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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재다능한 예술가

 

 
강 호(화가, 영화연출가)

 

                      • 1908년 8월 6일 경상남도 창원군에서 출생.

                      • 1927년 카프에서 활동.

                      • 1946년 북에 들어온 후 연극인동맹 서기장, 국립예술극장 총장, 조선화보사 사장, 국립영화촬영소

                        연출가 및 무대미술가, 평양미술대학 영화 및 무대미술강좌 강좌장으로 사업.

                      • 1984년 7월 3일 사망.

                                                                      

 

인간의 재능은 무궁무진하다고 해야 할것이다. 보통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뛰여난 재능을 가진 재사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모든 재능이 다 소중하고 값높은것으로 빛을 뿌리는것이 아니며 이름을 낸 재사들의 운명도 겨레와 민족앞에, 인류의 력사속에 모두 금문자로 새겨지는것이 아니다. 선이 아니라 악에, 진실이 아니라 허위에, 집단의 리익이 아니라 개인의 영달에 바쳐진 재능도 적지 않다.

자기의 재능을 무엇을 위하여 어디에 바쳐야 하는가. 바로 여기서 또 한가지, 운명의 선택에 관한 문제가 나선다. 외세에 의하여 강요된 분렬조국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앞에는 언제나 2분법의 기로가 놓여있다.

조선영화와 미술계에 뚜렷한 자욱을 남긴 재능있는 예술인 강호의 운명을 두고 그 참된 해답을 찾아보도록 하자.

 

 

민족의 량심과 지조를 지켜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봉곡리의 어느 한 초가집에서는 늘 작은 총각애가 코물을 훌쩍거리며 쉬임없이 붓을 놀리고있었다.

서로 다툼질을 해가며 남동생을 업어키운 누이들은 멀건 죽밖에 차례지지 않는 끼니마저 감감 잊은채 그림그리기에 여념이 없는 총각애를 똬리모양으로 둘러쌌다.

얼마후 종이우에 어린애의 귀여운 얼굴이 그려지고 그 다음은 아이의 손에 안긴채 금시라도 야웅!- 하고 새된 소리를 지를만큼 앙큼하게 생긴 고양이가 나타났다.

그 그림이 얼마나 방불했던지 식구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지금껏 몰랐던 총각애의 재능을 알게 되였다.

이렇게 태여난 묵화는 수십년세월이 흐르도록 벽지 한장 바르지 못한 그 집에 호젓하게 붙어있었다.

이 일화는 강호가 6살나던 해에 있었던 일이였다.

딸만 다섯을 줄줄이 내리낳던 소작농의 집안에서 아들이 출생한것은 가물에 단비온것 이상의 경사일수밖에 없었다.

강호의 부모와 누이들은 어떻게 하나 그를 공부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다. 대대로 가난에 찌들려온 그의 집안에서는 어렵게 본 아들에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것이다.

그러나 서발막대기를 휘둘러도 별로 거칠것이 없는 집안의 형편으로서는 도저히 가당치 않은 희망이였다. 결국 강호는 혈육들의 아쉬움과 한탄속에 겨우 보통학교졸업증밖에 쥘수가 없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는 어머니배속에서부터 그림소질을 타고났던것 같다.

그또래 아이들이 빈 죽사발을 들고다니며 투정을 부리고있을 때 강호는 손에서 붓을 놓지 않고 부지런히 그림그리기에 정신이 없었다.

그의 부모들은 아들의 재능을 꽃피워줄 종이 한장 제대로 구해줄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때없이 눈굽을 훔치군 했다.

1920년에 강호는 서울의 한 사립중학교에 입학했으나 한학기도 넘기지 못한채 학교문을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러나 강호는 가난때문에 미술공부를 하려던 희망을 삭정이 꺾어버리듯 할 나약한 인간이 아니였다.

퇴학후 두엄냄새가 푹 배인 고향집에서 불끈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르며 호미질을 하던 그는 한해도 넘기기 바쁘게 부모의 승낙도 받지 않고 혼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현해탄을 건느며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아버지, 어머니, 내 꼭 성공을 해서 집안을 일떠세우겠습니다.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세상의 복잡다단한 리치를 알기에는 너무도 단순했던 그가 고향집쪽을 바라보며 다진 그 맹세는 실현될수 없었다. 그후로 강호는 끝내 고향에 가보지 못했던것이다.

일본에서 강호는 빵집의 심부름군과 우유, 신문배달 등을 하면서 고학으로 교또중학교와 교또회화전문학교를 간신히 나올수 있었다. 그는 재학기간에 뛰여난 미술실력과 놀라운 향학열로 일본교원들과 학생들의 찬탄과 시기심을 번갈아 받군 했었다.

졸업을 앞둔 어느날이였다.

수업이 끝난 뒤 일본인미술교원이 그를 찾았다.

《군은 확실히 뛰여난 재능을 가지고있소. 유감이지만 일본학생들속에는 군과 같은 인재가 없거던. 장차 미술분야에 진출하고싶겠지?》

강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그럼 우리 일본인으로 귀화하게.》

《예?》

교원의 작은 눈이 안경테속에서 묘하게 웃고있었다.

《그렇게 되면 일본미술계는 군을 환영할거요.》

그것은 세계미술사에 이름을 남긴 명화가들을 줄곧 숭배해온 강호에게 있어서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였다.

조선학생의 심중에서 일어나는 심리적변화를 꿰뚫어본 교원은 그물을 바싹 조였다.

《남아라면 응당 운명의 선택에서 주저하지 말아야지. 결심이 섰으면 후지산을 멋지게 그려보게.》

하숙방으로 돌아온 강호는 온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문득 고향에서 허리펼새 없이 농사일을 하고있는 부모와 누이들의 여윈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미술에서 성공한다면 가정에 행복을 가져올수 있지 않을가?

어느날 강호는 자기가 존경하는 선배와 함께 음식점으로 갔다.

그날따라 곤드레만드레 취한 선배는 양복주머니에서 와락와락 돈뭉치를 꺼내들더니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

《이건 왜놈 첩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받은거야. 결국 넋을 팔아 번 돈이지. 에익!》

그는 결김에 돈뭉치를 음식탁우에 내던졌다.

락화처럼 흩날리는 지페를 보면서 강호는 량심의 채찍질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조선청년의 고통을 통절히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넋을 팔아 번 돈이였다.

그때로 말한다면 간또대지진이 일어난지 몇해가 지났으나 일제에 대한 조선민족의 원한은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다시 타오를 재속의 숯덩이마냥 조금도 사그라들지 않았었다.

1923년의 간또대지진은 14만여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낸 일본력사상 피해규모가 가장 큰 지진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일본반동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아무런 구제대책도 취하지 않았고 일본인민들속에서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자 그들의 반정부적감정을 딴데로 돌림으로써 지진으로 인하여 조성된 심각한 사회정치적위기를 모면해보려고 하였다. 일본천황은 이른바 《칙령》으로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일본반동정부는 《조선사람들이 방화한다.》, 《조선사람들이 우물에 독약을 친다.》는 등 모략선전을 벌려 재일조선인들에 대한 집단학살만행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군대와 경찰, 재향군인, 자경단, 청년단, 우익반공단체들과 불량배들은 재일조선인들을 야수적인 방법으로 닥치는대로 학살하였다. 일제가 간또대지진때 학살한 재일조선인수는 무려 2만 3천여명에 달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군국주의자들의 야수성과 잔인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으며 놈들이야말로 조선인민의 철천지원쑤라는것을 온 세상에 다시한번 드러내놓았다.

그때 이 선배도 자기의 학비를 대주기 위해 현해탄을 넘어와 갖은 고생만을 해오던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잃었다. 그런 그가 철천지원쑤 일본놈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면 그것은 민족의 넋을 파는 길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때 강호는 나라없는탓에 억울한 죽음을 당한 원혼들이 자기를 지켜보는것만 같았다. 강호! 너는 넋을 팔려고 하고있다. 그들이 이렇게 웨치는것만 같았다.

며칠후 그는 아무런 미련없이 배에 올랐다.

운명의 키를 고국으로 돌리였던것이다.

강호의 본명은 강윤희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자기 이름을 강호로 고치였다. 다시는 나약해지지 않으리라, 굳센 호랑이로 살리라. 강호는 이렇게 결심하였던것이다.

하지만 그앞에는 환향의 기쁨대신 왜놈장교의 초상을 그려야 하는 고통이 기다리고있었다.

《김군, 이를 어쩌면 좋은가. 섬나라에선 왜놈들이 후지산을 그리라고 하더니 조국에선 또 이 모양일세. 여보게, 난 붓으로 가족에 행복을 가져오려고 했는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통 보이지 않는구만.》

이것은 당시 그가 친구 김일영에게 쓴 편지의 한구절이다.

설사 목구멍에 거미줄이 쓴다고 해도 나라를 빼앗은 왜놈들을 위해 붓을 잡을수 없다고 생각한 강호는 서울에 있는 조선영화예술협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강호는 연출수업을 받게 되였는데 이것이 후날 그를 다재다능한 재사로 불리워지게 한 계기로 되였다.

당시 조선영화계에서는 라운규를 비롯한 진보적인 영화인들에 의하여 사람들을 애국적인 문화계몽운동에로 추동하는 많은 영화들이 창작되였다.

강호는 1927년에 프로레타리아문학예술동맹(카프)에 가입하여 김복진의 뒤를 이어 미술부를 책임지고 사업하였으며 영화부에도 관여하게 되였다.

강호는 라운규와 절친한 관계를 가지고 서로 돕고 이끌며 민족영화의 넋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라운규가 창작한 거의 모든 작품에는 강호의 미술이 안받침되여있다.

강호는 라운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리규설, 라웅을 비롯한 카프인물들과 협력하여 경향성이 좋은 진보적인 작품들을 창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리기영, 한설야, 조명희, 송영, 리상화, 박세영, 박팔양을 비롯한 카프작가들의 작품들을 애독하면서 그들과 가깝게 지내였다.

이 시기 강호는 진보적인 미술창작활동을 지도하여 창작한 진보적인 주제의 작품을 가지고 수원에서 조직하는 프로레타리아미술전람회에 참가하였다.

이 전람회는 일제가 조직하는 어용미술전람회나 《서화협회》가 조직하는 미술전람회와는 내용상에서 큰 차이를 가졌다. 출품된 많은 작품들이 일제의 착취와 압박을 반대하는 로동계급의 단결된 투쟁을 형상적비유의 방법으로 그리였다.

이 전람회의 진보적경향은 강호의 오랜 벗인 정하보가 출품하였던 유화 《공판》을 통해서도 알수 있다. 청색미결수복에 용수를 쓰고 공판장에 들어가는 애국자,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그의 의젓한 태도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유화는 강의한 의지를 지닌 혁명가의 풍모를 보여주었으며 반면에 그를 앞세우고 가는 일제경찰의 형상에서는 그 비굴성이 스스로 비쳐지게 그려내였다. 또한 모여든 군중들의 각이한 표정들을 통하여서는 혁명가에 대한 당대 인민들의 동경심과 일제에 대한 증오심을 비교적 진실하게 형상해내였다.

1930년 수원에서 열렸던 제1차 프로레타리아미술전람회는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비록 3일간이라는 짧은 기간이였지만 수많은 광산로동자들과 농민들, 청년학생들의 관심속에 진행되였다.

순수 회화보다도 적극적이고 실효성이 높은 예술창작을 희망했던 강호는 정열적인 창작활동으로 마침내 예술영화 《암로》(1928년)를 내놓았다.

강호자신이 직접 영화문학과 연출, 영화미술을 담당하여 만든 이 영화는 비판적사실주의작품으로서 인민들속에서 반일애국주의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착취계급에 대한 비판적안목을 넓히게 하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조선경내에서는 원산부두 로동자들의 총파업, 신흥탄광 로동자들의 폭동, 평양고무공장 로동자들의 투쟁, 룡천불이농장과 단천농민들의 투쟁 등 일제의 파쑈적폭압과 친일지주, 자본가들의 착취를 반대하는 로동자, 농민들의 투쟁이 더욱 강화되고있었으며 일제의 식민지노예교육정책을 반대하는 진보적청년학생들의 투쟁도 련이어 일어났다.

이러한 현실은 정의와 진리를 갈망하던 강호로 하여금 불합리한 사회현실의 부정면을 비판폭로하는데 머무를것이 아니라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인민대중의 분격과 항거의식을 직접적으로 반영할 결심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그는 비판적사실주의문학에서 프로레타리아문학창작에로 한걸음 더 전진하였다.

그는 1931년 영화문학 《늘어가는 무리》를 가지고 직접 연출, 영화미술, 주역까지 담당하여 조선에서 프로레타리아영화예술의 초기작품으로 되는 《지하촌》을 창조하였다.

영화는 자본가 김기택을 반대하는 빈민촌의 로동자들과 림철근을 비롯한 함남철공장 직공들의 파업투쟁을 기본내용으로 하고있다.

함남철공장 자본가 김기택은 일본군부의 후원을 받는 민족반역자로서 경제공황의 위기를 막고 일제의 대륙침략에 맞게 군수공업을 확장할 목적으로 실업군중이 사는 빈민촌을 철거시키는 한편 그들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한다.

이에 격분한 로동자들과 직공들은 파업투쟁에 진출한다.

그 앞장에는 주인공 림철근이 서있다.

그는 나이 30이 넘도록 장가도 못 가고 페병으로 공장에서 해고당한 남동생 성근이와 20살 난 누이동생 혜순이를 데리고 힘들게 살아간다.

가정의 참혹한 생활처지와 자신의 쓰디쓴 생활체험을 통하여 사회적모순과 불합리성을 인식한 그는 로동자들속에서 정치강좌를 조직하고 대중을 계몽하여 김기택을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선동한다.

그가 조직한 정치강좌는 철공장로동자들을 계급적으로 각성시키고 특히 어용단체인 구령단의 허위성을 폭로하는데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작품에서는 로자간의 사회적모순을 제기하고 그것을 무산계급의 새로운 성격형상을 통하여 해명하고있다.

물론 이 작품에는 무산대중의 계급해방에 대한 지향이 적지 않게 추상적으로 그려져있고 주인공의 항거와 투쟁의식이 낡은 사회를 변혁하기 위한 혁명적리상과 밀접히 결부되지 못한 부족점이 있다.

그러나 예술영화 《지하촌》은 착취계급의 본성과 허위성을 폭로하고 자본가들을 반대하는 무산계급의 대중적진출을 보여준것으로 하여 해방전 조선영화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였다.

이 작품에서 강호는 조선인민의 비참한 생활과 일제와 그 주구를 반대하는 로동계급의 투쟁을 영화미술의 어둡고 무거운 색채와 간결하고 집약된 구도, 강렬한 색대조 등으로 부각시키였다.

이러한 경향성으로 하여 영화는 일제검열기관의 탄압을 받게 되였고 일반상영이 정지당하였다. 하지만 이 영화창작으로 진보적인 예술가로서의 강호의 명성은 당시 조선영화계와 사회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영화 《지하촌》에 대한 탄압으로 의분을 삭일수 없었던 강호는 보다 새로운 영화를 만들어볼 생각으로 미술부의 사업을 정하보에게 넘기고 카프직속극단으로 《신건설》을 내오는 사업에 전력하면서 영화 《도화선》창작에 달라붙었다.

그는 또한 이 시기에 영화부기관지 《영화무대》를 책임지고 편집하는 한편 비합법적인 월간잡지 《우리 동무》의 편집사업에도 참가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벌리였다.

《도화선》이 거의 완성되여가던 1932년 강호는 카프사건으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서대문형무소에 끌려갔다.

정의감이 강했던 강호는 자기의 뜻을 굽히려고 하지 않은탓에 카프성원들중에서 가장 오래동안 감옥살이를 하였지만 끝까지 전향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냈다.

1935년 3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온 강호는 부산에서 간판점 화공으로, 신문사 광고부원으로 도안을 하면서 한쪽으로는 소설삽화도 하였다.

일제의 살기띤 폭압은 련속 그를 덮쳤다. 조선일보사에서 일하던 강호는 일제가 날조한 소위 공산주의협회자사건(일명 왜관농민야학사건)으로 체포되여 대구형무소에서 두번째로 감옥살이를 하게 되였던것이다.

1942년 4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강호는 《불온분자》의 딱지가 붙은것으로 하여 더는 영화계에 나설수 없게 되였다.

그러나 생계는 유지해야 했다. 그러자면 영화계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예술의 여러 방면에 손을 댄것은 천성적인 재능의 덕이기 전에 식민지예술인의 눈물겨운 처지가 가져온것이기도 하였다.

실지로 그가 전공과 무관한 무대미술에 발을 들여놓은것도 피할수 없는 생활난때문이였다.

그때 그의 생활형편은 말이 아니였다.

남의 집 곁방살이를 시작하였지만 집세를 물 돈은커녕 호구지책도 할수 없었다. 그런 속에서 그의 처가 임신을 했다.

조선중앙일보사 려운형사장의 서기로 근무한바 있는 안해는 외유내강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웃들앞에서 가난을 드러내보이기에는 자존심이 높았던 그 녀자는 자기들이 굶는다는것을 남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어떻게든 숯만은 사다가 마당에서 풍로에 물을 끓였다.

하루는 당시 무대미술을 하고있던 김일영이 강호의 집에 찾아왔다가 그들부부가 굶주림에 시달려 비틀거리고있는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강호군, 어떻게 그렇게야 살겠나? 더구나 아주머닌 혼자몸도 아닌데 … 참, 요즘 연극을 많이 하는데 무대미술을 해서라도 굶어죽지는 말아야지.》

강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무대미술을 전혀 몰랐던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었고 영화미술은 그럭저럭 해보았지만 무대미술은 난생 처음이였다.

혀를 끌끌 차던 김일영은 친구를 자기 집에 데려다 이틀동안 재우면서 무대미술이 어떤것이라는것을 차근차근 가르쳐주고 극단으로 데리고 갔다.

강호가 처음으로 맡은것은 연극 《촌색시》였다.

강호는 무대미술의 묘리를 전혀 몰랐다. 그래서 무대우에 무대장치를 세운것이 아니라 진짜 기와집, 초가집을 짓고 토담, 벽돌담을 쌓은것처럼 하였다.

극단 경영주는 무대미술가가 돈을 많이 쓴다고 툴툴거렸다.

그러거나말거나 강호는 밭을 가는 황소처럼 부지런히 무대장치를 완성해나갔다.

드디여 서울 부민관에서 연극 《촌색시》의 첫 공연이 진행되였다.

무대막이 오르자 객석은 한동안 물을 뿌린듯 조용하였다.

강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실패로구나!)

다음찰나 장내에서 《야!-》 하는 환성이 들려왔다. 관중들은 무대우에 덩실하게 올라앉은 진짜 조선기와집을 보자 잠시 얼떠름했다가 뒤늦게야 감탄을 터뜨렸던것이다.

구경갔던 강호의 안해마저 남편이 만든 무대장치를 보고 신통하다고 기뻐했을 정도였다.

《사실은 내가 무슨 요령이 있거나 재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대미술을 전혀 몰라서 그렇게 되였다.》

강호가 후날 친우들에게 한 고백이였다.

첫 공연이 끝나기 바쁘게 무대우에 세워졌던 진짜 기와집과 초가집, 토담에 대한 소문은 강호의 이름과 함께 서울시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관객들이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그제야 볼이 부었던 극단 경영주의 입이 터진 팥자루처럼 헤벌어졌다.

새로 온 무대미술가의 근면성과 미술감각의 덕으로 그는 가슴이 알알하던 손실액을 보충한것은 물론이고 약차한 돈까지 벌었던것이다.

기실 강호가 무대미술에 손을 댄것은 임신한 안해와 매일처럼 독촉받는 집세때문이였는데 뜻밖에도 그는 이 분야의 권위자로 되였던것이다.

강호는 성공의 문을 통과할수 있는 출입증인 재능과 정열, 의지를 다같이 소유한 사람이였다.

얼핏 생각하면 예술계의 여러 분야에 관여한 강호는 마치 팔방미인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그의 진짜 모습은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사회적모순을 반대하는 전선의 참호에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굳센 인간의 자태였다.

용감한 사람은 후퇴를 모른다. 만약 그가 자기의 신념을 조금만 양보하였더라면 지겨운 감옥살이를 두차례나 하지 않았을것이고 넉넉치는 못해도 한 가정의 평안만은 근근히 보장할수 있었을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같은 성미는 전향이라는 치욕을 용납하지 않았다.

당시는 일제에게 굴복한 일부 작가, 예술인들이 전향문학을 하던 시기였다.

그렇지만 강호는 그 어떤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프로레타리아영화예술의 선구자로서 영화 《지하촌》, 《암로》와 더불어 자기의 신념을 끝까지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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