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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의 품속에서 부른 참된 삶의 노래

 

작가 조령출이 어버이수령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온것은 북에 온지 한해가 조금 지난 1949년 12월 7일이였다.

이날 수령님께서는 새 조국건설을 령도하시는 바쁘신 가운데서도 그가 창작한 가극 《꽃신》을 보아주시였다.

시종일관 깊은 관심속에 가극을 보아주신 수령님께서는 조령출을 비롯한 창조성원들에게 작품이 아주 좋다고, 동무들이 많이 노력했기때문에 성과가 많았다고 하시며 그들의 수고를 높이 평가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런 방향으로, 민족적정취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것이 좋겠다는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만면에 태양같이 환한 미소를 지으신 그이를 삼가 우러르는 조령출의 두볼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이를 이렇게 만나뵈온것만도 기쁘기 그지없는데 변변치 못한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시니 이 은정에 무엇으로 보답한단 말인가.

조령출은 수령님께서 떠나가신 후 오래도록 자기의 손을 만지고 또 만져보았다. 그 손은 어머니가 낳아준 아들의 손만이 아니였다. 그 손은 자기를 사랑의 한품에 안아주고 아들이 거둔 자그마한 성과를 크게 내세워주시는 친어버이께서 친히 만져주신 뜨거운 손이였다.

《동무들, 이 손을 좀 만져보오. 뜨겁지 않소?》

작가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기의 손을 만져보게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후 작가는 어버이수령님의 크나큰 신임에 의하여 창작행정사업의 중요한 직무에서 활동하면서 혁명적내용에 민족적정서와 향취가 넘쳐나는 작품창작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전쟁도 끝나고 사회주의대건설이 힘있게 진행되던 어느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문학예술부문 일군들을 부르시여 민족문화유산의 하나인 민요를 우리 인민의 감정정서와 시대적미감에 맞게 재창조할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 말씀을 전달받은 조령출은 구전으로 전해내려오는 전통적인 민요유산들을 로동당시대와 인민들의 사상감정과 지향에 맞는 민요로 개작하여 그것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계속 애창되도록 하기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기의 수기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현실은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례를 들어 〈양산도〉의 민요라 하여 〈심산은 반락청산이요, 이수는 중분백로주라〉 하는 지금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가사를 자꾸 부르기때문에 감흥을 줄수 없는것이다.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높이 받들어 민요를 현대적미감에 맞게 새 사회 인민의 사랑을 받는 민요로 되도록 발전시키는 일에 창조적힘을 경주하였다.》

그는 민요화된 현대풍가요를 창작하기 위한 고심어린 노력을 기울인 결과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민요곡조에 들끓는 사회주의현실의 사상과 정서를 반영한 가사를 붙여 수령님께서 좋아하시고 인민들이 즐겨 부르는 많은 노래들을 만들어내였다.

그 대표작은 조령출이 창작한 민요 《모란봉》이다. 《모란봉》은 우리 나라 중부지방민요인 《창부타령》을 우리 인민들의 생활감정에 맞게 개작한 민요로서 예로부터 명승지로 소문난 모란봉과 나날이 웅장하고 화려한 도시로 변모되여가는 혁명의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긍지높이 노래하고있다. 민요는 혁명의 수도를 이 강산 좋은 곳에 두고있는 우리 인민의 자랑스러운 감정과 어버이수령님께서 마련하여주신 사회주의제도하에서 행복하게 살며 일하는 그들의 락천적인 생활정서, 민족적긍지감을 훌륭히 표현하고있다.

그가 가사를 짓고 그의 안해인 김관보가 편곡한 민요 《모란봉》을 들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노래는 아름다운 선률을 가진 노래라고, 그런 노래를 많이 지어야 하겠다고 높은 평가를 주시였다.

민요 《모란봉》은 민족적특성과 현대성을 훌륭히 구현하고있는것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 인민들속에서 널리 불리워지면서 사랑을 받고있다.

조령출은 종래의 민요를 현대적미감에 맞게 더욱 빛내일 생각으로 해방전 한탄의 상징으로 된 가사들을 새로운것으로 창작하였다.

《황금산의 백도라지》(도라지타령), 《법성포배노래》, 《양산도》 등이 다 그런 민요들이다.

1993년 2월 12일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친히 작가를 만나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지으시고 아, 조령출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시고는 그의 손을 뜨겁게 잡아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그에게 나이는 얼마인가, 장수하자면 락관적으로 살고 또 운동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장수의 비결까지 가르치시였다.

이날 뜻깊은 오찬에서 작가는 어버이수령님께서 장군님의 탄생 50돐에 즈음하여 지으신 송시의 운을 받들어 민족최대의 명절인 2월과 4월의 명절을 함께 노래한 헌시 《위대한 명절》을 읊어드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작가에게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하시면서 그 시를 자신께서 다시 보겠으니 두고 가라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그토록 평가해주신 그 헌시에는 어떤 사연이 깃들어있는가.

여기에 수령을 받드는 작가의 참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다.

그 전해인 1992년 2월, 어버이수령님께서 위대한 장군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지으신 송시를 받아안은 조령출은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며칠밤 잠들수 없었다.

그는 다음해 4월의 명절에는 위대한 수령님께 올릴 헌시를 송시의 운을 받들어 쓰리라 결심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탄생일을 맞으며 진행되는 연회에 참가하라는 련락을 받은 그는 헌시를 정서하기 위해 옷매무시를 바로하고 며느리에게 흰종이와 붓, 벼루를 가져오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창작실에서 수령님의 초상화를 우러르며 수령님과 장군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송시의 운을 받들어 헌시를 지어 붓으로 흰종이에 한자와 우리 말로 정서하였다.

먹 한방울 떨어질세라 조금이라도 틀리면 다시 쓰고 또 다시 정서하고 이러기를 그 몇번…

새벽이 되여서야 마음에 드는 헌시를 가슴에 품은 작가는 수령님을 모시고 열린 연회에 참가하였다.

작가는 수령님께 이렇게 말씀올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지난해 2월의 뜻깊은 명절에 친히 지으신 송시에 제 너무 감격하여 외람되나 송시의 운을 받들어 민족최대의 명절인 2월과 4월의 명절을 함께 노래한 헌시 〈위대한 명절〉을 지었습니다.》

조령출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옥체건강하시기를 바라는 절절한 마음으로 시를 읊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그는 언제인가처럼 수령님께서 잡아주신 손을 오래도록 쓸어만지며 생각했다.

(어버이수령님, 로신하 조령출은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오직 수령님을 위해 모든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후 그는 자기의 결심대로 어버이수령님의 뜻을 받들어 민요창작과 가극창조사업에 자신의 정열을 깡그리 바치였다.

조령출의 창작활동은 문학예술의 영재이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지도와 세심한 보살피심속에서 더욱 활짝 꽃펴나게 되였다.

경애하는 장군님은 가극혁명의 나날 작가에게 온갖 사랑과 믿음을 안겨주고 그가 인민의 기억속에 남는 훌륭한 작가로 성장하도록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스승이시다.

그가 처음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을 만나뵈온것은 1968년 6월 평양대극장에서 가극 《해빛을 안고》를 공연할 때였다.

그날 조령출이 창작한 가극공연을 보아주신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몸소 불러주시고 가극의 형식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으시였다.

조령출은 뜻밖의 말씀에 아무 대답도 드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비록 자기가 《해빛을 안고》를 썼지만 가극의 형식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하였던것이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가극을 하나하나 분석해주시면서 이런 식으로 가극을 만들면 현시대 사람들의 미감에 맞지 않을뿐아니라 우리의 가극예술을 발전시킬수 없다고 지적하시였다.

조령출은 가슴이 조여들었다. 받아안은 사랑과 은정에 결초보은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본의아니게 장군님께 심려를 끼쳐드린것이다.

허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자애로운 눈길로 바라보시며 자신과 함께 가극혁명을 해보자고 고무해주시였다.

그러시고는 많은 시간을 내시여 가극창조에서 나서는 리론실천적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때의 약속을 잊지 않고 혁명가극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밀림아 이야기하라》, 《금강산의 노래》, 《밝은 태양아래에서》 등 수많은 가극창조사업에 조령출을 내세워주시였다.

1972년 11월 27일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지도해주신 장군님께서는 조령출에게 가극 《금강산의 노래》를 문예총에서 맡아하라고 크나큰 믿음을 안겨주시였다.

조령출은 그 믿음에 더 큰 창작실천으로 보답할 일념으로 위인송가창작에 모든 정력을 바쳤다.

어느해 4월의 명절날 작가는 어버이수령님께서 보내주신 사랑의 선물을 받아안게 되였다.

선물을 부여안고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한 그는 북받치는 격정을 담아 가사를 썼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시여 어린시절을 보내신 혁명의 요람 만경대에 대한 우리 인민들의 깊은 동경과 사랑, 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흠모와 충정의 감정…

작가는 그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수 있도록 인민반속보판에 붙여놓았다.

이것을 본 작곡가 김옥성이 흥분하여 그 자리에서 가사에 곡을 붙였다. 이렇게 되여 세상에 태여난것이 바로 우리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진 《만경대의 노래》이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그가 창작한 가요 《만경대의 노래》가 음악무용극 《밝은 태양아래》에서 제일 인상에 남는다고 하시면서 가극 《밝은 태양아래에서》를 만들 때 이 노래를 반드시 넣어야 하겠다고 은정깊은 말씀을 하시였다.

음악의 천재이신 위대한 장군님의 은정속에 이 가요는 주체시대의 명곡으로, 가극의 주제곡으로 해마다 4월의 봄명절이 오면 불리워지는 추억의 노래, 위인칭송의 노래로 되였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작가를 만나실 때마다 그의 건강에 대하여 각별한 주의를 돌려주시며 왜 요사이 보이지 않았는가, 어데 아픈데는 없는가, 조선생은 앓지 말아야 한다고 다정히 격려해주시며 그의 생일 일흔돐상을 마련해주시였고 어느해인가는 인민들이 자신의 건강을 위하여 삼가 올린 산삼을 보내주시는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위대한 믿음의 품, 의리에 넘친 사랑의 품에 안겨 작가는 80고령을 눈앞에 둔 때에도 왕성한 창작적의욕을 가지고 새로운 작품창작에 온갖 심혈을 다 바치였다.

그 끝없는 사랑에 떠받들려 작가는 《피바다》식가극형식으로 새로운 민족가극 《춘향전》을 완성하였다.

1988년 12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가극 《춘향전》을 보아주시고 사상예술적으로 완전무결하게 완성된 우리 식의 가극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그가 인생의 마지막문을 닫기 전에 창작한 작품은 가사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이다.

《어머니 우리 당이 바란다면》은 위대한 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로동당에 대한 끝없는 충정의 마음, 절대불변의 의지적감정을 환희롭고 숭엄한 양상에 담아 노래하고있는 조령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노래는 작가가 79살의 고령의 나이에 자기의 창작을 총화하며 얻은 진리와 신념을 집약하여 시화한 의의있는 작품이다.

가사는 수령, 당, 대중이 일심단결된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해답을 심오하게 밝히고있다. 가사는 우리 사회의 가장 참된 인간이 되려면 당의 뜻과 의도대로 사는 사람, 당의 사상을 신념화하고 순결한 량심과 의리, 변함없는 의지로 한마음 당을 받들어가는 사람이 되여야 한다는 주체시대의 인생관에 관한 문제를 잘 반영하였다.

작가는 가사의 이러한 사상적내용을 우리 인민의 민족적정서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는 진달래, 목란꽃, 참대에 비유된 한없이 밝고 우아한 정서적색조와 함께 경건하고 숭엄한 양상으로 펼쳐보임으로써 예술적형상에서 세련미를 보여주고있다.

작가는 자기 한생의 총화이고 맹세이며 후대들에게 남기는 당부이기도 한 이 노래에 장군님을 따르는 우리 인민의 결곡한 마음을 그대로 담았다.

참으로 어버이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크나큰 믿음과 은정은 지난날 설음과 울분의 노래만을 터치던 《집없는 천사》의 생을 아름답게 꽃피워준 자양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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