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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황 철 (배우)

 

                        • 1912년 1월 11일 충청남도 청양군에서 출생.

                        • 해방전 조선연극사와 동양극장산하의 극단인 청춘좌 등에서 배우생활.

                        • 1939년 9월 아랑극단 단장.

                        • 1948년 4월 남조선대표로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

                        • 1955년-1961년 국립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 1958년-1960년 교육문화성 부상.

                        • 1961년 6월 9일 사망

                        • 조국통일상수상자, 인민배우.

                                                           

 

 

우리 나라 배우들중에서 어버이수령님과 위대한 장군님의 기억속에 깊이 남아있고 인민들의 생활속에 제일 가까이 있던 사람들중에는 황철도 있다.

나라의 첫 인민배우, 무대나 화면에 나타나기만 하면 한순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명배우, 리순신과 변학도의 모습으로 지금도 남아있는 황철을 두고 일화인들 얼마나 많았던가.

어버이수령님께서 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시원해진다고 높이 평가해주신 인민배우 황철!

그의 운명이 안겨주는 생의 진리는 무엇인가.

 

 

이루어진 소원

 

1948년 4월 초순 어느날 황철은 뜻밖에도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에 참가하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그것은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친히 자신의 명의로 보내주신것이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를 불러주시다니! …)

위대한 수령님의 존함이 정중히 모셔진 초청장을 받아든 그는 높뛰는 가슴을 진정할줄 몰랐다.

얼마나 그립던분이신가!

모진 수난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그분의 존함을 얼마나 외우며 경모하여왔던가!

위대하신 장군님의 품속에 안길 영광의 그 시각을 그리면서 갖은 풍상고초를 다 겪어온 그였다.

황철은 1912년 1월 충청남도 청양군 비봉면 강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태여난 그의 집은 몹시 가난하였다.

황철이 5살 잡히던 해 어머니가 앓다가 사망하고 그처럼 어머니를 사랑하던 아버지도 상심끝에 사그라지는 불처럼 조용히 운명하고말았다.

할수 없이 누이와 형과 함께 큰아버지집에서 생활을 하다가 누이는 출가하고 하나밖에 없는 형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큰아버지의 집에 홀로 남게 되였다.

거기서 학교에 다니던 그는 살기가 힘들어지자 큰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다.

하지만 일제통치하에서는 어디 가나 그의 희망이 이루어질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연극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배우가 될것을 꿈꾸어온 그였지만 량반가정이라는 큰아버지의 봉건관념으로 하여 집에서 내쫓기우게 되였으며 공부도 더 할수 없게 되였다.

그에게 차례진것은 무대가 아닌 실업의 거리였고 겨우 얻은 직업이란 자동차운전조수였다.

자동차운전조수로 일하면서도 그는 늘쌍 노래를 불렀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배우가 되였으면 좋겠다고들 하였다.

그럴 때면 황철은 마음속에서 저도 모르게 무대배우가 되고싶은 충동이 더더욱 강렬해졌다.

그후 그는 그 직업을 그만두고 요행 신극단체인 토월회에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식민지배우의 쓰라린 고통과 설음을 안고 배우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극단에서 빅또르 유고의 소설을 각색한 연극 《쟝 발쟝》을 공연하고있었는데 주인공역을 맡은 배우가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그가 급병으로 병원에 실려갔다는것이였다.

벌써 관중들이 관람석을 반나마 채웠는데 주역을 맡은 당사자가 없는것으로 해서 극단에서는 소동이 벌어졌다.

계약된 공연을 보장하지 못하면 경영주로부터 잡일을 하는 심부름군에 이르기까지 그날로 밥줄이 떨어져야 했던 세월이라 모두들 울상이 되여 안절부절 못하고있을 때 문득 《내가 한번 해보겠소.》라고 나서는 애숭이청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극단에 들어온지 한달도 채 못된 경력을 가진 황철이였다.

무대막뒤에서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에게 대사를 튕겨주느라고 연극대본을 읽어주던 젊은이가 대담하게 주인공역을 맡아하겠다고 나설 때 모두들 놀라와했다.

하지만 다른 방도가 없는 경영주는 그에게 주인공의 의상을 입고 분장할것을 지시했다.

황철은 배포유하게 의상을 갈아입고 무대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황철의 대담한 행동이 다른 배우들에게 그대로 옮겨져 그들은 최면술에 걸리기라도 한것처럼 하나둘 무대로 나갔다.

놀랍게도 그의 연기는 원래 역을 맡았던 배우의 수준을 훨씬 릉가한것으로 하여 떠나갈듯 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로부터 황철은 배우로서의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게 되였으며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게 되였다. 그러나 일제놈들은 저들의 요구가 담긴 연극을 할 때만 통과시키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금지시켰다. 생계를 유지하자니 별수 없이 그 치욕의 무대에도 끌려다녀야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더욱 가슴속에 못견디게 그리워지는것은 압제와 예속이 없는 해방된 내 나라, 내 무대였다.

이러한 나날속에 그는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주인공역을 맡아가지고 생동하게 연기를 하여 더욱 인기가 높아지게 되였으나 일제놈들의 탄압으로 극단은 해산되였다.

배우들은 갈길을 찾지 못해 헤매이다가 자기들끼리 연극을 해보겠다고 황철을 축으로 극단을 조직하였다. 하지만 역시 나라를 빼앗긴 배우들의 처지는 비참하였다.

이번엔 연극대신 노래를 해볼가 하는 욕망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에 갔으나 그에게 차례진것은 한갖 꿈에 불과한 치욕의 무대였다. 독창가수는커녕 천대와 멸시만 뒤따랐다. 나라없는 설음만이 마음속에 가득찬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고말았다.

당시 일제는 보잘것없는 신극이나마 민족적색채를 띨가봐 검열을 엄격히 실시하였으며 조금만 이상한것이 생겨도 공연을 중지시키고 저들의 요구를 담은 작품만을 무대에 올릴것을 강요하였다. 그는 당장 극단을 뛰쳐나오고싶었으나 일제놈들의 강압으로 하는수없이 치욕의 무대로 끌려다녔다.

그러던 1945년 8월 15일 나라가 해방되였다. 환희와 기쁨에 휩싸인 인민들은 저저마다 만세를 높이 부르며 거리를 행진하였다.

그러나 해방자의 탈을 쓰고 남조선에 기여든 미제는 첫날부터 민족문화를 더욱 가혹하게 유린말살하였으며 예술활동을 무참히 탄압하였다.

민주의 새 연극을 소개하는 극장광고들이 떨어져나가고 막이 오른 무대우로 폭탄이 날아들었으며 진보적인 예술인들은 감옥으로 끌려갔다.

아, 갈수록 더욱 모질어만 가는 이 캄캄한 세월은 언제면 끝장나려나? 어느때면 광명한 대우에서 새 조선의 연극을 해볼것인가?

황철이 갈길 몰라 몸부림치던 이무렵 그에게 재생의 밝은 서광을 안겨준것은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 북반부의 극장무대에서 울려오는 참다운 민족예술창조의 힘찬 목소리였다.

이때부터 황철은 공화국북반부를 동경하며 예술활동에서 활기를 띠게 되였고 새로운 목표를 가지고 연기를 보다 목적의식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는 서울뿐아니라 여러곳에서 연극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경향성이 좋은 연극들에 출연하고 지도하며 인민들을 각성시켰다.

진보적인 연극활동을 벌리던 황철은 1947년 7월 서울시 남산공원 군중대회에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연설을 류창하게 하여 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러자 미제와 남조선괴뢰도당은 인기배우 황철이도 《빨갱이》가 되였다고 소문을 내돌리면서 체포령을 내렸다.

황철은 적들의 검거선풍에 걸려 연극배우생활은 물론 자유로운 생활도 할수 없게 되였으며 무대를 떠나 은신해있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러하던 그가 자나깨나 경모하여마지 않던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으로부터 크나큰 믿음과 사랑에 넘친 부르심을 받게 되였으니 어찌 벅차오르는 감격과 흥분을 억제할수 있었으랴!

황철은 곧 평양을 향해 서울을 떠났다.

그로부터 며칠후인 1948년 4월 모란봉극장에서는 력사적인 남북련석회의가 열리였다.

민족의 태양이시며 전설적영웅이신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름름하고 활기에 넘치신 모습으로 단상에 나오시자 거세찬 경탄의 열풍이 만장을 휩쓸며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올랐다.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며 목청껏 만세를 부르던 황철은 가슴속에 쌓였던 설음과 감격의 격정이 한꺼번에 북받쳐올라 어깨를 들먹거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장군님,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떠돌아다니며 예술을 팔지 않으면 안되였던 연극배우 황철이가 평양으로, 장군님께로 왔습니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으며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한없이 인자하고 열정에 넘치신 어버이수령님의 거룩하신 모습을 우러러볼수록, 수령님을 모신 기쁨과 행복이 크면 클수록 그의 가슴에 더욱더 절절해지는것은 이제는 그 어디에도 가지 말고 오직 장군님의 품속에서 살고싶은 그 한가지 생각이였다.

하기에 회의가 끝난 후 남조선에서 온 일부 대표들이 다시 서울로 떠날 때 황철은 자기의 소원은 평양에 남는것이라고, 평양에 남아 인민을 위한 배우로 살고싶은것이라고 하면서 이 소청을 어버이수령님께 꼭 말씀올려달라고 하였던것이다.

황철의 소청을 보고받으신 수령님께서는 황철동무의 소원이 평양에 남아서 조국과 인민을 위한 무대예술창조사업을 하는것이라면 그 소원을 풀어주는것이 좋겠다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가 서울에 나가면 연기활동을 할수 없을것이라고, 황철동무의 소원대로 그가 평양에 남아있도록 하여야겠다고 거듭거듭 말씀하시였다.

드디여 그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을 전달받고 황철은 너무도 고맙고 고마워 그저 눈물만 날뿐이였다.

지난날 식민지예술인으로서 굴욕적인 연기생활을 하여온 이름없는 배우를 그 넓고도 따뜻한 품속에 안아주시는 수령님, 량심있는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속깊이 품고있는 그 간절한 소망을 귀중히 여기시여 과분한 사랑과 은정을 베푸시는 수령님, 그이의 두터운 배려와 신임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는 새 민주조선건설을 위한 연극창조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칠 굳은 맹세를 다지고 또 다지였다.

그 결의는 그후 예술창조활동에서 빛나게 실천되여나갔다.

국립극장 배우로 된 그는 연극 《항쟁의 노래》에 출연하여 맡겨진 역형상을 훌륭히 창조해냄으로써 새 사회건설에 떨쳐나선 인민들을 힘있게 고무하였다.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로 그처럼 바쁘신 가운데서도 일군들을 남조선에 파견하여 황철의 일가식솔을 데려오도록 하시고 그들이 왔을 때는 살림집까지 마련해주시였다.

새집들이를 하는 날이였다.

유명한 배우라고 하지만 해방전에는 세방도 제대로 구할수 없어 한해에도 몇차례씩 이사를 해야 하였고 끼니걱정으로 마음편할 날이 없이 살아온 황철은 난생처음으로 제집이라고 문패를 달고 살게 된 새 집에 선뜻 들어서지 못하였다. 방만 해도 여러칸이 되고 갖가지 가구들과 차곡차곡 개여놓은 이불이며 옥백미가 가득차있는 쌀독을 바라보는 황철은 참으로 이 모든것이 꿈만 같았다.

그는 민족의 위대한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우러러모시고 따르려는 오직 그 한마음을 품고 서울을 떠나 사선을 넘어왔지만 찾아와 안긴 장군님의 품이 그처럼 넓고 은혜로운줄은 다는 몰랐었다.

황철은 참고참아오던 격정을 터뜨리며 오랜 삯빨래질로 거칠어진 안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 우리 장군님 계시고 장군님께서 세워주신 인민의 나라가 있어서 이 황철에게도 무대가 차례지고 쓰고살 제 집이 생긴것이 아니겠소. 내 무대우에서 네활개를 치며 장군님의 은덕에 꼭 보답하겠소. 그러니 가정일은 당신이 맡아주오.》

황철은 한 연극배우의 재능을 귀중히 여기시고 그것을 빛내여가도록 아낌없는 사랑과 배려를 거듭 돌려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고마운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극장의 련습실과 무대에서 침식을 하면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새 조국건설로선을 관철하는데 이바지할 연극창조사업에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는 이 나날에 연극 《을지문덕》, 번역극 《어느 한 나라에서》 등 여러 연극들의 주역과 연출 그리고 방송소설랑독도 하면서 나라의 연극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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