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8
(2)
《저 자강도를 보십시오.》
무력부장이 온통 진갈색바탕우에 등고선들이 조잡하게 밀집된 산악지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기서 한해에 량곡이 얼마나 나올것 같습니까?》
《예?》
뜻밖의 질문에 무력부장의 눈이 뎅그래졌다.
《왜 그렇게 놀랍니까?》
《놀라지 않게 됐습니까. 전 놈들이 너무 못되게 노니 한바탕 답새길 일이라도 생겼는가 했습니다.》
《때릴 때가 되면 때려야지.》
《무력부장동무, 다른게 아니라 지금 자강도로동계급이 힘겨운 투쟁을 하는데 식량난에 봉착했습니다. 아무래도 무력부장동무를 달궈야지 식량이 나올데가 없습니다.》
무력부장이 곧은박이 성미그대로 펄쩍 뛰며 어깨를 솟구었다.
《자, 너무 흥분하지 말고 진정해서 잘 생각해보십시오.》
《알고있습니다.》
《그러다가 놈들이 불의에 덤벼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후에 꼭 메꿉시다.》
무력부장이
《무력부장동무, 지금도 우린 전쟁을 하고있습니다. 제국주의의 떼무리들이 우리를 먹어보려구 날뛰고있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얼마나 큰 전쟁을 치르고있습니까. 우린 어떤 일이 있어도 놈들의 경제봉쇄를 짓부셔버리고 자강도를 일떠세워야 합니다. 자강도로동계급이 쓰러지지 않고 내가 준 과업을 수행하면 그게 이기는겁니다.》
무력부장의 거뭇거뭇한 눈섭이 꿈틀거리였다. 한참이나 잠자코 있던 그가 비로소 얼굴에 드리웠던 그늘을 지워버리면서 말없이
《하, 그랬지요.》
무력부장이 몸을 젖히면서 입을 항 벌렸다.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들이 서뿔리 우리한테 덤벼들진 못합니다. 설사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식량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리구 무력부장동무야 개인적인 친분관계를 봐도 태혁동무의 아버지 강희준이와 모르는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30년대부터 왕청에서 강희준이와 함께 싸웠구요. 태혁동무를 도와줍시다. 재삼 말하는데 자강도를 도와주는것이 우리를 꺼꾸러뜨리려고 어리석게 날뛰는 적들의 귀뺨을 답새기는 일입니다.》
몇해전 통다이야문제로 마찰이 생겨 오진우무력부장이 태혁을 단단히 벼른다는 말을 듣고 그들을 스위스로 함께 휴양을 보냈던 일이 떠오르신것이였다.
그때 스위스에 갔다 온 오진우가 얼굴이 활짝 개여 돌아와서
그날 밤 자강도당청사의 모든 방들에서는 간데라불빛이 희미하게 새여나왔다.
《하기야 나도 속이 한줌만 했지. 막말로 말해서 오라는 져도 할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댔으니까. 까딱하면 자강도사람들을 다 굶겨죽일것 같더란 말이요.》
태혁은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을 쳐들고 그의 량어깨를 꽉 잡았다.
《여보, 우리가 큰 전투를 벌려놨지만 똑바로 하는 일이 뭐요? 하나에서 열까지
순간 뜨르릉- 요란히 울리는 전화종소리에 끌려 태혁은 책상앞으로 다가섰다. 갑자기 깊은 밤중에 어디서 걸려오는 전화인가 하여 모두들
긴장히 지켜보는 가운데 수화기를 집어든 태혁의 가슴은 세차게 울렁거렸다. 뜻밖에도 귀에 익은
《태혁동무요?》
《그렇습니다.
태혁은 두손으로 수화기를 꽉 움켜잡았다.
《왜 아직 쉬지 않소?》
《…》
태혁은 목안이 메여올라 대답을 못했다. 바로 자기가 그렇게 묻고싶었던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겨우 입을 열었다.
《태혁동무, 동무들이 이해 겨울에 배를 곯으면서 얼마나 고생을 했소.》
그 짤막하신 말씀속에 담겨있는 뜨거운 사랑에 태혁은 다시금 격정이 북받쳐올라 고개를 떨어뜨리였다.
《그건 무슨 말이요?》
《그러지 않아도 동무가 그렇게 생각할것 같아서 전화를 했습니다.》
《예?!》
태혁은 그만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동무가 인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 애쓰고있으니 반가운 일이요. 내 이전에도 동무와 만나서 말했지만 우리가 이 어려운
시기에 자강도로동계급처럼 혁명성이 강한 인민을 가지고있는것은 참말로 다행한 일입니다.
《동무들, 우리 자강도인민들은 가장 엄혹했던 고난의 행군시기에
《옳습니다. 전투는 불과 석달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 석달이요. 우리 자강땅사람들의 본때를 보이기요.》
태혁은 창문앞으로 힘차게 다가섰다. 멀리 평양의 하늘가에 시원을 둔듯 한 새벽빛이 푸르스름히 서리며 어느덧 강계땅의 명산, 흰 눈을 떠이고 솟아있는 독산우의 어둠을 한거풀 서서히 벗겨버리고있었다.
온 강계시가 깊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한 그 잊을수 없는 새벽이였다.
남산기슭의 외딴 집에서 고즈넉한 밤정적을 흔들며 피아노소리가 격동적으로 울렸다. 집으로 돌아온 태혁은 흥분된 마음을 금할길 없어
피아노의 건반을 힘차게 두드려대였다. 몇해전 정무원에 있을 때
《아니, 어떻게 된 일이예요?》
태혁은 그때에야 피아노에 못 다 쏟아부은 자기의 심정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여보,
《녜?!》
안해의 눈에 대뜸 눈물이 글썽해졌다.
피아노앞에서 성큼 일어난 태혁은 안해의 어깨를 힘있게 흔들었다.
《지금 온 도가 부글부글 끓고있소. 공장, 기업소, 발전소건설장들마다에선 궐기모임들이 벌어지고… 이젠 강재요. 강재만 해결하면 우린 발전소도 건설하고 공장도 다 돌릴수 있단 말이요.》
제 6 장
1
(1)
혜경은 한그람의 강재도 해결받지 못해 안타깝기 이를데 없었다. 그동안 남몰래 혼자 애꿎은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는지 몰랐다. 이럴줄
알았으면 왜 떠났던가? 애당초 자기는
태혁은 그를 떠나보내며 사람들의 심장을 울리라, 그러면 얼마든지 강재가 나온다며 선전대의 림신애까지 붙여주었지만 이젠 그 푸접이 좋은 말괄량이조차도 지배인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고 그저 꿔온 보리자루처럼 혜경이한테 끌려다니다싶이 한다. 혜경이앞에서 무슨 생각엔가 골똘히 잠겨있던 림신애가 그를 바라보며 시들히 말했다.
《혜경이, 정말 불쌍해서 못 보겠구나. 한다하는 도당 부원의 웃주제가 그게 뭐야? 신발이랑 앞코숭이가 다 터진걸 신구.》
혜경은 장난기가 어려있는 림신애의 말에 서글프게 웃으면서 자기들의 편리화를 내려다보았다. 림신애가 신고있는 편리화도 자기의것과 별반 구별이 없이 헐어빠진데다가 흙먼지투성이가 되여 볼 모양이 없었다. 선전대 《배우》의 체모에 어울리게 늘쌍 윤기가 반질반질 도는 굽높은 구두를 신고 강계바닥을 때각때각 울리며 다니던 멋쟁이처녀, 키가 늘씬하고 두눈이 서글서글한 림신애의 행색도 여간 초라해보이지 않았다. 하긴 그들이 이 김철에 와서 얼마나 분주히 드달려 다니였던가. 한밤중에도 성의껏 마련한 후방물자들을 들고 용해장과 출하직장의 로동자들을 뻔질나게 찾아다니느라 그들의 얼굴에서는 송골땀이 마를사이가 없었다. 그러한 나날이 흘러오는사이에 이젠 제철소로동자들과 퍼그나 친숙해져 길에서 만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정도가 되고 그들도 《강계처녀》들의 안타까운 문제를 풀어주지 못해 은근히 마음을 쓰는데 지배인만은 여전히 쓴외보듯 하니 속상한 일이였다. 태혁이가 김철에 도착하면 자주 전화도 하고 편지도 써보내라고 당부했지만 혜경은 매번 우는 소리만 할수 없어 그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있다. 하루빨리 강재가 도착하기를 목마르게 기다리고있을 책임비서동지의 마음인들 오죽 안타까울가? 혜경은 그 생각을 하면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아서 꼬박 뜬눈으로 새우군 한다. 이젠 식량이 다 떨어져 당장 먹고 살아갈 일도 급하였다. 그래서 한주일전에 김중범아바이를 강계로 보냈는데 왜 아직 돌아오지 않는지 알수 없다. 혜경은 이래저래 두루 걱정스러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남은 강재때문에 속이 타서 죽겠다는데 넌 별소릴 다하누나. 생뚱같이 신발따위가 뭐냐?》
《혜경인 정말 마음도 곱지.》
《애두, 제발 실없는 소린 그만해!》
혜경은 발끈해서 신애를 흘겨보았다. 좀해서 남한테 성낼줄 모르던 혜경이였는데 요즘은
《난 뭐 네 마음을 모르는줄 알어? 어서 가자. 오늘은 아무리 여기서 지배인을 기다려도 소용이 없어. 여느때 같으면 벌써 사람들이 잔뜩 모여와서 지배인을 만나려고 법석 떠들겠는데 이렇게 조용하지 않어? 중범아바이가 오지 않았는지 빨리 합숙에 나가보자꾸나.》
혜경은 그 말을 듣고보니 그럴상 싶어서 림신애와 함께 숙소로 정한 로동자합숙으로 나가다가 깜짝 놀라 멈춰섰다. 여러명의 로동자들이
《여, 빨리 기중기차를 불러와!》하며 그들의 옆으로 부리나케 뛰여갔다. 웬일인가 했더니 바다물을 끌어들이는 제철소의 랭각관이
터졌다는것이였다. 혜경은
혜경의 안타까운 호소에 감동된 로동자들이 굉장한 압력으로 내뿜는 물속으로 뛰여들었다. 림신애도 얼굴을 후려치는 물벼락에 비칠거리며 뒤따르다가 《신애, 뭘해. 빨리 가서 저 방송차를 잡아!》하는 혜경의 웨침에 얼핏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옆으로 지나가는 방송차가 눈에 띄였다. 림신애는 방송차를 따라가면서 《차를 세우라요. 세워요!》하고 소리쳤다. 방송차가 멈춰섰다.
림신애는 차에 올라 미처 량해를 구할사이없이 마이크를 들고 사고현장에서 벌어진 위태로운 사태를 다급히 알렸다. 여기저기에서 로동자들이 주먹을 쥐고 모여들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가마니며 솜옷을 벗어들고 달려와 터진 랭각관을 막기 위한 전투를 벌렸다. 그들의 불덩어리같은 마음에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라 림신애는 전시가요 《결전의 길로》를 격조높이 불렀다. 그의 노래는 도간도간 흐느낌때문에 끊어졌다. 근 반시간동안의 들끓는 분위기속에서 드디여 랭각관수리작업이 끝나자 로동자들은 저마끔 달려와 혜경을 둘러싸고 《정말 수고했소.〈강계처녀〉들의 이악성엔 쇠돌도 녹아나겠소.》하며 손을 꾹꾹 잡아주었다. 혜경은 추위에 꽁꽁 언 녀성같지 않게 생기를 띄며 명랑하게 웃어댔다. 자기의 흠빡 젖은 몸에 솜옷을 씌워주는 림신애와 함께 혜경은 제철소합숙으로 마구 줄달음쳐 갔다.
《혜경이, 넌 정말 도담해.》
림신애가 감탄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너무 비행길 태우지 말아. 난 오늘 신애의 진짜 노래를 들었어. 넌 무대에서보다 훨씬 더 노래를 잘 부르더구나.》
《정말?》
림신애가 깔깔 웃으면서 혜경을 살틀히 그러안았다.
《혜경아, 빨리 가자. 오늘은 어쩐지 중범아바이도 왔을것 같애.》
림신애의 말처럼 중범아바이가 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강계소식을 통 모르고 지내는 혜경은 여러모로 중범아바이가 여간 기다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합숙으로 돌아가보니 김중범아바이는 오지 않았다. 그가 젖은 옷을 갈아입고 옆방으로 가보니 무역국부국장만 벽에 잔등을 붙인채 찌뿌둥히 앉아서 그들을 맞아주었다.
《오늘도 또 헛탕이요?》
《네, 만나지 못했어요.》
부국장은 그럴줄 알았다는듯이 한숨을 내쉬며 심드렁히 말했다.
《혜경동무, 이젠 아무래도 안되겠구만.》
《뭐가 안된단 말이예요.》
《이제라도 도당에 사실대로 보고하는게 어떻소. 그래야 김철의 강재를 단념하고 한시바삐 대책을 새울게 아니요. 괜히 승산이 보이지 않는걸 될것처럼 하면서 시간만 보내다간 큰 일을 칠것 같단 말이요. 강재때문에 발전소건설이 중단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을 누가 지겠소?》
혜경은 가뜩이나 일이 뜻대로 되여주지 않아서 속상한데 부국장까지 걸핏 하면 신심이 없는 말을 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알수 없었다. 정말 이러다간 발전소건설에 지장을 주게 되진 않을가? 손맥이 탁 풀린 그가 머리수건도 벗지 못하고 나른히 앉아있는 모양을 한참이나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던 림신애의 눈에도 어느새 눈물이 감돌고있었다.
《부국장동문 왜 그렇게도
《됐소. 그만하기요. 내가 또 괜한 소릴 한것 같소. 이제 동무보구 물러서라면 호락호락 물러서겠소?》
부국장은 림신애의 가시돋힌 말을 얼른 막아버리고 나서 김중범에 대한 불만을 한바탕 터뜨렸다.
《그런데 중범령감은 왜 떠난지 한주일이 되도록 아직도 나타나지 않소?》
《하루이틀사이에 오겠지요.》
《오기야 하겠지. 제기랄, 별 령감태기가 다 따라와가지구 애먹이누만.》
부국장은 후끈 단김에 김중범이가 이전에 시행정위원회
혜경은 자기도 강계를 떠나기 앞서 부국장처럼 김중범아바이를 왜 김철에 보내는가고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