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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재생의 기쁨과 희망을 안고 해방된 조선의 첫 영화예술인대오에 당당히 들어선 박학은 영화촬영소를 튼튼히 꾸리는 사업에 투신하는 한편 새형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력사적인 창조사업에 자신의 온갖 정열을 다 쏟아부었다. 그의 마음은 늘 창작적열정으로 불타고있었다.

하여 박학은 해방후 첫 예술영화 《내 고향》(1949년)의 력사적화폭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게 되였다.

문학으로부터 시작하여 연출, 연기, 촬영 등 모든 분야에 걸쳐 위대한 수령님의 구체적인 지도를 받으며 창조된 이 영화에서 박학은 악질지주일뿐아니라 친일주구인 최경천의 아들 인달역을 아주 훌륭히 수행하였다. 영화에서 인달은 경찰의 앞잡이가 되여 경방단 단장의 자격으로 마을사람들을 징용에 내몰며 일제의 공출받이에 앞장서는가 하면 관필의 애인인 옥단이를 검질기게 유혹하려 든다.

그가 가증스러운 인달형상을 얼마나 생동하게 하였는가 하는것은 당시 길을 가던 청소년들이 그를 보고 《인달이 개새끼》라고 저주와 분노를 표시한데서 그리고 어느 한 나라에서 진행되고있는 영화축전에 참가하였을 때 그곳 조직일군들이 박학에게 《최인달선생》이라고 유모아적으로 호칭한데서 뚜렷이 표현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무에서 유를 창조한 영화라고 높이 평가하신 이 작품은 항일혁명투쟁의 력사적의의와 그 위대한 생활력을 깊이있게 반영하고 해방후 우리 나라에서 민주주의적민족예술영화창조의 첫 개시를 선포하였다는 의미에서 획기적리정표로 되였으며 이후의 영화창조실천에 귀중한 디딤돌로 되였다.

박학은 이 작품에 이어 해방후 두번째 예술영화인 《용광로》의 주인공 최용수역을 그리고 세번째 예술영화인 분계연선 은파산일가의 생활을 취급한 《초소를 지키는 사람들》의 주인공역에서도 성공하였다.

조국해방전쟁시기에 창조된 예술영화 《또다시 전선으로》, 《비행기사냥군조》, 《정찰병》 등에서도 그는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관록있는 배우로 되였다.

전후시기에 박학은 예술영화들인 《다시는 그렇게 살수 없다》, 《형제》, 《준령을 넘어서》, 《동이 튼다》, 《두만강》 그리고 연극 《위대한 힘》 등에서 주인공 또는 주역으로 출연하여 진실한 역형상으로써 관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박학의 이러한 예술적재능을 누구보다 먼저 헤아려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의 소망대로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내세워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신임속에 연출가로 된 박학은 첫 연출작품으로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맡게 되였다.

그는 자기의 창조적지혜와 재능을 남김없이 발휘하여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훌륭히 창조해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62년 1월 4일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를 보시고 영화가 결함이 없이 잘되였다고 하시면서 당정책을 정확히 반영하였으며 현실도 진실하게 반영한데 대하여 높이 평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이 영화에 인민상을 수여하자고 말씀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박학이 처음으로 연출한 예술영화 《분계선마을에서》는 1962년 2월 2일 조선영화사상 처음으로 인민상을 수여받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학이 더 큰걸음을 내디디도록, 시대와 인민이 요구하는 작품을 더 많이 만들어내도록 세심한 지도와 각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시였다.

박학은 예술영화 《혁명의 길》(《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연출을 맡고 그 첫 필림을 완성하여 어버이수령님께 올린 후 영화에 대한 교시를 주시기만을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있었다.

새해가 밝아 어느덧 보름이 지난 1월 중순의 어느날 박학과 창작가들은 해당 일군으로부터 수령님의 교시를 흥분속에 전달받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영화가 전반적으로 잘되였다고 치하하시면서 영화의 제목으로부터 인물의 대사, 혁명투쟁의 본질을 옳게 그리는 문제를 비롯하여 영화에서 수정하여야 할 몇가지 결함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특히 녀주인공이 지하공작에서 돌아오라는 지대장의 지시를 받고 기뻐서 거울을 들여다보며 몸단장을 하는것은 소시민적인 행동이라는것과 녀주인공이 적에게 체포될 때 인차 독약을 먹고 순순히 끌려갈것이 아니라 적들의 간담이 서늘하게 후려쳐야 한다는것을 지적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적어나가고있던 박학은 그 순간 죄스러움으로 하여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그것은 두 장면 다 영화문학에는 씌여있지 않았던것을 연출가인 박학이 그렇게 만든것이였다.

사실 그 장면들은 영화연출가인 박학의 정치사상적준비정도를 집중적으로 드러낸것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녀주인공이 거울앞에서 얼굴을 들여다보는 장면으로 말하면 연출가로서는 그 어떤 성격탐구의 시도라고 보았던것이다. 박학은 지하공작원이라 하더라도 녀성은 녀성만이 가지는 특징적인 생활이 성격형상에서 풍겨나와야 하지 않겠는가고 생각하면서 그가 부대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거울부터 들여다보는 화면을 넣었던것이다. 이것은 박학이 혁명투사의 높은 정신세계를 리해하지 못하고 또 지난날의 낡은 소부르죠아적미학관의 잔재를 극복하지 못한데서 나온 사상적과오였다.

녀주인공이 체포되는 장면을 놓고보아도 그러하였다.

박학은 녀주인공이 독약을 먹고 자살하는것을 설정함으로써 혁명가의 강의한 의지와 고상한 혁명적지조를 보여줄수 있으리라고 타산하면서 제딴에는 이것이 그 어떤 새로운 발견이라도 되는듯이 자부하였던것이다.

혁명가의 풍모를 심히 손상시킨 이 모든 연출상의 결함은 전적으로 박학이 아직 혁명적세계관이 똑바로 서있지 못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교시를 전달하고나서 해당 부문 일군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 교시를 주시기까지 영화를 여러번이나 보아주시였다는것을 알려주었다.

박학은 고개를 떨군채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불과 보름동안에 여러번이나 보아주시다니! 그것도 상하편 18권을, 한번 돌리자면 3시간 반이나 걸리는 이 긴 영화를…

수령님의 은덕에 무엇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 영화의 완성을 위하여 그토록 심려하고계시는데 연출가인 나는 과연 무엇을 하였던가!)

박학은 자책으로 하여 가슴이 터질것만 같았다.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전달받고 집으로 돌아온 박학은 좀처럼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박학은 다음날부터 자신의 잘못을 채찍질하고 수령님의 교시의 구절구절을 되새겨가면서 영화의 수정작업에 달라붙었다.

혁명전통주제의 대표작으로 완성하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는 박학의 심장을 무한히 격동시켰으며 모든 열정을 여기에 쏟아붓게 하였다.

박학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그 장면들만 고쳐놓으면 영화는 완벽을 기할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모든 노력을 거기에만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녀주인공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과 독약을 먹는 장면을 비롯하여 수령님께서 지적하여주신 장면들이 빠른 시일안에 수정되였으며 영화를 다시 어버이수령님께 올릴수 있게 되였다.

그로부터 얼마후인 1966년 2월 3일 저녁 박학은 뜻밖에도 어버이수령님께서 몇몇 영화창작가들과 함께 자기를 부르시였다는 통지를 받게 되였다.

박학의 가슴은 마냥 부풀어올랐다.

공화국의 품에 안겨 근 스무해, 국가적인 행사와 촬영소에 몸소 현지지도를 나오신 날들에 어버이수령님을 뵈올 때마다 더없는 영광과 행복에 눈물흘리던 자신이 오늘은 직접 그이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으니 그 감격과 흥분은 이루 다 말할수 없었다.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만나뵈올 그 순간을 생각하며 박학은 온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아무것도 한 일이 없을뿐더러 오히려 걱정만을 끼쳐온 이름없는 한 연출가를 친히 불러주시는 위대한 수령님의 그 사랑을 생각하면 목이 메여오기만 하고 이밤따라 아득히 흘러간 천대와 굴욕의 지난날이 자꾸만 눈앞에 되살아나는것이였다.

어느덧 날이 푸름푸름 밝아왔다.

박학이 창작가들과 함께 차에 몸을 싣고 먼길을 달려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신 곳에 다달은것은 아침 9시경이였다.

우리 혁명과 건설을 령도하시느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침식을 잊고 현지지도의 바쁘신 나날을 이어가시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영화예술이 걱정되시여 이렇게 불러주셨다고 생각하니 눈굽이 뜨거워지고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이윽고 박학과 그 일행은 어버이수령님께서 계시는 방으로 들어섰다.

문가에까지 걸어나오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담으시고 모두들 오느라고 수고했다고 하시면서 일일이 그들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다심한 어버이의 손길이런듯 한없이 따사로운 수령님의 사랑은 그대로 온몸에 스며들어 박학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올랐다. 너무도 행복하여 가슴이 높뛰였고 목이 꽉 메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몸둘바를 몰라하는 박학과 창작가들에게 어서 앉으라고 자리를 권하시며 과자도 집고 차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상우에 놓여있는 그릇들을 가리키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인자하고 너그러우신 인품에 이끌리여 모두는 어느덧 단란한 분위기에 휩싸이게 되였다.

그이께서는 자애로운 미소를 담으시고 창작가들의 경력을 한사람씩 물어주시였다.

차례가 되여 박학이 간단히 경력을 말씀드리자 수령님께서는 경험들이 다 오랜 동무들이라고 하시며 박학동무는 30년이나 된다고 못내 대견해하시였다.

박학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하시는 그이의 말씀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것을 겨우 참았다. 예술년한이 대체 무엇이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토록 대견해하시는것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장시간에 걸쳐 피로도 다 잊으시고 창작가들에게 혁명적문학예술작품창작의 절박한 필요성과 그 과업에 대하여 가르치시였다. 그러시면서 근로자들에 대한 교양사업을 강화하여 그들이 혁명적세계관을 철저히 세우며 계급적원쑤들을 쳐부시고야말겠다는 높은 각오를 가지고 혁명투쟁에 떨쳐나서게 하는 작품이 많아야겠는데 그런 작품이 없다고 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계속하여 혁명전통주제의 영화들이 눈보라속을 행군하면서 고생하는 장면만 보여주거나 뚱땅뚱땅 총을 쏘며 전투하는 장면만 지루하게 보여주는것이 결함이라고 지적하시면서 혁명에 대한 인식과정, 혁명적세계관의 형성과정을 잘 그리는것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대하여 자신께서 몸소 체험하신 산 자료들을 가지고 이야기하여주시였다.

박학은 위대한 수령님의 말씀 한마디한마디를 새겨들으며 그이께서 어찌하여 한편의 영화에 그처럼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고계시였는가 하는것을 이날 비로소 심장으로, 온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혁명적작품창작이 그토록 중요하고 절박하기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18권이나 되는 긴 영화를 보름동안에 무려 여러차례나 보아주시며 부족점을 일깨워주신것이 아닌가!

박학은 이렇게 생각하며 그이의 사상과 의도를 깊이 체득하지 못한 자신이 더욱더 뉘우쳐졌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랜 시간에 걸친 말씀을 끝마치시였을 때에는 벌써 한낮이 기울기 시작할무렵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오늘 이야기는 이만하고 우리 기념사진이나 한장 찍자고 하시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서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모시고 기념사진을 찍게 된 크나큰 행복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박학과 창작가들은 해빛밝은 앞뜰에 섰다. 계절은 립춘이라고 하나 아직도 날씨는 맵짰다.

어버이수령님을 가운데 모시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만!》 하고 사진사에게 촬영을 제지시키더니 손님들이 외투를 다 벗었는데 주인이 입어서야 되겠는가고 하시며 자신께서도 외투를 벗으려 하시는것이였다.

창작가들모두가 날씨가 맵짠데 외투를 벗으시면 안된다고 간절하게 말씀드렸다.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동무들이 정 그렇게 요구한다면 할수 없다고 웃으시는것이였다.

촬영이 끝나자 창작가들은 작별인사를 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가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라고 간곡한 말씀을 하시며 그들을 다정히 바래워주시였다.

박학일행은 차가 대기하고있는 정원의 굽인돌이로 걸어나왔다. 그런데 굽인돌이에서 돌아다보니 아직도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지 않으시고 여전히 찬바람이 부는 현관앞에 서시여 박학과 그 일행을 바래워주고 계시는것이였다.

박학과 그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들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하시며 다정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그 순간 박학은 불시에 쏟아지려는 뜨거운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다시한번 어버이수령님을 향하여 인사를 올리고는 차에 몸을 실었다. 가볍게 울리는 차의 시동소리와 함께 박학의 두볼에는 참고참았던 격정의 눈물이 콱 쏟아져내렸다.

달리는 차안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 한마디 없었으나 모두의 마음속에 꽉 차오른것은 하나의 생각, 오직 어버이수령님의 건강을 삼가 축원하고 또 축원하는 그 하나의 소원뿐이였다.

박학에게 있어서 1966년 2월 4일은 이렇게 어버이수령님을 난생처음 몸가까이에서 만나뵈온 잊을수 없는 날이였다.

그 뜻깊은 날에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되새기며 박학은 연출가로서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가 하는것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는 열정에 넘쳐 이미 수정하여 수령님께 올린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화면들을 다시 더듬어보았다. 무엇인가 딱히 찍을수는 없었으나 빈구석이 자꾸만 느껴지고 다 만들어놓지 못한 미완성작품이라는감이 자꾸 드는것이였다.

초조감속에 날이 흘러갔다.

2월 4일의 감격과 흥분이 아직도 가슴속에 생생한 그달 23일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의 창작가들인 영화문학작가와 박학을 또다시 불러주시였다.

정말 뜻밖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뵈온것이 바로 얼마전인데 나라일에 바쁘신 그이께서 또다시 자기들을 몸가까이에 불러주시다니?!

박학의 가슴은 끝없는 흥분으로 울렁거리기만 하였다.

이날 영화부문의 책임일군들 그리고 다른 몇몇 창작가들과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박학은 수정하여 올려보낸 영화에 대하여 그이께서 어떤 말씀을 주시려는가 하는 생각으로 누구보다도 마음이 설레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현관에까지 나오시여 그들을 따뜻이 맞아주시면서 영화를 만들기에 수고했다고 고무의 말씀부터 하시는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박학과 그 일행을 아래층 휴계실로 친히 이끌고가시여 몸둘바를 몰라하는 그들에게 의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하시고는 어서들 편안히 앉으라고, 자기 집에 왔는데 마음을 푹 놓으라고, 오늘은 실지 영화창작가들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합평회를 하자고 불렀다고 말씀하시였다.

합평회!

박학은 크나큰 충격에 그만 뜨거운것을 삼키며 머리를 숙이였다.

한편의 영화를 위하여 너무도 많은 시간을 바치시는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있는 부족점들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영화의 결함이 총적으로 보아 아직도 형식적인데가 많고 혁명적세계관형성과정의 단계를 진실하고 깊이있게 우여곡절속에서 그려주지 못한 점이라고 하시면서 이러한 결함이 남아있게 된것은 창작가들자신의 혁명적세계관이 아직 확고히 서있지 못하고 1930년대 혁명투쟁을 잘 모르는데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러시면서 자신께서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몸소 겪으신 사실들, 그때까지 아직 창작가들이 알지 못하고있던 귀중한 자료들까지 이야기해주시면서 영화의 완성방도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시였다.

계속하여 그이께서는 변절자문제를 어떻게 결속짓겠는가고 창작가들에게 물으시면서 영화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론의해보자고 하시였다.

창작가들은 저으기 당황하였다.

영화가 상하편 18권 되는것을 다시 돌리자면 3시간 반이나 걸릴것인데 여러번이나 이미 보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여기에 바치시려는데 대하여 그냥 있을수 없었다.

창작가들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이미 여러차례 보시였으니 그만두는것이 어떻겠는가고 말씀드리였다.

그이께서는 인자하신 미소를 지으시면서 동무들의 요구가 정 그렇다면 다수가결로 결정짓자, 그러되 후편만은 꼭 보아야 한다고 하시였다. 결국 영화의 후편을 돌리게 되였다.

영화의 후편을 다 보고나신 그이께서는 창작가들이 그때까지도 놓쳐버리고있었던 한 화면에 대하여 상기시키시였다.

그것은 불후의 고전적명작 《사향가》의 노래가 나오는 산전막장면이였다.

그이께서는 주인공이 고생하는 로인의 생활을 보며 고향집을 생각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는데 그것보다는 고통받는 인민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박학은 순간 전번에 녀주인공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장면에서와 같은 과오를 다시 범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제딴에는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잘 그려준다고 한것이였는데 자신의 세계관이 혁명가의 정신세계의 높이에까지 이르지 못하다보니 그렇게밖에 형상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토록 간곡하게 가르쳐주시였건만 암둔하게도 또다시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다니… 무거운 자책의 회오리바람이 가슴을 쳤다.

그러나 그보다 더 엄중한것은 지대장과 변절자와의 대결장면에서 변절자놈이 반동선전을 하는데도 코대를 꺾어놓지 못하고 그냥 돌려보내여 지하조직이 파괴되게 함으로써 영화를 수정했다는것이 전번보다 더 나빠진 그것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이에 대하여 지적하시였을 때 작가도 박학도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창작에서 또다시 범한 오유로 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있는 창작가들의 심정을 헤아리신듯 웃으시면서 영화는 이만하면 잘된 영화라고 고무격려하여주시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박학과 창작가들을 둘러보시며 변절자문제는 지대장을 만나지 않게 하고 자기 처신을 경솔하게 하다가 적에게 체포되여 끝끝내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녀주인공을 부는것으로 하는것이 어떠냐고 수정대안을 제시해주시였다.

순간 이때까지 박학은 눈앞을 가리우고있던 안개가 걷히고 앞이 환히 트이는것 같았다.

박학은 흥분된 심정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꼭 그렇게 잘 고치겠다고 말씀드리였다.

이날 박학은 그이의 자애에 넘친 말씀을 들으면서 영화연출가에게 있어서 혁명적세계관을 확고히 세우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작가나 연출가인 박학이 범한 과오는 바로 이 문제에 귀착되는것이였다.

박학은 작품에서 주인공의 정신세계를 혁명투쟁을 체험하지 못한 자기의 낡고 협소한 안목으로, 그 시대의 혁명투쟁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그 어떤 추상적인 세계에서 찾으려 하였던것이다.

만약 어버이수령님께서 영화가 가지고있던 이 모든 결함들을 그리도 명확히 지적하여주시지 않았더라면 과연 그후의 창작에서 얼마나 돌이킬수 없는 과오를 계속 범하였을것인가!

박학에게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는 과정은 영화연출가가 되는 가장 첫째가는 조건이 바로 혁명적세계관을 확고히 세우는것이라는것을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는 과정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을 만나뵙고 돌아온 박학은 며칠을 두고 자기의 지나간 예술활동 전과정을 검토하고 또 검토하여보았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자기의 세계관발전의 전환기로 될수 있는 제일 좋은 시기이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위대한 수령님의 세심한 지도와 육친적인 보살피심속에서 마침내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완성되여 세상에 나오게 되였다.

한 영화연출가를 키워주시기 위하여 돌려주신 어버이수령님의 신임과 배려는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영광스럽게도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뵈온 그때로부터 두해가 지난 1968년 11월 어느날 박학은 또다시 한 영화문학작가와 함께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동안의 혁명적작품창작실태를 료해하시고 영화창조사업에서 걸리고있는 문제들을 몸소 풀어주시기 위하여 창작가들을 불러주신것이였다.

두해만에 또다시 어버이수령님을 몸가까이 만나뵙는 박학의 가슴은 감격으로 하여 세차게 끓어올랐다.

이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혁명전통주제의 영화예술창작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세세히 가르쳐주시면서 도중에 예술영화 《한 지대장의 이야기》가 예술성에 치우친감이 있는것 같다고 또다시 말씀하시는것이였다.

창작가인 박학자신도 어버이수령님으로부터 일정한 평가의 교시를 받고 영화가 세상에 나간 다음에는 그 작품에 대하여 더 연구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이께서는 두해전에 창작된 영화를 놓고도 그렇듯 깊은 애정을 가지고계시는것이였다.

이렇듯 어버이수령님의 극진한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박학은 혁명적영화작품은 어떻게 창조해야 하며 창작단의 사령관인 연출가는 어떻게 준비되여야 하는가를 더욱 깊이 느끼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박학의 창조활동을 세심히 보살펴주시였으며 그가 모든 면에서 준비된 유능한 연출가가 되도록 친어버이손길로 이끌어주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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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1)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2) 창작단의 사령관인 영화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3) 끝없는 믿음과 사랑을 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4) 영화계의 첫 영웅칭호 운명의 선택 2 ^bb1. 재능있는 연출가로 -영화연출가 박학- 5) 수령형상영화의 첫 연출가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1) 새 삶의 품으로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2) 행복은 꽃피여 운명의 선택 2 ^bb2. 민족적량심을 귀중히 여겨준 은혜로운 품 -작가 송영- 3) 영생의 언덕에 높이 세워주시여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1) 이루어진 소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2) 보람찬 창조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3. 공화국의 첫 인민배우로 -배우 황철- 3) 영생하는 인민의 배우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1) 미술가로부터 촬영가로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2) 어버이의 보증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3)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운명의 선택 2 ^bb4. 영화화폭에 통일의 열망을 새기며 -촬영가 박병수- 4) 안해의 추억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1) 《임자없는 나루배》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2) 《내 고향》 운명의 선택 2 ^bb5. 인생의 참다운 포구를 찾아서 -배우 문예봉- 3) 인생의 참다운 포구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1) 《류민》의 처지가 낳은 현실항거문학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2) 《내 고향》을 찾은 류민 운명의 선택 2 ^bb6. 위인의 품에서 찾은 《내 고향》 -작가 김승구- 3) 위인의 사랑속에 청춘으로 산 작가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1) 북녘땅에서 다시 찾은 어린 날의 꿈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2) 보람찬 미술창작활동의 나날에 운명의 선택 2 ^bb7. 조국이 있어 빛나는 재능 -미술가 정창모- 3) 통일된 조국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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