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것을 화폭에 옮기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심장은 사랑으로 불타야 한다고. …

그렇다.

병사시절은 그에게 있어서 미술가가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답고 뜨거운 사랑의 심장을 주었으며 강의한 의지와 담력을 키워주었다.

비록 아직은 화폭에 담아야 할 수려한 산과 들이 불에 타고 강물우에선 폭탄이 튀며 물기둥이 솟아올랐지만 화가의 심장에선 미래에 그리고 또 그려갈 아름다운 조국이 그려지고있었다.

그는 붓이 아니라 총대로 사랑하는 조국의 대지우에 자유와 평화라는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화폭을 그려가고있는 사람들이 바로 병사라고 생각하였다.

우연이라 할가, 뜻밖에도 포화속에서 그가 진짜 붓을 들 행운의 기회가 찾아왔던것이다.

치렬한 전투를 일단락 결속한 련합부대가 전선에서 후방으로 배비변경되여 어느 한 산골짜기에 있을 때였다.

그때 부대에서는 《정각 5시 30분》이라는 연극을 만들어 병사들앞에서 공연하게 되였는데 이 연극의 창조과정에 한가지 큰 골치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부대안에 극작가와 배우 그리고 작곡가는 있었으나 유독 무대미술가만은 없었던것이다.

한동안 궁리를 짜내던 지휘관들은 무작정 그를 불렀다.

지휘관들은 별로 키가 크지 않고 단단하게 생긴 병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동문 부대직관원이지?》

《그렇습니다.》

《그럼, 그림을 그릴줄 알겠군. 이제부터 무대미술을 맡아야겠소. 명령이요.》

《알았습니다.》

그는 군소리없이 대답은 하였지만 정말 자신도 놀라웠다.

총포탄이 우박치는 전장에서 그림을 그릴줄이야…

하지만 화가의 심장은 벌써 흥분하였다.

지휘관들이 마련해준 자그마한 창작실안에 들어선 순간 그는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하였다.

총을 메고 걸어온 조국강산의 수려한 산발들과 강들, 협곡들, 벌판들…

그 모든것이 눈앞에서 하나의 거대한 화폭으로 안겨왔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붓을 들어 무대배경을 그려나갔다.

승리한 조국땅에 펼쳐질 그 아름다운 조국산천을.

그가 그려나가는 험한 산발과 깊은 계곡, 수려한 수림과 언덕, 실실이 늘어진 나무잎새들과 맑은 개울물에 놓인 징검돌들, 가리마같이 난 오솔길들은 준엄한 현실과는 너무도 대조되는것이였다.

무대배경그림은 관람자들의 대절찬을 받았으며 이로 하여 그는 부대안에서 당당한 미술가로 인정받게 되였고 이때부터 정창모는 미술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였다.

벽보발간과 속보를 맡아하던 정창모는 군무자미술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하게 되였다.

그는 며칠간을 고심하다가 자기가 애독하던 조기천의 서사시 《백두산》을 련상하였다.

 

산비탈 바위우에

청년 한분 버쩍 올라선다

후리후리한 키꼴에

흰 두루마기자락이

대공으로 솟아오르려는

거센 나래같이 퍼덕이는데

온몸과 팔과 다리-

모두다 약진의 서슬에 불붙고

서리발 칼날의 시선으로

싸움터를 단번에 쭉- 가르며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부르짖었다

바른손 싸창을

바위아래로 번쩍이자

마지막 발악 쓰던 원쑤 두놈이

미끄러지듯 허적여 뒤여진다-

《한놈도 남기지 말라!》

그이는 재쳐 부르짖었다

이는 이름만 들어도

삼도 왜적이 치떠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

이는 장백을 쥐락펴락하는,

큰 산을 주름잡아 한손에 넣고

동서에 번쩍!

천리허의 대령도 단숨에 넘나드니

축지법을 쓴다고-

북천에 새별 하나이 솟아

압록의 줄기줄기에

그 유독한 채광을 베푸노니

이 나라에 천명의 장수 났다고

백두산두메에서 우러러 떠드는

조선의 빨찌산 김대장!

 

그는 여기서 창작적령감을 받았던것이다.

제목은 홍산골전투였다.

큰 바위우에 서시여 싸창을 높이 드시고 전투를 지휘하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을 화면의 중심에 크게 모시고 유격대원들이 돌격해내려가는 용감한 형상과 적들이 무리로 녹아나는 장면을 그리자, 이것이 그의 결심이였다.

작품을 그리느라고 그는 며칠밤을 새웠다.

위대한 수령님의 영상은 신문, 잡지를 참고로 하고 대원들의 모습은 화보를 보고 골라서 배치하는 방법으로 그렸다.

부대내에는 이러한 전투장면을 찍은 사진이 얼마든지 있었던것이다.

이 작품은 려단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이름난 미술가도 아닌 그가 그런 대담한 창작을 한 그 밑바탕에는 백두산의 호랑이 김대장의 모습을 그리지 않고서는 못 견딜 충동과 흥분이 차고넘쳤기때문이였다.

청소한 공화국이 미제를 쳐부시고 승리한것은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령도가 있었기때문이라는것을 절감한 병사들의 심정을 누구보다 깊이 체험하고있었기에 수령님의 령도업적을 형상하고싶은것은 그의 막을수 없는 신념이고 열망이였다.

그 시기 정창모의 기량이 물론 높다고는 볼수 없었다.

그러나 수령님에 대한 그의 흠모심과 열정이 하도 높았기에 그림에서 홍산골의 설경과 전투환경은 비교적 잘 형상되였었다.

그림속의 풍경은 병사생활기간 많이 보고 느낀 우리 나라 동해안의 험산준령을 그려넣었다.

정창모가 제대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을 때 심사숙고한 끝에 미술공부를 하겠다고 선택하게 된것은 아마도 군사복무기간과 많이 련결되여있다고 볼수 있다.

이렇게 놓고보면 그의 미술가로서의 생활은 포연이 자욱하였던 군사복무시절에 시작된것이 아닌지.

그러나 디딤돌이 마련되였다고 하여 저절로 미술가로 되는것은 아니였다.

전쟁이 끝난 후 1957년 9월 그는 미술대학 전문부 조선화과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때부터 그의 미술전문공부가 시작되였다.

그러나 대학의 강의실은 그가 무대배경이나 그리던 부대의 자그마한 화실이 아니였고 대학의 교원들은 그의 속사만 보아도 입을 벌리던 단순한 애숭이들이 아니라 엄격하고 요구성높은 사람들이였다.

다른 학생들의 실력에 비해볼 때 그의 수준은 매우 낮은 상태였다.

희망과 포부는 컸지만 날이 갈수록 자기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고 화가가 되려던 어린 날의 꿈은 저 멀리 아득한 무지개로만 보이였다.

미술은 예술이고 기교였으며 그보다도 학문이였다.

천성 하나로는 이 거대하고 기묘한 학문을 달통할수 없는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술대학에 입학하여 강의를 받으면서도 미술이라는 거물앞에서 주춤거리고있었다.

난처한것은 그의 실기수준이 너무도 낮은것이였다.

그때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그는 언제나 뒤떨어졌다는 자책감과 따라잡아야 하겠다는 분발심을 습관적으로 가지게 되였다.

실제적으로 그는 한번도 1등을 해보지 못한 달리기선수처럼 학급동무들의 맨 뒤꼬리에서 그저 남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가까스로 뛰는 학생이였다.

고민이 어찌나 컸던지 그가 한번은 미술을 포기하고 전공을 바꿀 생각까지 한적이 있었다.

이러한 그를 만난 소묘지도교원인 담임선생 김장환이 그에게 훌륭한 조언을 주었다.

담임선생은 그에게 미술의 기초공부를 다른 동무들보다 10년이 늦어서 시작했으니 남들보다 10배의 노력을 해야 따라잡을수 있다, 앞선 동무들이라 해서 전망이 확고하다고 말할수 없다, 지금 출발선에 서있는것이나 같은데 벌써 신심이 없으면 영영 뒤떨어지고만다, 1~2년이 아니라 일생을 두고 꾸준히 따라앞설 각오를 가지고 분발하고 또 분발하면 먼 후날 꼭 결실을 보게 된다, 미술이라는 학문을 배워 명예를 빛내일 생각에 앞서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주고싶어 하는 어버이수령님의 은덕에 보답할 생각을 먼저 가져야 한다고 깨우쳐주었다.

김장환은 대학기간 그의 굳어진 손목을 풀어주기 위하여 무진 애를 썼고 조선화를 그리려면 필력을 가져야 한다고 하면서 권투를 할것을 권고하였다. 미술과 권투는 아무리 촌수를 따져보아도 공통점을 찾을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의 권고이고 조선화화가에게 있어서 권투의 순간속도, 강타의 힘이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는 말할수 없으며 또 화가 리석호도 유술 5단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던지라 정창모는 열심히 권투를 배웠는데 한때 대학선수로 경기에 나가기까지 하였다.

제대군인이고 남쪽에 고향을 둔 무의무탁생인 그에 대하여 학급동무들은 무던히 아껴주고 실기실력을 높이도록 의견도 주면서 실망하지 않도록 마음써주었다.

1960년대에 조선화에서 이름을 날린 리창은 정창모와 한학급이였는데 뒤떨어진 그의 소묘실력을 높여주기 위하여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정창모는 리창의 소묘를 참고로 하여 자기의 실기실력을 높여나갔다. 정창모가 리창과 보다 가깝게 지내게 된것은 그의 아버지 리용악이 쓴 시집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리용악은 일제통치시기부터 진보적인 문예활동을 한 애국시인으로서 해방후 서울에서 혁명적인 문학활동을 벌리던중 1949년 경찰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하다가 조국해방전쟁시기 인민군대의 서울해방과 함께 출옥하였다. 그후 공화국의 품에 안긴 시인은 조국과 민족앞에 훌륭한 시들을 창작하여 내놓았다.

정창모는 리용악의 《평남관개시초》를 애독하였으며 시인의 창작에서 펼쳐지는 인민들의 창조적생활에 대한 기쁨과 랑만의 세계, 조국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시적화폭을 자기의 미술작품에 담으려 하였다.

그의 학창시절은 참으로 감동적인 사연들로 엮어진 감격스러운 보람찬 나날들이였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학습과 생활에 필요한 침구류와 의복류 그리고 교과서를 비롯한 온갖 학용품과 미술기자재들은 물론 장학금까지 배려해주었다.

공화국은 그에게 진정한 미술가가 지녀야 할 모든것을 가르쳐주었고 사랑과 우정, 동지를 준 그의 집이였다.

참으로 그의 미술수업의 나날은 민족의 어버이의 뜨거운 사랑과 선생님과 동지들의 헌신적인 노력속에 흘러갔다.

이 나날에 그는 차호녀와 결혼하였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미술가가 안해를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다고 한다.

정창모는 외형미보다도 인간적미를 더 중시하였다.

결혼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 리상적인 결합이 이루어져 창작에 도움이 되자면 어떤 녀성이 필요한지 그는 깊이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동서고금의 적지 않은 미술가들이 미인과 련관되여 명작들을 창작하였다는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렘브란뜨와 《사스키야를 무릎에 앉힌 자화상》, 크람스꼬이와 《미지의 녀인》, 고야와 《마하부인》 등이 바로 그러하다.

그러나 정창모의 경우는 이와 달랐다.

화가의 녀성관이라 할지, 결혼관이라 하겠는지 그는 녀성을 택하는데서 외적미만을 중시하지 않았다.

정창모는 자신이 일점의 혈육도 없는 형편에서 자기를 일생 끝까지 믿고 리해해줄수 있는 녀성이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솔직히 화가자신도 키가 작고 녀성을 끄는 매력이란 별로 없는, 그래서 그자신의 말을 빌면 《못생긴 사람》이였다.

그래서인지 그는 자기는 특별히 고운 처녀를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착한 마음에 복이 온다고 했던가.

그의 녀성관이 아마도 화가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1963년 6월 친구의 소개로 차호녀라는 처녀를 알게 되였다.

처녀는 건설전문학교를 나온 원림기사로서 신문에도 소개된 모범일군이였다.

만나보니 소박한것이 마음에 들었고 이야기해보니 속이 깊고 진실한것이 좋았다.

더 재여볼것도 없고 알아볼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만난지 한주일만에 복숭아 2kg와 술 1병을 사가지고 가서 저녁식사를 같이하는것으로 약혼식을 하고 한달후에 결혼식을 하였다.

그때부터 차호녀는 그와 동고동락을 하면서 서로 충실한 혁명동지로 사랑하였고 화가인 그가 창작에 전심하도록 가정을 꾸려나갔다.

결혼초기 부족한것이 많을 때나 유족하게 살 때나, 작은 살림집에서나 네칸짜리 고급살림집에서 살 때나 그들은 늘쌍 마음편하고 검박하게 살았다.

그들은 서로 리해하였고 자기 할 일에 몰두하였으며 가정에서 다툼질도 없었다.

안해는 30년나마 한개 단위를 책임지고 사업하면서 남편을 잘 공대하고 아껴주었으며 세 아이를 잘 키워 내세웠다.

화가가 평생 창작에서 성과를 거둘수 있은 밑바탕에는 이렇게 진실하고 변함없는 사랑으로 그를 위해준 안해의 숨은 노력도 깔려있었다.

화가는 사랑하는 안해와 함께 고마운 공화국의 품속에서 살면서 먹을 걱정, 입을 걱정, 집걱정을 모르고 지내온 행운아였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행복이였고 조국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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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1)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2)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3)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4) 영화계의 첫 영웅칭호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5) 수령형상영화의 첫 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1) 새 삶의 품으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2) 행복은 꽃피여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3)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1) 이루어진 소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2) 보람찬 창조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3) 영생하는 인민의 배우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1) 미술가로부터 촬영가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2) 어버이의 보증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3)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4) 안해의 추억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1) 《임자없는 나루배》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2) 《내 고향》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3) 인생의 참다운 포구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2) 《내 고향》을 찾은 류민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1) 북녘땅에서 다시 찾은 어린 날의 꿈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2) 보람찬 미술창작활동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3)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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