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꽃피여
《송선생, 기뻐하십시오.
일군의 말에 송영은 너무도 감격이 커 무엇이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맙고 눈물이 날뿐이였다. 이처럼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는 품이라면
환희에 넘친 그의 결의는
어느날 송영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저는 흥남지구에 내려가겠습니다. 현실체험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네가 생각을 잘한것 같다. 현실을 모르고서야 작품을 못 쓰지. 연극인동맹위원장이라 해서 꼭 평양에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 내려가서 숙식조건이 여의치 않거든 알려라. 우리 식구도 다 함께 가서 지내게. …》
아버지도 어떻게 하나 좋은 작품을 써서
송영은 곧 현지에 내려갔다.
작가는 기뻤다. 작품을 써내고도 그것을 실은 잡지의 발매를 금지당했던 가슴쓰린 지난날을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몰랐다.
희곡 《나란히 선 두 집》은 해방후 로동계급속에서 일어난 사상의식개변과정을 기본문제로 내세우고 이것을 원군사업을 비롯한 제반 주요사회사업과의 유기적인 통일속에서 생동한 생활적화폭으로 해명한 작품이다.
작품은 그 어떤 커다란 생활적사건이나 특이한 정황들을 설정함이 없이 보통 가정생활의 테두리안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생활일화들과 세부들로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엮어나가면서 극성을 실감있게 조성하고 인물들의 개성적특징을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송영은 이밖에도 자기의 풍부한 풍자극창작경험을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 희곡 《금산군수》와 같은 희극적양상의 작품들도 창작하였다.
희곡 《금산군수》는 해방후 남조선사회의 부패상과 괴뢰정권의 허위성을 보여주면서 남조선반동관료배들의 반인민적성격과 사기협잡행위, 추악한 종말을 희극적으로 타매한 작품이다.
작품은 민주국민당이 추천한 백가와 리승만매국역도가 직접 임명한 리가가 한날한시에 금산군에 나타나 저마끔 군수자리를 타고앉으려고 개싸움을 벌리는 과정을 기본줄거리로 하고있다.
백가놈은 해방전에는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 복무하였고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벼슬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괴뢰정부에 뢰물을 찔러바친 후 금산군수의 벼슬을 산 인물로서 사고방식에서 봉건통치배들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세계에서 헤매이는 우둔한자이다.
리가놈은 매판자본가의 아들로서 미국놈들을 등에 업고 돈으로 출세의 길에 올라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놈은 백가와는 달리 숭미사대주의사상과 황금만능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본주의적산아로서 사대매국노의 전형이다.
작품은 두놈이 한방에 앉아서 서로 자기가 진짜군수라고 우겨대며 상대방의 더러운 경력과 무능력을 들추어 비방중상하는 장면과 농민들앞에서는 저마끔 자기가 진짜군수라며 허세를 부리다가도 유격대앞에서는 서로 진짜군수가 아니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강한 극적대조를 통하여 놈들의 추악한 몰골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있다.
송영은 여러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진하여 현실속에 들어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써내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새 민주조국건설에 창작으로 이바지하려는 그의 작가적량심을 보았고 순결한 애국충정을 보았다.
송영의 창작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계속되였다.
미제에 의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송영은 종군작가로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송영은 종군작가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헤치며 수많은 인민군용사들을 찾아다니였다.
송영은 가렬처절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영웅적군대와 인민의 투쟁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열렬한 조국수호정신과 미제에 대한 증오심이 차넘치는 작품들을 적극 창작하였다.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1952년)는 원쑤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고 하신
1막에서는 주인공 한계렬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와 함께 자기들이 받은 소막전고지점령임무를 기어이 수행하려는 한계렬소대전투원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며 2막에서는 전투장면을 통하여 인민군전사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주인공의 장렬한 최후를 보여주고있다.
작품에서 주인공 한계렬은
종군행군길에서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해 2월 군부대지휘관들의 초청을 받은 송영과 박세영은 기분이 좋아서 군단지휘부로 들어가는데 정문보초가 서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시인다운 성격적기질의 소유자인 박세영은 《우린 종군작가들이야.》라고 하면서 정지함이 없이 그냥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애어린 전사인 보초병은 규정대로 《종군작가라도 섯! 서지 않으면 쏜다.》라고 웨치면서 불쑥 앞에 총까지 내대는것이였다. 그러자 당황해난 시인이 펄쩍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서며 《아이구나, 오발할라. 설테니 그 총구를 좀 치워줘. 으쓸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초병은 이
이렇게나 해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박세영이 오른손주먹을 쳐들어 씩씩하게 흔들며 《승리의 5월》을 부르기 시작했다.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
그제야 앞에 서있는 체소하나 패기있어보이는 시인이 다름아닌 《애국가》의 작사자라는것을 알아차린 보초병은 《알겠습니다. 〈애국가〉의 시인 박세영동지! 어서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보초병앞을 힘찬 걸음걸이로 통과하여 들어간 시인은 저만쯤에 가서 아직 들어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는 송영을 돌아보며 골려주듯 말하였다.
《난 먼저 들어갑니다. 중좌동지.》
그러자 이번에는 송영이 보초병앞으로 한발 나서며 조용히 물었다.
《자네, 아니 보초병동무. 혹시 〈황금산〉이라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있나?》
희곡작가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전사의 입에서는 《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를 쓰신 송영선생님, 군단장동지랑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오.》라는 환성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이리하여 무사히 보초소를 통과한 두 작가는 이날 밤의 명절경축연회에 뜻깊게 참가할수 있었다.
일화적인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있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전쟁시기 송영은 싸우는 고지에서 《모두다 전선》, 《그가 사랑하는 노래》, 《나의 고지》,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강화도》 등 많은 극문학작품들을 창작하여 군대와 인민을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투쟁으로 승리하자 송영은 1953년
백두의 천고밀림을 헤치며 근 7 000Km의 기나긴 로정을 편답하면서 그는 해방전 말로만 전해듣던 백두의 피어린 자욱을 심장에 새겨안았으며
크나큰 감격과 흥분에 넘쳐 불과 두달기간내에 답사기행문집
제목에서부터 알수 있는바와 같이 송영은 이 글을 통하여 조종의 산
그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전체 동포형제자매들이여! 청년학생, 작가, 예술인들이여! 우리들은 소리높이 세상에 자랑하자! 영웅적항일민족해방투쟁의 혁명전통과 고귀한 정신을 계승한 로동당시대에 사는 긍지와 감격과 행복을! 오, 이 감격이여- 이 무한대의 행복이여!》
《사화산이던
이렇게 극작가인 그가
송영은
이 시기는 그가 작품창작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열정의 나날이였으며 창작활동에서의 전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혁명전통주제의 첫 작품인 희곡 《애국자》를 창작할 때 능력있는 극작가인 그가 2년 반이라는 기간에 5차례에 걸쳐 구성수정작업을 진행한것만 보아도 작품의 성과적완성을 위하여 얼마나 깊은 탐구와 많은 품을 들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1956년 7월 10일 창작일지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2막 2장을 네번째 다시 썼다. 김명희의 대사중에서 이런것을 썼다. (최구장에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직접 총들고 싸우는것보다 더 어려웁고 중요합니다.〉라는 대사를 쓰면서 나의 창작사업에서도 직접 이런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번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직접 유격투쟁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 이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한다는것은 쓰기 어려웁고 더 책임이 무거워진다.〉고. 나는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불사조같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송영이 창작한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마다에는 이처럼 그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희곡 《애국자》는 압록강대안의 한 마을에서 구장노릇을 하면서
송영은 일찌기 느껴본적 없는 창작적열정을 안고 붓을 달리고달려 1956년 9월에 장막희곡 《애국자》를 완성하였다.
무대에 오른 작품은 반향이 컸다. 그것이 다시 가극으로 각색되였을 때 파문은 더욱 컸다.
이때 그 창작성과를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어느날 극장에 몸소 나오신
송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몇번이나 손수건을 꺼냈는지 모른다.
하지만 베푸시는
얼마후
그날 동료작가들이 그를 축하해주고 수많은 관중과 독자들이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내여왔다.
송영의 환희와 행복은 이를데 없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기의 작품으로
인민을 위해 마음껏 창작할수 있는 품으로 불러주신분도, 좋은 작품을 쓸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시고 소재까지 찾을수 있게 하여주신분도
송영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을 비롯하여 영웅성과 혁명성으로 충만된 현실을 작가로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실지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으며 영웅적문학예술을 창조할데 대한
이 과정에 그는 영웅적인 우리 군대와 인민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하고 그들의 사상감정을 담은 문학 역시 영웅적인 문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였으며 그 신념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가 이렇듯 높은 창작적지향을 안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도 있다.
전후 그는
이때마다 그는
《대회 3일째 되는 날 나의 즉흥시랑송이 끝나자 전체 참가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터나쇼날〉을 부르고 이어 조선말로 〈조선〉, 〈조선〉 하는 웨침이 터져나왔다. 조선사람으로서 사회제도가 다른 인도네시아에 가서 인도네시아사람들이 조선말로 웨치는 〈조선〉이란 소리를 들을 때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할수가 없었다. 나는 진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된 자랑을 여기에서 더욱 크게 그리고 떳떳하게 느끼였다. 그것은 몇천만리 먼 이국땅에서 왔다 해서 의례삼아 부르는 환호성이 아니라 일제억압시절에도 굴하지 않았고 더우기 미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한 침략을 물리친 영웅조선에 대한 례찬이요, 환영이였기때문인것이다. 그래서 나도 너무나 기뻐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이것은 1959년 인도네시아인민문화련맹 제1차 전국대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대표로 참가했던 송영이 자기가 느낀 심정을 적은 《인도네시아기행》의 한 대목이다.
또한 송영은
작가는 우산장에서 희곡 《박연암》을 쓰던중 남조선에서 일어난 영웅적인민봉기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라지오에서 시시각각으로 울려나오는 격동적인 소식은 작가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게 하였다.
그는 떨리는 붓끝으로 자기의 창작일기에 이렇게 썼다.
《4월 13일, 희곡 〈박연암〉을 완성하는것도 물론 중요하고 의의가 크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시시각각으로 발전되고있는 남조선정세의 크나큰 격랑속에서 어떻게 몇백년전 이야기를 쓰고 앉아있기만 하겠는가.》
연극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의 첫 공연이 6월 3일 진행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당시 창작가, 예술인들의 조국통일념원이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전투적인 인민항쟁의 대합창이 울리는 속에 막이 오르면 피빛같은 화염이 활화산의 봉우리에서 터져오르고 화염속에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는 획이 굵고 힘찬 글발이 날아오른다.
치욕적이며 반인민적인 3. 15선거를 계기로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쌓여있는 마산시의 가난한 수공업자 최재춘의 집으로 17살 난 그의 조카 김주렬소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온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항쟁의 격류속에 뛰여들었던 김주렬소년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며 숨도 채 지기 전에 바다물속에 던져진다. 그리하여 수만명의 마산시민들은 김주렬소년의 복수를 웨치며 노도와 같이 일떠서고 남조선 각지에서도 반미자주화투쟁이 과감히 벌어지는 속에서 괴뢰도당이 어린 김주렬의 시체마저 내주지 않아 사진만 놓고 장례식을 하게 된다. 오빠의 사진을 쓸어만지며 목메여 우는 16살 소녀 김주옥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이 비통한 사연을 어찌 참고 견딜수 있겠는가. 이제 더는 참을수가 없다. 한탄만 하던 최재춘로인도 분연히 일어나 자기 조카 김주렬을 죽인 살인경관의 권총을 빼앗아 그놈을 쏘아눕히고 자기도 총에 맞아 쓰러지며 복수를 부르짖는다.
최재춘의 아들 최승원을 선두로 한 항쟁군중의 기세에 겁을 먹고 대사관안에 몰려든 미제살인귀들은 허수아비괴뢰를 갈아치우는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놈들의 잔꾀에 속지 않고 손에 무장을 잡은 인민의 항쟁기세가 더욱 고조될 때 막이 내린다.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여 마산에서부터 발단된 4. 19인민봉기의 전모를 보여주면서 남조선인민들이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미제국주의의 남조선강점과 그에 아부굴종하는 사대매국무리들의 썩은 정치에 있다는것을 명백히 밝히고 반미자주화투쟁의 불가피성을 확증하였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그는
그는 혁명전통주제의 작품을 더 많이 창작할데 대하여 주신
이처럼 송영은 창작의 전기간 우리 혁명의 주요행정과 사변들에 언제나 열렬하게 호응하여 사상예술성이 높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의 작품들을 적극 창작함으로써 자기의 창작활동이 곧 혁명승리에 이바지하는 투쟁으로 되게 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아동문학으로부터 성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로부터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단막희곡으로부터 장막희곡, 영화문학과 가극대본, 시와 가사는 물론 수필, 수기, 단상, 기행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를 포괄하는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처럼 송영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공민으로서 영광의 최절정에서 살아온 행복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