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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능있는 연출가로 

 


박 학 (영화연출가)

 

                        • 1914년 12월 6일 평양시 중구역에서 출생.

                        • 해방전 3. 1극장을 비롯한 여러 극단과 영화회사에서 배우생활.

                        • 1961년부터 영화연출가.

                        • 1982년 11월 11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인민배우.

                                                           

 

 

장장 100여년을 헤아리는 조선영화사의 갈피에는 배우로서, 연출가로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는 뚜렷한 이름을 남긴 인민배우 박학도 있다.

태양의 빛과 열이 있어 자연의 꽃들이 향기풍기듯이 절세의 위인, 위대한 스승의 손길이 있어 그는 명작, 걸작들을 창조해낸 영화연출부문의 공인된 재사로, 우리 인민의 재능있는 예술가로 될수 있었다.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리지적인 두눈과 체소한 몸에 항상 머리를 수그리고 걷는 사나이, 예술가라기보다 지성도가 푹푹 풍기는 세련된 대학교수를 방불케 하는 그가 바로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박학의 모습이였다.

박학은 민족수난의 비운이 칠칠이 드리웠던 망국초기인 1914년 12월 평양시 중구역 경상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조선봉건왕조말년에 어떤 우연한 연줄로 궁성에 들어가 나중에 오위장이라는 무관벼슬까지 지낸 사람이였다. 박학이 출생한 당시에는 경상골에다 자그마한 철공소를 차려놓고있었다. 그러고보면 어느 정도 부유한 가정이였다고 볼수 있다.

박학의 어머니는 순천에서 살던 농민의 딸이였다.

아버지는 박학을 늘그막에 본 아들이라 더없이 귀애하면서 그가 착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연개소문과 온달장군, 을밀과 솔개장군, 김응서장군과 계월향 그리고 임진왜란시기에 평양성인민들의 영웅적투쟁이야기와 미제침략선 《셔먼》호를 불태우는데 앞장서신 김응우선생님에 대한 이야기, 대동문과 칠성문, 창광산과 보통문에 대한 전설, 시인을 울린 련광정이며 성천에서 떠내려왔다는 릉라도와 갑자기 생겨났다는 청류벽, 도끼산과 귀성이야기, 대동강을 판 영특한 봉이 김선달에 대한 내용이였다.

아버지의 구수한 옛이야기는 박학의 동심에 은연중 자기 고향 평양에 대한 사랑과 귀중한 마음을 간직하게 하였다.

평양에서 숭인학교, 공업실습학교를 다닌 박학은 소년시절 공부에 전념하기보다는 장난과 놀음에 더 정신이 팔려있었다.

그는 낮에는 경상골안이 좁다하게 다니면서 뛰놀고 대동강가에 나가 미역감기를 즐겨하였으며 저녁에는 부벽루에 올라가 놀기를 좋아하였다. 거울같이 맑고 푸른 물이 감돌아흐르는 청류벽우에 둥실 떠있는듯 한 루정이란 뜻에서 부른 부벽루, 해가 서산마루에 사라지고 밝은 달이 떠오를무렵의 이 일대 경치는 그야말로 황홀한것이였다. 여기서 그는 동네아이들과 함께 꽃이나 풀들을 모아서 겨루는 꽃싸움과 풀싸움을 하면서 향토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가지게 되였다.

박학은 그 시절에 구경도 무척 좋아하였다. 그는 당시 평양에 있던 해락관, 제1영화관으로 계속 다니며 조명희의 《김영일의 죽음》, 《파사》, 송영의 《백양화》, 진우촌의 《구가정의 끝날》 등의 연극작품들과 이 시기 손꼽히는 변사들이였던 김영환, 김조성이 출연한 영화인 《춘향전》,《흥부와 놀부》 그리고 프랑스빠데영화회사의 부류베르영화들을 즐겨 보았다.

또한 당시 련광정부근에서 열리군 하던 명창들의 음악회에도 호기심을 가지고 찾아가군 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민요들과 《황성옛터》, 《봉선화》 등 비가들을 듣군 하였다. 박학이 구경을 얼마나 좋아하였던지 어머니가 국수를 사먹으라고 준 돈까지 연극과 영화를 보는데 소비하군 하였다. 아마도 이 시기의 흥미본위적인 구경들이 후날 박학을 예술계로 떠미는데 일정한 작용을 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학은 이때까지만 하여도 앞으로 자신이 예술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박학이 철이 들기 시작할무렵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가정의 기둥이 뽑히자 이때부터 콩나물장사, 물장사를 하면서 가난을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청년기에 들어서며 향학열에 불타던 박학은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다가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명고옥동해상업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학급에는 1929년 가을에 있었던 광주학생사건참가자들이 여러명 있었는데 박학은 이들로부터 사건당시 일제가 저지른 야수적만행에 대해 듣고 치솟는 민족적울분으로 몸을 달구었다.

이때부터 박학은 좌익서적들을 열심히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그후 동경에 있는 동아상업학교로 적을 옮긴 박학은 학교과정을 마치고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대학 예술과에 적을 두게 된것은 젊은 혈기에 다소나마 민족예술을 지향해서였다. 이미 상업학교시절부터 열혈청년 박학의 가슴속에는 자기도 모르게 예술에 대한 지향이 은연중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던것이다.

그는 재학기간 극예술을 전공하는 한편 주영섭을 비롯한 진보적인 조선사람들이 조직하였던 3. 1극장(후에 조선예술좌로 개칭)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이 단체에서는 주로 《춘향전》과 《심청전》을 비롯한 민족고전물들과 《개척자》,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그리고 외국의 진보적작가들인 체호브와 입쎈, 고리끼와 같은 경향성이 좋은 작가들의 작품들을 창작공연하고있었다.

반식민지적, 반파쑈적인 성격을 띤 이 단체의 영향을 받으며 박학은 소부르죠아적인 자신의 과거생활과 결별하기 시작했고 망국노로 된 자기 처지에 대하여 깊이 깨닫게 되였다.

그리하여 박학은 공부가 끝난 오후가 되면 극단의 동료들과 함께 조선인거주지역으로 다니며 정열적으로 선전극활동을 벌려나갔다. 이렇게 그는 예술활동의 첫걸음을 내디디였다.

이 시기 박학의 집에서는 근근히 대주던 얼마 안되는 학비마저 생활난으로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부자집 학생들은 집에서 한달에 100원이상의 학비를 부쳐오건만 박학에게는 보잘것없는 적은 돈이 오군 하였다.

박학은 어머니의 지성이 담긴 돈을 쪼개가며 생활했는데 그 돈마저 거덜이 나자 그는 신문배달, 우유배달, 림시로동 등으로 힘겨웁게 고학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조선사람들에 대한 민족적멸시와 차별도 걸음걸음 뒤따랐다.

하숙집 하나를 얻자 해도 어지간히 품을 들여야만 했다.

하숙집에 가면 문앞에 《하숙방 있습니다. 단 내지인에게만 한합니다.》라는 글이 나붙어있었다. 이런 식으로 조선사람들을 로골적으로 멸시하고 차별했던것이다.

1935년 방학기간을 리용하여 조국에 돌아온 박학은 어머니의 권고로 조인숙과 결혼을 하고 다시 현해탄을 건너갔으나 이듬해 여름 학비난으로 끝내 졸업을 몇달 앞두고 중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해 가을 조국으로 돌아온 박학은 서울에서 자신이 직접 동료들과 함께 연극협회라는 극단을 조직하였으나 극심한 재정난으로 얼마 못가 파산되고말았다.

1937년 평양에서 다시 연극단체를 조직하려던 박학은 갑자기 《불온사상》을 가졌다는 리유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류치장생활을 하게 되였다.

그후 극단연극좌라는 흥행극단에 망라된 박학은 함경도지방에서 순회공연을 하던중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보천보전투와 간삼봉전투승리소식에 접하게 되였다.

이때부터 박학은 항일의 전설적영웅이신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경모의 정으로 가슴을 끓이게 되였다. 박학의 정신세계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름도 아버지가 지어준 한구라는 이름으로부터 자신이 스스로 학이라고 고쳤다. 그것은 민족을 위한 참다운 예술을 탐구하고 지향한다는 뜻으로서 그자신의 새 출발을 의미하는것이였다.

박학의 가슴속에서는 민족예술에 대한 갈망이 불길같이 일어났으나 193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더 우심해지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말미암아 진통을 겪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시기 일제는 진보적예술작품은 물론 조선말로 된 연극이나 영화의 제작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지어 자그마한 장치물이나 광고에서조차 우리 글의 사용을 금지시켰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극단들을 운영하거나 영화를 제작할수 있는 자금난은 더해만 갔다. 이런 형편에서 수많은 크고작은 예술단체들과 개인영화회사들의 무질서한 제작경쟁이 펼쳐지게 되였으며 그속에서 박학은 극단연극좌로부터 랑만좌로, 다시 조선무대와 국민좌, 청춘좌, 고협극단 등으로 명칭을 고쳐가며 심한 류동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 과정에 그는 당대 연극, 영화부문의 명사들이였던 문수일, 김태진, 강호, 주영섭, 라웅, 황철, 리규설, 심영, 림선규, 문예봉 등과 사귀게 되고 뜻도 함께 나누게 되였다.

특히 그는 주영섭, 라웅, 황철과 가깝게 지내였다.

주영섭은 같은 평양출신으로 일본에서 고학을 함께 한 사이로서 해방후에 평양연극영화대학 강좌장사업을 한 사람이고 라웅은 그의 정신적인 선배로서 해방직후 박학이 조선로동당원이 되도록 이끌어준 관록있는 연출가였으며 황철은 이 시기 박학이 따라배워야 할 본보기 무대배우로서 해방후 국립연극극장(오늘의 국립연극단) 총장 겸 교육문화성 부상으로 사업한 일군이였다.

당시 황철은 《이 땅에 저만 한 배우가 없다.》는 정도로 인기를 모으고있었는데 그의 연기도 연기려니와 특히 음성이 기가 막혀서 무대에서 그가 내는 소리는 좋은 음악을 듣는것으로 착각할만큼 아름답고 류창한 음성으로서 참으로 매력적이였다.

이들은 영화에도 함께 출연하군 하였다.

박학이 영화에 처음으로 출연한것은 1938년 천일영화사에서 발성으로 제작한 예술영화 《도생록》(8권, 연출 안철영)이였는데 그는 이 작품에서 라웅과 함께 주인공역을 맡아 수행하였다. 그후 박학은 극랑영화사에서 역시 발성으로 제작한 예술영화 《어화》(8권)를 비롯한 여러편의 영화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여 전망성있는 배우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해방전 박학의 예술활동에서 기본을 이룬것은 연극분야였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우리 나라에서는 영화에 비해 연극이 보다 대중적인 예술로 되고있었다. 그때로서는 연극만큼 대중의 심장을 잡아흔드는 예술이 없었다.

무성영화가 발성영화로 발전되고 그것이 한 나라의 범위를 벗어나 세계적판도에서 보급되기 전까지 연극은 예술계에서 가장 위력한 감화력을 가지고있었던것만큼 우리 나라에서도 실태는 마찬가지였다.

일제침략자들의 조선강점후 우리 나라의 진보적예술인들은 일본도 영화업을 발전시키고있는데 조선사람이라고 해서 영화를 못 만들것이 무엇이냐, 우리도 선진국가들처럼 영화를 꽝꽝 만들어 영화예술에서도 자립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을 세계만방에 시위하자는 배심을 가지고 민족영화예술건설의 간고한 초행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리하여 요람기라고 할수 있는 1910년대의 활동사진시기를 경과한 우리의 민족영화예술은 1920년대 중엽 비판적사실주의를 거쳐 발성영화의 제작과 사회주의적사실주의작품창작에로 한껏 치달아오르기 시작하였다.

특히 라운규, 김태진, 강호를 비롯한 량심적인 영화인들은 《아리랑》, 《뿔빠진 황소》 등 민족적향취가 강한 작품들을 제작하여 우리 나라 예술인들의 실력을 힘있게 과시하였다.

그러나 해방전까지만 하여도 영화제작사업은 연극작품창작에 비하여 뒤면에 밀리우고있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 영화의 력사가 연극의 력사에 비해 훨씬 짧은데도 있었지만 영화제작사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사정과도 관련된다.

이로부터 해방전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영화건수에 비해 창작공연된 연극작품건수는 훨씬 많았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1920~1930년대)는 학생수가 50명쯤 되는 시골학교들에서도 연극을 한다고 떠들만큼 우리 나라에서 연극은 개화기, 전성기였던것이다.

이러한 시대적풍조에 편승하여 그리고 영화제작사업이 상대적으로 많은 자금을 필요로 했던 불가피한 사정으로부터 당시 우리 나라의 극예술인들은 대부분 연극운동에 심혈을 바치고있었다.

박학도 전문영화배우가 되고싶었지만 어쩔수 없이 연극창조활동을 벌리게 되였다.

이 시기 그는 풍자극인 《김삿갓》과 민족고전물들인 《홍길동전》, 《장화홍련전》 등 조선사람의 민족적의식을 고취한 진보적인 작품들에 많이 출연하면서 자기의 연기술을 부단히 련마하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식민지통치밑에서 박학의 생활은 언제나 애수와 비애에 젖어있었다. 그는 일제의 비위를 거슬린 대사 한마디때문에 공연후 순사놈들에게서 따귀를 얻어맞기도 하였고 무대와 극단을 빼앗기고 비내리는 거리를 방황하기도 하였다. 어느 한 지방순회공연때에는 밥값이 떨어져 려관집에 자기의 중절모와 극단의 배우를 인질로 떨구어두기도 하였으며 빌려입은 의상이 그만 말썽이 되여 공연도중에 옷을 벗기우는 일까지도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예술인으로 부평초처럼 살아왔으니 무슨 모욕인들 당하지 않았겠는가.

민족의 태양이시며 불세출의 영웅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장군님에 의하여 조국은 드디여 해방되였다.

해방후 박학은 새 조선에서 연극활동을 마음껏 해보려는 열망으로 서울에서 당시 조선프로레타리아연극인동맹 서기장이였던 강호의 추동밑에 라웅, 태을민, 황영일 등과 함께 극단예술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첫 작품으로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을 형상한 장막희곡 《독립군》을 무대에 올렸을 때 박학은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다. 이어 그는 조령출 작 《론개》와 한율 작 《옥문이 열린다》에서도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조령출 작 연극 《독립군》은 서울과 전주, 부산 등 여러 극장들에서도 공연되였다.

박학일행이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살판치는 남녘의 무대우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한것은 민족의 태양을 받드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념원을 반영한 애국적인 거사였다.

당시 이 공연을 본 관중의 반향은 대단하였다. 관중들은 한결같이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영웅적항일무장투쟁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면서 위대한 김일성장군님을 만고의 영웅으로 높이 칭송하였다.

박학이 김대장역을 얼마나 훌륭하게 수행하였던지 당시 민족주의운동의 거두였던 백범 김구는 연극을 보고 흥분한 나머지 나는 아직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지 못했는데 이 무대에서 뵈웠다고 눈물이 글썽하여 말하였다.

한편 반동들은 첫날부터 이 작품의 공연을 파탄시키려고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놈들은 리범석의 《대한청년단》깡패들을 내몰아 박학을 비롯한 여러명의 출연자들을 구타하고 20일동안이나 구금하는 소동을 벌리였다. 언제인가 부산지방공연때에는 2층의 객석에서 수류탄이 무대에 날아와 터지는 바람에 박학은 왼쪽팔에 심한 부상을 당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박학을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공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박학은 팔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동료들과 함께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남북련석회의를 지지하는 예술공연을 진행하였고 계속 창조활동을 과감히 벌려나갔다.

이에 겁을 먹은 적들은 박학을 비롯한 극단예술좌성원들을 체포할 흉계를 꾸미였다. 거리와 골목마다에 현상금까지 건 체포령이 나붙어 박학일행은 더는 어쩔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였다.

실로 남조선을 강점한 미제와 그 주구들에 의하여 예술인들의 처지는 날이 갈수록 험난해지기만 하였으니 예술적진실이나 량심은 곧 감시와 형벌의 대상으로 되였다.

인민의 의사를 대변하는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는 변변한 무대도 촬영기도 차례지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경성발성영화촬영소는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미군정에 압수되고 적지 않은 예술인들이 방안에 앉아있거나 나다니기를 주저하였으며 죽을고비에 이른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어쩔수 없이 생활전선에 나섰다.

박학도 극빈한 생활난으로 하여 감기에 걸린 둘째아들을 약 한첩 써보지 못하고 잃어야 하는 비극적운명을 감수하여야만 하였다.

이때처럼 그에게 해빛이 그리운 때는 없었다.

1948년 8월 드디여 박학은 동료들과 함께 진정한 삶의 품-어버이수령님의 품을 찾아 사선을 헤치고 공화국북반부로 향한 힘찬 걸음을 내디디게 되였다. 민족예술을 갈망하여 몸부림치며 키없이 흘러간 그의 예술활동은 마침내 끝장나게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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