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6
(2)
벌써 허명철이네 중대원들이 지핀 우등불이 건설장의 눈내리는 강변에서 활활 타올랐다. 이제 그 우등불에 언몸을 녹이며 세찬 강물속에서 가물막이작업을 하게 될 돌격대원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드디여 가물막이작업에 착수할 시간이 림박하여 주병호지배인이 공장의 끌끌한 청장년들로 무어진 지원로력을 들이밀고 500명 대취주악대가 강변에 어마어마하게 늘어서는바람에 건설장의 분위기가 한층 열기를 띠여갔다.
《시작!》하는 주병호의 우렁찬 웨침과 함께 취주악대의 요란한 나팔소리가 울리고 모래가마니를 둘러멘 명철이네 돌격대원들이 사품치는
강물속으로 육탄처럼 뛰여들었다. 처녀중대 대원들도 지원로력도 일제히 와 함성을 지르며 따라섰다. 태혁이도 딸을 잃은 장관우부위원장도
주병호지배인도 가마니를 메고 연방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마치도 백병전에 떨쳐나선 병사들을 방불케 하는 눈물겨운 광경이였다. 은희의 고귀한
희생은
《취주악대! 뭘 하는가? 나팔을 힘껏 불라. 더 힘껏!》
하지만 나팔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500명 나팔수들이 모두 울고있었다. 드디여 그들중의 한 청년이 트럼베트를 내던지고 흐느끼면서 돌격대원들속에 뛰여들었다. 뒤이어 한명, 또 한명… 나팔소리는 점점 작아지다가 아주 멎어버리고 말았다. 돌격대원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치렬한 격전을 벌리는 500명 나팔수들!… 다 영웅들 같았다. 강변에는 그들이 내던진 악기들이 격전뒤끝의 탄피처럼 시누렇게 널려있었다. 근 한시간동안 돌격대원들과 지원대, 나팔수들이 살을 에이는 강물속에서 추위를 참고견디며 불사신들처럼 뛰고 뛰여 마침내 가물막이공사를 완전히 끝내자 건설장은 이상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태혁은 소가죽처럼 꽛꽛이 언 옷을 걸치고 선채 강물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건설장을 둘러보았다. 왜서인지 은희가 없다는 뼈저린 생각이 밀려들며 가슴속이 쩌릿해났다. 푸근히 흐린 하늘에서 갓난아이 주먹만큼한 눈송이들이 소리없이 날아내리였다. 건설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성과를 축복해주는듯 한 흰 눈이였다.
태혁은 우등불에 언몸을 대수간 녹이고 펑펑 쏟아붓는 휘뿌연 눈발을 헤가르며 명철이네 돌격대숙소로 찾아갔다. 애인을 잃은 명철의 마음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잠간이나마 그와 만나 따뜻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싶었다. 그러나 명철은 방에 없었다. 혹시 은희의 묘에 올라간게 아닐가? 잠간 그런 생각에 잠겨있는사이 눈은 태혁의 어깨와 머리우에 한뽐이나 수북이 쌓이였다. 그렇다면 괜히 그를 방해할 필요가 없지… 태혁은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숫눈을 밟으며 승용차가 서있는 건설장의 입구로 걸어나왔다.
사위는 온통 새하얀 눈세계였다. 발전소언제와 세멘트창고지붕, 강변의 크고 작은 돌멩이들우에는 흰눈이 소담히 쌓이였다. 순간 태혁은 저도 모르게 발길을 멈추며 와뜰 놀랐다.
몇발자국옆의 흰 눈무지, 분명 바위돌이라고 생각했던것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씰움씰 움직였다. 저게 뭔가? 태혁은 그 신기한 눈무지를 넋없이 바라보았다. 마치도 병아리가 닭알껍질을 터치고 나올 때처럼 눈무지가 부슬부슬 터갈라지기 시작하더니 머리칼도 눈섭도 온통 새하얀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다.
그 《눈사람》이 바로 허명철이였다. 얼굴에 눈물이 고드름처럼 얼어붙어있었다.
은희를 잃고 강변에 혼자 앉아 눈속에 파묻혀버린 청년이였다.
《명철이!》
태혁은 와락 달려가 명철의 어깨를 꽉 그러안았다.
《책임비서동지!…》
명철이가 태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그때였다. 태혁은 자기 등뒤에 서있는 장관우를 알아보고 옆으로 비켜섰다.
장관우는 딸을 잃은 지금에야 청년에게서 혈육의 뜨거운 정을 느끼는것인지… 한동안 엷은 물기가 고인 눈으로 명철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들은 힘껏 껴안았다. 이미전 은희의 눈앞에서 그러한
조금후 태혁은 북천3호발전소건설장을 떠나 시내로 향했다. 장관우의 승용차가 뒤따랐다.
오늘은 장관우의 가슴이 얼마나 쓸쓸할것인가. 그는 딸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지 못한 사람이였다.
은희가 자기의 순결한 가슴속에 명철을 두고 사랑했지만 장관우는 딸의 그 마음을 리해해주려고 하지 않았다. 아버지인 그보다도 딸을 훨씬 더 뜨겁게 사랑해준 사람은 명철이가 아니였던가!… 태혁은 도당으로 돌아오던 길에 우정 시육아원에 들렸다. 지금쯤 그 귀여운 어린것들은 포근한 요람속에서 단잠을 잘것이였다. 아닌게아니라 보육원처녀는 밤중에 찾아온 그들을 당황히 맞아주었다.
《애들이 잠자오?》
《예. 방금전에…》
《가보기요.…》
아이들의 아늑한 침실에 들어선 태혁은 조심히 발걸음을 멈췄다. 저마끔 장난감같은 자그마한 침대를 차지하고 잠든 어린것들… 보면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태혁은 이 육아원에만 오면 아무리 바쁜 날에도 시간가는줄 모른다. 하지만 이 밤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을 지켜보는 태혁의
마음은 즐겁지만 않았다. 어쩐지 은희의 가슴아픈 희생이 눈앞에 자꾸만 밟혀왔다. 그 사랑스러운 처녀처럼 공장의 기대앞에서 순직한 사람들의
모습도 생생히 떠올랐다. 우리의 후대들은 이 고난의 시기에 그들이
《부위원장동무, 우리가 이 부모없는 피덩이들을 데려다가 이름을 지어주던 생각이 나오?》
《나지요.》
장관우가 풀기없이 대답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오늘 래일중으로 발전소건설장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작성해야겠습니다. 여기에 있는 아이들은 제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난 그들의 성을 붙여주자는겁니다. 고난의 행군의 산아들인 이 어린것들의 심장속에 새별처럼 빛나는 눈빛속에 자강도로동계급의 장한 모습이 영원히 아로새겨지게 말이요!》
태혁은 그렇게 힘주어 말하고나서 두눈을 슴벅이였다.
7
(1)
명철의 어머니 성녀는 벌써 한달나마 심한 불안에 시달리느라 말쑥하던 얼굴이 몰라보게 이울어져갔다. 늘쌍 임신중에 있는 녀성처럼 잠이 많아서 남편의 놀림을 받던 그가 요즘은 강한 진정제의 도움으로도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지 못하고 눈초리가 꼿꼿하여 밤을 새우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얼마전 아들을 만나려 공장에 찾아갔다가 뜻하지 않게 림준기사와 맞다들린 일로 그의 심중에는 무서운 고민거리가 생겨났다.
지금도 옛 건설대 부대장이 지팽이를 짚고 자기를 싸늘히 마주 보던 생각을 하면 오싹 소름이 끼치였다. 근 30년만에 만난 림준의 랭담한 얼굴은 성녀가 까마득히 잊어버린지 오랜 일, 자기의 첫 남편과 헤여지던 때의 가슴아픈 결별을 다시금 괴롭게 련상시켰다.
성녀의 남편 리상범은 자강도중소형발전소건설대
성녀가 처음으로 건설대
《성녀, 내 보기에도 건설대장이 괜찮은 젊은이 같군.》
《아이참, 선생님두.
성녀는 새침히 눈을 내리깔았으나 이상하게 목소리가 떨리고 가슴속이 활랑거려 의사앞에서 도망치듯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날 저녁 합숙으로 돌아온 성녀는 함치르르 윤기가 흐르는 머리를 감고 거울앞에 앉아서 오래도록 자기의 얼굴을 음미하듯이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살갗이 보동보동한 량볼을 꼭 눌러잡았다. 그의 자랑거리란 남보다 몇곱절 어여쁘게 생긴 미모라고 할가. 성녀는 건설대장과 자기의
아름다움을 견주어보다가
호실의 두 녀동무는 밤근무에 나가고 방안이 조용했다. 혼자 있는것이 무척 좋았다. 성녀는 머리우로 이불을 끄당겨 올리고 마음껏 공상하며 즐기였다.
그날밤 성녀는 꿈속에서 배꽃처럼 새하얀 신부옷을 차려입은
성녀는 결혼식날밤 이슬기가 어린 눈매로
《이건 우리의 두번째 꿈이예요. 영원히 깨지 않을 꿈!…》
그러나 성녀의 그 아름다운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건설대
건설대
건설대
끝없는 고독과 허무감… 그것을 이겨내기가 첫 해산의 진통보다도 훨씬 더 어려웠다.
그해 여름 성녀는 병원에서 남편도 모르게 생남을 했다. 그는 그 기쁜 소식을 건설대에 알리고싶은 마음이 꼬물도 없었다. 마침 출장차로
강계에 왔다가 얼핏 들렸다간 건설대 부대장 림준의 기별을 받고 남편이 뒤늦게야 급히 찾아왔었다. 성녀는 그날로 퇴원하여 집에 나왔다. 그가
입원한후 보름동안이나 텅 비여있은 단층집의 장판바닥에는 따끈따끈한 온기가 돌고 부엌의 늄가마에서는 미역국이 보글보글 끓으며 구수한 냄새를
풍기였다. 남편이 구들우에 헤쳐놓은 배낭안에서는 건설대원들이 마련한 산꿀단지와 부랴부랴 써보낸 축하편지들이 쏟아져나왔다. 그러나 성녀는 이제
남편만 떠나면 자기의 고달픈 생활이 다시금 반복될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전혀 반가운줄을 몰랐다. 안해의 마음을 모를리 없는 건설대
《여보, 당신을 늘쌍 이렇게 혼자 두고 다니는 내 마음도 괴롭소. 그러니 어찌겠소. 난 평생에 발전소건설을 해야 할 사람인걸. 우리 자강도엔 아직도 전기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소. 혼자 사는 일이 고달프면 당신도 우리 건설대에 망라되지 않겠소?》
《네? 내가 건설대에 가서 뭘해요?》
《남들이 하는 일을 하면 되지.》
《난 싫어요.》
성녀는 발끈해서 쏘아붙이였다. 발전소건설을 위해서라면 자기들의 사랑도 가정의 행복도 세멘트 혼합물처럼 거리낌없이 처넣을 사람이란 야속한 생각을 금할길 없었던것이였다. 남편은 이튿날 림준의 어머니를 성녀한테 붙여놓고 건설장으로 떠나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여보, 난 어떻게 하면 좋소? 그저 당신 마음대로 하라는 말밖에 할수 없구려.》
남편이 떠난뒤 밖에 나가보니 두툼한 마라초 꽁다리들이 수두룩히 널려있었다. 성녀는 토방에 쓰려져 울고 또 울었다. 이대로는, 이대로는 더이상 살아갈것 같지 못하여 목숨이라도 끊고싶었지만 어린것이 불쌍했다. 성녀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다가 마침내 말못하는 피덩이를 둘쳐업고 평양의 언니를 찾아떠날 용단을 내렸다. 강계역두에는 늦가을의 비가 부슬부슬 내리였다. 밤렬차는 어둠속을 달리고 창문에는 비물이 흘러내리였다. 성녀는 쓸쓸한 마음을 누를길 없어 등에 업었던 어린것을 내리워 가슴에 꼭 껴안고 나직이 흐느꼈다. 그때 자기가 남편의 곁에서 아주 가버린다고 생각했던가? 아니, 그런 마음은 없었던것 같았다. 하지만 그후 두달동안이나 언니의 집에 얹혀 살며 성녀의 가슴속에서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가뜩이나 가정생활에 대한 애착을 잃고 심한 동요속에 빠졌던 성녀는 언니의 꾸준한 설교에 의해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자기 인생을 다른 남자에게 의탁하기로 맘먹었다. 그래서 세상에 태여난지 얼마 안되여 다른 사람의 아들로 되여버린 명철이였는데 뜻밖에도 그러한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는 예전의 건설대 부대장과 만난 성녀였다.
아무때든지 그 림준의 입만 열리면 이전의 건설대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성녀는 혼자서 속을 끙끙 앓지 말고 미리 남편과 조용히 의논해보는게 좋을것 같았지만 가슴이 떨리여 말이 나가지 않았다. 요즘은 명철에 대한 남편의 태도도 예전같지 않다. 명철이가 제대된지 일년이 넘도록 집에 나타나지 않는 일을 두고 보통 노여워하지 않는 남편이였다. 성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괴로움에 볶이우며 지난밤도 거의 뜬눈으로 새우고나서 남편이 출근하자 아래목에 몸져 누워버리였다. 가내편의에 대수간 이름을 걸어놓고 나가며 말며 하던 일도 관두고 집에 구겨박혀버린 그는 마음의 고충때문에 밤과 낮이 바뀌여 이런 때면 얼마간 눈을 붙이군 한다. 오늘도 둬시간 낮잠을 자고 일어난 성녀는 갑자기 부엌문이 벌컥 열리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누군가 했더니 명철이였다.
《아니, 네가 어떻게…》
성녀는 넋나간 눈길로 아들을 두렵게 바라보았다.
(저 애가 벌써 다 알고왔구나.)
성녀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지 않다면 무엇때문에 저렇게 기름때가 시커멓게 묻은 작업복차림으로 달려왔겠는가? 아들의 행동거지도 여간 거칠어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와 만났는데 반가와 하는 기색이 없이 구들에 와 앉아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머니, 난 어머니와 할 말이 있어 왔습니다.》
《무슨 말?》
성녀는 여전히 눈이 뎅그래서 아들을 쳐다보았다.
《래일 우리 돌격대의 미옥이란 처녀가 약혼식을 합니다. 어려서 고아로 자란 처녀인데 전 그를 도와주려고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뭐라구? 그럼 네가 그 일때문에 왔단 말이냐.》
성녀는 불시에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그는 아들이 의아해하는 눈치를 채고서야 얼른 치마자락으로 눈굽을 훔치면서 말했다.
《그래. 그 처녀의 약혼식에 뭘 갖다줘야 하니?》
《그저 첫날에 입을 옷감만 있으면 됩니다.》
《알겠다. 네가 꼭 도와줘야 한다면 힘써 보자꾸나.》
《아니. 전 오늘 당장 가지구 가야 합니다.》
성녀는 아들이 너무 급하게 요구하자 어이없어 웃었다.
《애두. 그런 부탁이야 사전에 말해야지. 갑자기 어디서 첫날 옷감이 난다더냐. 집엔 널 장가 보내려고 장만해둔것밖에 없다.》
《그럼 됐군요. 빨리 주십시오.》
《너 정신이 쑥 나갔구나. 그런 물건은 함부로 남한테 덥석덥석 쥐여주는게 아니란다.》
《어머니, 제발 그러지 말구 아들을 위해 썼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안돼. 그것만은 정말 안되는줄 알아라.》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