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을 찾은 류민
그렇게도 고대하던 조국해방의 날이 왔다.
김승구는 친구들과 함께 남조선에서 해방만세를 웨치며 문학창작을 위한 열기로 가슴을 끓이였다.
그러나 차츰 시일이 흐르면서 그처럼 끓어번지던 창작적열정이 자꾸만 식어가는것이였다.
그는 캄캄한 창밖에서 시끄럽게 울어대는 귀뚜라미소리를 들으면서 이런 물음을 허공에 던져보군 하였다.
(이것이 정말 해방이란 말인가?)
해방만세의 웨침소리가 즘즘해진 남반부의 하늘가에 성조기가 거만하게 펄럭이기 시작한지 몇달이 지나갔다.
간사한 왜놈기생들의 샤미센소리가 흘러나오던 료리점은 어느새 카페로 변하고 술취한 미군병사들의 어지러운 휘파람소리가 흘러나왔다.
문제는 바로 그 해방군의 탈을 쓴 미군이 인민들의 창의에 의해 세워졌던 인민위원회를 강제로 해산하고 자유와 민주주의싹을 군화발로 사정없이 짓밟아버리고있는것이였다.
미군의 발굽밑에서 신음하는 이 땅이 정말 내 조국, 내 고향이란 말인가?
살길을 찾아 헤매이던 김승구에게 해방이 가져다준것은 의혹과 불안뿐이였다.
이 땅 그 어디에도 자기가 바라는 고향은 없었다.
그럼 난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러던 어느날 김승구는
인생의 참다운 길을 찾아 그처럼 모대기던 그는 1946년 7월 남반부에서 창작활동을 하고있던 윤기정, 강호 등과 함께 공화국북반부로 오게 되였다.
김승구일행이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으신
그때로서는
하지만
김승구는 너무도 놀랍고 감격하여 어쩔줄 몰라하였다. 거듭되는 은정앞에서 그는 그만 눈물을 와락 쏟고야말았다.
(아, 이곳이 바로 내가 찾고찾던 고향이구나!)
그는 새롭게 찾은 진정한 고향, 조국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아직은 욕망뿐이였다.
작가의 그 소원을 남먼저 헤아려주신분은
1947년 4월 어느날이였다.
이날
그리 넓지 않은 방안, 그가운데 놓여있는 흔한 나무책상과 걸상… 다른 점이 있다면 서재벽에 걸려있는 한폭의 풍경화뿐이였다.
일제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찾아주신 희세의
그 심정은 다른 작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작가들은
그러시고는 작가들에게 저가락을 쥐여주시고 국수는 양념맛이 절반이니 양념을 골고루 치라고 이르시며 양념그릇과 고기접시들도 밀어놓아주시였다.
하지만 작가들은 감히 저가락을 들지 못하고 망설이였다.
왜놈들에게 빼앗겼던 조국을 찾아주신
그들의 심정을 헤아리신
그바람에 좌중에는 한식솔사이에 오고가는 친근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날
김승구의 일생에서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영광의 그날은 우리 나라 문학예술의 귀중한 리정표가 세워진 뜻깊은 하루였다.
이날이 있어 장편서사시
동틀무렵 집으로 돌아온 김승구는 시간가는줄 모르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 작가들에게 훌륭한 집을 안겨주시고
해방이 되였지만 아직 인민들의 생활형편이 어렵다고 하시며 소박한 생활을 하시는 우리
바로 그런분이시기에
김승구는 두어깨를 크게 솟구며 심호흡을 하였다.
그래, 쓰자. 김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조국에 대하여, 조국을 찾기 위해 피흘려 싸운
그렇게 하는것이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을 치던 류민에 불과한 무맥한 작가였다.
그러나 이 순간에는 자기가 마치도 새
드디여 김승구는 창작의 붓을 들었다.
그때 그가 잡은 그 붓은 지난날 《류민》을 쓸 때의 항거와 현실부정의 붓이 아니였다. 잃었던 고향을 찾아주신
얼마후 원고지우에는 《류민》의 주인공 락현이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소극적반항아가 아니라 수난과 곡절앞에 굴하지 않고 맞서나가며
부두로동자 락현으로부터
고향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원고지우에서 그의 붓은 낮이나 밤이나 쉴새 없이 달렸다.
뇌빈혈을 일으키며 힘겹게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였던 지난날과는 다른 창작적흥분이 작가의 심장을 쾅쾅 두드렸다.
그는 마침내 영화문학 《고향》을 탈고하였다.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잘 그릴데 대한 문제, 왜놈들을 머저리로 그리지 말고 그 침략적본성이 잘 나타나게 그릴데 대한 문제, 영화의 제목을 새 맛이 나고 주제사상에 맞게 달데 대한 문제…
내 고향, 내 고향!
작가는
진정
행복에 넘쳐있는 그에게 또다시 행운이 차례졌다.
《내 고향》영화제작이 한창이던 어느날 영화촬영소에 몸소 나오신
배우들이 무장투쟁경험이 없다는것을 헤아려보신 어머님께서는 의상과 소도구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지도를 주시였다.
이후에도
이처럼
예술영화 《내 고향》은 단순히 한편의 영화가 아니였다.
그것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말살정책으로 하여 기초가 없었던 우리 영화예술이 새롭게 태여났음을 알리는 선언이였고 새 조국건설의 장엄한 진군길에서 우리 인민이 가지게 된 귀중한 문화적재부였다.
또한 그것은 작가의 세계관과 창작방법에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뜻깊은 작품이였다.
예술영화 《내 고향》을 완성한 후 영화문학창작위원회(오늘의 영화문학창작사의 전신)의
종군작가로서 서울, 수원, 대전을 거쳐 락동강까지 나가 취재활동을 벌리고 글을 썼으며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는 고향을 뒤에 두고 다시 2천리 간고한 행군길도 걸었다.
그때 박아지, 엄흥섭, 박춘명, 김련실, 김선영 등 고향을 남반부에 두었거나 전쟁전까지 남녘땅에서 살며 예술활동을 하던 수많은 작가, 예술인들이 공화국의 품을 찾아왔다.
간고하였던 전쟁의 나날은 작가로 하여금 오직
전후 작가는 국립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예술국장 등의 직무를 력임하였고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열리는 작가대회, 청년학생축전들에도 참가하였다.
작가 김승구에 대하여 생각할 때 사람들의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것은 그가 지닌 고결한 작가적품성이다.
김승구는 일생 량심과 진실을 생명처럼 간직한 작가였다.
생활에서 위선과 처세술을 경계하고 오직 진심을 중시해온 김승구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어린애처럼 순진했던 그는 《내 고향》을 창작하던 젊은 시절부터 로년기에 이르기까지 늘 진실하고 성실했다.
《심장은 거짓을 모른다. 손끝으로가 아니라 심장으로 쓰자. 심장이 달아오르고 무르익기 전에 의무감이나 명예욕에 떠밀려 붓을 들지 말자.》
이것은 그의 창작적신조였다.
현실을 대함에 있어서 그는 《수첩에 기록하기에만 서둘지 말고 그날의 생활과 견문을 깊은 사색을 통하여 가슴속에 간직하라. 건설장과 공장을 찾아가거든 신비한 현실과 기계에 눈을 팔지 말고 로동자들의 그 빛나는 눈동자를 주시하라. 그러면 심장에 안겨오는 그 무엇이 있을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을 발견하기 전에는 붓을 들지 않았다.
그러한 작가였기에 영화문학 《돈화의 수림속에서》와 《뜨거운 심정》을 창작하면서 초고를 쓰는데는 그리 오랜 시일을 소비하지 않았으나 붓을 들기까지는 2년 가까운 세월을 모대기였다고 한다.
김승구는 남들이 평범하게 보는 현상들, 미담으로 그칠수 있는 이야기들속에서 시대의 본질과 참된
그는 현실을 극적으로 파악하고 반영하는 극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것은 극에 대한 리해와 관점을 바로가지는것이라고 하면서 작중인물의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이 자기의것이 될 때까지 인물들의 세계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는 낡은 사회에서는 볼수도 상상할수도 없는 사회주의제도의 고마움, 천리마시대
원쑤들이 끼친 불행과 고통을 가시기 위하여 남의 아픔을 자기 아픔으로 여기고 하나같이 떨쳐나선 사람들의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격조높이 노래한
예술영화 《뜨거운 심정》, 어제날 모진 학대와 빈궁속에 고통스럽게 살던 보통강사람들이 사회주의제도의 품속에서 운명의 전환을 맞이한 력사적사변을
서사시적화폭으로 보여준 예술영화 《보통강반에 깃든 이야기》, 사회주의조국의 은혜로움을 소박한 생활적형상으로 설득력있게 보여준 예술영화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
공화국의 품속에서 성장한 농촌일군의 형상을 통하여 우리 시대
우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계렬에서 성공작들로서 조국에 대한 례찬의 감정으로 충만되여있는 김승구의 문학세계의 일단을 엿볼수 있게 한다.
원래 아름다운
전후 의용군출신의 문학청년을 집에 데려다가 친혈육처럼 돌봐주며 결혼식까지 치르어주고 자기 집의 방 한칸을 내주어 살림을 시켰다는 이야기며 함께 일하는 동무의 아들 병치료를 위해 발이 닳도록 걸음했다는 일화들은 그의 고결한
유년시절을 거쳐 청년시절에 그는
총칼과 황금으로
이러한 그였기에 공화국북반부에 와서 그가 만난 사람들은 더없이 고결한 정신미를 지닌 선남선녀들이였으며 이 사회는
실로 이목구비에 사무치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선과 악이 대조를 이루는 두 사회, 두 제도에서 살아본 김승구는 사회적변혁의 의의,
그의 붓에 언제나 힘을 실어준것은
김승구는 창작의 전기간 어머니조국과 아름다운
참으로 이것은 어제날 울분으로 피를 끓이던 류민이 그토록 찾고싶었던, 그래서 목놓아 터치고싶었던 내 고향에 대한 노래, 참된 조국에 대한 송가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작가 김승구는 왕성한 창작적열정을 지니고 《빨찌산처녀》, 《춘향전》, 《새날이 보인다》,《우리에게는 조국이 있다》 등 영화문학을 발표하였다.
그중 《돈화의 수림속에서》, 《뜨거운 심정》 등은 우수한 영화로 완성되여
작품의 사상은 작가의 세계관의 반영이며 작품의 지성도 역시 작가의 지성세계의 반영이다. 작가는 작품에서 새로운 철학의 세계, 미의 세계를 개척해나가야 하며 풍만한 생활형상을 통하여 인식교양적내용을 깊이있게 주어야 한다.
김승구는 현실을 반영한 다양한 주제의 작품들을 창조하면서 자기 작품의 주인공의 형상에 이러한 내용을 체현시키기 위하여 애써 노력하였다.
정의롭고 대바른 《내 고향》의 관필이, 텁텁하면서도 웅심깊고 진실한 《뜨거운 심정》의 리홍기, 락천적이면서도 신중하고 과감한
《적후청년들》의 박영찬, 진실하고 량심적이며 고정한 《조국으로 돌아온 관오의 일가》의 관오, 《그는 우리와 함께 있다》의 만수 등 직업과 년령, 사회적처지는 서로 달라도 그들은 한결같이 시대의 전형들로서 깊이도 있고 품위도 있는
작가의
그는 고령이 되도록 일기쓰기를 멈추지 않았으며 시, 소설, 가극 등 문학예술과의 활발한 접촉, 다양한 생활과의 부단한 교감을 순간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기에 김승구는 《나는 년령기와 더불어 식어가는 감수성과 투쟁한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는체 하며 눈과 마음이 건방져지고 어린애와 같은 티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생활을 느끼고 그것을 하나하나 가슴깊이 간직하지 못하는것은 글쓰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무섭고 슬픈 일이다.》라고 하였다.
1978년 어느 여름날에 있은 일이다.
그날 김승구는 사람좋은 얼굴에 흡족한 웃음을 담은채 신이 나서 창작실창가에 놓인 화분을 가꾸고있었다.
좀전에 《춘향전》각색작업을 끝낸것이다.
화분손질이 거의 끝나갈무렵 날씨가 더워서 활짝 열어놓았던 출입문가에 누군가 불쑥 나타났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관필이가 왔습니다.》
인민배우 유원준이였다.
우리 나라의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주인공 관필의 역을 담당했던 그는 김승구를 찾아올 때마다 늘 관필이가 왔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건네군 했었다.
《내 고향》을 만들 때부터 맺어진 두 사람의 우정은 30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어도 사람들의 부러움을 자아내고있었다.
김승구는 그를 보자 무척 반가워했다.
《어서 오우.》
유원준에게 자리를 권한 김승구는 어떻게 왔는가고 물었다.
《〈춘향전〉을 탈고하셨다면서요.》 하고 량볼의 보조개가 움푹 패이도록 빙그레 웃고난 유원준은 예술영화 《춘향전》의 연출을 자기가 맡았다고 이야기했다.
김승구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평시에 과묵한 그인지라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눈가에는 한번 잘해보라는 고무가 어려있었다.
그날 유원준은 온종일 작가와 함께 있으면서 각색된 《춘향전》원고를 보았고 어떤 장면은 제 흥에 겨워 크게 소리내여 읽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악질관료인 변학도의 흉내를 내면서 너스레를 피웠다.
그러자 김승구는 능청스러운 유원준의 낚시에 걸린줄도 모르고 흥이 나서 입을 열었다.
《이제 유동무가 도령이역을 할수는 없는거구, 연출도 하면서 변학도역쯤은 할수 있지 않겠소?》
유원준이 무릎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그것 참, 사실은 저두 그 생각을 하고있었는데 선생님처럼 강력한 지지자가 생겼으니 인젠 됐습니다.》
그리하여 유원준은 자기가 연출한 영화와 함께 만사람의 증오를 자아낸 포악한 변학도의 모습을 화면에 남겨놓을수 있었다.
김승구의 붓은 80고개에 이르도록 결코 무디지 않았으며 원고지우를 줄기차게 달리였다.
그의 성공작들에는 혁명전통주제와 조국해방전쟁주제, 사회주의현실주제, 조국통일주제, 력사물주제 등 모든 부문, 모든 령역들을 다 포괄하는 각이한 작품들이 들어있다.
그는 체험과 취재, 창작의 모든 계기와 공정들을 대하면서 시대의 높이에서 생활을 투시하고 시대와의 련관속에서 생활의 본질을 해부하는 극작가로서의 면모를 뚜렷이 보여주었다.
각이한 사회제도, 각이한 시대를 체험하면서 그는 생활의 모든것을 시대적높이에서 감득하고 해당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면서 작가적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모든것을 바쳤다.
로년기에 들어와 김승구는 력사물창작에 본격적으로 달라붙어 영화문학 《춘향전》(백인준과 합작), 《달매와 범다리》, 《리순신장군》을 썼다.
고전소설 《춘향전》을 영화문학으로 각색할 때인 1978년 5월 어느날에 있은 일이다.
원작을 읽어보고 또 읽어보는 그의 머리는 무거웠다.
《춘향전》에 반영된 해당 시대의 력사적환경에 맞게 생활을 풍부하게 그리자면 많은 탐구가 있어야 했던것이다.
한동안 그린듯이 앉아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랴부랴 창작실을 나섰다.
동료들은 여느때는 동작이 굼뜨던 그가 왜 그러는가 하여 의아해하였다.
그러거나말거나 한달음에 뻐스정류소에 뛰여간 그는 때마침 멎어선 무궤도전차에 올라탔다.
그가 숨을 헐떡거리며 조선미술박물관에 들어섰을 때는 관람시간이 거의 끝나갈무렵이였다.
17~18세기에 창작된 미술작품들이 전시된 방으로 총총히 들어간 그는 그림들을 보면서 당대 시대상과 생활풍습, 의상들을 주의깊게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관람시간이 퍼그나 지난줄도 모르고있었다.
아까부터 그의 진취적인 태도에 감동되여 한참동안 기다려주던 관리원이 참다못해 《손님, 문을 닫아야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번 탐구의 바다속에 뛰여들면 옆사람들이 무안할 정도로
관리원은 그만 어이가 없었다.
《원 참, 별사람 다 보겠군.》
하긴 그 관리원이 시간가는줄 모르고 정신없이 옛날 미술작품을 들여다보고있는 손님이 해방전에 《춘향전》을 연극화하여 무대에 올리는데 기여하였고 전후에는 그 작품의 외국문번역에 참가하였으며 1950년대 후반기에는 《춘향전》을 연극과 영화로 실현한 작가라는것을 알리 만무했다.
만일 김승구가 예술영화 《내 고향》을 쓴 작가라는것만 알았더라면 관리원의 입에서 《별사람》이라는 말대신 존경의 말이 흘러나왔을것이다.
참다운 작가에 의하여 참다운 문학이 태여난다면 참다운 삶의 요람속에서만 참다운 작가가 태여난다는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