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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참다운 포구

 

이 땅에 전쟁의 포화가 휩쓸던 준엄한 그 나날에도 영화예술인들에 대한 어버이수령님의 사랑과 배려는 끊임없이 돌려졌다.

1950년 12월 어느날 문예봉을 비롯한 예술인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차를 타고 그이께서 계신 곳으로 가게 되였다.

차에서 내려 회의장에 들어서던 문예봉은 그만 《어마나?!》 하며 다급히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차를 타고 올 때에는 똑같이 솜동복차림이였는데 회의장에 들어서면서 보니 어느새 다들 준비해가지고 온 양복과 세타를 날래게 갈아입었던것이다.

녀배우중에 누런 솜동복을 입고있는 사람은 유독 자기 혼자뿐이였다. 고운 세타에 맵시있는 치마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다른 배우들과 뚜렷이 대조되는 차림새에서 문예봉은 덜퉁한 자신을 자책할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버이수령님께서 회의장에 들어서시였다.

순간 폭풍같은 만세소리가 터져올랐다.

오매에도 그리던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는 순간 격정에 사무친 문예봉은 만세를 높이 부르며 사람들의 사이를 헤집으며 정신없이 앞으로 나갔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가까이 오시게 되였을 때 유별나게 솜옷을 입고있던 자신을 발견한 문예봉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려고 하였다.

그런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를 알아보시고 걸음을 멈추시였다.

몸둘바를 몰라하는 문예봉을 보시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에게 손을 내미시며 그동안 앓지 않았는가고 다정하게 물어주시는것이였다.

《장군님, 안녕하십니까?》

문예봉은 인사를 올리며 저도 모르게 몇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그러다가 갑자기 망설이며 몸을 움츠렸다.

수령님의 눈길이 자기의 옷차림에 와닿았던것이다.

문예봉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싶은 심정이였다.

바로 그때 수령님의 우렁우렁한 음성이 머리우에서 울렸다.

《그렇게 입으니까 보기도 좋고 절도가 있어보입니다. 전시인데 옷을 잘 입으면 인민들이 욕합니다. 그렇게 입으니 아주 좋습니다.》

《?!》

문예봉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온몸을 휩싸고있던 죄스러움이 바람에 연기날리듯 순식간에 날아났다.

문예봉은 끝없는 감사의 마음으로 수령님을 우러렀다. 예봉이 자신도 부끄러워했던 옷차림새를 그토록 평가해주시는 수령님, 참으로 수령님은 한 녀배우의 마음속깊이까지 다 헤아려주시는 인민의 어버이이시였다.

문예봉은 그이를 삼가 우러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리였다.

그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전쟁승리를 앞당기는데 이바지하는 작품을 만들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대로 문예봉을 비롯한 창작가, 예술인들은 예술영화창조사업에 자신들의 정열을 다 바쳐 전쟁시기의 첫 예술영화인 《소년빨찌산》을 완성하였다.

그 공로로 하여 문예봉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제정한 공훈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전쟁이 한창인 영웅의 나라 조선에서 나온 예술영화 《소년빨찌산》은 체스꼬슬로벤스꼬(이전)에서 진행된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여받았으며 련일 초만원을 이루면서 상영되였다.

전쟁의 포성이 울리던 조국의 하늘가에 승리의 축포가 오르고 전후복구건설의 힘찬 노래소리가 울리던 1954년 문예봉은 예술영화 《빨찌산처녀》의 주인공역을 훌륭히 형상하여 인민들을 기쁘게 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7살이였다. 그는 연기를 진실하게 잘하여 1955년 새해를 경축하는 국가연회에서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처녀역을 정말 잘하였다고, 앞으로도 처녀역을 잘하라는 과분한 치하의 말씀과 함께 축배잔을 받았다.

복은 홀로 온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무색해지는 세월이였다.

1960년 어느 한 연회장에서 문예봉은 또다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고있을 때 수령님께서는 문예봉에게 축배잔을 부어주시며 《문예봉동무! 축배잔을 드시오.》라고 하시며 동무는 아직 젊었는데 왜 로인역을 하는가고 매우 섭섭해하시였다.

문예봉은 당황하여 고개를 푹 숙이였다. 아마도 얼마전에 방영된 예술영화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신듯 하였다. 그 영화에서 문예봉은 할머니로 분장하여 출연하였던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그 모습이 수령님께 이토록 심려를 끼쳐드릴줄이야.

처녀역을 하라고 하시던 수령님앞에 정말 면목이 없었다.

5년전에 하셨던 말씀을 잊지 않으시고 그이께서 자기의 역 하나하나를 그토록 세심히 살펴보고계시였다는 생각에 문예봉은 몸둘바를 몰랐다.

이때 한 일군이 수령님께 문예봉동무에게는 이젠 대학에 다니는 자식이 있다고 말씀올리였다.

그것은 사실이였다. 15살의 어린 나이에 라운규의 손에 이끌려 《임자없는 나루배》의 녀주인공으로 출연하였던 문예봉은 어느덧 중년부인에 어울리는 체모를 갖추기 시작하고있었다.

수령님께서는 섭섭한 표정을 지으시며 대학에 다니는 아들딸들이 있다고 해서 할머니역을 하는가 하시며 머리를 저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얼굴을 들지 못하고있는 그에게 동무에게는 지금이 한창때인데 벌써부터 로인역을 하기 시작하면 진짜 늙어버리고만다고 타이르듯 말씀하시였다.

문예봉은 머리를 번쩍 들었다. 영화배우도 사람인것만큼 나이가 들면 늙기마련이고 따라서 로인역을 맡는것은 응당한것이다.

하지만 수령님께서는 녀배우를 그토록 아끼시는 마음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한 녀배우의 청춘을 두고 그렇듯 아쉬워하시는것이 아닌가.

배우로서의 20대 청춘기를 수난의 그 세월에 다 흘러보내고 30고개에 수령님의 품에 안긴 문예봉이였다.

그의 진정한 예술활동은 바로 수령님의 품에 안겨서야 비로소 시작된셈이니 문예봉의 예술창조도 청춘기라고 보아야 할것이였다.

그러니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청춘시절, 예술창조의 청춘시절은 바로 지금이라고 수령님께서 깨우쳐주신것이다.

문예봉의 심장은 격동의 불꽃으로 튀여오르고 얼굴은 흥분으로 하여 붉게 상기되였다. 그럴수록 자신을 소중히 여겨주시고 앞날까지 축복하여주시는 수령님의 사랑앞에 가슴이 뜨거워지는것을 금할수 없었다.

(내 언제나 청춘으로 수령님께 기쁨을 드리리라.)

문예봉은 전후복구건설시기와 천리마운동이 벌어지던 격동적인 시기에 조국과 숨결을 같이하며 영화창조사업에 자기의 재능과 열정을 다 바치였다.

하여 그는 이 시기에 《다시 찾은 이름》, 《성장의 길에서》, 《금강산처녀》를 비롯한 많은 예술영화들에 출연하여 조선영화사의 한페지를 수놓을수 있었다.

그 행복의 나날속에 그는 1982년 인민배우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하루의 일과대로 《로동신문》을 펼쳐들던 문예봉은 《무대를 잃은 〈아리랑〉의 녀주인공》이라는 기사의 제목을 보게 되였다.

《아리랑》의 녀주인공이라면 해방전 영화계의 혜성으로 떠받들리우던 신일선(본명은 신홍련)이였다. 그가 대체 어떻게 되였다는건가.

문예봉은 서둘러 기사에 눈길을 박았다.

병약한 로파의 사진과 함께 기사에는 가게방을 운영하던 신일선이 병석에 누워 해외에서 이붓자식이 부쳐주는 돈으로 생명을 겨우 유지해나간다는 기막힌 사실이 씌여져있었다.

조선의 영화재사로 높이 떠받들리우던 라운규와 함께 민족영화의 대표작인 《아리랑》에 출연하여 만사람의 각광을 받던 신일선, 미모의 명배우로 명성을 떨치던 그가 생활의 막바지에서 죽을 날만 기다린다니…

《… 신홍련양의 연기는 처녀출연으로는 놀랄만 한 성공이라 하겠으며 그의 용모나 기예는 확실히 조선녀우로서는 누구보다도 영화배우적소질을 가장 풍부하게 가진 사람이라 하겠다. …

끝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여 성공한 여러분과 더욱 장래의 기대가 적지 않은 신홍련(신일선)양의 자중(自重)을 바란다.》

이것은 1926년 10월 7일 《동아일보》에 실린 예술영화 《아리랑》이 거둔 예술적성과에 대한 관평의 일부분이였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였다.

문예봉은 밤새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신일선은 그렇게도 넘고싶던 아리랑고개를 넘지 못하였다. 참다운 인생의 포구를 찾지 못한 신일선, 그는 여전히 주인없는 나루배에 실려 한많은 세상에 대한 가슴저미는 저주와 통한이 서리고서린 어둠짙은 망망대해에서 정처없이 떠돌고있는것이 아닌가.

그날 문예봉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따뜻한 품속에 안긴 자기의 행복한 생활에 대하여 새삼스럽게 돌이켜보았다.

아담한 새 집을 받던 때의 일, 영화촬영소에 나오신 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뵙고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서 옥단이의 역을 수행하던 시절, 어느해인가 국가연회에 참가하였을 때 수령님께서 동무는 아직 젊었는데 왜 로인역을 하는가고, 동무에게 로인역은 맞지 않는다고 하시며 청춘의 활력을 부어주시던 그 나날…

예술영화 《춘향전》을 촬영할 때는 또 어떠했던가.

그때 문예봉은 60고개를 넘긴 자기가 그 영화창조에 참가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물론 그가 우리 나라에서 첫 유성영화 《춘향전》의 주인공역을 한것은 사실이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득한 옛적 일이다. 누구도 그 일을 생각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나 예술영화 《춘향전》의 완성을 위해 수십차례의 말씀을 주시고 배우선발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관심을 돌려주신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문예봉에게 리도령의 어머니역을 형상하도록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그리하여 문예봉은 력사주의적원칙과 현대성의 원칙이 잘 결합된 력사물영화로 널리 알려진 예술영화 《춘향전》창조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우리 나라 영화사에 또 한페지를 기록할수 있게 되였다.

주체82(1993)년 2월 12일은 문예봉의 인생에서 최절정으로 되였던 뜻깊은 날이였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동안 당을 받들어 일을 잘해온 문학예술부문의 로장들과 함께 문예봉을 친히 오찬회에 불러주시였다.

《나는 동무들과 협의회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정적분위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식사나 한끼 같이하자고 불렀습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모두를 나의 오랜 친구들이라고 부르시면서 한명한명씩 이름을 찍어 해방직후부터 5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나날들을 감회깊이 추억해주시였다.

문예봉은 자리를 같이한 동지들을 둘러보았다. 영생불멸의 혁명송가 김일성장군의 노래》와 《애국가》를 작곡한 작곡가 김원균을 비롯하여 영화혁명, 가극혁명, 음악혁명의 선구자들이였던 작가 백인준, 조령출, 신진순, 배우 유경애 등 모두가 한사람같이 우리 수령님과 당을 받들어 주체문학건설의 초행길을 개척해온 쟁쟁한 공로자들이였다. 바로 그속에 자신도 속해있다고 생각하니 마냥 부풀어오르는 심정을 금할수 없었다.

그는 자기 차례가 오자 정중히 일어나서 일생동안 어버이수령님의 배려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고 죄송스레 말씀올리였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손을 들어 자리에 앉으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문예봉동무가 일생동안 나의 배려만 받고 기쁨을 드리지 못했다고 하는데 왜 기쁨을 주지 못하였겠습니까.

문예봉동무는 해방직후부터 지금까지 많은 영화를 만드는데 참가하였습니다.》

그러시면서 예술영화 《내 고향》으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출연한 영화들을 일일이 꼽아주시였다.

문예봉은 솟구치는 눈물을 금할수 없어 젖어드는 눈굽을 옷고름으로 찍어내며 앞으로 다부작예술영화 《민족과 운명》에도 출연하겠다고,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을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김정일동지께 충실하게 키우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감사하다고 하시며 문예봉에게 자식들이 모두 몇이나 되는가고 따뜻이 물으시였다.

문예봉은 어려움도 잊고 아들딸 3명에 손자, 손녀가 6명이나 된다고 말씀올렸다.

그의 대답을 들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시는것이였다.

《문예봉동무에게 아들딸 3명과 손자, 손녀가 6명 있으면 대단한 밑천을 가지고있는셈입니다.》

좌석은 금시 밝은 웃음으로 차넘치였다.

그날 식탁에는 사연깊은 언감자국수가 올랐는데 수령님께서는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시기 장백현에서 활동할 때 량강도사람들한테서 배워가지고 언감자국수를 만들어 먹던 일이며 해방후에도 자신을 찾아온 해외교포들에게 언감자국수를 대접하면서 언감자국수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던 일들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그날 좌석에는 남조선에서 활동하다가 해방직후 공화국의 품을 찾아온 예술인들이 과반수였다.

문예봉은 그 동무들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조국이 통일된 다음 수령님을 제주도까지 모시고 가고싶다고, 그날 제주도 산기슭에서 이런 언감자국수로 통일연을 차리겠다고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감사하다고 하시며 힘주어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기어이 미제를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해야 합니다. 조국이 통일되면 우리 인민들이 잘살수 있습니다.》

바로 이날에 문예봉은 자기의 한생을 크나큰 영광과 행복의 한생으로 빛내여준 태양의 품이 얼마나 은혜로운것인가를 다시금 사무치게 절감할수 있었다.

기구한 운명의 곡절로 열다섯살에 영화배우가 되여 나라잃은 예술인의 민족적설음과 온갖 모멸을 사무치게 느껴온 녀배우를 한창시절은 더 말할것도 없고 인생의 황혼기에도 언제나 잊지 않으시고 손잡아 이끌어주시여 주체예술의 꽃바다우에 활짝 핀 한떨기의 붉은 꽃으로 되게 하여주신 위대한 그 사랑.

그렇게 놓고보면 문예봉은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속에서 비로소 행복의 포구를 찾은 행운아였고 행복자였다.

그는 1997년 예술영화 《먼 후날의 나의 모습》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의 한생을 돌이켜보게 하는 총화작이라고도 말할수 있었다.

영화의 창조과정을 마치고나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어렸을 때 먼 후날의 나의 모습인 지금을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어릴 때 나의 할아버지가 커가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가인박명〉이라는 말을 자주 외우군 하였다. 하지만 나는 오늘 이 말을 부정하게 된다.

내 나이 이제는 80이 넘었다. 작년초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은정어린 80돐생일상을 받아안던 날 나는 당의 품에 안겨 값있게 살아온 나날들을 돌이켜보면서 위대한 장군님에 대한 고마움에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또 흘렸다.》

그는 《영화와 함께 70년》이라는 회상록을 집필하다가 1999년 3월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애국렬사릉에 안치되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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