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9 회)
5
(2)
허진규가 얼굴이 시뻘개서 재차 일어났다.
《물론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당장 식량문제가 걸려있는데 너무 정치적인 고려만을 앞세우지 말았으면 합니다. 벌둥섬의
공동시장은 밑천이 드는 일도 아닙니다. 별로 쓸모없는 빈 땅뙈기만 제공하면 래일이라도 당장 식량이 들어올수 있는데 큰 마음을 먹고 해봅시다.
우린 정무원 대외봉사총국과도 합의를 봤습니다. 뭐니뭐니해도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제하고
《집요하오!》
태혁의 무서운 기상에 압도된 허진규는 시선을 떨구었다. 태혁은 안경을 추슬러올리며 연신 두눈을 끔벅이였다. 옆의 문성태비서도 리성하도 긴장해서 장내를 묵묵히 굽어보았다. 제자리에 앉은 허진규는 반외투주머니안에 손을 넣었다 뺐다 했다. 회의장이라는것을 잊고 성급히 담배를 찾는 거동이였다. 오늘은 그도 보통 흥분된 사람 같지 않았다. 장관우는 태혁에 대한 불만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르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태혁이가 성이 나서 큰소리를 치지만 무슨 방도가 있는가? 회의장을 요란히 흔들며 태혁의 웅글진 목소리만이 여전히 그의 뒤통수를 후려치듯이 거세게 울렸다.
《나도 당장은 어떻게 식량문제를 풀수 있겠는지 몰라서 답답한 마음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벌둥섬의 공동시장문제를 반대하는건
태혁의 불같은 열변에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벌거우리해진 얼굴을 숙이고 잠자코 앉아있었다. 장관우는 마침 자리에서 엉거주춤히 일어나는 도림업국장을 랭담한 눈길로 지켜보았다.
《도당책임비서동무의 말에 저도 전적인 동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랜 류벌공출신인 림업국장은 구부정한 자세로 앞의자의 등받이를 눌러잡고 느릿느릿 말했다.
《나라의 정세도 복잡한데 공동시장이요 뭐요 할게 있습니까? 그럴것 없이 우리한테 흔한 원목수출을 허락받아서 서너달 바쁜 고비를 넘기는것이 좋겠습니다.》
림업국장이 텁텁하게 말하고 앉자 장내는 웅성거리였다. 이때까지 론의된중에서 그의 제안이 제일 현실성이 있다고 긍정하는 사람들과 십중팔구 가망이 없다는 사람들사이의 견해상 차이로 잠시 구구하게 공론이 벌어질 때였다.
《림업국장동무! 그것도 말이라고 하오?》
회의도중 단 한마디 말도 없던 리성하의 엄한 질책에 모두들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는 의자등받이에 몸을 제끼고 제빠듬히 앉아서 림업국장을 마뜩지 않게 흘겨보았다.
리성하는 큰소리로 헛기침을 깇고 손수건을 꺼내여 입가를 문질렀다. 회의참가자들은 숨을 죽이고 리성하의 성난 얼굴을 긴장히 지켜보았다. 그가 이전에 자강도의 발전소건설련합기업소 지배인으로 일한 일군이지만 그동안 오랜 세월이 흐르다보니 거의나 그때의 리성하에 대해서
알고있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현재의 리성하, 전력공업부문의 실력자인 리성하를 어렵게 대하군 했는데 오늘 그의 체모에 어울리는 위엄찬 말을
듣고 어지간히 놀란 기색들이였다.
《동무들, 방금
장내는 갑자기 얼어붙은듯 조용해졌다.
《오늘 협의회에서 여러가지 심중한 문제들이 론의되였는데
얼마후 문성태비서가 회의를 중단하고 떠나기 앞서 리성하부부장이 여유작작한 거동으로 장관우를 찾아왔다.
《부위원장동무, 일이 뜻대로 되여가는것 같소. 난 이미 문성태비서와 만났는데 우리의 주장이
《그거야 책임비서동무가 아무 소리없이 침묵을 지키지 않았소?》
장관우의 눈빛이 별안간 날카로와졌다. 리성하와 견해를 같이하면서도 생사람을 해치는 너절한 일에는 애당초 나서지 않으려는 태도였다.
《내 그래서 하는 말이요. 벌둥섬문제가 나오자 책상을 치면서 초당적으로 피대를 돋구던 사람이 일언반구도 없었다는게 이상하지 않소?
《알만 하오. 이제 곧 만나겠소.》
장관우는 문성태한테로 찾아가면서 혼자 생각했다. 태혁이가 원목수출문제를
6
《앉소. 앉아서 구체적으로 말하시오.》
압록강의 벌둥섬에 공동시장을 운영하는 문제며 원목수출… 한개 도의 책임일군들에게 부여된 권한으로써는 도저히 결론할수 없는 문제들이였다. 협의회가 중단된 리유도 다른데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태혁동문 벌둥섬의 공동시장문제를 승인하지 않았단 말이지요?》
《예. 태혁동무도 돈을 벌자면 욕심이 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벌둥섬의 공동시장을 허용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시장경제에 휩쓸려들어간다고 하면서 단호히 반대했습니다.》
《벌둥섬의 공동시장문제를 들고나온 사람들의 주장은 뭡니까?》
《당장 도안의 인민들을 먹여살릴 다른 방도가 없다는것입니다. 그들은 통털어 열정보도 되나마나한 빈 뙈기섬을 리용해 굶주림에 쓰러지는 사람들을 구원하자는것이고 회의에서 론의된 원목수출에 비하면 큰 문제로 될수 없다는것입니다. 태혁동문 그 말에 성을 내며 왜 그것이 빈 땅이겠는가. 벌둥섬도 선렬들의 피가 스며있는 조국땅의 한부분이다라고 꾹 눌러버렸습니다.》
장마철이면 사품쳐흐르는 탕수에 위태롭게 잠겨버릴듯 하는 압록강의 자그마한 무인섬… 만포시에서 초간히 떨어진 미타마을앞에 나서면 물가운데 도두룩이 떠있는 그 외진 섬이 선명하게 내려다보인다. 몇해전에 미타농장사람들이 수수천년 버림을 받아온 섬을 개간하여 다소 번해졌으나 예전에는 키낮은 개버들과 잡초들이 엉클어져 물새들만이 찾아들던 땅뙈기였다.
태혁의 아버지 강희준은 일제때 왕청에 들어가 홍범도독립군에 가담하여 용맹하게 싸운 할아버지를 연줄로 석현 모나니의 오태희일가와
무척 친밀하게 지냈다. 오태희로인도 반일감정이 높고 의협심이 강한 할아버지와 친교를 맺고 강씨가정의 식솔들을 제 혈육처럼 돌봐주었다.
대끝에서 대순이 돋아난다고 독립군출신인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강희준은 룡정중학교에 입학하여 열심히 도를 닦는다 했더니 얼마 못가
학생데모에 참가한 죄명으로 중도에서 퇴학을 당했다. 워낙 남아다운 기질에 성격이 락천적인 강희준은 그후에도 실망한 기색이 없이 구차한 집안의
농사일을 도우면서 지냈다. 그가 밤이면 구슬프게 퉁소를 불며 고국을 멀리 두고 타향살이설음에 잠 못드는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군 한 속내는
누구도 알길이 없었다. 그 퉁소를 잘 부는 청년으로 유명짜하게 소문난 강희준이 예쁜 안해를 집에 두고 오태희로인네 끌끌한 젊은이들과 섭쓸려
직업적인
그 아들이 공작임무를 수행하고 돌아가던 길에 국경수비대의 추격에 걸려들어 근 한달동안이나 초근목피로 창자를 채우며 피신한 곳이 바로 압록강의 벌둥섬이였다.
《그게 빈땅이란 말이지.》
《벌둥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준은 그 이듬해 왕청지구의 지하조직을 확대강화할 임무를 받고 활동하다가 석현마을에서 놈들한테 체포되여 화형당하였소. 놈들은 그를 중국사람이 살던 빈 집에 가둬놓고 불을 질렀소. 태혁동무의 할아버지가 아들의 유해라도 찾아오려고 석현마을로 갔지만 악착한 놈들은 가야허의 강물속에 처넣었지. 그후 강희준이 불타죽은 집터에 봉분이 생겼소. 불에 거멓게 그슬린 흙무지였소. 태혁동무의 할아버지가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할수 있었던 일이였소. 난 몇해전 태혁동무의 어머니가 돌아갔을 때 태혁동무를 불러 아버지의 묘가 있는 왕청으로 떠나라고 했소. 두분을 합장해드릴 마음이였소. 살아있을 때 생리별한 그들을 죽어서라도 함께 있게 해주고싶었소.》
차마 뒤말을 잇지 못하시는
《그건 무슨 말이요?》
《아버지의 묘에는 유해가 없습니다. 빈 흙무지… 입니다.》
태혁이가 웅크리고 서서 손등으로 젖은 얼굴을 훔쳤다.
《아니요!》
방안을 쩡 울리는
《동무의 아버지가 그 자리에서
태혁의 두눈에서는 비오듯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이미 오래전에 아들의 기억속에서도 삭막해져버린 아버지의 묘, 그 빈 흙무지의 한줌 흙을
위해 조국땅에서 직승기까지 띄우시겠다니 태혁은 방바닥에 풀썩 꿇어앉았다. 자기가
문성태는 눈물이 글썽하여 자리에서 정중히 일어났다.
《음… 그 동무들이 원목수출문제를 토론했다는데… 태혁동문 어떤 립장입니까?》
《태혁동문 침묵을 지켰습니다. 도림업국장동무가 원목수출문제를 들고나왔으나 리성하부부장이 호되게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생각할만 한 리유가 있지 않았겠소?》
《그 리유란 다른게 아닙니다. 벌둥섬공동시장을 완강히 반대한 태혁동무가 원목수출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것인데 근거가 명확치 않았습니다. 태혁동무도 감히 원목수출문제를 제기할수 없는데 말입니다.》
7
(1)
다른 출로가 없다. 오로지 자강도에 흔한 통나무수출만이 지금의 식량위기에서 사람들을 구원할수 있는 가장 적합한 방안이다. 그런데 왜 문성태비서가 평양으로 올라갈 때 명확한 견해표명을 못했던가?… 방금 림업총국 국장과 만나 도안의 림지들을 료해하고 돌아온 태혁은 자기의 보신적인 태도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하는것 같은 가책으로 한시도 의자에 앉지 못하고 불안에 싸여 방안을 오락가락했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자강도에서는 원목밖에 나올것이 있는가. 지금은 변강무역으로 수입하는 식량도 거의나 없다. 그렇다고 벌둥섬의 공동시장을 운영하겠는가?… 벌써 몇십번이나 두통이 일게 떠오른 생각을 되씹던 태혁은 수화기를 들고 도재판소 소장에게 물었다.
《소장동무, 원목을 한 5만립방 팔면 말이요. 내가 몇년을 먹소?》
《징역말인가요?》
《그래.》
《허참…》
재판소장이 그만 어처구니없어 허허 웃었다.
《왜 웃소?》
《그렇잖아도 책임비서동지가 원목수출을 들고나올거라구 합디다.》
《그건 누가 벌써 동무한테 고해바쳤소.》
태혁의 말속에는 조금도 롱이 섞여있지 않았다.
《누군 누구겠습니까. 도행정위원회 부위원장이였지요. 장관우부위원장은 책임비서동지가 도내인민들의 식량문제때문에 고심이 많지만 우둔하게 원목수출을 꿈꿀줄은 차마 몰랐다구 하면서 밤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장관우가 그만큼이라도 생각해준다니 태혁은 코마루가 찡해났으나 자기의 감정을 억누르며 퉁명스레 물었다.
《됐소. 그만하고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보오.》
《이거 정말 진땀이 나누만요. 글쎄 책임비서동지가
태혁은 재판소장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수화기를 덜컥 놓고 불시에 왼켠 가슴을 꽉 움켜잡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심한 신경과민과 육체의 과로로 갑자기 심장이 후두둑 뛰다말고 칼끝으로 찌르는것처럼 쑤셔대기 시작했다. 근래에 와서 처음인 발작적인 동통이였다. 뒤이어 혼미해져가는 의식속에 다른 한손으로 책상모서리를 으스러지게 눌러잡았다. 모진 아픔을 참느라 이마에 내돋은 땀방울이 미끄러져내리며 안경을 적시였다. 때마침 방안으로 찾아들어온 량정국장이 달려와 헤덤비면서 물었다.
《책임비서동지, 왜 이럽니까?》
《아니… 아무렇지도 않소.》
태혁은 다소 가슴이 진정되자 손수건을 꺼내여 안경을 닦았다. 량정국장이 땀에 젖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죄진 사람처럼 서있었다. 엊그제 협의회에서 퇴장당한 후 처음 만나보는 일군이였다. 량정국장도 그사이 무척 고민했다는것이 첫눈에 제꺽 알리였다.
《무슨 일로 왔소?…》
《전 자격이 없습니다.》
량정국장은 사직서를 책상우에 내놓았다. 태혁은 그를 무표정히 바라보았다.
《이건 뭐요?》
량정국장이 컴컴한 낯빛으로 겨우 입을 열었다.
《전 책임비서동지가
량정국장은 고개를 푹 떨구고 자기의 지난 생활을 뉘우쳤다. 태혁은 책상우에 팔굽을 짚고 앉아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니 동문 원목수출에 동감이라는거요?》
《다른 방도가 없잖습니까.》
태혁은 여전히 자기 반성에 잠겨있는 량정국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나서 책상우에 눈길을 떨구었다.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일이라며 걱정하는 장관우나 재판소장의 말보다는 결함을 범한 사람이지만 량정국장의 진심이 훨씬 더 가슴을 쳤다.
《옳소. 그런데 우린 아직 원목수출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지 못하고있소. 장관우부위원장만 지지하면 이제라도
《알겠습니다.》
그때 방에서 나가던 량정국장이 흠칠 놀라며 돌아다봤다.
책상우의 전화기가 요란히 울리고 수화기를 든 태혁이가 큰소리를 질렀다.
《뭐, 편직공장지배인이 어떻게 됐다구?》
《만포에서 식량을 싣고 령을 넘어오다가 화물자동차와 함께 굴었습니다.》
수화기에서 울려나오는 끔찍한 소식을 듣고 눈앞이 아뜩해진 태혁은 재차 다급히 물었다.
《사람은 다치지 않았소? 왜 말이 없소?》
《자동차가 뒤집혔는데 사람이 성할리 있습니까. 다행이 생명의 위험은 면했는데 전혀 운신을 못합니다.》
《빨리 병원에 싣고와서 구급대책을 취하시오.》
《챠, 그런데 이거 정말 죽여줍니다. 편직지배인이 사고현장에 실성한 녀인처럼 웅크리고앉아서 말을 들어줘야지요.》
《무슨 소릴 하오. 당장 병원으로 호송하시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