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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볕에서 살리라

 

박세영이 자나깨나 그리워하던 공화국의 품에 안겨 전설적영웅이신 민족의 태양 김일성장군님을 처음 만나뵈온것은 1946년 6월 어느날이였다.

한여름의 해볕이 류달리 따사롭던 그날 시인은 어버이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이께서 계시는 청사로 갔다.

시인은 안내하는 일군을 따라 어느 한 방에 들어선 후에도 여전히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잠시후 후리후리한 체구에 안광이 영채롭게 빛나는분이 방안에 들어서시면서 먼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였다고 인사를 건네시며 김일성이올시다.》라고 우렁우렁한 음성으로 자신을 소개하시는것이였다.

《아, 장군님!》

수령님을 만나뵙는 첫 순간 감격에 넘쳐 이렇게 부르짖는 시인의 가슴속에는 세찬 격정이 일어났다.

(이분이 바로 김일성장군이시구나! 이분이 바로 천리길을 주름잡으시면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일제침략자들의 머리우에 불벼락을 안긴 전설적영웅이시며 백전백승의 강철의 령장이신 김일성장군님이시구나.

일제교형리들의 횡포무도한 박해와 천대속에서도 오직 이분을 기둥처럼 믿고 살아오지 않았던가!)

《장군님, 자나깨나 장군님을 뵈옵고싶던 시인 박세영이 삼가 문안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목메여 말하며 허리를 깊이 숙이는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것이 흘러내렸다.

그이께서는 겸허하게 웃으시며 시인의 팔을 잡고 만류하시였으나 장군님께 큰절을 드리는 그의 마음은 더욱 뜨거웠다.

《장군님, 산에서 왜놈들과 싸우시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장군님께서 나라를 찾아주시여 이제는 온 겨레가 내 조국, 내 땅에서 자자손손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박세영이 드린 심장의 목소리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시인이 올리는 다함없는 진정에 고맙다고 뜨겁게 말씀하시면서 그를 친히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시인의 담차고 강직한 모습에서 일제의 모진 박해와 탄압속에서도 프로레타리아문학을 지향하여 신념을 굽히지 않았으며 서정시 《산제비》를 비롯한 수많은 시들을 창작하여 자유로운 새시대를 갈구하는 우리 인민의 마음을 노래한 그 애국적소행을 더듬어보시는듯 오래도록 시선을 떼지 못하시였다.

그러시면서 그이께서는 남조선에 조성된 정세에 대해 묻기도 하시고 가정형편에 대하여 일일이 알아보기도 하시면서 해방된 우리 나라에 민족문화를 빨리 건설하여야 한다고, 작가, 예술가들에 대한 당의 기대는 매우 크다고 말씀하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말씀을 구절구절 새기며 격동된 심정을 어쩌지 못하고있던 시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군님, 장군님의 건국로선을 높이 받들고 새 민주조선의 민족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힘껏 일하겠습니다.》

시인이 올리는 말에서 작가, 예술인들의 충정의 마음을 읽으신듯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좋습니다라고 못내 만족해하시면서 시인의 손을 다시금 힘주어 잡으시였다. 그러시면서 앞으로 일을 하려면 우선 마음이 안정되여야 한다고, 생활에서 불편한 점이 있으면 꺼리지 말고 후에라도 이야기하라고 하실 때 시인은 북받치는 격정을 더는 누를길 없어 《장군님!》 하고 뜨겁게 부르짖었다.

그로부터 몇달후 시인 박세영은 어버이수령님의 사랑의 품이 얼마나 깊고 따사로우며 수령으로서, 인간으로서, 어버이로서 그이의 천품이 얼마나 고결하고 거룩한것인가를 다시금 심장깊이 절감하게 되였다.

그해 10월초 어느날이였다.

함흥의 로동계급들속에서 현실체험을 하고있던 시인은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의 한 일군으로부터 급히 올라오라는 련락을 받았다.

그가 평양역에 도착하자 홈에 나와있던 그 일군은 대기하고있던 승용차에 그를 태우고 곧장 경치아름다운 문수봉기슭으로 달리게 하였다.

이윽고 승용차는 벽돌담장을 두른 한채의 아담한 집앞에 멈추어섰다.

시인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는데 방문이 열리면서 안해가 나오고 뒤따라 아들딸 오누이가 달려나와 《아버지!》 하며 와락 옷섶에 매달리는것이 아닌가. 서울을 떠나던 날 문밖까지 따라나와 바래주던 혈육들이였다.

《장군님께서 일군들을 보내시여 우리 가족을 평양으로 불러주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집까지…》

안해가 울먹거리며 말해서야 시인은 모든것을 알수 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서재가 달린 집필실과 여러칸의 살림방이 있는 주택과 옥백미를 시인에게 배려해주시였던것이다.

이 모든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아, 사선을 헤치고 불원천리 달려와 안긴 품, 내 인생도 문학도 다 맡긴 그 품은 이다지도 넓고 따사로운것인가.)

시인은 어깨를 세차게 들먹이였다.

불우했던 지난날 이런 꿈같은 일을 생각이나 해보았던가. 해방전 저주로운 그 세월에 병마와 기아로 숨진 어린 세 아들과 딸 하나를 이름없는 산기슭에 자그마한 봉분으로 련달아 남겨놓고 피눈물을 뿌리며 땅을 치던 시인이였고 황토먼지 이는 이국의 방랑길에서는 단칸집 하나 마련할수 없어 눈보라치는 겨울날 찌그러져가는 다리밑에 거적때기를 두르고 거처해야 했던 시인이였다.

그 굴욕의 나날에 가슴속에 응혈로 박히고 쌓인 피방울을 씻어내듯 시인은 오늘 감사의 눈물, 행복의 눈물을 맘껏 쏟치는것이였다.

《장군님! 고맙습니다. 이 하해같은 은혜를 어찌 잊을수 있겠습니까.》

가족들도 오열을 터뜨리고 이 감격적인 소식에 접하여 모여온 마을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적시였다.

시인은 안해에게 목이 메여 말하였다.

《우리의 머리우에서 찬란한 태양이 빛나고있소. 난 언제나 그 해볕에서 살리다.》

이렇게 말한 시인은 한손을 머리우로 번쩍 쳐들더니 격정에 넘쳐 시를 읊는것이였다.

 

설한풍 밀림을 집으로 삼고

때로는 불탄재로 식찬을 삼아도

동지들을 위해선 스스로 굶고 싸우던

영용한 애국투사들 있었거니

이날이 어찌 안 오리까

 

남의 강토에 도사리고

가난한 인민의 피를 빨며

모조리 파먹던 왜적에게

항거의 불길을 올리던 뜻

피끓는 이 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 목숨으로 지켜왔다 해도

어찌 당신처럼이야 싸웠사오리까

 

당신은 이름도 거룩한 김일성장군

정의의 칼을 뽑은지 몇해이며

조선인민의 살아날 리치를 펼친지

무릇 몇해시뇨

오 영명하신 장군 젊으셨어도

가뭇도 없이 빼앗긴 나라일엔

누구보다도 몸바치셨더라

 

번번이 왜적을 소스라치게 하던

당신의 위대한 전략전술이야

우리들이 모를 일이어든

해살같이 밝으신 삶의 리치

지금은 삼천리강산 곳곳마다

꽃으로 피여납니다

 

허나 가지가지 새로운 력사를

지어내시면서도

오직 소박한 사람으로 앞장서셨거니

우리 뜻을 다 바침이로다

그러기에 위대한 우리들의 장군이시로다

 

서정시 《해볕에서 살리라》(1946년)에는 김일성장군께 드림》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는 이미 세 제도를 살아본 사람이였다.

빛을 잃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두고 산천도 몸부림치던 조선봉건왕조 말엽의 소년시절을 거쳐 가혹한 일제통치의 식민지멍에를 벗어던지자 올가미를 조인것은 미제가 강점한 남조선사회였다.

그 기나긴 칠칠암야의 질곡속에서 유린당했던 인생을 다시 찾은것도 장군님의 품이였고 문학의 노래를 마음껏 펼칠수 있은것도 장군님의 품이였다.

하기에 그는 시에서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업적을 높이 칭송하면서 영원히 어버이수령님의 그 해볕에서 살리라는 자신과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마음을 격조높이 노래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시인에게 베푸신 사랑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6년 7월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국장을 거쳐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사업을 맡겨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해 9월 27일 오래전부터 구상해오신 《애국가》창작과 관련하여 교시를 주시는 영광의 자리에 조기천, 리찬과 함께 박세영도 불러주시였다.

그날 시인은 어버이수령님께서 선물로 보내주신 양복지로 지은 옷을 차려입고 감격에 겨워 어쩔줄 몰라하며 그이께서 계시는 곳으로 달려갔다. 수령님께서 꼭 석달만에 다시 시인을 불러주시였지만 오래 헤여져있던 옛 지기를 만나신듯 그렇게 기뻐하시면서 등을 다정히 두드려주실 때 시인은 그만 눈물이 글썽하여 몇번이고 입속으로 외워보던 감사의 인사도 제대로 올리지 못하였다.

시인의 마음을 헤아려보신듯 그이께서는 환하게 웃으시면서 모두 바쁠텐데 이렇게 오시라고 한것은 다른게 아니라 인민들이 부를 노래에 대하여 의논해볼가 해서입니다라고 말씀을 떼시였다.

노래라는 말씀에 벌써부터 창작적흥분을 느끼고있던 시인은 다음순간 가슴이 세차게 뛰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애국가창작에 대해 말씀하시는것이 아닌가.

그이께서는 지금 인민들이 해방된 조국땅에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게 된 기쁨과 감격을 목청껏 노래하고싶어하며 애국가를 요구하고있다고 하시면서 하루빨리 애국가를 창작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시였다.

《애국가!》

그 이름 조용히 불러만 보아도 가슴 벅차올랐다. 해방전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탓에 울밑에 선 연약한 봉선화를 부여잡고 한탄의 눈물을 쏟던 우리 인민이 아니였던가. 바로 그 인민에게 해방의 기쁨을 마련해주시고 오늘은 당당한 우리 조국의 국가를 안겨주시려고 마음쓰시니 창작가들의 마음이 어찌 격정으로 부풀어오르지 않을수 있으랴!

창밖에서는 9월의 가을볕이 물러가고있었다.

그이께서는 그것도 잊으신듯 두시간나마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우리 나라는 참으로 아름다운 나라입니다. 세 면이 바다로 둘러싸여있고 산들은 기세차고 장엄하며 전원에는 오곡백과가 무르익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지하자원, 금은보화도 무진장합니다.

우리 인민은 반만년의 오랜 력사를 가진 인민이며 찬란한 문화를 가진 슬기로운 인민입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조국의 아름다운 산천에 대해 생생한 화폭으로 펼쳐보여주기도 하시고 우리 인민의 자랑찬 투쟁력사와 문화에 대하여서도 실례를 들어가면서 개괄해주기도 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아름다운 조국과 슬기로운 투쟁전통을 가진 조선인민의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노래에 담아야 하겠다고, 인민들이 이 노래를 부르면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이 더욱 솟아날것이라고 하시면서 인민들에게 속히 애국가를 만들어주자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그이의 가르치심을 받으며 시인의 가슴은 세차게 높뛰고있었다.

시인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걸어오신 혁명의 천만리길을 생각했다. 그것은 걸음걸음 혈전의 언덕을 넘어야 했던 간고한 길이였다.

하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20여성상 백두산의 줄기줄기와 압록강의 굽이굽이에 피어린 자욱을 남기시며 애국의 길, 투쟁의 길을 앞장에서 헤쳐오지 않으셨는가.

그리하여 우리 인민에게 잃었던 조국을 찾아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오늘은 성스러운 조국의 국가에 담아야 할 내용까지 가르쳐주고계신다고 생각하니 시인은 위대한 태양으로 칭송하여마지 않는 장군님이시야말로 진정 민족해방의 구성이시며 절세의 애국자이시라는 생각에 다함없는 흠모의 정을 금할수 없었다.

(장군님께서 품고계시는 애국심을 사상으로 삼고 그이께서 가르쳐주신 빛나는 구절구절을 가사로 옮기리라.)

번개인듯 번쩍하는 사상감정과 충동에 억제할수 없는 힘을 느낀 시인은 집에 돌아오기 바쁘게 책상에 마주앉았다.

조국을 례찬하는 주옥같은 시구들이 가슴에서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고심어린 창작의 낮과 밤이 흘렀다.

이듬해 봄이였다.

이 봄도 시인은 먼 후날 어느 시에서 노래한것처럼 《만경봉 푸른 소나무에 볼을 비비며/ 아침해 빛나는 내 조국의 애국가 구절구절》을 고르느라 심혼을 쏟아붓고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김책이 시인을 찾아와 애국가의 창작정형을 알아보고 언제면 완성할수 있겠는가고 물었다.

그때 시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두달후인 6월 27일에 애국가를 시청하여주셨으면 하는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그날을 목표로 가사를 완성하여 작곡에 넘기겠습니다.》

시인이 말하는 그날의 뜻깊은 사연을 김책은 모르지 않았다.

《장군님께 그렇게 보고올리겠습니다. 우리 그날 장군님께 꼭 기쁨과 만족을 드립시다.》

마침내 영광의 그날은 왔다.

1947년 6월 27일.

위대한 수령님께서 애국가의 시청회에 참석하시기 위하여 북조선인민위원회 회의실에 나오시였다.

시인은 그이를 우러르며 남다른 격정에 휩싸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한해전 이날 친히 만나주신것만도 더없는 영광인데 그날을 못잊어하는 시인의 간절한 소원을 헤아려 바로 오늘로 시청날자를 정하여주시고 친히 참석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의 그 다함없는 은정에 그만 자꾸 목이 메여왔다.

시인은 애국가를 작곡한 청년작곡가 김원균의 손을 꼭 잡았다.

《작곡가동무, 난 그저 꿈만 같소. 장군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내주시다니…》

그날은 날씨가 몹시 무더웠다. 그래서 한 일군이 선풍기를 가져다 설치하였다. 그런데 시원한 바람을 일구며 돌아가는 선풍기를 바라보시던 그이께서는 좀 덥기는 하지만 새로 나온 《애국가》를 위하여 선풍기를 끄는것이 어떤가고 말씀하시였다.

선풍기는 멎고 장내는 물을 뿌린듯 조용하였다.

시인의 마음에서 세차게 타오르는 흠모의 분출인양 피아노의 반주에 맞추어 합창단이 부르는 애국가의 노래소리가 장내에 장중히 울리기 시작했다.

 

아침은 빛나라 이 강산

은금에 자원도 가득한

삼천리 아름다운 내 조국

반만년 오랜 력사에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슬기론 인민의 이 영광

몸과 맘 다 바쳐

이 조선 길이 받드세

 

장내에는 숭엄한 정숙이 깃들었다. 작곡가 김원균의 손을 꼭 잡은 시인의 두손은 땀에 질벅하게 젖어있었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그 정숙속에서 가끔 무엇인가 수첩에 적으시며 깊은 사색에 잠겨계시였다.

그러시던 그이께서는 노래의 2절까지 끝나자 환하게 웃으시며 못내 만족해하시더니 이 노래를 인민들이 좋아할것 같다고 하시면서 시인을 찾으시는것이였다.

한해전 시인을 처음 만나시던 그날을 그려보신듯, 그날의 시인이 오늘은 조국과 인민앞에서 《애국가》의 작가로까지 성장한 일이 못내 기쁘신듯 대견하게 바라보시던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책상우에 놓여있는 가사를 손에 드시였다.

그리고 글줄을 짚으시면서 《애국가》에서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시행부터 그아래는 반복하는것이 좋겠다고 하시며 우리 나라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 유구한 력사를 가진 나라인데 어떻게 한번만 부를수 있겠는가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그러시면서 다시한번 부르면 선률로 보아서도 더 효과적이고 음악상조화도 잘될뿐만아니라 노래도 한결 장중해지고 부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긍지감과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고 하실 때 문학예술에 대한 그이의 탁월한 식견과 비범한 예지에 장내는 감동의 파도로 설레였다.

그러니 시인의 감정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누구보다도 기뻐하신분은 어버이수령님이시였다.

그이께서는 《찬란한 문화로 자라난》이라는 부분부터 반복하여 다시 부르는 합창단의 노래를 들으시고 좋다고 하시면서 친히 자리에서 일어나시여 우렁찬 목소리로 우리 인민은 오래동안 《애국가》를 부르지 못하고 살았는데 이제는 《애국가》를 부르게 되였다고 말씀하시였다.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와 환호소리로 차넘쳤다.

모두가 애국의 뜨거운 열정이 흘러넘치고 민족의 숭고한 정서로 가득찬 우리 조국의 영원한 송가를 제정해주신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러 솟구치는 감사의 눈물을 어쩌지 못하고있었다.

그런데 수령님께서 오히려 손을 잡아주시며 수고했다고 감사를 주실 때 시인은 이 뜨거운 은정에 무어라고 인사를 드려야 할지 알지 못했다.

《애국가》는 이렇게 탄생하였다.

《애국가》, 그것은 태양조선의 위대한 찬가였으며 우리 인민의 영원한 삶의 노래였다.

일제식민지통치하에서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수법으로 내놓은 《산제비》로부터 악독한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된 새 조국땅에서 세계에 대고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을 가슴터쳐 노래한 《애국가》! 이것은 박세영의 운명개척에서의 근본전환을 보여주는 인생행로의 대표작인 동시에 애국으로 살고 애국으로 조국을 받들어나가려는 신념과 의지의 결정체였다.

사람들이 《애국가》의 작가를 두고 찬사의 말을 할 때마다 박세영은 말하였다.

《〈애국가〉의 작가가 저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 모르고 하는 말이지요. 사실 〈애국가〉는 어느 개별적시인이나 작곡가가 창작한 노래가 아닙니다. 항일의 불비속을 뚫고 조국을 찾아주시고 민족을 구원하여주신 어버이수령님께서 우리 인민들에게 안겨주신 조국찬가이며 조국송가입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저에게 〈애국가〉를 쓸데 대한 구체적인 상을 안겨주시고 시어 한마디, 시구 하나에 이르기까지 세심히 다듬어 완성시켜주시였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새 민주조국건설에 이바지한 시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시여 해방후 새로 제정한 첫 국기훈장도 남먼저 안겨주시고 문학예술부문앞에 중요한 과업이 나설 때면 박세영을 부르시여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기도 하시였으며 식견도 넓히고 휴식도 하라고 외국방문의 길에도 내세워주시였다.

1959년 여름이였다.

보통강유원지건설장을 찾으신 수령님께서는 깊은 감회에 잠기시였다.

오랜 세월을 두고 인생의 최하층에서 물로 하여 불행을 당해야 했던 토성랑사람들을 두고 생각많으셨던 그이께서는 한 일군에게 박세영을 비롯하여 작가들이 배를 타고 만경대와 보통강을 돌아보도록 하라고 말씀하시는것이였다.

현지지도의 길에서도 작가들을 잊지 않으시고 친히 이름을 불러주시며 창작의 무궁한 현실을 펼쳐주시는 어버이수령님의 류다른 사랑과 보살피심속에서 일군들은 모두가 뜨거운것을 삼켰다.

이 뜻밖의 소식에 접한 시인은 보통강의 푸른 물결우로 달리는 배우에서 눈물에 젖어 수도의 일경을 바라보며 목이 메여 부르짖었다.

《수령님, 해방의 봄언덕에서 위대한 태양의 빛발로 저의 인생을 꽃피워주시고 문학의 광활한 앞날을 열어주시고도 10여년세월 이렇게 걸음걸음 보살펴주신단 말입니까!》

그는 솟구치는 격정에 넘쳐 어버이수령님을 처음 만나뵙고 썼던 시 《해볕에서 살리라》를 마음속으로 읊고 또 읊었다.

 

그 빛 해살같이 온 땅에 비쳐

우리를 행복에로 이끌어주나니

무엇을 서슴으오리

우리 다 그 해볕에서 살리라

하여 밝으신 그 령도따라 나가리라

빛나는 민주의 새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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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1) 《회고와 신념》의 세계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2) 병상을 박차고 창작의 활주로에로 운명의 선택 1^bb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작가 석윤기- 3) 수령형상문학의 개척자로, 담당자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1) 해방은 되였으나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2) 해볕에서 살리라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3) 태양의 빛발이 날개가 되여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4) 해볕 또 해볕에서 운명의 선택 1^bb2. 《산제비》가 깃들인 곳 -시인 박세영- 5) 영생의 언덕에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1) 《순수문학》의 상아탑에서 벗어나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2) 비상한 노력가 운명의 선택 1^bb3. 참된 력사를 찾아 아로새긴 삶의 자욱 -작가 박태원- 3) 고목에 핀 꽃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1) 민족의 량심과 지조를 지켜 운명의 선택 1^bb4. 다재다능한 예술가 -화가, 영화연출가 강호- 2) 또다시 전선으로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1) 《집없는 천사》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2) 운명의 선택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3) 공화국의 품속에서 부른 참된 삶의 노래 운명의 선택 1^bb5. 그가 찾은 영생의 노래 -작가 조령출- 4) 영생하는 작가의 삶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1) 무대에 운명을 걸고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2) 위대한 스승의 품속에서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3) 연극혁명의 불길속에 다시 태여난 인생 운명의 선택 1^bb6. 무대우에 찍혀진 운명의 자욱 -연극배우, 연출가 리단- 4) 어머니를 불러, 통일을 불러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1) 떠돌이생활에서 벗어나기까지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2) 생 명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3) 소망을 헤아리시고 운명의 선택 1^bb7. 인기있는 화술배우로 -영화배우 오향문- 4) 이어가는 참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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