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페지로
날자별열람

 

비상한 노력가

 

해방만세의 우렁찬 웨침이 삼천리강산을 뒤흔들었다.

우리의 풍운아는 움츠렸던 어깨를 쭉 펴고 장편력사소설 《세종대왕》, 《리순신장군》, 《갑오농민전쟁》을 쓸 준비를 다그치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것이 봄날의 꿈이였음을 깨달았다. 남조선에 상륙한 《해방자》들의 무거운 군화가 인민들의 총의에 의해 세워졌던 인민위원회의 간판들을 사정없이 으깨여놓고 10월인민항쟁에 떨쳐나선 인민들의 가슴을 마구 짓밟아버렸던것이다.

그와 함께 엊그제까지 일본기생들의 샤미센소리가 간지럽게 울리던 서울의 거리에 징그러운 양키문화가 오물처럼 범람했다.

그 와류속에서 력사소설을 쓴다는것은 투구에 갑옷을 차려입고 현대문명을 자랑하며 달리는 궤도전차에 오른것만치나 기이하게 느껴질 일이였다.

당시의 형편으로서는 극도로 반동화되여가는 남조선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을 쓰는것이 급선무였다.

박태원은 당초의 계획을 접어놓고 《략탈자》를 비롯한 여러편의 장편소설들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그러던중에 전쟁이 일어났다.

1950년 6월 28일 괴뢰중앙청에 람홍색공화국기가 펄펄 휘날리는것과 함께 인민의 세상으로 전변된 서울에서 박태원은 난생처음 현실속에 살아움직이는 인간중심의 새 력사를 체험하였다. 정의와 량심이 떳떳이 머리들고 활보하는 벅찬 삶의 호흡속에서 그는 새로운 문학세계를 발견하였고 또한 자기의 붓대우에 실린 성스러운 사명을 새롭게 절감하였다. 하기에 조국앞에 준엄한 시련이 닥쳐온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그는 서슴없이 북행길에 올랐고 용약 종군작가가 되여 인생의 새 출발을 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그가 《림꺽정》의 안내로 들어섰던 희망의 오솔길은 인민을 위한 진정한 문학의 대로, 참된 애국의 대로와 합쳐지게 되였다.

그는 전쟁기간에 중편소설 《조국의 기발》, 《조국의 품》 그리고 많은 전투실화들을 써서 인민군군인들과 후방인민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조국의 하늘가에 승리의 축포가 터져오른 뒤 박태원은 화약내배인 군복을 자기집 말코지에 걸어놓기 바쁘게 력사탐구의 길에 들어섰다.

천세봉선생이 쓴 《작가수업 40년》에는 이런 글줄이 있다.

《나는 신문에 난 박태원의 앞머리를 내려드리운 사진을 보면서 나도 언제면 저처럼 유명한 작가가 될수 있을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와 함께 일하고있다.》

박태원은 초기에는 장편소설 《천변풍경》과 단편소설집 《구보씨의 하루》를 비롯한 현대물작품을 많이 써서 이름이 알려졌지만 원숙기에 이르러서는 이미 서울에 있을 때부터 결심했던 력사물작품창작을 위하여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그 시기 작가는 사회과학원의 력사연구소와 중앙도서관, 대학의 도서관들, 력사박물관, 민속박물관, 모란봉과 대성산, 개성과 해주, 구월산의 력사유적들과 운명적이라고 할수 있는 깊은 인연을 맺었다.

그때 그가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더라면 후날 한치의 앞도 볼수 없고 한치의 걸음도 움직일수 없는 불구의 몸으로 그처럼 훌륭한 장편력사소설을 써낼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방대한 규모의 《리조실록》과 《팔만대장경》 번역에서 큰 역할을 발휘한 언어학자이며 력사학자인 홍기문, 조선중세사 전문가로서 중세조선력사연구와 이 부문 후비육성에서 많은 공로를 세운 김석형, 동명왕릉과 안학궁의 발굴과 정리사업 그리고 단군릉, 동명왕릉, 왕건왕릉개건사업에 참가하여 학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조선력사를 주체적인 사회력사관에 기초하여 체계화한 박시형은 박태원의 가까운 벗들이였다.

그들은 서로 때없이 오고가면서 력사학계에서 론의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하군 했다. 그들모두가 뜨르르한 원사, 교수, 박사들인것만큼 그들사이에 진행된 대화들이 력사소설가인 박태원에게 큰 도움이 되였으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했다.

때로는 홍기문이 력사학계에서 론의되는 일련의 문제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들으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박태원은 자기의 작품이 출판되여나오면 그들에게 먼저 보냈고 그들도 자기의 저서가 출판되면 우선적으로 작가한테 보내주군 하였다.

력사탐구의 10여년간 박태원이 자료작업을 해놓은 책과 자료묶음들은 방 한칸을 차고 넘을 정도였다.

그는 력사소설은 력사에 대한 진지한 탐구가 없이는 쓸수 없다는것을 알고있었으므로 력사학자이상으로 력사연구에 전념하였고 많은 지방들을 직접 편답하였다.

적지 않은 독자들은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읽고 작가가 혹시 전주사람이 아닌가 하고 짐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럴 정도로 박태원은 전라도를 마치 자기의 고향처럼 속속들이 알기 위하여 지도작업을 열심히 하였고 그곳 전주의 마을이며 숲이며 정자며 큰 소나무며 하는것들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주의를 돌렸던것이다.

사실 그는 서울에서 나서자랐고 일본에 공부하러 갔다가 중퇴하고 돌아와 다시금 서울에서 살았으며 지난 조국해방전쟁시기 공화국북반부로 들어온이래 평양에서 줄곧 살았다. 그러므로 《갑오농민전쟁》의 무대로 서술한 전주땅은 고사하고 농촌생활도 잘 몰랐다.

하지만 그는 전라도의 농촌생활을 매우 방불하게 그렸다.

그통에 제일 혼난것은 순박한 그의 안해였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녀자는 어린시절을 충청북도 청주의 한 농촌에서 보냈었다.

작가는 틈만 있으면 안해의 농촌지식을 최대한 짜내여 자기의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고 불편한 몸이지만 동부인하여 주변농촌으로 가기도 하였다.

그것만으로도 소설창작에 바쳐진 작가의 피타는 노력을 가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작가는 《대동여지도》연구에도 달라붙었다.

언제인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의 민청원(당시)들이 그의 지리연구에 도움을 주기 위해 5만분의 1 지도를 보내준 일이 있었다.

지도의 가녁에는 《당 제4차대회에 드리는 선물로 창작하고계시는 선생님의 장편력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가 어서 세상에 나오기를 학수고대합니다. 작가동맹 민청원일동》이라는 글이 또박또박 적혀있었다.

그 글을 본 박태원은 《허, 이거 내 어깨가 더 무거워지는구만.》 하며 소설창작에 더욱 박차를 가하였다.

그는 문우들과 마주앉을 기회가 있으면 《작가에게 있어서 지식의 축적과 함께 생활체험, 취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고 말하군 했다.

그의 말처럼 박태원이 15년이나 누워있으면서도 창작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할수 있은것은 두눈이 빛을 잃지 않았을 때 많이 보고 두다리가 성성할 때 많이 걸었기때문이였다.

훌륭한 력사소설가가 되기 위한 그의 노력은 대단했다.

박태원은 《흐르지 않는 물, 고인물은 썩기마련이다. 강물은 마땅히 흘러야 한다. 강물이 흐른다는것은 바다로 간다는것을 의미하며 바다로 간다는것은 진보를 의미하는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바다는 크고작은 강줄기들을 다 자기의 품에 안아준다. 그것처럼 작가라면 지식의 바다가 되여야 한다는것이 작가 박태원의 지론이였다.

작가는 력사지식은 물론이고 예술, 미술, 음악을 비롯한 정치와 경제에 대한 학습에도 상당한 힘을 넣었다.

책은 지식을 주는 말없는 스승이며 거기에서 얻은 지식으로 두뇌는 필요한 사유를 감당하고도 남을만치 총명해지는것이다.

소설가치고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만 박태원은 보기 드문 독서광이였다.

그는 날마다 꺼져가는 시력때문에 눈을 가느스름하게 쪼프리고 가족들이 잠든 깊은 밤까지 책을 열심히 보았다.

그러면서도 책을 무턱대고 본것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과학적으로 읽었다.

그는 후배들에게 이르기를 세월을 흘러가는대로 내버려둘것이 아니라 세월과 함께 진행된 생활의 단편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분석하여 마음속에 쌓아두어야 한다고 했다.

박태원은 그 말처럼 전쟁에서 승리하고 전후복구건설에 착수한 조국의 벅찬 모습을 관광객의 시선이 아니라 건설자의 눈길로 차근차근 뜯어보며 기억하군 했다.

그는 또한 음악과 미술에 대한 공부도 필수적인것으로 여겼다.

그에게 있어서 음악과 미술은 멋을 부리기 위한 취미가 아니였다.

박태원은 문학은 소리없는 음악이므로 문학작품의 매 글줄마다에서 음악이 울려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음악적인 리듬을 타고 문장이 흐를 때 작품은 정서를 풍길뿐아니라 속도도 빨라질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동서고금의 유명짜한 소설들을 놓고보아도 잘 알수 있다.

박태원은 문학에 미치는 음악의 영향력을 잘 알고있었고 그 실현을 위하여 한평생 노력하였다.

그는 젊었을 때 바이올린을 즐겨 켜군 하였다.

그가 바이올린우에 뾰족한 턱을 슬쩍 올려놓고 우아한 자세로 활을 긋는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였다.

이따금 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아서 감정을 담아 지휘자마냥 한손을 부드럽게 흔들며 마치 무대에서 독창이나 하듯이 진지하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박태원에게는 민족음악을 전문하는 벗들도 많았다.

박동실, 정남희, 류대복…

그들은 자기의 음악을 리해해주는 박태원을 찾아와 오래도록 이야기하고는 거뜬한 마음으로 돌아가군 하였다.

이처럼 그의 창작과 생활에서 음악은 더없이 귀중한 길동무였다.

박태원은 미술공부도 열심히 하였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회화는 소리없는 음악이라는것이다.

여느 사람들은 미술작품을 눈으로 보지만 박태원은 눈만이 아니라 귀로 듣기도 했다. 화폭에서 울려나오는 그 음정을 듣는다는것은 아마 미술가들의 최고의 경지중의 하나일것이다. 거기에는 문학적인 환상도, 사랑도, 생활과 사업도 있기때문이였다.

그의 동생 박문원은 우리 나라 미술계의 이름있는 사람이였으며 조선미술사 개척자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작품을 끝내면 박태원에게 먼저 보여주군 하였다.

작가는 그 과정에 그림에 대한 많은 지식을 배우군 했다.

행복의 순간은 너무도 짧았다.

1958년 어느날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시력장애로 안해와 함께 병원에 갔던 박태원은 량안시신경위축증과 색소성망막염이라는 치명적인 진단을 받았다.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그런 진단을 받고보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는 서울에 있을 때부터 병을 앓고 시력이 몹시 낮아졌었는데 그동안 창작을 하느라 눈을 혹사하는통에 상태가 더 악화된것이다.

그의 시신경은 위축될대로 위축되여 200자원고지에서 단 한자밖에 알아볼수 없었다.

병원에 입원하여 집중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검은 장막은 점점 넓게 퍼져왔으니 작가의 시력은 꺼져가는 등불과도 같았다.

그는 미구에 자기의 시력이 영원히 꺼져버릴것이라는것을 알았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수많은 력사사료들을 고증하며 써야 하는 력사소설창작은 하늘의 무지개를 잡으려는것처럼 불가능했다.

박태원은 붓뚜껑의 좁은 구멍처럼 줄어든 시야나마 더는 줄어들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면서 고증할 사료들을 입원실에 가져다놓고 한자한자씩 뜯어보며 머리속에 새겨넣기도 하고 더러는 안해를 시켜 발취하도록 하였다.

얼마 지나서는 점점 눈앞이 캄캄해지더니 명암만 겨우 구분할수 있게 되였다.

허나 박태원은 자기의 의사를 배반한 육체앞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한 가정의 남편과 아버지이기 전에 조선의 작가였으며 로동당원이였던것이다.

문득 그의 머리에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우리 나라에서 농민전쟁전반과 계급투쟁의 전모를 보여줄수 있는 력사물주제의 소설을 쓸데 대하여 가르쳐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는 두주먹을 꽉 쥐였다.

(이대로 주저앉을수는 없다. 눈을 보지 못할 때까지 소설을 쓰자!)

박태원은 우리 나라 력사를 연구하는 과정에 력사적으로 이름난 세명의 인물을 소설의 주인공으로 형상할 구상을 세웠다.

농민전쟁지도자들중에서는 전봉준, 명장들중에서는 리순신장군, 왕들중에서는 세종대왕이였다.

그는 자기 소설의 첫 주인공을 갑오농민전쟁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으로 정하고 농민전쟁전야의 이야기와 그 전쟁에 참가한 인물들의 대군상을 그릴것을 구상하였다. 그리고 전 16권에 달하는 방대한 창작계획을 세웠었다.

그는 조급해나서 창작을 다그쳤는데 장편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1, 2부가 발표된 후 시력이 급속도로 악화되여 1966년에는 거의나 보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하여 작가는 부득불 초기의 창작계획을 바꾸어 《갑오농민전쟁》 1, 2, 3부를 쓰게 되였으며 그로하여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와 《갑오농민전쟁》간에는 수십년간이라는 공간이 생기게 되였다.

그러던 어느날 끝끝내 불행의 시각이 닥쳐왔다. 작가의 두눈에서 광명이 사라져버렸던것이다.

먹물처럼 캄캄한 세계가 그를 촘촘히 둘러쌌다.

만일 그 불행이 생활의 유쾌한 희롱에 지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작가는 좌절감에 몸부림쳤다.

(이젠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의 가장 고귀한것, 창작능력을 상실한 이때에 과연 무엇을 할것인가?)

빛이 없는 암담한 나날들이 지겹게 흘러갔다.

면회온 친구들은 그를 동정에 찬 눈길로 바라보면서 작가가 더는 일어서지 못할것이라고 짐작했다.

그에게 지리연구에 도움이 되라고 5만분의 1짜리 지도를 보내주었던 작가동맹의 처녀들은 안타까워서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그러나 그들은 작가 박태원을 잘 모르고있었다.

차츰 절망의 나락속에서 헤여나온 그는 이런 생각을 했다.

(목숨이 붙어있는 순간까지 소설을 계속 쓰자. 그것은 단순히 한편의 력사소설을 쓰는가 못 쓰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민의 의의있는 과거투쟁사를 가지고 력사소설을 쓰라고 하신 어버이수령님의 교시를 관철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절박한 문제이기때문이다. 수령님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한 작가는 죽을 권리도 없다. 나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진짜투쟁은 이제부터이다.)

그는 온몸에 힘과 용기가 샘처럼 솟구치는것을 느꼈다.

박태원은 생각끝에 간살을 도려낸 비닐판을 원고지우에 올려놓고 연필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한자, 두자…

하루는 그가 화가 나서 연필을 뚝 꺾어버린적이 있었다.

무딘 손으로 더듬으며 글을 쓰다보니 한 글자를 쓴 우에 덧글자를 쓰고 또 써서 하루종일 한페지도 전진하지 못했던것이다.

《이렇게 해가지구야 언제 다 쓰겠나?》

한참동안 모지름을 쓰던 그의 머리속에 피뜩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그렇지.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가?)

그 방법은 소설을 안해에게 불러주어 받아쓰게 하는것이였다.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안해는 즉석에서 만년필을 집어들었다.

이때부터 작가의 강행군은 구술의 방법으로 이어지게 되였으며 그속에서 유명한 《갑오농민전쟁》 1, 2부가 태여났던것이다.

혹 어떤이들은 구술로 창작하면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상 이것은 퍼그나 어려운 일이였다. 왜냐하면 소설을 구술로 창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작가의 머리속에 완결된 옹근 한권의 소설책이 들어있어야 하기때문이다.

그는 상상으로가 아니라 면밀히 연구되고 정확히 고증된 산더미같은 력사사료를 뛰여넘어 10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면서 창작의 환상을 펴야 하였다.

그가 선택한 생활범위는 우로는 봉건왕실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을 포괄하고있는것만큼 당시 법제와 문물제도, 풍속과 의상, 음식류와 지리, 력사적사건들이 벌어진 정황들에 대한 세밀하고 꾸준한 연구와 고증이 선행되여야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매 장, 매 절은 물론 인물들이 등장하고 퇴장할 환경까지 환히 떠오르고 그우에 문장조직까지도 다 끝낸 후에야 구술에 착수할수 있었다.

그러자면 작가의 노력이 어느 정도에 이르러야 하는가를 충분히 짐작할수 있을것이다.

이전페지   다음페지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1) 《회고와 신념》의 세계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2) 병상을 박차고 창작의 활주로에로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3) 수령형상문학의 개척자로, 담당자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1) 해방은 되였으나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2) 해볕에서 살리라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3) 태양의 빛발이 날개가 되여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4) 해볕 또 해볕에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5) 영생의 언덕에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1) 《순수문학》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2) 비상한 노력가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3) 고목에 핀 꽃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1) 민족의 량심과 지조를 지켜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2) 또다시 전선으로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1) 《집없는 천사》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2) 운명의 선택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3) 공화국의 품속에서 부른 참된 삶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4) 영생하는 작가의 삶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1) 무대에 운명을 걸고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2) 위대한 스승의 품속에서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3) 연극혁명의 불길속에 다시 태여난 인생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4) 어머니를 불러, 통일을 불러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1) 떠돌이생활에서 벗어나기까지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2) 생 명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3) 소망을 헤아리시고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4) 이어가는 참된 삶
←되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