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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꽃피여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속에 공화국북반부에 들어온 송영은 1946년 8월 어느날 뜻밖의 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송선생, 기뻐하십시오. 김일성장군님께서 선생에게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의 중책을 맡겨주시였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선생에 대한 기대가 크십니다. 우리 나라 연극예술을 더욱 발전시켜 새 민주조국건설에 적극 이바지할것이라고 믿고계십니다.》

일군의 말에 송영은 너무도 감격이 커 무엇이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고맙고 눈물이 날뿐이였다. 이처럼 크나큰 신임을 베풀어주는 품이라면 자신의 운명도 미래도 다 맡기고 숨이 지는 마지막순간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창작에 한생을 바치고싶었다.

환희에 넘친 그의 결의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서울에 있던 그의 부모와 가족들을 무사히 평양에 데려오게 하고 친어버이사랑으로 살림살이의 구석구석까지 보살펴주시는 한량없는 사랑과 은정을 받아안고 더더욱 뜨겁게 불타올랐다.

어느날 송영은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님, 저는 흥남지구에 내려가겠습니다. 현실체험을 하면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네가 생각을 잘한것 같다. 현실을 모르고서야 작품을 못 쓰지. 연극인동맹위원장이라 해서 꼭 평양에 있어야 한다는 법도 없지. 내려가서 숙식조건이 여의치 않거든 알려라. 우리 식구도 다 함께 가서 지내게. …》

아버지도 어떻게 하나 좋은 작품을 써서 어버이수령님의 믿음과 기대에 보답하려는 송영의 결심을 적극 지지해주었다.

송영은 곧 현지에 내려갔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찾아주신 새 조국을 부강번영하는 락원으로 꽃피우기 위해 근로자들이 헌신적인 로력투쟁을 벌리는 들끓는 현실은 그에게 전에 없던 창작의욕과 열정을 북돋아주었다. 이렇게 되여 두편의 희곡 《인민은 조국을 지킨다》와 《나란히 선 두 집》이 창작발표되였는데 그것은 8. 15경축 문예경연에서 입선작품으로 평가되였으며 책으로도 출판되고 무대에서도 공연되였다.

작가는 기뻤다. 작품을 써내고도 그것을 실은 잡지의 발매를 금지당했던 가슴쓰린 지난날을 생각할 때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몰랐다.

희곡 《나란히 선 두 집》은 해방후 로동계급속에서 일어난 사상의식개변과정을 기본문제로 내세우고 이것을 원군사업을 비롯한 제반 주요사회사업과의 유기적인 통일속에서 생동한 생활적화폭으로 해명한 작품이다.

작품은 그 어떤 커다란 생활적사건이나 특이한 정황들을 설정함이 없이 보통 가정생활의 테두리안에서 벌어지는 평범한 생활일화들과 세부들로 이야기를 아기자기하게 엮어나가면서 극성을 실감있게 조성하고 인물들의 개성적특징을 생동하게 보여주었다.

송영은 이밖에도 자기의 풍부한 풍자극창작경험을 살리고 더욱 발전시켜 희곡 《금산군수》와 같은 희극적양상의 작품들도 창작하였다.

희곡 《금산군수》는 해방후 남조선사회의 부패상과 괴뢰정권의 허위성을 보여주면서 남조선반동관료배들의 반인민적성격과 사기협잡행위, 추악한 종말을 희극적으로 타매한 작품이다.

작품은 민주국민당이 추천한 백가와 리승만매국역도가 직접 임명한 리가가 한날한시에 금산군에 나타나 저마끔 군수자리를 타고앉으려고 개싸움을 벌리는 과정을 기본줄거리로 하고있다.

백가놈은 해방전에는 일제의 충실한 주구로 복무하였고 일제가 패망한 후에도 벼슬에 대한 야욕을 버리지 않고 괴뢰정부에 뢰물을 찔러바친 후 금산군수의 벼슬을 산 인물로서 사고방식에서 봉건통치배들의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대착오적인 세계에서 헤매이는 우둔한자이다.

리가놈은 매판자본가의 아들로서 미국놈들을 등에 업고 돈으로 출세의 길에 올라 더러운 야욕을 채우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이다. 놈은 백가와는 달리 숭미사대주의사상과 황금만능을 철저히 신봉하는 자본주의적산아로서 사대매국노의 전형이다.

작품은 두놈이 한방에 앉아서 서로 자기가 진짜군수라고 우겨대며 상대방의 더러운 경력과 무능력을 들추어 비방중상하는 장면과 농민들앞에서는 저마끔 자기가 진짜군수라며 허세를 부리다가도 유격대앞에서는 서로 진짜군수가 아니라고 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강한 극적대조를 통하여 놈들의 추악한 몰골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있다.

송영은 여러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자진하여 현실속에 들어가 좋은 작품들을 많이 써내였다. 여기서 사람들은 새 민주조국건설에 창작으로 이바지하려는 그의 작가적량심을 보았고 순결한 애국충정을 보았다.

송영의 창작은 준엄한 전쟁시기에도 계속되였다.

미제에 의하여 전쟁이 일어나자 송영은 종군작가로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송영은 종군작가들과 함께 포연탄우를 헤치며 수많은 인민군용사들을 찾아다니였다.

송영은 가렬처절한 전쟁의 불길속에서 영웅적군대와 인민의 투쟁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열렬한 조국수호정신과 미제에 대한 증오심이 차넘치는 작품들을 적극 창작하였다.

희곡 《그가 사랑하는 노래》(1952년)는 원쑤들에게 한치의 땅도 내주지 말라고 하신 최고사령관동지의 명령을 높이 받들고 나의 고지운동의 선두에 선 공화국영웅 한계렬과 그의 소대원들의 영웅적투쟁을 형상한 작품이다.

1막에서는 주인공 한계렬의 숭고한 사상정신세계와 함께 자기들이 받은 소막전고지점령임무를 기어이 수행하려는 한계렬소대전투원들의 굳은 결의를 보여주며 2막에서는 전투장면을 통하여 인민군전사들의 대중적영웅주의와 주인공의 장렬한 최후를 보여주고있다.

작품에서 주인공 한계렬은 위대한 수령님과 당에 대한 끝없는 충실성을 지닌 참된 당원, 혁명전사로 형상되여있다.

종군행군길에서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해 2월 군부대지휘관들의 초청을 받은 송영과 박세영은 기분이 좋아서 군단지휘부로 들어가는데 정문보초가 서라고 하는것이였다. 그렇지만 시인다운 성격적기질의 소유자인 박세영은 《우린 종군작가들이야.》라고 하면서 정지함이 없이 그냥 걸어들어갔다. 그러자 애어린 전사인 보초병은 규정대로 《종군작가라도 섯! 서지 않으면 쏜다.》라고 웨치면서 불쑥 앞에 총까지 내대는것이였다. 그러자 당황해난 시인이 펄쩍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서며 《아이구나, 오발할라. 설테니 그 총구를 좀 치워줘. 으쓸하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보초병은 이 수상스러운, 군사규정도 잘 모르는 불법침입자인 로군관들앞에서 총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나 해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던지 박세영이 오른손주먹을 쳐들어 씩씩하게 흔들며 《승리의 5월》을 부르기 시작했다.

 

장하고나 우리들은 힘찬 근로자

새 세기를 창조하는 승리의 주인

 

그제야 앞에 서있는 체소하나 패기있어보이는 시인이 다름아닌 《애국가》의 작사자라는것을 알아차린 보초병은 《알겠습니다. 〈애국가〉의 시인 박세영동지! 어서 들어가십시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보초병앞을 힘찬 걸음걸이로 통과하여 들어간 시인은 저만쯤에 가서 아직 들어오지 못하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듯 서있는 송영을 돌아보며 골려주듯 말하였다.

《난 먼저 들어갑니다. 중좌동지.》

그러자 이번에는 송영이 보초병앞으로 한발 나서며 조용히 물었다.

《자네, 아니 보초병동무. 혹시 〈황금산〉이라는 소리를 들어본적이 있나?》

희곡작가의 그 말을 들은 순간 전사의 입에서는 《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를 쓰신 송영선생님, 군단장동지랑 기다리십니다. 들어가십시오.》라는 환성에 가까운 소리가 울려나왔다.

이리하여 무사히 보초소를 통과한 두 작가는 이날 밤의 명절경축연회에 뜻깊게 참가할수 있었다.

일화적인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작품이 얼마나 널리 알려져있는가를 잘 보여주고있다.

전쟁시기 송영은 싸우는 고지에서 《모두다 전선》, 《그가 사랑하는 노래》, 《나의 고지》, 《내 집으로 돌아오다》, 《강화도》 등 많은 극문학작품들을 창작하여 군대와 인민을 전쟁승리를 위한 투쟁에로 힘있게 고무하는데 이바지하였다.

조국해방전쟁이 우리 군대와 인민의 영웅적투쟁으로 승리하자 송영은 1953년 항일혁명투쟁전적지조사단의 한 성원으로서 유격근거지, 밀영지, 전투장 등 82개 장소를 답사하였고 항일무장투쟁참가자, 연고자, 현지주민 700여명을 만나보았다.

백두의 천고밀림을 헤치며 근 7 000Km의 기나긴 로정을 편답하면서 그는 해방전 말로만 전해듣던 백두의 피어린 자욱을 심장에 새겨안았으며 크나큰 감격과 흥분에 넘쳐 불과 두달기간내에 답사기행문집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를 집필완성하였다.

제목에서부터 알수 있는바와 같이 송영은 이 글을 통하여 조종의 산 백두산은 혁명의 성산으로 영원히 높이 솟아 빛나리라는것, 다시말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영광찬란한 혁명력사와 항일혁명투사들의 불멸의 위훈은 천추만대와 더불어 길이 빛날것이라는것을 생동한 력사적자료와 사실들을 통하여 격조높이 토로하였다.

그는 글을 이렇게 끝맺었다.

《전체 동포형제자매들이여! 청년학생, 작가, 예술인들이여! 우리들은 소리높이 세상에 자랑하자! 영웅적항일민족해방투쟁의 혁명전통과 고귀한 정신을 계승한 로동당시대에 사는 긍지와 감격과 행복을! 오, 이 감격이여- 이 무한대의 행복이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시였다.

《사화산이던 백두산에서 분출한 〈광복혁명〉의 용암은 2천만동포의 주목을 끌었다. 항일혁명의 불길이 미쳐간 곳곳을 돌아본 작가 송영은 자기의 답사기행문집에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는 표제를 붙였다. 그 표제가 말하듯이 우리가 백두산을 타고앉은 때로부터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이는 광복의 활화산, 혁명의 성산으로 되였다.》

이렇게 극작가인 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의 발자취가 깃들어있는 혁명전적지편답의 길에 나섰으며 어디서나 백두산을 우러르는 경건한 마음으로 혁명전통교양주제의 도서를 훌륭히 써냈다는것은 찬양할만 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송영은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밑에 조직전개된 항일혁명투쟁력사와 투사들의 모습을 실화나 기행문만으로가 아니라 문학작품으로 형상하여 보여주려고 하였다. 더우기 취재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전투의 불길속에서도 친히 수많은 노래와 희곡들을 창작하시였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몹시 감동되여 자기의 창작활동도 전투로 되여야 한다는 불같은 창작적충동을 받아안게 되였다. 하여 그는 짧은 기간에 희곡 《백두산은 어디서나 보인다》(일명 《애국자》), 영화문학 《밀림아 이야기하라》, 가극대본 《밀림아 이야기하라》, 희곡 《불사조》, 중편소설 《나는 다시 강을 건너간다》, 희곡 《나는 다시 강을 건너간다》 등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이 시기는 그가 작품창작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인 열정의 나날이였으며 창작활동에서의 전성기였다고 말할수 있다. 혁명전통주제의 첫 작품인 희곡 《애국자》를 창작할 때 능력있는 극작가인 그가 2년 반이라는 기간에 5차례에 걸쳐 구성수정작업을 진행한것만 보아도 작품의 성과적완성을 위하여 얼마나 깊은 탐구와 많은 품을 들였는가 하는것을 잘 알수 있다.

1956년 7월 10일 창작일지에는 이렇게 씌여져있다.

《2막 2장을 네번째 다시 썼다. 김명희의 대사중에서 이런것을 썼다. (최구장에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직접 총들고 싸우는것보다 더 어려웁고 중요합니다.〉라는 대사를 쓰면서 나의 창작사업에서도 직접 이런것을 느끼게 된다. 특히 이번 작품의 창작과정에서 〈직접 유격투쟁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 이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한다는것은 쓰기 어려웁고 더 책임이 무거워진다.〉고. 나는 이런 책임감으로부터 이 작품의 완성을 위하여 불사조같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송영이 창작한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마다에는 이처럼 그의 피타는 노력이 깃들어있다.

희곡 《애국자》는 압록강대안의 한 마을에서 구장노릇을 하면서 장군님께서 주신 임무를 수행한 항일유격대공작원의 이야기였다. 조직의 비밀이 생명보다 귀중하기에 구장노릇을 해야 하는 안타까운 사연을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터놓고 말하지 못하고 그들로부터 《일제의 주구》라는 갖은 비난과 저주를 받아가면서도 한가슴에 묵새기고 끝내 임무를 빛나게 수행하는 주인공, 이야기는 사실 그대로가 손색없는 하나의 극작품이였다.

송영은 일찌기 느껴본적 없는 창작적열정을 안고 붓을 달리고달려 1956년 9월에 장막희곡 《애국자》를 완성하였다.

무대에 오른 작품은 반향이 컸다. 그것이 다시 가극으로 각색되였을 때 파문은 더욱 컸다.

이때 그 창작성과를 두고 누구보다 기뻐하신분은 위대한 수령님이시였다.

어느날 극장에 몸소 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곁에 앉혀주신 송영의 손을 내내 잡으신채 참으로 커다란 만족을 표시하시였다. 그이께서는 근래에 드문 좋은 작품이라고 하시며 그때에 촌장이나 구장을 한 공작원들은 자신의 본심을 누구에게도 말할수 없었으며 빨찌산에서도 자신과 몇몇 정치일군들밖에는 몰랐으니까 빨찌산에게도 잡혀 죽을수 있었다고, 그러니 누구한테 말하겠는가고 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많은 근로자들에게 보여주는것이 좋겠다고 이르시였다.

송영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몇번이나 손수건을 꺼냈는지 모른다. 위대한 수령님께 작품을 보여드린것만도 최고의 영광인데 이처럼 높은 평가와 배려를 받아안으니 형언 못할 감격과 고마움이 가슴에 사무쳐와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베푸시는 어버이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얼마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작품에 인민상을 수여하는것과 함께 송영에게 그동안 문학창작에서 거둔 특출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인민상계관인의 영예를 안겨주도록 하시였다.

그날 동료작가들이 그를 축하해주고 수많은 관중과 독자들이 그에게 축하의 편지를 보내여왔다.

송영의 환희와 행복은 이를데 없었다. 작가에게 있어서 자기의 작품으로 수령께 기쁨을 드리고 인민들의 사랑을 받는것보다 더 큰 영광, 더 큰 행복이 어데 있으랴!

인민을 위해 마음껏 창작할수 있는 품으로 불러주신분도, 좋은 작품을 쓸수 있도록 조건을 지어주시고 소재까지 찾을수 있게 하여주신분도 수령님이신데 그이께서는 그 모든 공로와 영예를 작가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시니 이 하해같은 사랑과 은혜에 어떻게 보답을 드려야 할지 그저 가슴속으로 다함없는 경모와 감사의 뜨거운 눈물만 흘러내릴뿐이였다. 그후 10여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1972년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를 내용과 형식, 형상에서 남아있는 부족점들과 결함들을 완전히 극복하고 5대혁명가극의 하나로 훌륭히 완성하도록 크나큰 사랑과 배려를 돌려주시였다.

송영은 준엄한 조국해방전쟁을 비롯하여 영웅성과 혁명성으로 충만된 현실을 작가로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실지 목격하고 체험하면서 창작활동을 벌렸으며 영웅적문학예술을 창조할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받아안은 영광도 지니였다.

이 과정에 그는 영웅적인 우리 군대와 인민의 생활과 투쟁을 반영하고 그들의 사상감정을 담은 문학 역시 영웅적인 문학으로 되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니였으며 그 신념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하였다.

그가 이렇듯 높은 창작적지향을 안게 된데는 남다른 사연도 있다.

전후 그는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배려에 의하여 우리 나라 문화대표단 성원으로 윁남, 인도네시아 등지의 외국을 여러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마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에 대한 세계인민들의 절대적인 흠모와 칭송, 영웅적조선인민에 대한 열렬한 존경의 감정을 절감하군 하였다.

《대회 3일째 되는 날 나의 즉흥시랑송이 끝나자 전체 참가자들이 모두 일어나 〈인터나쇼날〉을 부르고 이어 조선말로 〈조선〉, 〈조선〉 하는 웨침이 터져나왔다. 조선사람으로서 사회제도가 다른 인도네시아에 가서 인도네시아사람들이 조선말로 웨치는 〈조선〉이란 소리를 들을 때 그 감회를 무어라 표현할수가 없었다. 나는 진실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된 자랑을 여기에서 더욱 크게 그리고 떳떳하게 느끼였다. 그것은 몇천만리 먼 이국땅에서 왔다 해서 의례삼아 부르는 환호성이 아니라 일제억압시절에도 굴하지 않았고 더우기 미제국주의자들의 오만한 침략을 물리친 영웅조선에 대한 례찬이요, 환영이였기때문인것이다. 그래서 나도 너무나 기뻐서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이것은 1959년 인도네시아인민문화련맹 제1차 전국대회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문화대표로 참가했던 송영이 자기가 느낀 심정을 적은 《인도네시아기행》의 한 대목이다.

또한 송영은 어버이수령님의 높은 평가를 받은 한 직물공장 녀지배인을 원형으로 한 영화문학 《두 지배인》(1962년)을 창작하여 작가로서 벅찬 현실에 민감하게 반응하였으며 력사물창작에도 관심을 넣어 희곡 《박연암》, 영화문학 《흥부전》(1962년), 민족의 숙원인 조국통일을 이룩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들의 영웅적인 4. 19인민봉기를 반영한 희곡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1960년) 등도 창작하였다.

작가는 우산장에서 희곡 《박연암》을 쓰던중 남조선에서 일어난 영웅적인민봉기에 대한 소식을 전해듣게 되였다. 라지오에서 시시각각으로 울려나오는 격동적인 소식은 작가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게 하였다.

그는 떨리는 붓끝으로 자기의 창작일기에 이렇게 썼다.

《4월 13일, 희곡 〈박연암〉을 완성하는것도 물론 중요하고 의의가 크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시시각각으로 발전되고있는 남조선정세의 크나큰 격랑속에서 어떻게 몇백년전 이야기를 쓰고 앉아있기만 하겠는가.》

연극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의 첫 공연이 6월 3일 진행되였는데 이것만 보아도 당시 창작가, 예술인들의 조국통일념원이 얼마나 절절했는가를 잘 알수 있다.

전투적인 인민항쟁의 대합창이 울리는 속에 막이 오르면 피빛같은 화염이 활화산의 봉우리에서 터져오르고 화염속에 《분노의 화산은 터졌다》는 획이 굵고 힘찬 글발이 날아오른다.

치욕적이며 반인민적인 3. 15선거를 계기로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쌓여있는 마산시의 가난한 수공업자 최재춘의 집으로 17살 난 그의 조카 김주렬소년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려고 온다. 그러나 부정선거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항쟁의 격류속에 뛰여들었던 김주렬소년은 경찰의 총에 맞아 쓰러지며 숨도 채 지기 전에 바다물속에 던져진다. 그리하여 수만명의 마산시민들은 김주렬소년의 복수를 웨치며 노도와 같이 일떠서고 남조선 각지에서도 반미자주화투쟁이 과감히 벌어지는 속에서 괴뢰도당이 어린 김주렬의 시체마저 내주지 않아 사진만 놓고 장례식을 하게 된다. 오빠의 사진을 쓸어만지며 목메여 우는 16살 소녀 김주옥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다.

이 비통한 사연을 어찌 참고 견딜수 있겠는가. 이제 더는 참을수가 없다. 한탄만 하던 최재춘로인도 분연히 일어나 자기 조카 김주렬을 죽인 살인경관의 권총을 빼앗아 그놈을 쏘아눕히고 자기도 총에 맞아 쓰러지며 복수를 부르짖는다.

최재춘의 아들 최승원을 선두로 한 항쟁군중의 기세에 겁을 먹고 대사관안에 몰려든 미제살인귀들은 허수아비괴뢰를 갈아치우는 방법으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한다.

그러나 놈들의 잔꾀에 속지 않고 손에 무장을 잡은 인민의 항쟁기세가 더욱 고조될 때 막이 내린다.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여 마산에서부터 발단된 4. 19인민봉기의 전모를 보여주면서 남조선인민들이 당하는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은 미제국주의의 남조선강점과 그에 아부굴종하는 사대매국무리들의 썩은 정치에 있다는것을 명백히 밝히고 반미자주화투쟁의 불가피성을 확증하였다.

우리 민족이 수천년력사에서 처음으로 맞이하고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형상을 창조하는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작가적의무로 간직한 그는 력사적인 보천보전투를 승리에로 이끄신 수령님의 업적을 칭송한 희곡 《보천보의 홰불》(1967년)을 창작하는데서 핵심적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님을 처음으로 형상한 희곡 《푸른 소나무》(1968년)창작에도 기본성원으로 참가하여 혁명연극창조사업에 이바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혁명전통주제의 작품들을 창작하여 근로자들에 대한 혁명교양에 이바지한 송영을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는 그 바쁘신 속에서도 가극 《밀림아 이야기하라》와 연극 《불사조》를 지도해주시였다.

그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연극 《불사조》를 보아주시고 정말 작품을 잘 썼다고, 이렇게 좋은 연극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보여주어야 한다고 분에 넘치는 치하의 말씀을 해주시며 거듭거듭 자기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던 그날의 감격을 잊을수 없었다.

그는 혁명전통주제의 작품을 더 많이 창작할데 대하여 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명심하고 창작활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벌리였으며 그 과정에 우리 나라에서의 첫 인민상계관인(1959년)의 영예를 지니게 되였던것이다.

이처럼 송영은 창작의 전기간 우리 혁명의 주요행정과 사변들에 언제나 열렬하게 호응하여 사상예술성이 높은 다양한 형태와 주제의 작품들을 적극 창작함으로써 자기의 창작활동이 곧 혁명승리에 이바지하는 투쟁으로 되게 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아동문학으로부터 성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단편소설로부터 장편소설에 이르기까지, 단막희곡으로부터 장막희곡, 영화문학과 가극대본, 시와 가사는 물론 수필, 수기, 단상, 기행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를 포괄하는 문학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베푸시는 정치적신임은 날로 더욱 깊어져 그는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작가동맹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문예총중앙위원, 국립연극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등 책임적인 여러 직책에서 사업하면서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수령님의 위대성을 직접 체험하는 행운을 지니였다.

이처럼 송영은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공민으로서 영광의 최절정에서 살아온 행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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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1)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2)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3)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4) 영화계의 첫 영웅칭호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5) 수령형상영화의 첫 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1) 새 삶의 품으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2) 행복은 꽃피여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3)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1) 이루어진 소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2) 보람찬 창조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3) 영생하는 인민의 배우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1) 미술가로부터 촬영가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2) 어버이의 보증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3)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4) 안해의 추억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1) 《임자없는 나루배》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2) 《내 고향》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3) 인생의 참다운 포구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2) 《내 고향》을 찾은 류민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1) 북녘땅에서 다시 찾은 어린 날의 꿈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2) 보람찬 미술창작활동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3)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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