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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조령출(작가)

           

                      • 1913년 11월 10일 충청남도 아산군에서 출생.

                      • 해방후 서울에서 연극동맹부위원장으로 사업.

                      • 1948년 공화국의 품에 안겨 국립예술극장과 조선작가동맹 작가, 국립영화문학창작사 주필,

                        국립민족예술극장 총장,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조선문학창작사 작가로 사업.

                      • 1993년 5월 8일 사망.

                     • 김일성상계관인.

                                                                      

 

 

누구나 원하는바이지만 살아있을 때 세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줌의 흙으로 된 후에도 사람들의 가슴속에 잊을수 없는 추억을 남기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그것은 길다고 볼수 없는 일생을 훌륭하게 산 사람에게만 차례지는 특혜이며 력사의 공정한 평가이다.

하다면 그 행운아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여기에 그 물음에 대답을 주는 한 인간의 이야기가 있다. 그가 바로 생존시에는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대해같은 은정속에 행복한 삶을 마음껏 누렸으며 사후에도 인민의 추억속에 훌륭한 노래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있는 우리 민족의 저명한 작가 조령출이다.

 

《집없는 천사》의 노래

 

하늘을 지붕삼고 떠도는 신세

동서남북 바람결에 갈 곳이 없어

찬이슬 잔디우에 쓰러져 울면

어머님의 옛사랑이 다시 그립다

 

비오고 바람부는 하늘밑에서

팔베개로 꿈을 꾸는 집없는 천사

운다고 옛사랑이 다시 올소냐

설음맺힌 가슴에도 희망은 있다

 

이것은 조령출이 해방전에 지은 노래로서 황량한 들판을 정처없이 헤매는 가련한 방랑자의 설음, 나라잃은 망국민의 슬픔을 담은 가요이다.

동서남북 그 어디를 둘러봐도 갈 곳이 없어 아득히 흘러가버린 어머니의 옛사랑을 새삼스럽게 그리며 목메여 우는 그, 밝은 해빛대신 찬비를 뿌려주는 그 하늘밑에서도 팔베개를 벤채 천사의 꿈을 꾸는 애젊은 방랑자…

그 천사는 작가의 상상속에 그려진 가요의 서정적주인공이 아니라 다름아닌 그 시절 조령출자신의 모습이였다.

하기에 그는 수기에서 해방전 자신의 신세를 가리켜 《집없는 천사》였다고 고백하였다.

작가 조령출은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구름이 더욱 짙어가던 1913년에 태여났다.

령출이란 이름은 원래 그의 어머니가 지어준 아명이였다. 조령출의 고향에는 령인산이라는 산이 있었는데 그는 이 산기슭의 수수한 초가집에서 빈손뿐인 부모의 눈물어린 축복을 받으며 출생하였다. 그런 까닭에 어머니는 아들의 어릴적이름을 령인산의 첫자를 따서 령출이라 불렀던것이다.

조령출의 본래이름은 조명암이였다.

그러나 령인산기슭에서 어머니가 애정을 담아 조용히 부르던 아명이 작가의 진짜이름으로 되였다.

조령출이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1958년 위대한 수령님께서 중화인민공화국 모택동주석의 초청에 의하여 정부대표단을 인솔하고 중국을 친선방문하셨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교육문화성 예술국장이였던 조령출은 조선예술단 대표로 위대한 수령님의 중국방문을 수행하는 영광을 지니였었다.

어느날 그는 예술단지휘성원들과 함께 모택동주석과 주은래총리를 만났었다.

담화도중에 주은래총리가 문득 작가더러 이름을 어떻게 쓰는가고 물었다.

조령출은 《나라 조》자에 《신령스러울 령》자, 《날 출》자라고 대답했다.

주은래총리는 《그거 참 좋은 이름이요!》 하고 말했다.

옆에 있던 모택동주석도 동감인듯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란 이름에 따라간다고 그 범상치 않은 이름이 그를 력사의 행운아로 만들었던가?

아니, 다음의 이야기들이 결코 그것이 아님을 말해주고있다.

조령출의 부친은 마을에서 자그마한 약방을 차려놓고 근근히 생계를 유지해가는 한미한 고려의사였다. 그는 한시읊기를 몹시 즐기였고 문장이 통하는 친지들과 함께 자주 시를 짓군 하였다.

조령출은 4살 되던 해에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1921년부터 1년 반동안 한문서당과 다름없는 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말았다. 불행하게도 부친을 잃었던것이다.

화불단행이라고 미래의 작가는 얼마후 어머니와도 생리별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어떻게 하나 아들을 공부시키려는 극진한 모성애는 어머니로 하여금 어린 자식을 남의 집에 양자로 들여보내는 모진 결단을 내리게 하였던것이다.

이것은 유년시절에 작가가 겪어야 했던 피할수 없는 숙명이였다.

불우한 그 시절에 우리 인민이 강요당하는 민족적멸시와 울분을 직접 체험하게 되면서 그는 자기의 가슴에서 고패치는 심정을 그대로 담을수 있는 문학수업에 뜻을 두게 되였다.

고학의 어려운 길을 걸어온 조령출은 그후 피타는 노력을 기울여 일본 와세다대학 프랑스어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재학 당시 그는 쉑스피어와 같은 유명한 극작가가 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식민지노예살이를 강요당하던 그 시대에 그의 이러한 희망은 이루어질수 없었다.

그는 학비를 마련할 방책으로 잡지사에 가요들을 투고하기 시작하였다.

재능있는 조령출이였지만 그는 불우한 문인이였다. 인재도 때를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는것처럼 나라잃은 문필가로서 그의 인생은 빛이 없었다.

작가는 창작의 첫걸음부터 시련의 광풍을 힘들게 헤쳐나가야 하였다.

1933년 그의 처녀작 《서울노래》가 신춘문예 1등당선작품으로 발표되였다.

 

한양성 옛 터전 옛날이 그리워라

무궁화가지마다 꽃잎이 집니다

 

한강물 푸른 줄기 오백년

앞남산 봉화불 꺼진지 오랩니다

 

잎트는 삼천리 꽃피는 삼천리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

 

하지만 이 노래는 불온하다는 리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인민의 높아가는 반일기세에 겁을 먹은 일제는 인민들의 투쟁기세를 막아보려고 그 어느때보다도 발광적으로 날뛰면서 탄압의 도수를 높이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할수록 그에 항거하는 우리 인민의 반일기운은 반일인민유격대의 창건과 더불어 날로 높아가고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창작된 가사 《서울노래》는 무궁화가지마다 꽃잎이 지고 한강물 푸른 줄기에 《오백년의 꿈》이 잠든 조선을 깨우치면서 《잎트는 삼천리》, 《꽃피는 삼천리》를 부르고있었다. 가사는 비록 지금은 강대하던 옛 모습을 찾아볼수 없고 망국의 울분으로 몸부림치는 삼천리강산이지만 잎이 트고 꽃이 피는 새봄은 기어이 오고야말리라는 희망을 안겨주고있다.

물론 《서울노래》는 그러한 정서적지향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못하였지만 마지막결구에서 《아시아의 바람아 서울의 잠을 깨라》고 비유적표현에 담았다.

작가는 후날 이 표현에 대하여 《당시 아시아의 대륙에 파동쳐오던 혁명의 풍운, 백두산에서 전하여오던 전설같은 이야기를 이 노래에 〈아시아의 바람〉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으로밖에 담을수 없었다.》 라고 회고하였다.

이 구절이 문제시되여 가사가 음판으로 나오자 일제는 불온하다고 하면서 금곡령을 내리고 모두 압수하여 깨버리는 망동을 부렸던것이다.

작가는 너무 분통해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때려눕힌자도 강하지만 다시 일어난 사람은 그보다 더 강한 법이다.

조령출은 그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인 가사창작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작가는 침투력이 강한 가요에 나라잃은 설음에 가슴을 치는 겨레의 운명과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보려는 욕망으로 모대기였다.

조령출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어떻게 담겠는가 하는 창작실천상의 문제에서 중요한 원천을 민요의 보물고에서 찾고 민요적인 바탕을 살려 민족적정서를 구현하였다. 이것은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고취하고저 애쓴 측면에서 다른 시인들이 따를수 없는 특출한 점이였다.

고조선시기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민요로부터 삼국시기 고구려의 《동동》, 백제의 《정읍사》, 신라의 《서동요》, 고려시기의 다양한 민요들, 조선봉건왕조시기 각 도의 풍부한 향토민요들, 20세기 초엽 신민요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우리 민요의 유산은 민족시가의 풍부한 보물고였다.

그는 일제식민지통치의 암담한 환경속에서도 명승지들에 대한 노래를 지어 조선이야말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긍지높이 웨쳤으며 조선민족의 넋과 순결성 그리고 민족적인 자부심을 노래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많은 작품들에는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신음하는 인민들의 생활처지, 빼앗긴 조국과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 노예의 쇠사슬을 하루빨리 끊어버리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려는 희망과 락관의 감정이 맥맥히 흐르고있다.

철들기 전부터 어머니와 리별하고 이붓아버지의 슬하에서 응석 한번 부려보지 못한채 유년시절을 보냈으며 청년시절에는 학비에 목이 매여 고역의 설음속에 눈물을 흘려야 하였던 작가의 쓰라린 체험과 망국민의 처지는 그로 하여금 민족수난기 우리 인민의 눈물겨운 처지를 가요에 담게 하였다.

결국 작가가 쓴 수많은 신민요가사들과 대중가요가사들은 겨레의 울분과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반항의 감정이 짙은 서정으로 충만되여있다.

민족수난기 조령출의 처지는 그의 노래에도 있듯이 따뜻한 정 흘러넘치는 가정이 없고 마음편히 지낼수 있는 집마저 가지지 못한 방랑자의 신세였다.

가요 《울며 헤진 부산항》도 이러한 심정을 담은 노래들중의 하나이다.

후날 작가는 그 가요에 대해 회고하면서 《내 일찍 집없는 천사처럼 남의 나라에 가서 고학을 하며 현해탄을 오고갈 때 보았던 부산항은 리별의 항구, 슬픔의 항구였다.》고 말하였다. 조상의 뼈가 묻히고 송아지동무들과 뛰놀던 추억이 생생한 정든 고향과의 리별, 모진 고생속에서도 정을 나누며 사이좋게 살던 마을사람들과의 리별…

작가가 일본으로 고학을 떠나던 때에 겪은 자기의 체험을 토대로 하여 쓴 《울며 헤진 부산항》은 당시는 물론이고 그때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에도 이민을 가는 남녘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로 되였다.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생리별당한 집없는 방랑아, 그러나 천사의 넋과 심장을 지녔던 작가 조령출.

민족수난기 그의 가사들은 그대로 그의 인생이였고 그의 아픔이였으며 그의 설음이였다. 그리고 두번다시 겪고싶지 않은 그 체험은 당시 진정한 삶의 보금자리-조국을 잃은 우리 인민모두의 심정이였다.

《집없는 천사》, 이 노래를 들을 때면 먹구름 드리운 하늘밑에서 차거운 대지우를 헤매는 작가의 측은한 모습이 방불하게 안겨온다.

과연 집없는 천사가 그의 숙명이였던가?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의탓이 아니였다. 왜놈에게 나라를 빼앗긴탓이였다.

그에게 있어서 집은 아름다운 꿈과 자유로운 넋이 나래치는 맑고 푸른 하늘이여야 했고 따뜻한 대지여야 했으며 자기의 노래가 불리워지고 자기의 연극들로 하여 초만원을 이룬 화려한 극장이여야 했다. 하지만 봄이 없는 땅, 남에게 빼앗긴 땅은 한 아들의 소박한 꿈을 꽃피워줄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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