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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의 대지를 찾아
 

 

석윤기(작가)

 

                      • 1929년 10월 22일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출생.

                      • 조국해방전쟁시기 의용군으로 입대.

                      • 1961년부터 현역작가로 활동.

                      • 1982년부터 4. 15문학창작단 단장, 그후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겸임.

                      • 1989년 4월 28일 사망.

                      •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민족분렬의 비극을 안고 조국의 통일을 그리며 살던 작가 석윤기는 림종을 앞두고 아들 석남진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통일이 되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꼭 찾아뵈워라. 지금 살아있으면 할아버지는 89살, 할머니는 79살 됐을거야. 네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술을 부어드려라.

내가 집을 떠난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나를 위해 숱한 속을 썩였는데 난 한번도 효도를 하지 못했다.

나의 이 심정을 그대로 전해다오.

민족은 하나라는것이 분렬된 조국에서 사는 우리 작가들이 작품에 담아야 할 중요한 주제이다.

남진아, 통일을 위해 민족을 불러일으키는 좋은 글을 많이 쓰거라.》

인간이 생의 마감에 남긴 유언에는 그가 한생을 두고 품고있던 모든 소원이 담기고 그가 일생동안 닦아온 인격의 진모가 비낀다고 하였다.

남녘땅에 계시는 부모의 슬하를 떠나 근 40년, 가슴속에 오로지 조국통일의 일념을 안고 창작의 붓대를 벼려온 작가 석윤기는 자식들의 이름도 해를 따라 간절해지는 통일의 념원을 담아 남주, 남진, 남연이라고 달면서 애타게 그리던 통일의 그날을 끝내 보지 못하고 우리곁을 떠나갔다.

그의 생애는 사회주의품속에서 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서 빛났다고 할수 있다.

영예의 김일성훈장수훈자, 김일성상계관인, 로력영웅, 4. 15문학창작단 단장으로서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한없이 따사로운 사랑속에 받을수 있는 모든 믿음과 표창을 다 받아안고 영생의 길을 간 그의 생은 참으로 부러운것이였다.

그러나 그는 정말 행복하기만 했던가.

그는 한 인간이 누릴수 있는 모든 영광과 행복을 다 누렸지만 분렬된 조국에 사는 한 지성인으로서 인간이 겪을수 있는 고통과 불행의 눈물을 다 쏟아놓으며 살아온 사람이였다. 어떻게 되여 그는 이 운명의 제비표를 골라잡았는가. …

 

 

《회고와 신념》의 세계

 

소설가 석윤기의 고향은 락동강류역인 경상북도 달성군 동천면 불로동이다. 그는 여기에서 1929년에 가난한 농가의 맏아들로 출생하였다.

첫 자식이 아들일 때 가정은 끝없는 기쁨과 웃음으로 밝아지는 법이건만 석윤기의 출생은 오히려 집안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연약하고 가난에 쪼들릴대로 쪼들린 어머니는 아들을 먹여살릴 길이 막막하여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며 소리없이 울군 하였다.

하지만 그는 가난이 그대로 식량이 되였는지 병을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났고 다섯살때는 어른들 틈에 끼워 서당공부를 하면서 무척 짧은 기간에 《천자문》을 떼여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이것이 가난한 집에서는 너무도 큰 기쁨이여서 그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목마태우고 동네방네를 다니며 자랑을 하였다.

하루는 동구앞 락동강가의 나루터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목마를 타고 나온 5살난 그를 내리워 《천자문》을 외워보라고 요청했다.

그는 강뚝의 새파란 잔디밭에 무릎을 꿇고앉아 앞뒤로 몸을 약간씩 흔들며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천자문》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하늘천, 따지, 감을현, 누를황…》

그 모양이 하도 기막히고 신기해서 눈을 껌벅이며 바라보던 땅꼬바지를 입은 안경쟁이가 어린것에게 만년필을 꺼내주면서 자기가 읊는 한자구를 써보라고 하였다.

안경쟁이는 제법 운까지 붙여가면서 《한래서왕이요, 추수동장하리라.》 하고 호기있게 뽑는것이였다.

모여있던 어른들은 《저렇게 어린것한테 너무 과하구만.》 하고 안경쟁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호기심이 동하여 만년필을 가누어쥔 어린 석윤기를 바라보았다.

어린것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이 없이 입을 옥물고 눈을 깜빡이며 잠간 생각하더니 힘있게 만년필을 놀리였다.

《寒來暑往, 秋收冬藏》(한래서왕, 추수동장)이라는 8개 한자로 4언절구를 써놓는것이였다.

글씨는 조금도 서툰감이 없이 몹시도 방정하였고 필순이 정확했을뿐아니라 획과 획의 맞물림이 여물어 아주 기백이 약동하였다.

어른들은 너무도 희한하여 입들을 다물지 못하고 감탄하였는데 특히 글을 쓰라고 하던 그 안경쟁이는 두눈이 뒤집힐듯 휘둥그래졌다.

잠시후 그 사나이는 그 뜻이 무엇인가고 묻는것이였다.

어린것은 꿇어앉은 자세를 꼿꼿이 펴고 챙챙한 목소리로 당돌하게 《예, 추위가 오면 더위는 물러가기마련이고 가을에는 거두어들이고 겨울에는 깊이 건사한다는 뜻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어이쿠, 이녀석 놀라운걸, 너 분명 아이가 맞느냐?》

사나이는 어린것을 덥석 그러안기까지 하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사람들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이 마을에 신동이 났구나. 경사로다!》

이처럼 석윤기는 어렸을 때부터 다문박식한 인재로 될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있었다.

그러나 험악한 세월은 어린 그의 모든것을 여지없이 짓뭉개버리였다.

1938년 장마로 락동강이 범람하여 얼마 안되는 소작지를 묻어버리는 바람에 농사를 망쳐버린 그의 일가는 살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였다.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진눈까비 내리는 두만강을 건너선 그는 목단강에서 안타까이 찾던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가까스로 중국소학교에 2년간 다니였는데 그는 이 기간에 이 지역에 주둔하고있던 관동군 6군관구 헌병대놈들의 주민학살만행을 목격하면서 치를 떨었다.

그곳에서도 살길이 막힌 석윤기의 일가는 다시금 고향으로 돌아와 그 원한서린 소작살이를 다시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1942년 석윤기는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친척들의 피어린 후원으로 대구시 대륜중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는데 인차 수재학생으로 공인되였고 학생회장으로까지 선출되였다. 이때 그는 학교당국이 강요하는 단체복착용을 반대하는 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석윤기는 16살 되는 해에 조국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는 일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기쁨과 격정에 넘쳐 동무들과 함께 태양의 열로 뜨겁게 달아오른 8월의 대지를 힘차게 구르며 목청껏 부르짖었다.

《아, 해방이다! 우리 세상이 왔다!》

열혈청춘이였던 석윤기는 자유와 해방이 도래한 현실에서 벅찬 감격을 체험하면서 자기의 앞날에 펼쳐진 새로운 대지를 보는것만 같았다.

정의롭고 자유롭고 더없이 아름다와보이는 그 대지를 향해 새 삶의 배가 출항하였다는 환희에 그의 가슴은 못견디게 부풀어올랐다.

작가는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담아 시 《출항》을 써서 발표하였다.

이때를 회상하여 석윤기는 자기의 수필 《회고와 신념》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

《…민족재생의 태양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그처럼 어마어마하게 보이던 일제를 쳐물리치시고 조국을 해방해주시였다. …

나는 시를 썼다.

철부지 내 눈앞에는 찬란한 해빛아래 푸른 바다가 누워있었다. 사랑하는 조국은 창창한 항로를 앞둔 아름다운 배였다. 갈매기는 날고 물이랑은 끝없이 설레이는데 우렁찬 배고동소리가 울린다. … 그리하여 그 시의 이름은 〈출항〉이였다.》

하지만 작가는 이 세상에 보내는 청춘의 그 첫 속삭임으로 하여 상상할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제를 대신하여 기여든 미제침략자들과 그 하수인이 된 민족반역의 무리들은 그를 공산사상을 퍼뜨린 《빨갱이시인》으로 몰아 경찰서감방으로 끌고가 무지하게 매질하였다.

그는 푸른 꿈을 안고 희망의 바다로 《출항》한 이 시작품 한편때문에 갈비 석대를 바쳐야 하는 무서운 참변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던것이다. 반주검이 되여 들것에 실려나오던 날 그립고그리워 두번씩이나 찾아떠났던 평양의 하늘을 우러르며 부러진 갈비뼈밑에서 약동하는 심장에 불같은 결심을 새겨넣었다.

(내가 갈 곳은 평양이다. 거기에 청춘의 푸른 꿈도 꽃피우고 인간답게 살수 있는 모든것이 있다.

만고의 영웅, 절세의 애국자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 펼쳐가시는 저 민주의 대지야말로 내가 찾고 뿌리내려야 할 운명의 땅이 아닌가!)

그의 이 결심은 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대가 서울을 해방하였을 때에야 실천으로 옮겨지게 되였다.

석윤기는 용약 정의의 총을 메고 북으로 가는 길-침략자 섬멸의 결전장으로 주저없이 뛰여들었던것이다.

석윤기는 수필 《회고와 신념》에서 다 피력하지 못했던 그 심정을 그후에 쓴 자기의 창작수기에서 펼쳐보이면서 자기가 선택한 그 길에 어떤 영광스러운 삶이 약속되여있었는지 그때는 알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위대한 수령님의 다심한 믿음과 사랑속에 작가로 자라나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의 세심한 보살피심과 이끄심을 받아 영광의 단상에 오른 자기의 오늘에 대하여 자자구구 새기였다.

만약 그가 북으로의 그 길이 힘들다고 다른 길을 걸었더라면 그 영광과 행복의 절정에 서지 못하였을것이다.

그러고보면 그가 남조선에서 단행한 첫 《출항》은 끝끝내 진리의 대지를 찾았고 그 기슭에 닻을 내린것이였다.

하지만 작가로서 우리 인민들과 민족성원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까지는 순탄치 않은 의지의 행군길이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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