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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팔베개를 하고 누워서 따뜻한 보금자리를 꿈꾸던 조령출의 이슬맺힌 눈에 조국해방의 밝은 빛이 비쳐들었다.

허나 조국해방의 그 밝은 빛이 천사의 오랜 꿈을 깨우기에는 아직 시간이 조금 더 흘러야 했다.

아래에 조령출이 그때를 회고하여 쓴 수기의 일부를 그대로 적는다.

1945년 8월 15일 일제통치로부터 조선은 해방되였다.

하건만 서울에서는 사람들이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 어리벙벙하여 《해방이요, 해방이요.》, 《왜놈들이 그처럼 기승을 부리더니 망했소.》 하며 서로 뜨겁게 손을 잡고 말할뿐이였다.

우리 민족이 일제의 그 악독한 총칼의 폭압밑에서 신음하다가 해방된 그 환희의 감정을 폭발시킬 계기가 없었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겨레의 통곡이 사무친 이 하늘아래 3. 1만세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다 왜놈의 총칼앞에 피를 흘린 그 원한을 풀려 종로 한복판거리에서 조선만세, 조선독립만세를 웨쳐 불러야 하겠는데 그 계기가 없어 부르고싶던 그 만세소리가 터져오르지 않았다.

1926년 주권의 상징으로나마 생존해있던 조선봉건왕조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죽음은 망국의 비통한 감정을 우리 겨레의 가슴에 일시에 폭발시켰다. 이해 6월 10일 순종의 상여가 마지막 창덕궁을 떠나는 시각 참을수 없었던 망국의 비통한 울음이 일시에 터지고 그것은 6. 10만세시위투쟁으로 서울에서 왜놈의 총칼을 헤치고 터져오르고 애국적반일투쟁의 불길로 번져나갔다.

허나 오늘날 일본제국주의의 그 악독한 식민지통치기반으로부터 해방된 서울거리에서 어째서 《조선해방 만세!》, 《조선독립 만세!》의 환호성이 전인민적인 우렁찬 함성으로 터져오르지 못하고있는것인가.

만세의 폭풍이 일어날 계기가 아직 이르지 않은것으로 생각되였다.

나의 마음속공허는 스스로 마음깊이 흠모하여온 《나라님》을 기다리였다.

그렇다. 항일의 20성상 오직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항일혁명군을 이끄시고 백두의 눈보라를 헤치시며 일제 백만대군과 맞서 싸우시고 평양으로 개선하시였다는 소식!

더우기 장군님께서 기차로 서울에 오신다는 소식은 나의 마음도 서울시민들의 마음도 격동시켰다.

나는 문인들, 무대예술인들과 함께 서울역으로 나아갔다. 역전광장은 김일성장군님을 환영하기 위하여 나온 사람들로 흥성거리였다. 붉은 기발과 함께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영웅이신 김일성장군 만세!》 라고 쓴 프랑카드가 나붓기고 흠모로 기다리며 뵈옵고싶은 마음이 절절히 고동치였다.

목청이 터지도록 만세를 웨치고 또 웨쳐도 성차지 않을 그 감격은 작가의 풍부한 언어를 가지고서도 감히 형용할수 없을만큼 벅찬것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해방의 환희란 곧 강도 일제를 때려부시고 게다짝에 짓이겨졌던 삼천리금수강산을 찾아주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열화같은 흠모의 분출이였다.

박세영, 리용악을 비롯한 진보적시인들은 시랑송모임을 가지고 해방된 격정을 터치였다.

이때 조령출은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를 랑송하였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른다

 

백두산마루에 떨어지는 비방울들이

바다로 흘러가는 그 리치를 아느냐

오 동무여 조선인민이여

 

그렇다. 인민은 민족의 령수 김일성장군님을 그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는 소식에 접한 조령출은 물밀듯이 흘러가는 인파속에 섞여 매일처럼 서울역에 나갔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이를 만나뵙지 못하고 가슴속에 허전한 마음을 안은채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군 하였다.

어느날 그는 장군님을 만나뵈우려고 떨쳐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8월의 복더위속에서도 해가 저물도록 흩어지지 않고 모여있는것을 보게 되였다.

《혹시 알겠소. 장군님께서 저녁차로 오시겠는지.》

《그럴지도 모르지요.》

그들속에는 허연 수염을 길게 드리운 로인도 있었고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나온 철부지아이들도 있었다.

(저들의 가슴속에 쌓인 장군님에 대한 그리움을 얼마만이라도 풀어줄수 없을가?)

이렇게 생각하던 그는 갑자기 무릎을 쳤다.

《그래, 내가 쓰자.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연극을!》

하여 작가는 장군님께서 이끄신 조선인민혁명군의 투쟁내용을 취급한 장막희곡 《독립군》을 창작할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누구의 권고에 의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였다. 그리고 어떤 단체의 정식요청으로 착수한것도 아니였다.

당시 남조선에는 진보적연극단체로서 조선예술극장과 서울예술극장이 있었는데 그 어느 극장에서도 작가에게 이 주제의 작품을 써달라고 한적이 없었다. 온 겨레가 민족의 태양으로 우러러받드는 백두산장군에 대한 그자신의 열화같은 흠모심이 낳은 열정의 발현이였다.

그러나 욕망과 능력의 불일치가 작가를 괴롭혔다. 무엇보다 안타까운것은 자신이 장군님에 대하여 잘 모르고있는 사실이였다.

해방전에 간도로 들어간 친구들을 만나면 장군님의 투쟁이야기를 들을수 있었겠으나 찾을수가 없었다. 혹 해방후 서울의 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파견된 항일투사가 있을수도 있고 혁명근거지에서 생활하던 사람들,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사람들도 있을것이지만 아무리 수소문해도 만날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작가는 우연히 북간도에서 왔다는 한 로인과 30대의 젊은이를 만났는데 뜻밖에 그들을 통하여 김일성장군님의 투쟁사적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던것이다.

장군님께서 령활한 유격전법으로 왜놈들을 삼대쓸어버리듯 하신 이야기, 유격근거지에 있을 때 장군님 주신 땅에서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아동단학교에 보내던 이야기, 장군님께서 류창한 중국말로 위만군포로들을 감화설복하여 고향으로 돌려보내신 사실, 장군님께서 대원들앞에서 조국해방에 대한 감동적인 연설을 하시고 포위공격해오는 왜놈《토벌대》를 족치신 통쾌한 전투이야기…

장군님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들은 작가에게 절세의 애국자, 민족의 구세주가 어떤분인가를 잘 알게 해주었다.

그들이 밤가는줄 모르고 펼쳐놓은 꾸밈없고 감동깊은 이야기들은 작가의 심장에 좀전에는 상상할수 없었던 창작적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서울예술극장의 책임연출가 라웅을 비롯하여 많은 예술인들은 그가 창작하고있는 작품이 김일성장군님에 대한 작품임을 알자 열렬히 찬동했다.

조령출은 그들의 고무에 힘을 얻으며 한장면한장면 써나갔다.

사람들속에 기쁨과 웃음을 안겨주던 랑만적인 명배우, 인민배우 김세영은 당시 새파랗게 젊은 극단의 신인배우였는데 그는 조령출의 집에 찾아와서는 작품대본 1막이 떨어지면 1막을 가져다 연기련습을 하고 또 2막이 떨어지면 2막을 가져다 련습하면서 3막 4장의 희곡 《독립군》을 말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빠른 시일안에 형상창조하였다.

후날 조령출은 그때의 열정에 대하여 여러번 회상하면서 그것은 창작가, 예술인들이 모두 젊은데도 있었지만 보다는 이 땅에 해방을 가져오신 장군님에 대한 흠모심이 낳은것이였다고 곱씹군 하였다.

작가는 작품의 제목을 《혁명군》이나 《빨찌산》이 아니라 《독립군》으로 달았다. 한것은 당시 국내에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두고 김일성독립군》이라고 많이 불렀으며 이로하여 독립군이라는 말이 인민들속에 널리 알려졌었다. 뿐만아니라 부산에서 일본으로 오가는 관부련락선에 김일성독립대장》이라는 글이 나타나 왜놈들을 당황망조케 한 사건도 있었다.

때문에 조령출은 독립군이란 이름이 더 인기있을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라웅이 연출을 담당하고 무대미술은 강호가 맡았으며 위대한 수령님의 역형상은 박학이 담당하였다.

박학은 그 당시 진보적이며 학구적인 청년배우로서 북간도에서 나왔다는 한 인물에게서 장군님의 영걸하신 풍모와 활달하신 품성, 인자하신 덕성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를 듣고 깊은 연구끝에 장군님의 역을 정중히 형상하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나 북에 온 작가는 위대한 수령님을 직접 만나뵙고 또한 그이의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전에 자기가 들었던 그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사실이였음을 다시금 알게 되였다.

작품에 등장하는 녀대원은 문정복과 남궁련이 담당하고 장군님께서 녀대원에게 파견한 로대원은 리재현이, 부현장집에 잠입하여 녀대원을 회유하려다가 오히려 규탄을 받고 량심의 가책을 받는 변절자역은 정리일이 맡았다.

연극은 항일무장투쟁시기의 위대한 수령님을 형상의 중심에 모시고 녀성정치공작원을 적구로 파견하시여 국내반일민족해방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나가시는 탁월한 령도자로서의 그이의 풍모를 훌륭히 창조하였다.

황영일, 류경애, 김세영 등 연극인들도 연극의 성공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독립군》은 곧 완성되여 동양극장에서 상연되였다.

서울시민들은 구름처럼 극장에 몰려들었다.

《무대우에서라도 김일성장군님의 모습을 뵈옵자!》

이것은 그때 사람들의 한결같은 심정이였다.

당시 한국독립당 당수이며 상해림시정부 주석인 김구가 공연을 관람하러 왔던 일도 있었다.

어느날 김구가 연극구경을 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연극인들은 놀랐다. 극우익반공단체의 우두머리가 어떻게 김일성장군님의 형상을 창조한 연극을 보러 오는가?

그날 저녁 6시에 김구일행이 정말 동양극장에 왔다.

당시 어느 한 신인배우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그때 나는 무대면막사이로 2층관람석을 바라보았는데 김구는 검은 안경을 쓰고있다가 연극이 시작되니 천천히 벗었다. 연극이 끝났을 때에는 일어나 무대를 향하여 열정적인 박수를 보냈다. 아마 반공인사였던 그도 그 연극에 대하여 매우 깊은 감동을 받은것 같았다.》고 말하였다.

김구는 다음날 사람을 보내여 조령출과 배우들에게 연극을 잘 보았다는 인사를 전했다.

참으로 이 시기 연극 《독립군》에 대한 반향은 대단했다.

서울에서의 공연이 끝나자 조령출은 서울예술극장측에 연극을 지방에 내려가 상연할데 대하여 제기했다. 물론 극장측에서도 적극 찬동했다.

연극인들은 전라도 려수, 순천에까지 나가 《독립군》을 공연하였다.

하지만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온것으로 하여 사정은 점점 달라졌다.

미군정이 실시되고 해방후 인민들의 총의에 의해 세워진 인민위원회들이 강제로 해산되였다. 또한 일제가 만들었던 법조항들이 그대로 사람들의 어깨를 짓눌렀으며 한동안 움츠러들었던 친일파들은 미제의 앞잡이가 되여 활개를 쳤다.

조령출은 몹시 실망했다. 미국이 해방자가 옳긴 옳은가?

그 와중속에서 불온연극을 했다는 구실밑에 박학, 남궁련, 리재현, 정리일 등 《독립군》에 출연한 연극배우들이 경찰에 잡혀들어가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해방후 우리의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미제와 반동들의 첫 탄압이였다.

연극 《독립군》은 비록 얼마 공연되지 못했지만 8. 15해방직후 남반부에서 위대한 수령님을 무대우에 정중히 형상한 첫 작품이라는데서 의의를 가진다.

해방후 작가가 창작한 연극은 《독립군》만이 아니였다.

1946년에 조령출은 희곡 《론개》를 창작하였으며 그것은 극장들에서 성대히 막을 올렸다.

 

구차하게 살자 하니

더러운 욕 어이하리

이미 죽을 작정이면

왜적칼에 내 죽으리

 

임진조국전쟁시기 진주 촉석루에서 술취한 왜장을 붙안고 강물에 떨어진 론개의 애국적의거를 형상한 이 연극은 미군의 강점으로 신음하던 남조선인민들속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작가는 그해에 또다시 가극 《청사초롱》을 썼다. 이 가극은 진보적가극인들에 의하여 널리 공연되였다.

작품창작의 나날에 작가의 세계관에서는 심각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기 토지개혁이 실시되여 농민들에게 땅이 차례지고 인민이 주인된 새 사회건설이 추진되고있는 북반부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날개돋친듯 서울장안에 퍼졌다.

북조선에 찾아온 새봄에 대한 동경심, 이것이 가극 《청사초롱》의 주제내용이였다.

이것은 당시 작가의 마음의 반영이기도 하였다.

1947년에 들어서면서 남조선정세는 더욱 복잡하고 긴장했다. 미제는 친미주구인 리승만을 내세워 단독정부를 세우려 획책하면서 민주적인 단체와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따라서 작가는 자기의 붓을 점차 반미민주운동을 취급한 연극창작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작가는 이 시기 력사극을 창작하였다.

그 력사극은 1894년부터 1895년초까지 봉건통치배들과 왜적을 반대하여 일어났던 갑오농민전쟁을 취급한 작품으로서 남조선인민들의 반미반침략의식을 반영하여 현실적의의가 있게 창작한것이였다.

처음 장면에는 봉건통치배들의 학정으로 신음하는 농민들의 생활이 보인다. 연극이 관중들의 절찬을 받은것은 당시 미제의 강점하에서 멸시받고 학대받는 남조선인민들의 심정을 실감있게 반영하였기때문이였다.

력사극은 사람들속에서 폭풍같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작가의 이러한 창작활동에 대하여 미제와 리승만도당이 팔짱을 끼고있을리 만무하였다. 탄압의 그물이 작가를 둘러싸고 조여들기 시작하였다.

조령출은 해방은 되였어도 이 세상은 여전히 자기의 진정한 집이 아니라는것, 결국 자신은 어제도 오늘도 변함없이 집없는 천사라는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자기가 밤을 새우며 쓴 연극과 노래가 마음대로 불리워지지 못하는 세상, 왜놈대신 미제가 주인노릇을 하는 식민지 이 땅에 더는 있을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새 조선의 노래가 힘차게 울려퍼지는 진정한 보금자리-인민의 세상인 북으로 달리는 마음을 걷잡지 못하였다.

운명은 작가로 하여금 선택을 요구하고있었다.

당시를 회고하여 조령출은 자기의 수기에 이런 글을 남겼다.

내가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고학할 때 영문과에는 손정봉이란 친구와 황순원이 있어 동창으로 우정을 두터이 하였다.

손정봉은 영어를 잘하여 앞으로 영어교원으로 일하며 문학작품의 번역가가 되겠다 하였고 황순원은 그 당시 시단에 이름있는 시인으로서 계속 시인작가로 발전할 희망을 가진 친우들이였다.

그들의 고향은 모두 평양이였고 도꾜에서 류학을 할수 있는 정도의 재산이 있는 집 아들들이였다.

당시로서는 문학동창으로 별로 사상적갈등이 없이 친숙하였다.

우리 세 친구는 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나는 서울에, 황순원은 자기 고향인 평양에서 작가로 활동하였고 손정봉은 고향인 평양에 있다가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영어교원으로 활동해보려고 서울에 머물러있었는데 해방을 맞이하였다.

손정봉은 미군이 남조선에 들어오는것과 함께 영어가 시세를 만나 서울에서 활동할 전망이 더욱 클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허나 시일이 갈수록 나라의 북과 남은 상반되는 정세로 달라졌다.

남조선은 미군이 들어와 미군이 지배통치하는 미군정의 세상이 되였는데 평양에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민족의 새 국가를 창건하시고 인민을 위한 나라, 빈부의 차이가 없는 민주의 새 사회를 펼쳐나가기 위하여 나라의 인재를 구하신다는 소식이 들려와 우리를 감동시키고 흠모의 마음을 더욱 불타게 하였다. 이 소식에 접한 손정봉은 나를 만나 자기의 결심을 말하였다.

《나는 평양으로 가겠소. 새 사회건설에 헌신하겠소.》

나는 그의 손을 굳게 잡고 송별의 술을 들어 그를 축하하였다.

헌데 그가 떠난지 한달이 못되여 평양에서 황순원이 서울에 왔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나는 친우의 기쁨으로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허나 이야기과정에 우리의 사상이 서로 다르게 지향하고있다는것을 감촉하였다.

나는 놀랐다. 손정봉은 평양을 향해 떠나갔는데 황순원은 자기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로 온것이다. 과시 황순원은 그후 경향이 나쁜 소설을 써서 민족앞에 수치스러운 모습을 남기였다. …

운명의 선택!

그것은 말처럼 쉬운것이 아니였다. 선택이라는것은 순간에 불과한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인생 그자체를 성공이냐 파멸이냐 하는 상반되는 결과에로 이끌어가는것이다. 이를테면 선택이라는것은 분명 가진다는 의미이지만 거기에는 하나는 가지고 다른것은 버려야 한다는 심각한 의미가 포함되여있는것이다.

조령출은 모대기였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은 어떻게 되여야 하는가.)

우리 인민들이 사랑하는 가요를 창작하고 그들이 좋아하는 가극을 창작하는것은 조령출의 꿈이였고 리상이였다. 지금껏 그는 해방이 되였으니 동서남북 갈 곳 없어 찬이슬 내리는 잔디우에 쓰러져 어머니의 옛사랑을 그리던 그 불행한 시절이 영영 끝장났다고 생각해왔었다.

했으나 남의 땅으로 변해버린 남조선에서 그의 꿈은 바다물이 다 말라도 실현될수 없는 공상에 불과했다. 해방전에도 금곡령을 면치 못했던 그의 희곡, 그의 노래들은 해방된 이 땅에서도 빛을 보지 못한것이다.

1948년 리승만은 남조선에서 단선을 강행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였다.

우리 인민의 앞에는 반만년의 력사를 가진 민족과 국토가 두동강이 날 엄중한 정세가 조성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당시의 정세를 명철하게 분석하신데 기초하여 1948년 4월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련석회의를 통하여 조선민족의 통일적이며 민주주의적인 정부수립에 대한 문제를 성과적으로 토의하도록 이끄시고 민족분렬을 막기 위한 투쟁을 조직령도하시였다.

바야흐로 남북조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승리적으로 진행되고 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민족의 영웅이신 김일성장군님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이 내외에 엄숙히 선포될것이다.

작가의 심장은 세차게 고동쳤다.

(아, 우리 민족의 참다운 구세주는 김일성장군님이시다!)

마침내 그는 심장이 가리키는 곳으로 운명의 키를 돌렸다. 가자, 북으로, 김일성장군님이 계시는 곳으로!

작가는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는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 남조선대표로 선출되여 38 선을 넘어 평양으로 왔다.

그가 인민의 새 세상에 들어선 감격을 노래한 시초 《북조선으로》의 한 대목을 아래에 소개한다.

솔문 푸르게 서있는 동구

조국의 부강과 자유와 광명이 찬란한

새 나라 기발들이

꽃처럼 피여있는 마을!

집집의 기둥마다 벽마다

오색테두리단장 새로운 벽보들

가지가지

만세와 감사

인민공화국수립 만세는

나의 머리우에

프랑카드에 펄펄 날리는것이니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금강 불멸의 반석우에

영원번영하리라

 

정녕 그가 소리높이 읊은 이 시는 진정한 보금자리를 찾은 어제날의 집없는 천사가 목메여 부른 자유의 노래, 행복의 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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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1) 《회고와 신념》의 세계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2) 병상을 박차고 창작의 활주로에로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3) 수령형상문학의 개척자로, 담당자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1) 해방은 되였으나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2) 해볕에서 살리라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3) 태양의 빛발이 날개가 되여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4) 해볕 또 해볕에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5) 영생의 언덕에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1) 《순수문학》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2) 비상한 노력가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3) 고목에 핀 꽃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1) 민족의 량심과 지조를 지켜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2) 또다시 전선으로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1) 《집없는 천사》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2) 운명의 선택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3) 공화국의 품속에서 부른 참된 삶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4) 영생하는 작가의 삶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1) 무대에 운명을 걸고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2) 위대한 스승의 품속에서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3) 연극혁명의 불길속에 다시 태여난 인생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4) 어머니를 불러, 통일을 불러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1) 떠돌이생활에서 벗어나기까지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2) 생 명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3) 소망을 헤아리시고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4) 이어가는 참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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