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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령형상영화의 첫 연출가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1975년 6월 백두산창작단 창작가들에게 위대한 수령님의 혁명력사와 혁명적가정을 반영한 첫 수령형상작품으로서 예술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창조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면서 이 영화의 연출을 친히 박학에게 맡겨주시였다.

그이께서는 박학이 비록 나이 60을 넘긴 몸이였지만 실력으로 보나 창작적개성으로 보나 모든 점으로 미루어보아 이 영화를 훌륭히 연출해낼수 있는 적격자로 보시였던것이다.

그렇게도 소원하던 중임을 맡은 박학은 이날 예술영화 화면에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기 위해 기울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령도를 생각하며 온밤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박학의 머리속에는 언뜻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병약한 자기를 친히 이름을 찍으시여 백두산창작단 연출가로 소환시켜주시던 일이며 잊지 못할 1969년 2월 16일에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자신의 탄생일을 축하하러 온 박학을 비롯한 창작가들에게 우리의 영화예술이 그동안 적지 않게 발전하였다, 우리는 혁명적대작들도 만들었고 이제 곧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친필하신 불후의 고전적명작들을 영화에 옮기기 위한 사업에도 착수하게 된다, 그러나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의 화면에 정중히 모시기 위한 사업만은 아직 시작하지 못하고있다는 심려의 말씀을 하시였다.

만민의 축원을 받으셔야 할 경사스러운 탄생일에도 우리 영화예술의 근본문제를 두고 그토록 심혈을 바쳐가고계시는 그이앞에서 박학은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수가 없었다.

그이께서는 이어 나는 방금전에도 어떻게 하면 그처럼 위대하신 수령님의 영상을 예술영화의 화면에 모실수 있겠는가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수령님께서 혁명의 길에 나서신지도 벌써 50년이 가까와오는데 아직도 수령님의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모시지 못한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서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시였다.

그이의 말씀은 절절하시였다. 박학은 그날부터 가슴에 연추를 매단듯 한 심정이였다.

그토록 갈망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긴 때로부터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각별한 총애를 받으며 수많은 예술영화를 만들어낸 영화계의 원로로서 인생말년이 가까와오는 오늘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단 한번도 모시지 못한것을 생각하니 자신이 민망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영화들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옵고 감격에 목이 메여 흐느끼는 장면들을 수없이 형상하였지만 아쉽게도 그런 장면에서조차 수령님의 영상을 모시지 못한채 장면을 비약하지 않으면 안되였던 박학은 시대와 인민앞에 죄를 진듯 한 심정이였다.

그렇게 놓고보면 자신을 우리 나라 영화계의 원로라고 자부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러웠고 더우기 예술적으로나 정치사상적으로 아직 준비가 어린 영화인이라는것을 자인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내가 정말 이 영화를 그이께서 의도하시는대로 만들어낼수 있을가.)

박학은 이러한 위구심을 안고 다음날부터 실재한 력사적사실을 어떻게 하나 예술적으로 진실하게 형상하기 위하여 진지한 창작전투를 벌려나갔다.

영화의 창조과제는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권동지와 조선의 어머니 강반석녀사의 혁명활동을 보여주면서도 위대한 수령님의 숭고한 형상을 창조하는 참으로 영광스럽고도 어려운 과업이였다.

처음엔 좌왕우왕이 없지 않았다.

혁명일가분들의 인간관계와 생활을 격식화하고 기록주의적으로 라렬하여 작품을 딱딱하게 만들어 경애하는 장군님께 걱정도 끼쳐드리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수령형상영화의 연출을 맡고 모대기던 박학에게 위대한 인간들의 생활을 잘 아는 창작가들만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할수 있다는 뜻깊은 가르치심을 주시면서 여러차례에 걸쳐 새벽 4시가 넘도록 영화의 부족점들을 하나하나 지적해주시고 수정대안까지 찾아주시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박학은 뜻밖에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보내주신 선물을 받아안게 되였다. 만경대일가분들의 전기도서인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 《불요불굴의 혁명투사 김형직선생》, 《조선의 어머니》 등 귀중한 책들이였다.

그때까지 박학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사랑속에서 많은 선물들을 받아왔지만 이처럼 책들을 받기는 처음이였다.

이것은 중요한 영화창작을 맡은 박학에게 혁명일가분들의 생애와 활동에 대하여 더 깊이 연구하도록 하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은정어린 사랑이 담긴 선물이였다.

박학은 그 책들을 읽고 또 읽었다.

집에서도 읽고 차안에서도 읽고 촬영현지에서도 읽으면서 위대한 인간들의 생애와 활동에서 사소한 이야기도 놓치지 않고 깊이 새겨넣었다.

그리하여 박학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밝혀주신 이 작품의 종자인 죽을지언정 절대로 꺾이지 않는 혁명적신념과 불굴의 의지에 관한 사상을 형상하는 창조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나갈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77년 4월 15일을 맞으며 창작가들이 만들어올린 수령형상의 첫 예술영화인 《누리에 붙는 불》을 보시고 영화를 아주 잘 만들었다고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가 담고있는 력사적사건과 인물들이 모두 사실과 같으며 당시 우리 인민들의 비참상과 시대상이 진실하게 그려졌다는데 대하여 치하해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영화가 만족스럽게 잘되였다고 거듭 평가하시면서 영화를 창작한 일군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달할데 대한 분에 넘친 말씀도 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높으신 평가는 수령형상의 첫 예술영화를 최상의 수준에서 완성시켜주시려는 경애하는 장군님의 정력적인 지도를 떠나서는 생각할수 없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가 창작되던 첫 시기인 1975년 12월 한달사이에만도 여러차례 작업필림을 보아주시면서 작품이 담아야 할 기본이야기줄거리와 혁명일가분들의 투쟁업적 그리고 력사적사실자료들을 전형화하는데서 나서는 모든 문제들을 일일이 가르쳐주시였을뿐아니라 영화가 완성될 때까지 무려 수십차례나 강령적가르치심을 주시여 수령형상영화의 첫 작품으로서 손색없는 완전무결한 영화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영화의 황수원숲속장면이라든가 토장장면 같은것은 장군님께서 직접 찾아주신 명장면들이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영화에서 시대상과 비참상을 잘 그리기 위한 방향과 방도들도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고 한마디의 대사와 행동, 표정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가르치심을 주시여 오늘과 같은 성과작으로 되도록 이끌어주시였다.

영화는 그해 텔레비죤으로 전국에 방영되였다.

《오늘 새로 나온 영화 봤어?》

《봤어, 야! 우리 수령님을 뵈웠어. 그리구 강반석어머님도 뵈웠어.》

《정말 꿈같구만.》

그날 온 나라 인민은 감격에 넘쳐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만 2년이라는 고심어린 나날끝에 박학은 조선영화인으로서의 최대의 숙원을 풀었다. 그는 어버이수령님의 존귀하신 영상을 예술영화화면에 모신 최초의 영화연출가로 되였던것이다.

그 나날에 그는 혁명적영화창조에 관한 경애하는 장군님의 사상과 리론으로 무장하고 예술적으로 원숙해지고 대담해졌다.

혁명영화창조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확신을 가진 그는 이어 혁명영화 《첫 무장대오에서 있은 이야기》를 연출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이 영화는 혁명영화 《누리에 붙는 불》을 창조할 때보다 훨씬 빨리 완성되였다.

그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성장한 박학의 모습을 보여주는것이였다.

그런데 이런 보람찬 혁명영화창조의 나날에 박학은 자기의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여 기울기 시작한다는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한 작품만 더 만들자.》

박학은 심하게 앓는 몸으로 또다시 항일녀성영웅이신 김정숙어머님을 형상한 혁명영화 《미래를 꽃피운 사랑》을 만들었다.

혁명의 어머니 김정숙어머님을 뵙고싶어하는 우리 인민의 간절한 소망을 또 풀어주었다는 긍지로 하여 박학은 더없이 행복하였다.

그는 이어 숨돌릴새 없이 또다른 혁명영화창조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약한 육체는 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았다. 위험계선을 넘어선 병마는 종시 그의 육체를 무너뜨리고말았다.

혁명영화의 마지막편집작업을 하다가 새벽에야 집에 들어와 누웠던 그는 《한 작품만 더…》라는 마지막말을 끝맺지 못한채 숨을 거두었다.

 

 

*          *

 

재능있는 영화예술가는 애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일군들은 그의 사망에 대하여 경애하는 장군님께 즉시 보고드리지 못하였다.

너무도 다망하신 사업으로 긴장한 시간을 보내시는 그이께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드려 마음을 아프시게 할수 없어서였다.

시간이 지나서야 박학의 사망을 아시게 된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왜 이제야 알리느냐고 일군들에게 엄하게 말씀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혁명의 첫 시기부터 함께 일해오던 재능있는 전사가 영영 자신의 곁을 떠났다는것이 정녕 믿기가 어려우시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였건만 68살을 일기로 떠나간것이 무정하게만 느껴지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아프신 마음을 달래시며 박학동무는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에 출연한 때로부터 30여년간 좋은 영화들을 많이 창작한 재능있는 연출가였다고 그의 생애를 추억하시면서 신문과 방송에 부고를 내여 재능있는 영화연출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것을 알게 하고 장의도 사회장으로 잘할데 대하여 가르쳐주시였다.

그의 령전에는 화환이 놓여있었다.

1982년 11월 12일 《평양신문》에 발표된 박학의 사망과 관련한 부고에는 다음과 같이 씌여져있다.

《동지는 인민의 사랑을 받는 배우로서, 재능있는 연출가로서 불후의 고전적명작 〈꽃파는 처녀〉를 각색한 예술영화 〈꽃파는 처녀〉를 비롯한 사상예술성이 높은 많은 영화들을 창작하여 우리의 영화예술을 개화발전시키는데서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고인의 령구에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된 화환이 진정되였다.》

오늘도 우리 인민들의 추억속에 소중히 자리잡고있는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배우 박학.

그는 오늘도 애국렬사릉에서 전진하는 우리 조국과 함께 영생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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