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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송 영 (작가)

 

                        • 1903년 5월 24일 서울에서 출생.

                        • 1923년 염군사를, 1925년 카프를 조직하는데 참가.

                        • 1946년 8월부터 북조선연극인동맹 위원장,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대외문화련락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등으로 활동.

                        • 1977년 1월 3일 사망.

                                                           

 

 

민족적량심을 가지고 애국의 길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라면 비록 그가 지나온 경력에 곡절은 있어도 영원한 동행자로 믿고 불변의 사랑과 의리로 운명을 지켜주고 빛내여주는 한없이 은혜로운 품, 그것이 바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품이다.

작가 송영은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절세위인들의 사랑속에 영생하고있는 사람들중의 한사람이다.

 

 

새 삶의 품으로

 

해방의 감격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1946년 6월 어느날이였다.

미제가 살판치는 남조선에서 창작의 붓을 들지 못하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있던 송영에게 하루는 뜻밖에도 평양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평양에서 찾아온 사람은 송영에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북반부로 오고싶어하면서도 미제와 반동들의 반공선전에 속아 북반부로 오지 못하고있는 남조선의 작가, 예술인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이 계셔서 왔다고 하는것이였다.

《아니, 김일성장군님께서 저를 불러주셨단 말입니까?!》

송영은 너무도 놀라운 사실앞에서 높뛰는 심장의 박동을 눅잦힐수 없었다.

건국사업에 그토록 분망하신 만고의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들까지도 안중에 두시고 친히 평양으로 불러주시다니…

이날 송영이 그처럼 반가운 소식에 접하고도 선뜻 믿지 못한데는 그럴만 한 사연이 있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의 청장년들을 징병과 징용에 마구 끌어내가는 한편 조선연극문화협회라는 친일단체를 조작하고 여기에 적지 않은 연극인들을 강압적으로 망라시켰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총독부의 관리가 송영을 불러다놓고 《대일본제국》을 위한 연극단체가 나왔는데 여기에 가입할 의사가 없는가고 물었다. 송영이 뜻밖의 어처구니없는 질문에 기가 막혀 미처 입을 열지 못하고있는데 그자는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사여하를 불문하고 조선의 연극인들은 무조건 다 망라되여야 하는것이니 목숨을 버리기가 싫거든 가입해야 한다고 을러메였다. 송영이 죽어도 가입할 의사가 없다고 하였으나 그자는 이미 총독부에서는 그를 협회리사로 결정하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상임명예직에 불과한것이니 크게 할 일도 없고 욕을 볼것도 없다고 하면서 더 의향을 묻지도 않고 그를 돌려보내는것이였다.

그가 본의아니게 수치스러운 직분을 받게 된 경위는 대체로 이러한것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송영은 밤새껏 잠들수 없었다.

그는 쓰라린 마음을 안고 지난날을 돌이켜보았다.

송영(본명 송무현)은 1903년 5월에 서울의 어느 한 문인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문학애호가였고 아버지 역시 《강능추월》을 비롯한 신소설을 창작한 작가의 한사람이였다. 그러고보면 3대를 문학을 업으로 살아왔다고 볼수 있다.

송무현은 서울 보인학교를 거쳐 1917년에 서울 배재고보에 입학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박세영과 같은 학년에서 공부하게 되였다. 처음부터 창작에서 두각을 나타낸 문학소년 송영에 대하여 시인 박세영은 이렇게 회상하였다.

《학생시절에 송영은 특히 작문에서 우수한 모범을 보였다. 그리하여 작문교원은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나중에는 간혹 송영의 작문으로 작문시범까지 하여 우리들에게 보여주기까지 하였다. 16살의 소년으로서 자긍할수 있었건만 그는 더없이 겸허할뿐이였다.》

2학년때에 송무현은 박세영, 리적효, 리호와 함께 《새 누리》라는 륜독문예습작잡지를 발간하였다.

당시 서울 배재고보에는 량심적인 민족주의지식인들이 적지 않게 교편을 잡고있었기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그 영향을 받아 반일적인 민족주의사상이 농후하였다.

《새 누리》에는 작가들의 애국적인 시, 산문들과 애국명장들의 전기들 그리고 조국산천을 례찬한 기행문들도 편집하였다.

《새 누리》를 발간할 때부터 송무현은 필명을 송영(宋影)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우주의 그림자란 의미이다. 말하자면 그는 세계에서 제일가는 문호가 되여보겠다는 꿈을 안고있었는데 10대의 젊은 나이치고 놀랄만 한 일이였다.

그때 서울 배재고보에서는 그의 선배들인 박팔양, 윤기정, 김소월, 라도향이 공부하고있었다. 그리고 후배들인 박승극, 리지용, 라웅, 김욱, 황철 등이 있었다.

1919년 3. 1인민봉기를 계기로 송영은 동창생인 박세영 등 몇몇의 학우들과 함께 《자유신종보》라는 비밀프린트신문을 6호까지 발행하였는데 군중들속에 독립사상을 고취하는데서 일정한 작용을 한것으로 하여 퇴학처분을 받게 되였다.

1919년 가을 대부분의 학생들은 복교하였지만 송영은 학교로 갈수 없었다. 그것은 비밀프린트신문으로 하여 일제경찰이 그에게 《사상불온》이라는 딱지를 붙여놓았으며 한편으로는 가정의 령락때문이였다.

그는 운송점에서 잡역으로 일하게 되였다. 로동생활은 그의 사상의식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문학수업의 원천으로 되였다.

그는 넘치는 열정을 다 바쳐 《구름 끝까지》와 《어부》라는 근 만매에 가까운 두편의 습작장편소설도 썼고 고리끼의 《최하층》, 고골리의 《검찰관》, 체호브의 희곡작품 등 수많은 작품들을 탐독하면서 문학수업을 꾸준히 해나갔다.

그후 송영은 우편국의 하급사무원으로 있던중 왜놈우편국장의 민족적차별과 멸시를 참을수 없어 잉크병으로 답새기고 그길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꾜의 유리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일하면서 도꾜대학 예술과 야간을 다니였다. 낮에는 고된 로동을 하고 밤에는 늦도록 공부하였으며 어떤 때는 쉬는날에도 일하러 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의 이러한 생활체험은 송영의 세계관형성과 작가적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22년말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그는 제약공장에서 로동자로 일하였다.

이무렵 송영은 문학을 지향하는 동료들과 함께 현실에서 어지럽게 범람하는 각종 문학류파들을 놓고 론의하면서 인민대중의 요구를 반영한 새로운 문학단체를 조직할것을 다짐하였다.

이리하여 1923년에 드디여 송영은 리호, 리적효 등 문학청년들과 함께 우리 나라에서 첫 프로레타리아문학단체인 염군사를 조직하였다.

당시 《창조》, 《페허》, 《백조》 등 출판물을 통하여 자연주의, 퇴페적랑만주의가 횡행하는 조건에서 염군사는 독자들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일환으로 잡지 《염군》을 발간하였다.

《염군》이란 불꽃의 무리라는 뜻으로서 장차 이 땅에 휘몰아칠 프로레타리아문학운동의 불길을 일으킬 새 세대 문학인들의 의지와 신념을 표현한 명칭이였다.

일제경찰의 탄압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염군사는 자기의 기관지를 통하여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가을에 나온 《염군》 2호에는 송영의 단편소설 《남남대전》이 발표되였으며 1924년 초봄에 나온 3호에는 희곡 《백양화》와 단편소설 《어두운 마을》이 발표되였다.

그는 작품들에서 계급투쟁의 현실을 반영하였으며 매국노들의 죄행을 폭로비판하였다.

기관지를 통하여 송영을 비롯한 동인들은 힘차게 창작활동을 벌렸으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염군》은 겨우 3회를 발간하고 페간당하고말았다.

1924년에 송영은 단편소설 《늘어가는 무리》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우리 나라에서 로동계급의 투쟁을 형상한 첫 작품으로 되였다.

송영은 1925년 염군사, 파스큐라의 문학단체성원들인 조명희, 리기영, 한설야를 비롯한 작가들과 평론가 임성재, 리성태 등과 함께 조선프로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을 결성하였다.

이때부터 송영은 카프조직의 중심인물의 한사람으로서 창작활동을 활발히 벌리는 한편 카프조직을 확대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에 한몸 다 바쳐 일하였다.

카프는 결성시기부터 리광수, 최남선, 김동인, 렴상섭 등 반동작가들의 부르죠아문학의 기만성과 반인민성을 철저히 폭로규탄하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새로운 문학창조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 시기 카프문학작품들은 아직도 초기프로레타리아문학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있었다. 이러한 형편은 카프조직을 새로운 단계에 적응하게 개편확대강화할 문제를 제기하였다.

1927년 카프조직은 총회를 열고 보다 높은 단계로 이행하기 위한 대책을 세웠으며 새로운 강령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지역별로 위원들을 선거하였다.

송영은 개편된 카프의 서기장이 되였다. 그는 기관지 《조선문예》, 《문학창조》편집사업에도 관계하였으며 아동잡지 《별나라》편집도 맡아보았다.

송영은 로동계급의 투쟁을 반영한 첫 작품으로 되는 단편소설 《늘어가는 무리》를 비롯하여 단편소설 《용광로》(1925년), 《선동자》(1925년), 《석공조합대표》(1926년) 등 소설창작활동을 왕성하게 벌리였다.

이 시기 송영은 작품들에서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침략자와 착취자를 증오하며 그들과 싸우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특히 단편소설 《석공조합대표》는 그의 창작계렬에서뿐아니라 우리 나라 프로레타리아문학발전에 새로운 기여를 한 작품의 하나로 된다.

송영은 또한 정평농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중편소설 《호미를 쥐고》, 홍원농민들의 투쟁을 반영한 단편소설 《군중정류》도 썼다.

그는 정평농민들의 투쟁소식을 듣고 지체없이 현지로 가던 도중 고원역에서 경찰에게 단속되였다. 경찰은 그를 체포억류하였다가 서울로 되돌려보냈으나 그는 다시 정평으로 가서 투쟁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취재하고 중편소설을 창작하였던것이다.

이 시기 송영은 단편소설 《옷자락은 기발같이》(1929년), 《쫓겨가신 선생님》(1930년), 《새로 들어온 야학생》(1931년), 《을밀대》(1931년) 등 아동문학작품들을 적지 않게 창작하여 프로레타리아아동문학발전에도 기여하였다.

송영은 리기영, 한설야 등과 더불어 반동적부르죠아문학의 본질을 폭로하는 평론활동도 줄기차게 벌리였다.

그는 수필 《선풍칠 순간》에 이어 평론 《1931년의 조선문단개관》을 《조선일보》 1931년 12월 17일부에 집필발표하였다. 이 평론은 량주동, 정인섭이 1931년을 《프로문학의 부진의 해》라고 중상야유한것을 반박하여 쓴것이다.

송영은 이 글에서 부르죠아문단의 반동성을 폭로하면서 1931년은 카프문학운동이 상승하고 성장하여온 해였다는것을 힘있게 론증하였다.

송영은 평론에서 최남선의 정체를 찍어서 발가놓았다.

당시 카프에는 전문평론가들이 별로 없는 조건에서 작가들이 여기에 직접 참가하였는바 리기영은 리광수, 김동인을, 한설야는 렴상섭, 김화산을 그리고 윤기정은 권구환을, 송영은 량주동, 정인섭을 상대로 하여 투쟁하였다.

송영이 쓴 평론 《1931년의 조선문단개관》이 발표되자 너무도 명백한 사실앞에서 부르죠아문단은 어쩔수 없이 입을 다물고말았다.

1920년대말부터 송영은 소설과 아동문학, 평론을 쓰는 한편 희곡을 주로 창작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우수한 희곡작품들을 창작하여 두각을 나타내였다. 《호신술》(1928년),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1929년), 《신임리사장》(1934년), 《황금산》(1937년), 《김삿갓》(1938년)은 해방전 그의 희곡작품들중에서 주목되는것들이다.

당시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예술이 없었다. 하여 1920~1930년은 프로레타리아연극의 개화기, 전성기였다.

송영의 희곡작품들은 어느것이나 다 신랄한 풍자로서 특징적이다.

희곡 《일체 면회를 거절하라》는 착취사회현실을 폭로비판하고 규탄한 송영의 극문학의 대표적작품이다.

작품은 파국적인 경제공황이 세계 자본주의나라를 휩쓸던 1920년대말을 시대적배경으로 하여 애국자의 탈을 쓰고 사리사욕과 리기적목적을 추구하고있는 한 자본가의 정체를 예리한 풍자의 불길로써 신랄하게 조소하고 타매한 작품이다.

무대는 어느 도시의 방직공장 사장실이다. 예속자본가인 사장은 경제공황에서 벗어나보려는 자기의 책동에 제 심복인 지배인과 잡지사 주필, 기생 등을 끌어들인다.

풍자대상인 이 사장은 큰 자본가들이 련이어 파산당하는 경제공황에서 살아나 많은 돈벌이를 해보려고 《국산장려》라는 간판을 내들고 그것을 선전하려고 획책한다.

그는 《국산장려》라는 말을 선전하면서 인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기 공장의 제품을 팔아먹으려고 꾀한다.

먼저 기생들을 청해다가 자기 공장에서 짠 천으로 옷을 지어 입혀서 어디로 불려가든지 《자작자급의 정신》을 말하라고 하면서 운동비를 쥐여준다. 한나산잡지사 주필을 불러서는 다 같은 피줄인데 계급투쟁을 하지 말자고 선전하면서 선전비용 천여원을 찔러준다.

사장은 이처럼 제놈의 오그랑수를 위해서는 돈을 물쓰듯 하면서도 로동자들에게 내줄 얼마 안되는 임금마저 잘라먹고 내주려 하지 않는다.

사장의 이러한 잔꾀가 실현되기도 전에 수십명의 로동자들이 항의하러 밀려들며 신문사의 기자들과 기생들도 돈을 달라고 찾아오는바람에 질겁하여 전화도 면회도 일체 거절하라고 악을 쓰면서 당황망조하는데서 작품이 끝난다.

작품은 일제에게 아부굴종하면서 인민들을 억압착취하는 착취계급의 반인민적본성을 적라라하게 폭로하고 로동계급의 혁명적진출에 의한 착취제도의 멸망의 필연성을 강조하고있는것으로 하여 해방전 사회주의적사실주의문학의 대표작으로 문학사에 남았다.

그의 작품이 담고있는 사상적내용과 사실주의적수법, 주인공들의 성격적특질이 뚜렷한 대사, 해학과 풍자를 통한 성격형상 등은 해방전 우리 나라 희곡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수 있다.

또한 송영은 시인 박세영과 함께 신인육성사업을 맡아 김북원, 리원우, 신고송, 안룡만, 남궁만, 남응손, 장승한, 송순일 등 당시의 신인청년작가들을 키워냄으로써 후날 우리 문학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934년 일제는 카프를 없애버리려는 계획밑에 사건을 조작하여 2차검거를 하였다. 송영은 리기영, 한설야 등 수많은 카프성원들과 함께 전주감옥에서 령어생활을 하게 되였다.

두차례의 검거선풍으로 하여 카프는 비참하게도 1935년에 자기의 존재를 끝마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가 카프를 강제로 해산시키였지만 조선문학의 견결한 지향정신과 애국애족의 터전에서 싹트고 자라온 그 명맥은 도저히 끊어버릴수 없었다.

합법적인 카프의 간판이 내려진 뒤에도 송영, 리기영, 한설야를 비롯한 핵심적인 전위작가들은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송영은 리기영으로부터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선인민혁명군을 창건하시고 무장투쟁을 힘차게 벌리고있다는 감격스러운 소식을 듣고 크나큰 흥분에 휩싸였다.

송영은 일제의 적극적이고 로골적인 비호를 받고있는 문인보국회를 비롯한 친일어용문학과 맞서 붓을 들고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일제에게 항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의 희곡 《유훈》(2막)과 정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내용의 가극 《금화의 피리》를 창작발표하였다.

그리고 일제침략자들을 폭로풍자한 풍자극 《전엉터리》를 창작하였다.

참으로 송영은 해방전 문학작품을 통하여 당대 사회제도를 비판하고 우리 인민의 민족적 및 계급적해방을 주장하였으며 무산계급의 선각자를 전형으로 내세우고 사회주의적리상을 제기한 선진적작가의 한사람이였다. …

그런데 이러한 자기가 일제의 강압으로 친일단체의 무슨 리사로 되였다는것이 정말 억울하고 통분하기 이를데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신문에 공개장이라도 써내여 세상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리고싶었지만 놈들의 보복때문에 선뜻 그럴 용단을 내리지 못하는 나약한 지식인인 자신이 얼마나 역겨운지 몰랐다.

이런 고달픔과 괴로움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던 그는 어서빨리 나라가 해방되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8. 15를 맞았다. 그러나 기쁨은 순간이였고 미군의 남조선강점으로 하여 눈앞은 또다시 캄캄해지기만 하였다. 서울에서는 어느덧 적지 않은 작가, 예술인들이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의 품을 찾아 38 선을 넘어가고있었지만 송영은 욕된 경력때문에 그렇게도 할수 없는 자신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몰랐다. 게다가 공산주의자들은 친일파들을 숙청하는데 북에 갈 생각은 아예 하지도 말라는 일부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면 금시 가슴이 미여지는듯 했다.

그러던 어느날 깊어가는 번민으로 가슴을 태우던 그가 위대하신 김일성장군님의 부르심을 받는 꿈같은 행운을 지니게 되였으니 마음속에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컸으랴.

그날 송영은 아버지에게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아버님, 저는 북으로 가겠습니다. 제가 일본놈들의 연극단체에 들었던것을 걱정한것은 공연한것이였습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민족적량심이 있는 사람이면 과거경력은 개의치 않고 누구나 기꺼이 받아주신다고 합니다.》

《과시 품이 넓으신분이시구나! 그럼 떠나거라. 북에 가서도 네 량심껏 일한다면야 누가 나무람하겠느냐. 아무쪼록 장군님을 받들어 좋은 글을 쓰거라.》

며칠후 송영은 몇몇의 작가들과 함께 평양을 향해 떠났다.

송영이 선택한 북행길, 그것은 욕된 경력때문에 늘 위구와 불안속에 살던 그가 만시름을 놓고 안길수 있는 넓고 따사로운 사랑의 품으로 찾아간 행복의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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