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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리 단 (연극배우, 연출가)

                     

                      • 1918년 10월 8일 경기도 려주군에서 출생.

                      • 1940년부터 아랑극단 배우.

                      • 1950년부터 국립극장 연극배우.

                      • 1962년부터 국립연극단 연출가로 활동.

                      • 2004년 1월 3일 사망.

                      •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4기, 제7기~제11기 대의원.

                      • 김일성상계관인, 인민배우.

                                                                      

 

오늘도 우리 인민이 잊지 않고 사랑하는 인민배우 리단의 한생은 무대우에 뿌리를 내리고 거목으로 자란 한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해방전 무대에서 배우생활을 한 그는 참기 어려운 풍상고초도 겪어보고 온갖 희로애락도 맛보았으며 보통인간으로서는 오를수 없는 영광의 단상에서 인생을 총화지은 우리 나라 무대예술을 대표하는 배우들중의 한사람이다.

북과 남의 대조적인 정치를 페부로 절감하면서 인민의 자주적운명을 결정하는 근본요인이 무엇인가를 체득한 민족의 한 성원으로서 무대우에서 흘러간 그의 생활은 민족분렬의 비극이 가져다주는 가슴아픔이 어떤것이며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도 잘 보여주고있다.

경기도 려주가 고향인 그는 어려서부터 가난이 가져다주는 뼈아픈 눈물을 체험하였다.

그의 본명은 리정훈이였다.

해방이 되여 번역극 《폭풍의 거리》에서 주역을 담당하게 된 리단은 결혼식을 하는 날까지도 낮에 밤을 이어 공연에만 열중하였다.

어머니는 어이없어 말을 못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연극에 미쳐버린 그를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보게 정훈이, 아무리 바빠도 결혼식할 시간이야 내야지.》

친우들이 이렇게 권고하였으나 리단은 히죽이 웃기만 하면서 시간낼념을 하지 않고 계속 공연에만 몰두하였다. 그때 리단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하였다고 한다.

(열정이 없으면 정훈이가 아니지. 뜨거운 정열로 빛을 낸다는 뜻이 바로 정훈이가 아닌가. 나는 기어이 정열의 인간이 되련다!)

그는 후에 부모가 지어준 정훈이라는 이름대신 《붉은 단》자를 넣어 리단으로 자칭하였다.

연극으로 민족을 빛내이고 그 길에 자기 한생을 깡그리 바치겠다는 마음을 담은 그 이름자에는 정열의 인간-리단의 애국의 굳은 신념과 의지가 깃들어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이 용단을 정의롭고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만이 취할수 있는 행동으로 여기면서 적극적으로 지지해주었다.

리단은 한생을 이름에 담은 그 결심과 지향대로 살았고 우리 나라 무대예술사에 당당하게 자기의 자욱을 남긴 연극배우가 되여 인민의 사랑을 받았다.

 

 

무대에 운명을 걸고

 

리단은 어린시절부터 연극배우가 되기를 갈망했었다. 누가 가르쳐서도 아니고 먹고살아가기 위해서도 아니였다. 스스로 그것을 갈망하였다. 이것은 그의 천성이였다.

그는 문학에도 취미를 가지고있었지만 보다는 무대우에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예술인이 되고싶었다. 하지만 모진 세월 일찌기 남편을 잃고 홀몸으로 네 자식을 먹여살려야 했던 어머니는 한가정의 맏이이면서 외아들인 리단이 배우가 되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배우가 되면 먹고살아가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관념때문만이 아니라 사회에서 구경거리로만 치부하는 천하디천한 배우가 되라고 내버려둘수가 없었던것이다.

《난 네가 배우가 되여 동물원의 짐승처럼 구경거리가 되는걸 바라지 않아. 그런 생각 제발 거두어라.》

어머니는 완고하게 반대하였지만 배우가 되고싶은 리단의 지향은 더욱더 불타올랐다.

가정생활이 어려워 다섯식구의 생계유지가 경각에 달하게 되자 리단은 다니던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아일보사 륜전기계공으로 일하면서 자기 혼자서 부지런히 배우수업을 하였다.

리단이 스스로 정한 배우수업무대는 서울시 성북동 옛 성터아래에 있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밑이였다.

도시의 소음을 피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늙은 소나무앞에 있는 잔디밭으로 모여들군 하였다.

리단은 이 나무아래에서 많은 소설이나 희곡의 주인공들과 만났고 또 주인공자신으로 되기도 하였다.

주인공들의 세계에 공감되여 그들과 같이 잔디밭을 딩굴기도 하고 그들의 비극적운명이 가슴아파 잔디를 쥐여뜯으며 함께 울기도 하였다.

리단이 언제나 이렇게 성북동 뒤산 조용한 곳에 가서 누구의 지도도 없이 소설랑독이며 시랑송, 역인물의 연기훈련을 하느라면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괴짜라고 부르며 혀를 찼다. 그럴 때면 리단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히쭉 웃어보이며 (앞으로 두고봐라. 내가 어떻게든지 명배우가 되는걸…) 하고 속마음을 다지군 하였다. 배우라면 펄펄 뛰던 어머니도 아들의 정열적인 모습에 감복하여 그의 점심밥을 싸가지고 야외무대로 찾아오군 하였다.

리단의 야외무대에는 산새들과 내물소리 그리고 산울림이 유일한 벗으로 되였다.

야외무대에서 리단이 련습을 하다가 잔디밭에 누워서 공상에 잠겨있으면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자는줄 알고 먼발치에서부터 뛰여오며 《얘야, 바위에서 잠들면 입비뚤어진다. 어서 일어나 밥먹어라.》 하고 흔들며 일으켜세우군 하였다.

리단이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도 식사를 하고 중얼중얼 대사련습을 할 때면 어머니는 바느질을 멈추고 신기하기도 하고 근심스럽기도 하여 물끄러미 바라보군 하였다.

리단은 이렇게 독학을 하면서 피타는 노력과 정열로 배우로 되기 위한 실력을 키워나갔다.

그의 배우생활은 20대에 들어서면서 시작되였다.

그가 처음으로 찾은 극단은 《아랑》이였다.

배우들을 모집하던 극단의 단장은 소박한 리단이 과연 극단에서 연기를 해낼수 있겠는지 우려되여 그에게 력사극에 나오는 전쟁병역을 해보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입직시험이였다.

연기시험문제는 그 연극에서 나오는 역인물의 첫 대사 《아병망료 아뢰오!》 하며 지금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급보를 알리는 대목이였다.

리단은 그 역을 어렵지 않게 인상깊이 해내였다. 연출가는 물론 거기에 참가한 배우들모두가 감탄해마지 않았다. 리단의 입직시험연기가 어찌나 명연기였는지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아병망료》 라고 불렀다 한다.

극단에서는 리단의 첫 연기를 보고 주인공역을 서슴없이 맡기였다.

어느 한 희곡을 창조할 때였다.

연출가는 리단에게 작품의 꿈장면에 나오는 도깨비역을 맡겼다.

총시연회가 진행되는 날 극단의 단장과 연출가는 리단이 자기가 맡은 도깨비역을 어떻게 할것인가를 흥미와 기대속에 지켜보았다.

그런데 리단이 도깨비역을 얼마나 재치있고 흥미있게 하였는지 그의 연기를 본 모든 사람들이 허리를 붙안고 웃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더욱 놀란것은 도깨비역형상을 해보지 못한 리단의 기발한 착상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깨비라고 하면 머리에는 뿔이 나고 눈은 동그랗고 몸뚱이는 빨간색모습으로 형상했었다. 리단이 형상한 도깨비는 뿔이 아니라 숯과 고추를 끼운 새끼를 머리와 목에 감고 여러색의 천을 매달아놓은 새까만 옷차림에 손짓, 발짓을 하며 나타났던것이다.

옛날에 아이를 낳은 집으로 사람들이 막 들어오는것을 막기 위해 대문우에다 새끼줄을 늘이고 거기에 고추와 숯을 끼워놓는 풍습이 있었는데 아들이면 고추를, 딸이면 숯을 매달아 표식하였었다. 사람들은 도깨비로 분장한 리단을 보고 어쩌면 저렇게 연기를 잘하느냐고 감탄하였다.

이렇듯 리단은 배우로서의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있었으나 일제의 압제속에서는 그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은 리단의 가슴을 환희와 기쁨으로 설레이게 하였다.

나라를 찾았으니 조선의 예술도 찾을것이 아닌가!

리단은 커다란 기대와 포부를 안고 서울조선예술극단에 들어갔다.

극단에서 그는 번역극 《폭풍의 거리》(주역), 《향연》(참봉역), 번역극 《웨쳐라 대지》(대학생역), 《3. 1운동》(주인공역) 등을 맡아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침략자들이 살판치는 남조선땅에서 진정한 예술은 꿈에 불과하였다.

정의와 진리를 위한 예술활동을 하려는 기미만 보이면 총칼로 탄압하는것이 미제강점하의 남조선땅이였다.

(내가 희망한 예술이 이렇게 짓밟힌단 말인가.)

리단은 생각할수록 허무하기 그지없었다.

바로 이러한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 정사를 펴나가시는 북조선에서는 새 조국건설의 노래소리가 높이 울려퍼지고있었다. 그는 높뛰는 가슴을 안고 북녘하늘을 우러렀다.

사람마다 전설처럼 이야기하는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의 품에 안기면 진정한 예술을 창조하고싶은 자기의 소망이 풀릴것 같았다.

리단은 용약 결심하였다.

드디여 1946년 어린시절 뛰놀던 고향마을과 배움터, 야외무대로 정다워진 성북동 옛 성터의 잔디밭과 늙은 소나무를 뒤에 남기고 손을 놓을줄 모르는 어머니와 기약없이 헤여진 그는 38 선을 넘어 공화국의 품에 안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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