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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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녀는 칼로 베듯이 딱 자르고나서 사정조로 말했다.
《얘야. 그 처녀한테 보낼건 따로 마련하겠으니 맘놔라. 약혼식은 래일 한다지 않니? 내 어떻게든지 결혼식날엔 꼭 입히도록 해주마.》
성녀는 가뜩이나 제 부모에 대한 불만을 품고 집에 발길을 하지 않는 명철이가 이러다가 훌쩍 일어나 가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랴 하여 눈치껏 둥글둥글 아들의 비위를 맞췄다. 그러지 않아도 명철은 훌쭉해진 얼굴을 숙이고 앉아서 무거운 한숨만 몰아쉬였다.
《저한텐 이젠 그 어떤 례장감도 필요없습니다.》
성녀는 아들의 입에서 험한 말만 쏟아져나오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어머니, 전번에 우리 공장에 찾아왔을 때 정문에서 만났던 처녀가 생각납니까? 은희라구 우리 발전소건설장의 처녀중대 중대장이였습니다. 전 그 처녀를 사랑했고 그 처녀도 나를 무척 따랐습니다. 그런데 얼마전에 공장의 유능한 기능공을 구원하고 희생됐습니다.》
《에그머니나!》
성녀는 깜짝 놀랐다. 너무도 뜻밖의 충격을 받고 가슴속이 활랑거려 무슨 말이 나가지 않았다. 첫 인상에 눈이랑 억실억실하고 무척 쾌활해보인다 했더니 그 처녀가 자기 아들을 사랑하다가 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성녀는 넋빠진 녀인처럼 아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 은희동무가 자기네 처녀중대 대원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했는지 어머닌
상상도 못할거예요. 은희가 희생된 날
명철이가 갑자기 번들거리는 눈망울을 굴리며 말을 중단했다. 성녀도 숨을 쉬는것 같지 않게 앉아서 아들의 얼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은희의 장례식이 끝난후 병원에서 나온 덕삼아바이는 처녀중대장이 자기때문에 목숨을 바쳤다는게 기가 막혀 며칠동안 말없이 다니더군요. 은희묘에 올라가선 뻐금뻐금 담배만 태우며 내려오지 못하더군요. 그러다가 은희한테 보답이 되는 일을 하려고 래일 자기 집에서 처녀중대 대원의 약혼식을 차려줍니다. 이럴 때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희가 살아있으면 제가 시집 가는것보다도 훨씬 더 기뻐할텐데.… 그런데 은희는 없고 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내 손으로 은희를 언땅에 묻을 때의 심장이 터질것같은 슬픔은 아직도 이 가슴속에 그냥 남아있습니다. 그렇지만 전 은희를 대신해서 약혼식에 찾아가 노래를 불러주겠습니다. 처녀중대원들이 건설장으로 오가면서 즐겨부르던 노래입니다. 은희가 사랑한 노래예요. 가슴속엔 눈물이 차올라도 은희가 사랑한 축복의 노래를 불러주겠습니다. 은희를 위해서, 그가 그처럼 아껴온 처녀의 행복을 축하해주겠단 말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이 아들의 마음을 너무도 몰라주누만요.》
명철은 어머니앞에서 힘없이 일어났다. 어망결에 따라 일어난 성녀는 아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명철이가 사랑한 처녀중대
중대장 은희와는 너무나도 상반되게 자기를 위해서만 살아온 지난 일이 있어 부끄럽게 돌이켜졌었다. 이제 와서 내가 명철의 아버지를 배반한
사실을 감춘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가 아무리 재간껏
성녀는 자기와 아들사이에 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고 융합될수도 없는 생활이 담벽처럼 가로 막혀 있다는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비록 은희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를 열렬히 사랑했고 앞으로도 쓰린 마음으로 오래오래 추억하게 될 아들이 과연 이 어머니를 자기의 깨끗한 심장속에 받아들일것인가?
성녀는 난생 처음 제가 낳은 자식을 아들이라고 떳떳이 부를수 없는
아니야, 그럴수 없어! 성녀는 명철이가 올데갈데 없는 제 혈육이라는 생각에 지꿎게 매달리면서 두손으로 아들의 얼굴을 싸쥐였다. 그리고는 자기의 애끓는 가슴에 꼭 갖다대며 피 터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울고있었다. 세상에 갓 태여나 어머니의 젖꼭지밖에 물줄 모르던 명철을 강보에 싸안고 렬차의 차창가에 앉아 구슬프게 바라보았던 강계역! 철없는 명철이와 함께 온통 흐릿한 비발속에 휩싸여버린 강계시를 떠났던 일이 어제런듯 생생히 떠올라서였다. 여태껏 그 피덩이를 아들이라고 생각한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성녀는 너무나도 뒤늦게야 그 슬픈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았다.
《얘야, 좀 섰거라!》
마침내 웃방으로 올라간 성녀는 이미 이 세상에 없는 며느리에게 보내는 마음으로 몇해동안 꽁꽁 싸두었던 옷감을 꺼내여들고나왔다. 명철이가 고마운 눈길로 마주 보았다. 순간 목구멍을 지지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아직은 자기밖에 알수 없는 서러움을 안고 문밖으로 따라 나선 성녀는 아들을 말없이 쓸쓸히 바래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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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혁은 장강군의 발전소건설에 총력량을 집중할데 대한
그래 장강이다. 거기서 우리의 피어린 전투를 결속하게 될것이다! 태혁은 주먹을 부르쥐고 분연히 일어섰다. 그가 로력도 자재도 운수수단도
장강군발전소건설장들에 우선적으로 들이밀 결심을 품고 도지휘부에 나타나
모든 발전소건설장에서 한창 맹렬한 전투가 벌어져 정신을 차릴수 없는 때 대안의 발전기들때문에 장강군이 골탕먹게 되였다고 걱정하면서도 누가 장강군에서 마지막전투를 결속하게 되리라고 상상인들 했던가.
요즘은 그 어떤 회의도 15분을 초과하는 일이 없었다.
오늘도 태혁은 지휘부회의가 끝나자 대안중기계공장에서 보장하기로 된 발전기들만 믿지 말고 자체로 만들데 대한 도당위원회 결정을 도안의 모든 공장, 기업소 당위원회들에 시급히 내려보내였다. 때를 같이 하여 만포와 자성, 화평지구의 발전소들에 나가 있는 림준과장한테서 적지 않은 발전기예비를 탐구해냈으니 속히 기술자들을 보내달라는 련락이 와 리경훈이 출장차림을 하고 태혁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로학자는 무릎까지 처져내린 솜외투에 허술한 배낭을 메고 겸손하게 풍뎅이를 벗어쥐였다.
《책임비서동무, 이제 곧 떠나겠습니다.》
지난 넉달동안의 어려운 투쟁속에서 리경훈이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막역지우가 된 태혁은 한동안 그의 손을 뜨겁게 잡고 놓지 않았다.
《경훈선생, 또 수고하게 됐군요.》
《원, 별소릴… 나를 한전호속에서 싸우는 로병처럼 생각하면 됩니다.》
《예. 선생은 여불없는 로병같습니다. 큰 키에 두툼한 동화며 긴외투… 난 선생의 이 훌륭한 모습을 일생 잊을것 같지 못합니다. 늘쌍 부탁하는 말인데 아무쪼록 몸을 조심하십시오. 아직도 우리의 투쟁은 간고합니다.》
《알고있습니다. 무척 힘겨워들 하지요. 하지만 내 눈에는 모든 사람들이 돋보입니다. 참으로 자강도사람들의 투쟁은 고난에 차있으면서도 부럽게만 생각된다니까요.》
로학자가 탄 《갱생》차가 얼음이 깔린 중앙광장쪽으로 사라져가는 모양을 이윽토록 뜨거운 눈길로 바래워주고난 태혁은 곧 승용차에 올랐다.
그는 강계시의 발전소건설정형을 돌아보고 다시금 성간군을 향하여 급히 떠났다. 순간 성간군당책임비서가 그가 찾아가면 늘쌍 웃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들던 모습이 떠올라서 혼자 빙긋이 웃었다. 건망증이 심하기로 소문난 그 리흥덕이가 아니나다를가 별하발전소의 지하갱도안에서 건설자들과 어울려 일하다가 태혁을 알아보자 부리나케 아래우주머니를 꾹꾹 만지며 야단을 쳤다. 보아하니 안경과 수첩을 어디다 뒀는지 몰라서 헤덤비는게 분명했다. 기름한 얼굴의 두눈을 흡뜨고 《아뿔사! 이런 변이라구야.》하고 당황해하는것같던 리흥덕은 뒤늦게야 태혁의 앞으로 달려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수고하오. 지금 뭘 하오?》
《어제부터 돌격대원들을 갱도미장작업에 붙이고 냅다 미는중입니다.》
태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리흥덕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워낙 키꼴이 크고 뼈대가 굵게 생긴 일군인데 면도도 하지 않은 두볼은 푹 꺼지고 코만 삐죽하게 두드러져보였다. 태혁은 뒤이어 리흥덕이와 함께 굴간안으로 들어갔다. 한절반 미장작업을 마친 100m 지하갱은 이전에 돼지우리로 쓰던 어지러운 굴간과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그때엔 코를 찌르는 구린내와 얼굴에 달라붙는 하루살이떼의 성화로 눈을 뜰수 없었는데 지금은 지하철도의 웅장한 구조물을 둘러보는 기분이였다.
《여보, 이거 정말 굉장하구만.》
태혁은 너무도 희한하여 두손을 허리에 올려짚고 황홀한 심경에 잠겨 말했다.
《천지개벽이라는게 바로 이런거요. 이제 저 천정에다 새하얗게 도색까지 하면 볼만 하겠소. 군당책임비서동무, 평양의 고려호텔에 가봤지? 거기 드높은 천정에 매달려있는 무리등과 같은 화려한 장식등을 우리도 여기다 만들어달자구. 이왕이면 군데군데에 벽화들도 멋들어지게 그려붙이구. 난 이번 전투기간에 자강도안의 모든 발전소들을 궁전화하자는거요. 어떻소?》
《전적인 찬성입니다.》
《그래, 맘먹고 달라붙으면 못할게 없소.
태혁은 발전기실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옮겨갔다.
드넓은 현장안에서 제강소의 로동자, 기술자들이 설비조립작업에 한참 여념이 없었다. 누가 누군지 도무지 분간해보지 못할 정도로 얼굴이며 작업복에 온통 새까맣게 기름매닥질을 하고 불이 번쩍나게 일손을 다그치는 그들의 미더운 모습을 태혁은 한참이나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성간군이 별하와 남리발전소만 완공해도 전기부자가 되겠소.》
《예, 작년말 건설을 시작할 때 당장 먹고살아갈 일도 급한데 어떻게 발전소도 건설하고 살림집도 짓는가, 군당책임비서가 정신나갔다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모두들 사기충천하여 죽을둥살둥 모르고 일합니다.》
《군당책임비서가 고생한 보람이 있단 말인데 얼마나 좋소. 동무네 군에 동원된 도청년동맹돌격대원들이 몇명이나 되오?》
《약 150명가량 됩니다.》
《내가 찾아온건 다름이 아니요. 오늘저녁에 그들을 철수시켜 당장 장강군에 보내야겠소.》
리흥덕은 장강군당책임비서 김충모와는 여간 승벽이 강하지 않다. 그는 자기네 군의 발전소건설을 도와주고있는 청년동맹돌격대원들을 장강군에 넘겨주라고 하자 펄쩍 놀라며 우는 소리를 했다.
《아니, 그럼 우린 쫄딱 녹습니다.》
《군말 말고 보내라면 보내오. 장강군의 공사형편이 대단히 긴장해졌소. 동무네만 발전소를 완공하고
태혁은 구태여 긴말을 하지 않고 돌아서나와 승용차가 서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연해서 그를 바라보던 리흥덕이 그때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씨근거리며 뒤쫓아와서 멋적게 뒤덜미를 쓸어만지였다.
《책임비서동지, 저 구봉령도로관리원 복실이의 신랑감이 생겼습니다.》
태혁은 뜻밖의 희소식에 호기심이 동하여 발길을 멈추었다.
《장강군의 굴착기운전공인데 눈섭이랑 량옆으로 치째진게 보통 사내싸게 생긴 녀석이 아닙니다.》
《당사자들끼리 만나봤소?》
벌써 여러차례 성간군당책임비서에게 복실의 대상자를 좋은 청년으로 물색할데 대한 과업을 주었던 태혁은 엄한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만나봤지요. 일이 좀 별나게 되긴 했습니다만… 전번달에 복실이가 회령에 가서 백살구나무모를 한자동차 실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눈보라치는 밤에 굴착기부속을 구해가지고오던 한 청년이 그 자동차와 맞다들자 태워달라구 무작정 앞을 가로막아 나섰습니다. 성이 독같이 난 운전사가 결김에 주먹을 부르쥐고 뛰여나가자 복실은 간이 콩알만 해서 울상이 되여버리구요.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두 청년이 서로 얼싸안고 돌아가는바람에 복실은 마구 웃어댔답니다. 글쎄 군대때 한부대에서 복무하며 포차를 끌었던 친구들사이의 감격적인 상봉이 벌어졌다나요. 마음씨 고운 복실은 너무도 기뻐서 운전칸의 자기 자리까지 굴착기운전공에게 양보하고 적재함에 올라가 앉았는데 두 친구는 그간의 회포를 나누며 오는 정신에 적재함의 처녀에 대해서는 감감히 잊어버렸답니다. 서너시간이 실히 지나서야 갑자기 처녀생각이 난 굴착기운전공이 자리를 바꾸려고 적재함에 올라가보니 글쎄 복실이가 동태짝처럼 꽁꽁 얼어서 말도 못하더랍니다.》
태혁은 리흥덕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겁이 더럭 난 굴착기운전공은 복실을 덥석 안고 길옆의 농가로 뛰여갔다누만요. 아닌밤중에 처녀를 안고 나타나서 사람을 살려달라구 소동을
피우는데 제 정신이 아니더라는겁니다. 복실이가 그날 밤에 귀인을 만났지요. 알고보니 그 집 할머니가 젊었을 때 복실이처럼 온몸에
리흥덕의 능청스러운 구변에 태혁은 어처구니없어 웃고말았다.
《그 친구 정말 괴짜로군.》
《이후에 복실의 새 솜외투까지 지어가지고 와서 복실이 어머니앞에 내놓으며 그 이야기를 실토하더라질 않습니까. 딸을 시집보내지 못해 속상해하던 복실의 어머니는 연분이 될라구 그런 일이 생겼다면서 굴착기운전공을 놓칠가봐 야단입니다.》
《됐소. 복실이 어머니도 마음에 든다니 성간군당책임비서가 나서서 성사시키오. 발전소건설도 하고 복실의 신혼가정도 무어주잔 말이요.》
태혁은 시간이 급해서 그쯤 말해두고 승용차에 오르려는데 건망증이 심한 리흥덕이가 뭘 또 까먹었는지 손바닥으로 이마빡을 딱 치면서 다가섰다.
《저, 그런데 도투바우같은 장강군당책임비서가 문제입니다. 일전에 도당에 올라간 기회에 만나서 그 말을 했더니 〈내 동무의 능구렝이같은 속심을 모를줄 알구? 우리 굴착기운전공이 탐나면 그저 공손히 달라구 하오.〉하구 눈을 찔 흘기질 않겠습니까. 한번 만나서 단단히 침을 놔주십시오.》
《여보. 장강군당책임비서와 사돈을 맺는다는게 쉬운줄 아오? 만날 자기 군 욕심만 차리며 아웅다웅하지 말고 이번엔 동무네도 손을 잡소! 도청년동맹돌격대원들도 당장 보내구.》
장강군당책임비서 김충모가 아무렴 굴착기운전공이 아까와서 복실이의 혼사를 막아나설 사람인가. 겉보기엔 푸접이 없고 무뚝뚝해보이지만 도량으로 말하면 성간군당책임비서보다 크면 컸지 켤코 작지 않다. 그런즉 오래동안 끌어오던 복실의 신랑감문제는 십중팔구 해결된셈이 아닌가. 그가 조금후에 구봉령을 넘어오면서 보니 오늘도 복실이네 일가식솔들은 눈덮인 미끄러운 령길로 자동차들이 안전하게 다닐수 있게 석비레를 실어다 깔면서 바지런히 일손을 놀리고있었다.
좀체로 남편의 사무실에 찾아다니지 않던 안해가 무슨 긴한 용무가 있는지 뒤따라 들어와서 그 무슨 희귀한 식물표본처럼 종이에 따로따로 정성껏 싼 여린 풀줄기들을 책상우에 펼쳐놓았다.
《이게 뭐요?》
《우리 집 시험포전의 농사작황이예요. 강냉이와 감자, 완두콩, 파인데 리미액미생물비료를 준것과 주지 않은것이 벌써 이렇게 헨둥히 차이가 나요. 보라요. 리미액으로 종자처리를 한 강냉이와 감자, 완두콩은 이렇게 키도 크고 줄기가 실하며 뿌리가 긴데 이쪽건 형편없이 허약하지 않나요? 얼마나 대조가 심해요?》
태혁의 두눈은 금시 기쁨으로 빛났다. 될성부른 나물은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게 바로 그것을 말해주지 않는가. 성실이가 연구한 리미액비료의 성공을 확정적으로 실증해주는 증거물이나 다름없었다.
《여보, 이거 정말 맞긴 하오?》
태혁이 어찌나 큰소리를 질렀는지 안해가 깜짝 놀라며 가만가만 타일렀다.
《여보, 좀 진정하라요. 내가 뭐 없는 사실을 꾸며내겠어요?》
태혁은 도무지
《이건 대단한 성과요! 금년 농사는 떼여놓은 당상이란 말이요. 성실동무가 이걸 봤소?》
《봤어요. 장강군 읍농장의 온실에 심은 감자와 남새의 발육도 좋다며 기뻐서 어쩔바를 모르더군요.》
《그런데 왜 그 동문 오지 않구 당신이 왔소?》
신숙경은 얼른 대답을 못하였다. 말없이 마주 쳐다보는 안해의 두눈에는 까닭 모를 눈물이 가득 괴여오르고있었다.
《여보, 왜 그러오? 울긴 왜 우나 말이요. 어서 말하오!》
태혁은 참을성을 잃고 소리쳤다.
《성실동문 중병에 걸렸어요. 너무 연구사업에 몰두하다보니 전신마비가 왔대요. 난 그런줄도 모르고있다가 오늘에야 알았어요. 에그, 가엾기도 하지. 연구사업때문에 곡절을 겪으며 어린 자식을 잃었는데 이젠 자기까지 그렇게… 어떡하면 좋아요. 류설미선생이 사흘동안이나 꼬박 붙어 좀 차도가 있다지만 걸음걸이랑 영 말이 아니예요.》
태혁은 갑자기 담벽에 이마를 되게 부딪친것처럼 머리속이 뗑해졌다. 아직도 과학자로서 한창 나이인 성실이가 큰 일을 해놓고 중병을 만난 일이 생각할수록 가슴아팠다. 작년말 연구사업을 포기하고 과학원으로 불리워올라갔을 때 성실이가 겪은 마음고생인들 얼마나 컸던가. 그것으로 과학자인 자기의 인생이 끝났다면서… 그가 자강땅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던 일이 되살아올랐다.
그처럼 절망의 나락속에 깊이 빠져버렸던 성실이가
《그래 성실이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소?》
《병원에 갔으면 좋지요. 자기는 죽어도 현장을 떠날수 없는 몸이라며 실험실에서 치료를 받고있어요. 자기가 직접 리미액의 발효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하여… 첫 하루이틀은 담가에 실려서 종균배양현장을 돌아봤는데 직원들이 그걸 보구 모두 울었다고 해요.》
태혁은 가슴이 터지는듯 하여 방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그리고는 리미액공장이 자리잡고있는 서산동을 향해 성급히 떠났다. 그가 리미액공장에 찾아가면 늘쌍 차소리를 가려듣고 반갑게 달려나오군 하던 성실이였는데 오늘은 아무도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빈 집뜨락처럼 썰렁한 기운이 떠돌뿐이였다. 차에서 내린 태혁은 대문을 열어 젖히며 달려 들어가다가 마침 위생가방을 들고나오는 류설미와 마주치자 성실이 어디 있는가고 다급히 물었다. 류설미는 종균배양실에 있다면서 현장으로 안내했다. 태혁은 그를 따라 몇발자국 옮겨짚다 말고 한자리에 우뚝 굳어져버리였다. 세네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림성실이 힘겹게 마주 걸어왔다. 아니, 걷는다기보다 그들의 팔에 매달려오고있었다. 태혁은 그만 눈앞이 확 흐려지는것을 느끼며 두손으로 성실의 갸날픈 어깨를 잡고 울부짖었다.
《성실동무, 어쩌다 이렇게 됐소. 나한테는 왜 알리지도 않았는가 말이요!》
성실의 두눈에 대뜸 눈물이 가득히 고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책임비서동지, 용서하십시오. 전 책임비서동지가 어떤 어려움을 이겨가는지 잘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말자고했는데…》
성실은 얼굴을 적시는 눈물이 성가신지 머리를 젓고나서 애써 웃음을 지었다. 여위고 창백한 얼굴에 한순간 떠오른 그 이지러진 웃음을 지켜보던 태혁은 너무도 처량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돌리였다. 그가 괴로와하는것을 보고 류설미가 옆에 새로 병실처럼 꾸린 방으로 성실을 데리고가서 침대에 눕히였다.
《안되겠소. 당장 병원에 입원시키오.》
《책임비서동지, 전 여기가 좋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구 있소? 동문 넘어져선 안될 사람이요.》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