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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박태원(작가)

                    

                      • 1909년 12월 7일 서울에서 출생.

                      • 조국해방전쟁시기 종군작가로 활동.

                      • 1986년 6월 10일 사망.

                                                                      

 

장편소설 《갑오농민전쟁》과 더불어 우리 민족문학사에 재능있는 력사소설가로 알려진 박태원!

그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자면 또 다른 박태원이라고 할수 있는 그의 안해 권영희가 작가의 가장 믿음직한 일심동체의 방조자로 된 사연을 간단하게나마 먼저 말해야 할것이다.

그의 딸 정태은은 아버지 박태원과 어머니 권영희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갑오농민전쟁〉 제3부에는 박태원, 권영희 두 이름이 씌여져있다. 그러나 나는 1, 2부의 박태원이라는 이름밑에서 또 하나의 다른 이름 권영희를 본다.

엄마는 아버지의 절반이였다. 아니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아버지는 한생을 문학에 종사하면서 많은 작품을 썼지만 작가로서 가장 중요한 시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엄마가 없이는 불가능한 처지에 있었다. 창작은 고사하고 육체적인 존재자체를 유지할수 없는 형편이였다.

부부란 가위와 같은 존재라는 의미를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서로 필요로 하고 의지한다는것의 참의미를 알았다. 일반적인 부부의 의미를 초월한 더 높은 곳, 더 확실한 곳, 더 큰 곳에 살고있는 존재가 다름아닌 나의 엄마와 아버지라는것을 퍽 후에야 발견했다. 아버지는 력사소설과 함께 어머니라는 살아움직이는 창작품을 탄생시키였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안해였고 엄마였고 문우였고 제자였다. 그들은 둘이였지만 하나의 결정체였다. 그 결정체는 아버지의 죽음으로써만 쪼각났다.》

어느 정도 특이한 필체와 감정으로 엮어진듯 한 딸의 글에도 있는것처럼 박태원과 권영희는 분렬된 조국의 시련이 필연적으로 결합시킨 부부라고 할수 있다.

권영희녀성의 본남편 정인택은 해방전은 물론 해방후에도 남조선에서 쟁쟁한 소설가로 이름날리던 재능있는 작가로서 박태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처마를 맞대고 앞뒤집에서 함께 살아오면서 안해들끼리도 류다른 정을 맺고있었다.

조국해방전쟁시기 해방된 서울에서 새 제도, 새 세상을 받들어 일도 함께 했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 공화국을 따라 북행길도 함께 떠났다. 남편들은 남편들대로 의용군대렬을 따라, 안해들은 안해들대로 자식들과 함께 험난한 후퇴의 먼길을 걸었다. 그런데 어찌하랴. 운명은 그립던 북녘땅에서 가슴아픈 리별과 상봉의 극을 펼쳐놓았다.

한 집에선 남편이 못 오고 또 다른 집에선 안해가 오지 못했다.

안해없이 문필활동에 피를 태우고있는 력사소설가 박태원과의 결합으로 권영희녀성은 인생의 두번째 장을 맞이하게 되였다. 그것은 고뇌인 동시에 보람이였고 행복과 기쁨인 동시에 강의한 의지를 요구하는 강행군이였다.

만약 권영희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소설가 박태원의 한생은 《갑오농민전쟁》과 더불어 문단의 별이 못되였을수도 있다.

박태원이 불의 인간이라면 권영희는 자기의 몸을 통채로 그 불길을 솟구는데 이바지한 헌신의 인간이였다.

이제 참된 인간의 력사를 찾아 그우에 보람찬 삶의 자욱을 아로새긴 박태원의 인생행로와 함께 그 길에 찍힌 믿음직한 안해의 자욱도 더듬어보기로 하자.

 

 

《순수문학》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망국의 호곡이 터져올랐던 을사년의 그날로부터 4년째 되던 해에 서울거리의 한 집안에서 새 생명의 출생을 알리는 고고성이 울려나왔다.

금방 태여난 아기는 빨간 주먹을 귀엽게 내저으며 마치 방안에 푹 배인 고려약냄새에 취한듯 방그레 웃고있었다.

그가 바로 후날 우리 문학사에 큰 자욱을 남긴 력사소설가 박태원이였다.

약제사였던 아버지의 덕에 려염집자식들처럼 빈손을 빨지 않았지만 왜놈들의 게다짝소리에 이마살을 찡그리면서 성장한 박태원은 자식의 번성한 장래를 원하는 부친의 엄한 훈계로 일본의 법정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망국노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들쓰기마련인 굴욕적인 민족적모욕과 가증되는 학비난으로 하여 그는 중도에서 사각모를 벗고말았다.

대학생복에 묻은 섬나라의 먼지를 아무런 미련없이 툭툭 털어버리고 서울로 돌아온 박태원은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눈총을 뒤잔등에 받으며 원고지를 꺼내들었다.

14살때인 보통학교시절에 쓴 《입학》이라는 작문의 호평으로 문학에 대한 야릇한 호기심을 가졌으며 그후 똘스또이니, 듀마니 하는 작가들의 소설을 탐독하느라 푼푼치 못한 등잔기름을 어지간히 써버렸던 그가 창작의 붓을 닁큼 든것은 불가피한 운명이라고 할수 있었다.

1930년 잡지 《신생》 10호에는 박태원의 첫 단편소설 《수염》이 발표되였다.

문학의 초학도는 숨을 죽인채 자기의 첫아들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기다렸다.

며칠이 지나자 친구들이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났다.

《태원이, 소설을 잘 썼네.》

《축하하네. 앞으로 더 좋은 소설을 써주게.》

그제야 박태원은 자기의 자식이 미남이라는것을 알고 죽였던 숨을 후- 내쉬였다.

처녀작의 발표로 힘을 얻은 그는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시작하였다.

박태원은 24살 나던 해인 1933년에 정지용, 김기림, 리상, 리효석 등과 함께 문학친목단체인 《9인회》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면서 왕성한 정력으로 붓을 달렸다.

다음해 그는 단편소설집 《구보씨의 하루》를 발표하였다.

그 소설집 역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일정한 평가를 받았다.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있다.

《구보는 아이들을 사랑했다. 아이들이 잘 따르지 않으면 지어 아첨하기도 했다.》

소설의 주인공 구보는 아마도 작가자신이였던것 같다.

실지로 박태원은 아이들을 무척 사랑했다. 웬만한 어른들같으면 열번도 손이 나갔을 일에도 그는 부드러운 말로 아이들을 타이르군 했다.

《뭘 그러오? 아이가 아니요.》 하고 그는 못된 장난을 친 개구쟁이의 엉덩짝을 철썩 갈겨주기 바라는 사람들에게 서둘러 말하군 했다.

이러한 그였기에 자기 딸이나 손녀라 할지라도 손찌검은커녕 언제 한번 반말을 해본적이 없었다.

1935년에 그는 첫 장편소설 《청춘송》을 발표하였는데 그 소설은 《조선중앙일보》에 련재되여 문단의 호평을 받았다.

그는 중견작가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차지하였다.

박태원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중류급이하 사람들의 세태풍속을 그린 장편소설 《천변풍경》(1938년)을 내놓았으며 《명랑한 전망》(1938년), 《애경》(1940년), 《녀인성장》(1941년), 《원적》(1945년, 미완성) 등 장편소설들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그의 작품들은 섬세한 세부묘사와 진지하고 치밀한 구성, 세련된 언어구사로 하여 이때까지 우리 나라 소설문학계에서 보기 힘든 높은 예술적기교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박태원은 자기의 창작에 대해 점차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부르죠아문단에서는 그의 작품을 두고 저저마다 찬사를 올리였지만 근로인민대중속에서는 별로 좋은 반향이 없었다. 오히려 랭담했다고 해야 할지…

사실 이때까지 박태원이 쓴 현실주제작품들에는 근로인민대중의 절박한 사회적처지와 격동하는 투쟁기세가 전혀 반영되지 못하였으며 부르죠아모더니즘의 영향밑에 중소부르죠아계급이나 최하층인간들의 저조한 세태생활을 자연주의적으로 그린 《순수문학》의 그늘이 짙게 비껴있었던것이다. 사회정치적문제에서 멀리 떨어진 그의 문학세계는 해방을 전후하여 류례없이 심각한 력사적사변을 겪으며 민족적 및 계급적각성기를 걷고있던 우리 인민의 사상감정에 맞을리 없었다. 차츰 짙어가는 번민속에서 그는 이웃나라의 력사소설과 민족고전들도 번역하고 또 직접 력사소설들을 쓰면서 새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박태원은 력사에 대한 예술적탐구를 시작하면서 장편력사소설 《홍길동전》, 《리순신장군》을 창작하고 중국력사소설들인 《삼국지》와 《수호전》을 우리 말로 번역하였다.

그의 력사소설창작에 하나의 리정표로 된것은 홍명희의 장편력사소설 《림꺽정》이였다.

《림꺽정》은 1928~1938년까지 《조선일보》에 련재되여오다가 그후 단행본으로 출판되였다.

당시 《림꺽정》의 인기는 대단했다.

글개나 아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 소설을 읽고 또 읽었다.

장에 가면 장에서, 상점에 가면 상점에서, 역전에 가면 역전에서 의협심이 강한 림꺽정과 장기 잘 두고 하루밤에 천리를 간다는 황천왕동, 힘장사 곽오주와 얄미운 서림에 대한 열기띤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박태원도 열성적인 독자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며칠밤을 새우며 여러권의 《림꺽정》을 다 읽어버렸다.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페지를 덮은 박태원은 멍하니 한곳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후들후들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뒤졌다. 그리고는 지난날 자기가 썼던 장편소설들을 꺼내들었다.

벌컥벌컥 책장들을 번지던 그의 갸름한 얼굴에 쓰거운 미소가 그려졌다.

아무리 보아도 자기의 소설에는 《림꺽정》에 맥맥히 흐르는 인민들의 지향이, 인간의 존엄을 위해 자기의 몸을 서슴없이 바치는 영웅남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것이다. 있다면 가정잡사에 빠져 돌아가는 못난이들뿐이였다.

무엇인가 잘못되였다는 생각이 뇌리를 쳤던것이다.

그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돌이켜보면서 자기가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떨쳐나선 인민의 지향을 외면한채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고있었다는것을 통절히 느끼였다.

(어떻게 해야 《림꺽정》처럼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진짜 소설을 쓸수 있겠는가?)

불현듯 자기가 쓴 일부 소설책들이 독자들의 랭대를 받고 서점에서 셈평좋게 잠을 자고있던것을 본 일이 생각났다.

그때에는 그 원인을 자기의 미숙한 기교상문제로, 어떤 때는 독자들의 몰리해로 밀어붙였었다.

하지만 《림꺽정》을 보고난 이상 더는 자신을 기만할수 없었다.

작가라면 마땅히 인민들의 리해관계를 반영한 작품을 써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사랑을 받고 널리 애독될것이다. 독자들이 어째서 림꺽정이나 곽오주, 길막봉이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좋아하고 반대로 그들을 탄압하는 봉건관리들을 증오하는가?

그렇다. 인민들은 삐뚤어진 조정을 뒤집어엎기 위해 목숨걸고 나선 림꺽정과 그의 의형제들과 같은 의젓한 호걸들의 형상속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을 영웅들을 바라고있으며 서림이와 같이 제 리익을 위해 친우들을 팔다못해 나라까지 왜놈들에게 서슴없이 팔아먹은 친일파들을 미워하고있다.

박태원은 웅글은 신음소리를 질렀다.

그제야 홍명희의 《림꺽정》이 단순히 수백년전의 력사적인물들을 취급한 력사소설만이 아니라는것을 깨달은것이다. 그것은 력사소설이기 전에 짓눌린 겨레의 넋과 민족의 존엄에 대한 심장의 호소였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누구에 대하여 찬미해왔던가?

어리석게도 나의 문학세계는 인민들의 지향이라는 거대한 대하와 너무도 거리가 먼 심산속의 시내물처럼 도란도란 흐르고있었다.

그런즉 나의 소설들이 독자들의 버림을 받은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다음순간 그의 가슴속에서는 한가지 결심이 석고처럼 굳어졌다.

(이제라도 홍명희선생처럼 내 민족의 력사를 떠올린 인물들을 보여주는 력사소설을 쓰자. 이 길만이 진정한 애국자로 사는 길이며 참된 문인이 되는 길이다!)

결국 일생동안 그를 괴롭히기도 하고 기쁘게도 해준 그의 인생목표는 누에가 실을 뽑듯 소설들을 줄줄이 써내던 20대가 아니라 40대에 이르러서야 굳어진것이다.

박태원은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항구를 일찍 떠난 기선이 반드시 건너편 대안에 먼저 당도한다는 법은 없다. 만일 그 기선이 항로를 잘못 정했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맴돌거나 처음의 항구로 되돌아올수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참된 력사의 부두에 가닿지 못하고 도중에 주저앉는것은 일생을 기울여 실현할만 한 숭고한 목적이 없거나 혹은 그 실현을 위해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때문이다.

그는 자기에게는 인민을 위한 력사소설창작이라는 정확한 항로가 있으며 불타는 심장이 있으니만치 비록 자기의 기선이 뒤늦게 항구를 떠났지만 남먼저 대안에 당도할수도 있다는 신심을 가졌다.

그는 새로운 결심을 품고 력사소설창작에 달라붙었다.

얼마후 박태원은 장편력사소설 《임진왜란》을 신문에 발표하였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독자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한주일, 한달이 지나도 소설을 잘 썼다면서 찾아오는 친구들은 없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는것을 모를만치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였다.

실패, 그것도 완전한 실패였다.

인내성이 부족한 독자들은 하나, 둘 그의 곁을 떠나갔다.

하루는 한 친구가 나타났다.

소설이 좋다는 사람도, 나쁘다는 사람도 없어 전전긍긍하던 참이라 박태원은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친구가 거리낌없이 내뱉았다.

《자넨 력사소설가로 되긴 코집이 글렀네.》

박태원은 채찍에 가슴을 후려맞은것처럼 놀랐다.

돌아가는 친구를 바래줄념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소힘줄처럼 질긴 사람이였다.

다행히도 그에게는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성공한 인간으로 되기 위한 필수적요소-인민을 위한 참다운 력사소설을 쓰려는 뚜렷한 목표와 어떤 시련이 닥쳐와도 굴함없이 뚫고나가려는 강의한 의지가 갖추어져있었다.

그는 실패의 소용돌이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언제인가는 반드시 《림꺽정》과 같은 력사소설을 쓰리라는 결심만은 꺾지 않았다.

이런 연고로 그는 홍명희를 무척 존경하였고 장편소설 《림꺽정》을 읽고 또 읽으며 사색을 거듭했다. 뿐만아니라 자신에 대한 요구성을 늦추지 않기 위해 력작 《림꺽정》옆에 졸작 《임진왜란》을 나란히 놓아두었다.

그때 그는 섶나무우에서 불편스러운 잠을 자면서 쓰디쓴 쓸개를 맛보았다는 어느 한 왕을 그려보았을지도 모른다.

력사소설가로, 참된 애국자로 살기 위한 작가의 노력은 후날 응당한 결실을 가져왔다.

바위를 갈고갈아 바늘을 만들만큼 꾸준했던 그는 그때로부터 15년이 지난 1965년에 장편력사소설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 제1부를 창작발표하였다.

소설에 대한 문단과 독자들의 반영은 그의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통의 편지들이 매일처럼 날아들었다. 어떤 독자는 소설을 보고 너무 흥분된 나머지 밤늦게 집에 찾아오기까지 했다.

박태원은 처음으로 웃었다.

행복했다.

얼마나 좋은가. 바로 이런 멋에 피를 말리우고 뼈를 깎으며 소설을 쓰는것이 아닌가.

보름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우편통신원을 만난 안해가 큰일 난듯이 방안에 뛰여들어왔다.

《여보, 편지가 왔어요.》

박태원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독자들로부터 독후감을 적은 수백통의 편지를 받아온 그로서는 새삼스러울것이 없었던것이다.

《여느 편지가 아니란 말이예요. 홍명희선생이…》

박태원은 후닥닥 놀랐다.

《뭐요, 홍명희선생이? …》

안해가 편지봉투를 손에 쥐여주자 그는 눈을 쪼프리고 속지를 펼쳐들었다.

《…서울에서 동무의 〈천변풍경〉을 읽고 재간있는 사람이라는것은 알았지만 력사소설도 쓰는줄은 몰랐습니다. 정말 수고하였습니다. 그리고 잘 썼습니다.》

박태원은 흥분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기가 오래전부터 존경하던 홍명희가 이처럼 과분한 찬사를 보내올줄은 꿈에도 몰랐던것이다.

그는 그 일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듯 아픈 눈을 비비면서 편지를 두번세번 읽었다.

며칠후 그는 안해와 함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청사로 갔다.(당시 홍명희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사업하고있었다.)

홍명희는 그날 박태원을 만나 담화하면서 자기는 서울에서 많은 력사자료들을 볼수 있어 《림꺽정》을 쓰기 쉬웠는데 전쟁으로 자료들이 다 없어진 지금 동무는 어떻게 그런 소설을 쓸수 있었는가고 물었다.

박태원은 그저 어줍게 웃었을뿐이였다.

《정말 수고했소. 소설을 잘 썼소.》 하고 홍명희는 다시금 칭찬했다. 그런다음 남편의 옆에 수집게 앉아있는 그의 안해에게 진심어린 어조로 말했다.

《권영희동무는 참 훌륭한 방조자요. 그러고보면 박동문 안해복이 있소.》

그의 안해는 당황해서 어쩔줄 몰라하다가 남편의 등뒤에 몸을 숨겼다.

홍명희는 헤여질무렵 박태원에게 확대경을 내주었다.

《받소. 동문 시력이 좋지 않으니 필요할거요.》

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쯤 례절을 차리고는 주는대로 받았을것이다.

박태원은 사양했다. 확대경은 자기보다 80이 불원한 홍명희에게 더 필요할것이라고 생각한것이다.

《허허, 그러지 말고 받으라니까.》

고지식한 박태원은 또 거절했다.

《전 일없습니다.》

이쪽에서 자꾸 사양하니 홍명희도 억지로 쥐여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박태원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궁싯거렸다.

안해가 보다못해 물었다.

《왜 그러세요?》

박태원은 갑자르다가 말을 꺼냈다.

《거 확대경말이요. 그걸…》

미처 터놓지 못한 남편의 뒤말을 짐작한 안해는 어둠속에서 소리없이 웃었다.

박태원은 본시 물건에 대한 욕심이 꼬물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홍명희의 확대경을 선뜻 받지 않은것만은 몹시 후회하는것 같았다.

모름지기 물체를 실제보다 크게 보이게 하는 그 광학기구의 쓸모보다는 자기를 《순수문학》의 상아탑속에서 벗어나도록 해준 고마운 사람에 대한 친근한 감정을 두고두고 추억하기 위해서였을것이다.

물론 우의 이야기는 작가가 서울에서 《임진왜란》의 실패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때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있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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