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볕 또 해볕에서
우리 인민모두가 그러하지만 시인 박세영은 남달리 해볕에서 또 해볕을 받아안고 사는 행운을 지니였다.
그는 해방후 공화국의 품에 안겨
시인이 향도의
이날 시인은
그 열렬한 충정은
사람들은 흔히 나에게 묻더라
백발이 흩날리는 나를 두고
그 기백 그 열정이 어디서 오는거냐고
그러면 나는 마음속으로 대답하여라
사람도 강산도 청춘이 나래치게 하는
은혜로운 당의 품을 두고
그 모든 따사로움을 두고
…
아 잊을수 없어라 영광의 그날을
꽃을 피웠다면 한낱 방울꽃일가
별로 기쁨을 드린적 없건만
…
받아안은 감격은 순간이여도
내 지닌 영광은 영원하여라
따사로운 그 손길에서 흘러드는 은정은
청춘을 불러 내 온몸을 끓게 하였거니
그것은
그것은 하찮은 나에게도 안겨주신
크나큰 믿음의 손길!
그것은 바위도 뚫고 솟구칠
창조의 샘을 터쳐주신 은혜로운 손길!
…
사람들이여!
내 늙었다고 생각지 말라
충성심이야 나이로 셀수 없는것
오직 그 한길에서 살려는 이 내 마음
저 맑은 하늘을 떠인 푸른 소나무같은데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서야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서야
내 어이 늙을수 있으리
…
시인이 청춘의 활력으로 더욱 큰걸음을 내딛게 된것은 80고령에 이르러 시단을 떠나 집에서 쉬고있을 때였다.
사람의 한평생에서 누구나 황혼기에 이르면 집에서 자식들의 시중을 받으며 사는것이 보통현상이라고 할수 있다.
《산제비》로 날아예던 시인 박세영도 어쩔수 없는 인생길이였다.
이날도 시인은 버드나무 늘어선 보통강가에 나와 붓대신 낚시대를 드리우고 (《산제비》의 날개가 이젠 부러졌구나!) 하는 서글픔과 함께 하는 일없이 나라의 혜택만을 받으며 사는 죄스러움이 가슴에 파고들어 무겁게 앉아있었다.
그러했던 그에게 다시 창공을 날으는 생의 기적이 생겨났다.
로작가의 심정을 헤아려보신
새 청춘이 시작되던 그날 박세영은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기였다.
《나는 40대에
산제비를 자유의 화신으로 소리높이 구가하던 청년시인은 80대에 잠시 놓았던 펜을 이렇게 다시 들었다.
사색의 호수는 청춘기 못지 않게 출렁거렸고 육체의 힘도 왕성해졌다.
로작가들이 창작실에 나오는 날이면 제일선참으로 나오군 하였다.
눈내리는 어느날이였다.
모두들 이런 날에는 박세영선생이 못 나오리라고 생각하고있는데 그가 마당에 깊은 눈자욱을 남기며 씨엉씨엉 걸어들어오고있었다.
《이 눈길을 용케 오셨습니다.》
작가실의 동무들이 이렇게 말하자 그는 《동무들, 내 발자국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좀 보우.》 하고 빙그레 웃으며 눈우에 찍힌 발자국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문제없어.》 하고 그가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을 하며 빙긋 웃었다.
청춘의 기백을 표현하는 《문제없어.》라는 그의 이 말은 로작가조에 나오면서부터 더 잦아졌는데 그는 서정시 《90청춘을 노래하노라》를 쓸 때도 이 말로부터 창작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날이였다.
《무슨 회의라도 있는가요?》
《아니요, 광복거리건설장으로 생활체험을 나가야겠소.》
《광복거리라니요?》
부인은 놀랐다.
다음날 시인은 출판사에서 차를 내준다고 하였지만 차안에 앉아서야 무슨 체험이냐고 하면서 부인과 함께 부글부글 끓는 광복거리건설현장으로 나갔다.
자그마한 키에 은백색머리, 83살의 고령에도 정정한 걸음새로 그는 건설장을 걸었다.
하늘을 치받고 솟아오르는 고층건물들과 그 꼭대기에서 붉은기를 든 신호수의 신호에 따라 육중한 벽체들을 닁큼닁큼 들고 빙빙 돌리는 처녀기중기운전공.
긴 목을 빼들고 흙을 퍼담는 굴착기들과 쉬임없이 오가는 대형화물차들, 돌격대원들과 군인들, 지원자들을 돌아보며 로시인은 부인에게 말했다.
《내 늘그막에 이런 놀라운 광경을 보는구려. 내 저 높은 꼭대기까지 올라가봐야겠소.》
《뭐요? 제발 그 위험한 곳에만은…》 하며 부인은 어쩔바를 몰라했다.
박세영이 취재를 나왔다는 소문이 건설장에 퍼지자 건설장에는 그가 쓴 노래 《천리마타고 달린다》와 함께 선동원의 흥분된 소개말이 고성기에서 울려나왔다.
《동무들! 〈애국가〉를 쓴 박세영선생이 건설현장에서 좋은 시를 쓰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건설장일군들이 박세영의 손을 이끌고 그의 소원대로 준공이 가까운 고층건물옥상으로 안내했다.
아득히 높은 고층건물우에서 내려다보니 어제날의 자취는 가뭇없이 사라지고 눈뿌리 아득히 뻗어간 넓고 시원한 대통로, 금강의 메부리마냥 치받으며 일떠서는 고층, 초고층살림집들이 한눈에 안겨왔다.
언듯 시인에게는 50여년전 우연히 충북의 속리산 문장대에 올라 살같이 날아도는 산제비를 보며 시상을 고르던 그때와는 대비도 안될 숭엄한 감정이 부풀어오르는것이였다.
그 시절 《산제비》가 그리도 날아보고싶어하던 하늘은 번개치고 우뢰울며 먹장구름이 비꼈던 하늘이였다.
그러나 그가 오늘 날아예는 하늘은
룡마의 날개에도 비기지 못할 마음의 나래, 창작의 나래를 활짝 펴고 행복과 긍지로 한껏 부푼 가슴에 노래를 가득 안고 광복거리를 날으는 《산제비》였다. 그만이 아닌 수천수만의 돌격의 《산제비》들이 기운차게 날아예는 광복거리의 하늘이였다.
낮에도 밤에도
시인은 마침내 무릎을 치며 환성을 올렸다.
《찾았다! 그것이다.
고심어린 창작적사색과 탐구로 이 귀중한 시구절을 찾아낸 백발의 시인은 창작가만이 체험할수 있는 기쁨에 못이겨 울고있었다.
사람이 나이가 많아지면 눈물이 헤퍼진다고 하지만 이 시각 시인은 해방의 봄언덕에서
새 삶의 첫 기슭에서
그는
시인은 가슴에 흘러든 청춘의 활력으로 광복거리건설장에서 마침내 련시형식으로 된 시초 《광복거리에서 부르는 노래》를 완성하였다.
조선봉건왕조시기부터 살아온 모질던 세상과의 대비속에 세인을 경탄시키며
웅장화려하게 솟는 광복거리의 위용을 노래한 시,
많은 젊은 시인들이 그의 로당익장의 창작적정열과 기백에 머리를 숙이였다.
그들중 한 청년대학생이 시는 정열의 산물인만큼 흔히 청춘의 힘과 기백이 약동하는 젊은 시절에 써야 하는것으로 알고있는데 시인할아버지는 어떻게 되여 고령의 나이에 그처럼 훌륭한 시를 쓸수 있었는가를 물었다.
그때 시인은 기쁨과 자랑에 넘쳐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시인이 언제부터 동시대인들앞에, 독자들앞에 하고싶었던 심장의 절절한 토로이기도 했다.
시인의 인생을 키워주셨고 그의 창작적재능을 꽃피워주시고 가꾸어주신
그 은혜로운 사랑의 품속에서 시인자신도 잊고있던 가사 《승리의 5월》, 《빛나는 조국》은 해방직후에 창작되여 널리 불리운 노래, 감회깊은 노래라는 높은 평가속에 사회주의대건설로 들끓는 조국땅우에 더욱 높이 울리고 현대조선문학사의 갈피에 명작으로 빛나게 되였으니 시인으로서 이보다 더 큰 영광과 행복이 그 어디 있을것인가.
사랑의 해볕은 시인의 생일 85돐을 맞는 날에도 비쳐들었다.
1987년 7월 7일.
한편한편의 가사만이 아니라 생일까지 잊지 않고계시는
《산제비》시인은 어깨를 세차게 들먹거렸다. 빛나는 삶의 절정에서 오늘의
(아, 대를 이어가시며 나의 인생도 문학도 더욱 꽃피워주시는 그 품, 이 세상 끝까지 따르고모실 하늘같은 그 품.)
시인은 마음속으로 뜨겁게 부르짖으며 사진사에게 생일상만 따로 잘 찍어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생일상사진을 후손들에게 대대손손 가보로 물려주겠소. 그리고 통일되는 날 남녘의 고향에도 가지고 가겠소.》
시인은 생일을 축하하러 온 친지들과 시인들, 문학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