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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회

서  장

 

376년 10월의 어느날 밤.

밤늦도록 내리는 비, 소나무 무성한 수림앞으로 자그마한 개울이 불어나 사품치며 흐르는데 목책을 둘러친 숲속공지에 흠씬 젖은 장막들이 비좁게 자리잡은 군영이 있었다.

차거운 진창에 발을 묻고 서있는 파수병의 손에 들린 방패가 먹장구름속에서 간신히 새여나오는 희미한 달빛에 번들거렸다.

장막들앞에 여기저기 무져놓은 무기들사이를 절컥거리며 돌고있는 파수병들이 음산한 어둠속을 날카롭게 휘둘러보고있었다.

이때 숲속공지에서 갑자기 가벼운 설레임이 일어났다.

차츰 가깝게 들려오는 말발굽소리를 가려들은 파수병들이 창검을 부딪치며 군영문을 향해 부산스럽게 달려갔다.

여라문명의 기마수가 어둠속에서 불쑥 자태를 드러내며 튀여나왔다.

먼길을 달려온듯 홰불빛에 드러난 말들의 몸뚱아리에서는 뜬김이 물씬 피여올랐다.

기마수들이 군영문을 그냥 말을 탄채 지나치려고 하자 당황한 파수병들이 창검을 삼엄하게 겨누며 앞을 막아섰다.

련락을 받고 뛰여온 파수장이 서렬을 헤치고나와 홰불을 높이 추켜들고 아직도 말에서 내리지 않고 버티고있는 그들의 얼굴들을 하나하나 비추어보았다.

아무리 봐야 전혀 생소한 얼굴들이라 파수장은 머리를 기웃거렸다.

《여긴 고구려군 군영인데 어디서들 오시나이까?》

파수장의 물음에 기마수들중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중년의 사나이가 맞갖지 않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국내성에서 조정의 령을 받고 내려오는 길이다.》

파수장은 조정에서 내려왔다는 말에 기가 질린듯 헛기침을 깇었다.

그래도 군영의 영문을 지키는 파수장이라 순순히 물러서지 않고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군령이 없이는 함부로 외인을 군영에 출입시킬수 없소이다. 조금 기다려주시오이다.》

우두머리사나이는 분노한듯 말을 내몰아 파수장에게 다가와 왼손으로 그의 어깨를 끌어당기며 오른손으로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 꺼내여 보여주었다. 그것은 높은 급의 무관들만 차고다니는 금패였다.

파수장은 무척 놀란듯 두눈이 휘둥그래가지고 그를 정신없이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젠 알겠는가? 어서 유주자사에게 안내하게.…》

파수장은 상대가 이렇게 호령해서야 펄쩍 정신을 차리고 자기가 직접 조정에서 내려왔다는 그들을 유주자사 진의 장막으로 안내하였다.

그들은 군영을 가로질러 맨 웃쪽에 위치한 제일 큰 장막앞에 잠시 머물렀다.

파수장이 장막호위장수에게 무어라고 속삭이자 호위장수는 들어가도 좋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였다.

조정에서 내려왔다는 사나이들이 일제히 말에서 내려서자 장막호위장수가 급히 한손을 쳐들며 우두머리사나이의 앞을 막아섰다.

《진자사님의 장막이오이다. 다른 사람들은 밖에 대기시켜주시오이다.》

우두머리사나이는 장막호위장수의 요구에 응하여 다른 사람들은 떨구어두고 가까운 심복인듯싶은 우람한 체격의 젊은 사람 하나만을 데리고 허리를 굽히면서 열려진 문안으로 들어갔다.

장막안은 화토불을 피워놓아서인지 몹시 훈훈했다.

화토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방금 장막안에 들어선 사나이들의 얼굴을 비쳐주었다.

나이는 40대 후반기에 이른 중년의 사나이, 구레나룻을 보기좋게 기르고 두눈이 부리부리한것이 매우 서글서글한 인상이였다.

뒤에 따라선 사람은 왼쪽볼에 유표하게 나있는 칼자리로 하여 얼굴 전체가 몹시 차겁게만 보이는 서른살가량의 젊은 얼굴이였다.

장막안에서 지휘탁을 마주하고있던 세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운데 서있던 사람이 지휘탁을 에돌아 마주나왔다.

얼굴은 전장에서 항시적으로 말을 타고 달리는 장수답게 볕에 거무스레하게 그슬렸으며 눈언저리는 매의 두눈을 련상케 하듯 몹시 날카롭게만 보였다.

그가 바로 유주자사 진이였다.

그의 량옆에 있는 두사람은 진의 충실한 심복들로 한명은 유주의 주소재지인 연군의 태수 자형이요, 다른 한명은 범양군의 내사(벼슬이름-태수의 보좌관격) 위문이였다.

범양내사 위문은 고구려사람이 아니라 한인이였는데 어려서 모용선비족에 붙잡혀 노예로 팔려다니다가 진의 손에 구원되여 고구려로 귀화한 사람이였다.

고구려의 유주는 모두 해서 13개 군이니 태수가 13명에 또한 고구려의 최전방이라 군정, 민정을 보는자가 다해서 도합 70여명에 달했다.

지금 북방으로 쫓겨갔던 모용선비족의 잔당들이 유주에 침입하여 파괴와 살륙을 벌리기때문에 유주자사 진이 직접 연군과 범양군의 무력을 이끌고 토포하는중이였던것이다.

진은 조정에서 내려왔다는 사람들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내가 유주자사 진이요. 무슨 일로 날 찾는것이요?》

이렇게 말을 붙이며 상대에게 다가서던 진이 그만 아연하여 굳어져버렸다. 그의 입에서 경악에 가까운 비명이 터져나왔다.

《영무장군, 살아계셨소?! 모두들 장군이 치양격전때 전사하였다고들 하였는데…》

《이게 얼마만인가. 우리가 서로 헤여진지도 어언 십여년의 세월이 흘렀군.… 그렇네. 자네 말대로 난 한번 죽었다가 살아난 몸일세.》

영무는 괴로운 회상에서 벗어나려는듯 손으로 얼굴을 쓸며 대답했다.

진이 옛지기의 얼굴을 이렇게 마주하는것이 꿈이 아닌가싶어 한마디 말도 못하고 정신없이 쳐다보기만 하는데 영무가 정색한 얼굴로 좌중을 한번 날카롭게 둘러보더니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수하들을 물리여주게. 자네에게 조용히 할말이 있으니까…》

진은 영문을 몰라하는 부하들에게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장막안에는 진과 영무 그리고 영무의 심복부하만이 남았다.

진과 영무는 마치 서로가 전혀 생면부지인듯 뚫어지게 한동안 마주 바라보고만 있었다.

마침내 영무가 먼저 무거운 침묵을 깨며 허리춤에서 금패를 꺼내들었다. 좀전에 군영에 들어올 때 파수장에게 보여주었던 그 금패였다.

얼결에 금패를 넘겨받아 유심히 들여다보던 진은 다시한번 놀랐다.

《이것은 왕당주의 금패가 아니오이까?》

고구려사람들이 수호신으로 여기는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의 사신이 새겨져있는 금패-이것은 오직 하늘아래 고구려의 태왕과 태왕의 신변을 지키는 왕당주만이 차고다닐수 있었던것이기때문에 유주자사 진이 놀라는것은 무리가 아닌것이였다.

진의 손에서 금패를 돌려받은 영무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이젠 알만 한가. 나는 왕당주가 되였네.》

《페하의 곁을 지켜드려야 할 왕당주께서 어찌 천리변방까지 내려오셨소이까?》

《그것은 자네가 조정의 명령을 두번씩이나 거역하였기에 그 의도를 묻기 위해서라네.…》

영무의 대답을 들은 진은 처음과는 달리 평온해진 얼굴을 들었다.

《그럼 장군은 조정의 철군명령을 받들지 않았다고 그 죄책을 묻기 위해 여기까지 천리먼길을 온것이오이까?》

《그렇네. 자네의 의도는 무엇인가?》

진은 장막안을 천천히 거닐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조정에서 저렇게 왕당주까지 비밀리에 파견한것을 보면 자기가 처한 상황이 보통 심각하지 않은것이였다.

과연 내 판단이 옳지 않았단 말인가.

어떻게 해서든 유주를 보존해야 한다고 여러번 상주문을 올린 나의 처사가 잘못이란 말인가.

유주는 하북의 머리부분이요, 대륙으로 통한 입구였다.

유주를 손에 넣으면 하북땅을 통제할수 있고 고구려가 되찾은 료서땅을 믿음직하게 지켜낼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고구려는 엄혹한 시련의 시기를 겪고있었다.

나라의 남쪽에서 급속히 강한 세력으로 자란 백제가 가야를 손아래에 끌어들인 다음 신라를 내리누르고 고구려에 반기를 들었던것이다.

369년 치양에서의 대격전때 수만의 고구려군을 일거에 격파한 백제는 한수(한강)남쪽에서 열병식을 벌려 군력을 과시하였으며 누런 천자의 기발까지 들어 천하에 백제가 황제의 나라임을 공포하는데까지 이르렀던것이다.

이것으로 백제는 고구려의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나 고구려와 대등한 대국임을 과시한것이였다.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백제-가야, 신라가 조공국으로 지내던 삼국관계가 이것으로 막을 내리게 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정벌이 예상되자 곧 나라의 국력을 총동원하여 전면전으로 진입했다.

370년, 고구려는 백제와의 전쟁의 소용돌이속에서도 병력을 북방전선에 집중시켜 유주까지 진출했다.

백제는 혼란된 대륙의 정세를 리용하여 료서의 일부 지방을 타고앉았고 그 남쪽의 제(산동지방)에까지 세력을 펼치고 바다를 통해 수만의 군대와 백성을 이주시켰다.

이것이 바로 백제의 비래지인 백제군인것이였다.

백제가 대륙에로 진출한것은 령토팽창에 대한 야망뿐아니라 여기에 든든히 발을 붙이고 고구려를 앞뒤로 견제하려는것이였다.

백제는 371년 수만의 정예병을 일으켜 고구려를 기습공격하여 남평양성(오늘의 황해남도 신원군일대)에서 고구려군을 밀어버렸다.

이 격전에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에 맞고 전사하였다.

이렇듯 불의의 기습공격으로 크게 숭전한 백제는 수도를 북한성(한산성)으로 옮기고 적극적인 공격전에 매달렸다.

동족의 국가인 고구려와 백제는 일진일퇴의 대격전을 벌리며 천하의 패권을 다투고있었다.

고구려는 앞뒤로 곤경을 겪게 되였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전전선에 걸쳐 공격해왔는데 북방에서도 여러 이민족들이 수시로 지경을 넘어들어오고있었다.

유주에 진출하여 전선이 비할바없이 넓어져 이것을 막아내기에도 힘이 부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멸망한 연의 잔여세력이 유주에 침입하였고 또 진나라는 맹약을 저버리고 유주를 타고앉을 기회만을 노리고있었다.

진나라왕 부견의 동생 부염이 유주지경밖에 수만의 무력을 배치하여 고구려를 위협하고있었다.

마침내 고구려조정에서는 오랜 론의끝에 유주의 주둔군을 모두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유주자사 진은 조정의 결정을 맹목적으로 따를수 없었다.

아직까지 고구려사람들의 숙원인 옛 조선의 땅을 모두 수복하는 성업을 이루지도 못하고 더우기는 위험한 침략세력이 존재하는 형편에서 서북방의 중요거점인 유주를 비워둘수 없다고 생각한것이였다.

지형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에 위치하고있는 유주를 내놓으면 앞으로 이곳을 거점으로 어떤 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지 모를 일이였기에 두차례나 걸친 조정의 철수명령을 진은 집행할수 없었던것이다.

유주의 여러 군, 현을 진나라에 떼여주는 대가로 그 방위를 진나라 군대에 맡기고 여기에 주둔하고있는 수만의 고구려군가운데서 치안을 위한 약간의 병력만 떼여두고 나머지는 전부 철수시킨다는 조정의 결정은 실로 어처구니없는것이였다.

유주자사 진이 한사코 이 명령을 집행하지 않자 온 국내성이 벌둥지처럼 법석 끓었다.

여기에 붙는 불에 키질하듯 투서사건이라는것이 터졌다.

투서라는것은 순전히 진을 모해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여있었는데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진이 수만의 유주주둔군으로 고구려조정을 뒤집어엎을 반역을 꾀하고있다는것이였다.

진의 병권을 빼앗고 그를 한시바삐 소환해야 한다고 조정대신들과 5부의 귀족들이 들고일어났다.

하여 조정에서는 비밀리에 왕당주인 영무를 유주에 파견하여 자세한 내막을 조사해보고 진을 소환하기로 결정하였던것이다.

영무는 초조한 심정으로 진을 건너다보고있었다.

그는 이제라도 진이 자기의 주장을 굽히고 조정의 결정을 따라주길 간절히 바랐다. 영무는 진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이전 태왕인 고국원왕시기부터 군직에서 오래동안 같이 종사해왔으며 여러번 전장에 나가 어깨를 겯고 함께 싸우며 생사를 같이한 지기였다.

진과 영무 그리고 지금 국상으로 있는 연구흠 이 세사람은 한날한시각에 왕당에 들어간 절친한 벗들이였다.

왕당이라고 불리우는 근위대에서 함께 복무하다가 진은 서부전선으로, 영무 자기는 백제전선으로 파견되고 연구흠은 조정에 남아 서로 길이 갈라진지도 어언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영무는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진이 결코 변할 사람이 아니라는것을 굳게 믿고있었다.

조정에서는 무기명의 투서 한장을 놓고 진이 반역을 꾀한다고 론난을 벌리고있지만 영무는 애당초 그것을 믿지 않았었다.

그가 유주로 자진하여 찾아온 목적도 오랜 지기인 진을 설복하여 그의 주장을 굽히게 함으로써 조정대신들의 모든 의혹을 풀어주려는데 있었다.

물론 영무는 유주를 끝까지 지켜내려는 진의 주장과 의도가 백번 옳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고구려는 유주를 얻기 위해 너무도 많은 피를 흘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유주에만 집착할수도 없지 않는가.

유주를 진나라에 떼여주더라도 백제를 견제해야 한다는 조정의 의도도 옳았고 또 유주를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진의 주장도 옳았다.

영무는 백제와의 접경지역인 치양대격전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몸이였다.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백제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주위에는 온통 시체더미뿐이였다.

영무는 시체무지속에 파묻힌채로 10여일간이나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때 그 처참한 전장에서 살아남은것은 영무와 그의 식객무사였던 하평이 두사람뿐이였다.

그후 영무의 마음은 항상 치양대격전의 수치를 씻을 일념으로 모대기고있었다. 이러한 리유로 영무는 조정의 령대로 이번 길에 진을 설복하여 백제전선으로 유주주둔군을 돌린다면 진의 위급함을 구할수 있고 치양의 수치도 씻을수 있으리라 생각했던것이다.

장막안을 오가며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진이 고개를 돌리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 조정의 의도는 무엇이오이까?》

《유주의 중요거점들에만 약간의 수비병을 두고 병력을 모두 철수하여 남부전선에 돌리자는것일세. 말하자면 유주에서 주동적으로 철수하자는것이지.…》

진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이기 시작했다.

《유주에서 철수한다면 나라의 관문을 열어주는것과 무엇이 다르오이까?》

《진나라에 일시 양보하는것일세. 진나라와 지경을 접한 여러개의 군, 현을 넘겨주면 부염이 그것으로 만족하고 물러설것일세.…》

진은 표표한 시선으로 영무를 노려보았다.

장군, 무언가 잘못 아셨소이다. 나는 이리에게 문을 열어주는 어리석은짓을 할수가 없소이다. 내가 유주자사로 있는 한 단 한명의 군사도 철수할수 없소이다.》

영무는 아연해서 입을 벌린채로 말뚝처럼 굳어져버렸다.

한순간 그의 뇌리에는 무기명투서의 내용이 떠올랐다.

아무리 애써 부정하려고 해도 위구심이 지꿎게 갈마드는것이였다.

과연 조정대신들의 주장대로 진이 반역을 꾀한단 말인가?!

조정의 령을 한사코 반대하는 진의 진짜속심은 무엇인가?!

《여봐라, 밖에 누가 없느냐?》

진이 소리치자 연군태수 자형과 범양내사 위문이 부리나케 장막안으로 뛰여들어왔다.

진은 영무쪽에 시선을 주지도 않고 자기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조정에서 내려온 영무장군을 너희들이 지경밖까지 바래여 보내드려라.》

자형과 위문이 다가서려는데 영무가 별안간 허리춤에서 금패를 꺼내들며 소리쳤다.

《유주자사 진은 조정의 명령을 받으라. 이제부터 일체 군국대사는 내가 집행한다. 하평은 진의 검과 인장을 빼앗으라.》

하평이라는 왼쪽볼에 칼자리가 유표한 사나이가 진에게로 다가갔다.

한동안 어리둥절해 서있던 자형과 위문이 검에 손을 얹고 하평의 앞을 막아서자 진이 소리쳐 그들을 멈추어세웠다.

《무슨짓이냐? 조정에서 파한 사람들이다. 그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영무에게로 돌아서며 진이 물었다.

장군, 한가지 묻겠소이다. 이것이 과연 페하의 의도로 진행되는 일이오이까?》

영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나서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은 나를 따라주게. 이것을 거역한다면 자넬 반역자로 체포할수밖에 없구만.… 지금 페하께서는 환후중이라 조정대사는 고추대가 고부진이 실행하고있네. 자네의 머리우에 씌워진 루명을 벗자면 이 길밖에 없을걸세.》

《그럼 국상의 의도 역시 같은것이오이까?》

《진, 제발 대세에 역행하지 말게.… 국상도 자네가 루명을 벗길 간절히 바라고있네.…》

영무는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진 진의 얼굴을 계속 마주볼 용기가 나지 않아 더이상 말끝을 맺지 못하고 돌아서고말았다.

영무는 마치 무슨 큰 근심을 떠안은 사람의 질린 표정으로 무의식중에 진의 검과 인장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전장에서 어깨겯고 생사를 같이한 벗을 제 손으로 포박해야 하는 괴로움이 그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듯싶은 고통을 가져왔던것이다. 이렇게밖에는 진을 돌려세울 방도가 없단 말인가.

하지만 달리는 할수 없었다. 조정의 명령에 충실해야 하는것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사태를 수습해야 진을 《반역》 혐의에서 벗어나게 해줄수 있는것이였다.

어지러운 발자국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온 군영이 깨여나 설레이였다. 조정에서 내려온 장수에게 유주자사 진이 포박되고 병권이 그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는 소문이 벌써 군영을 휩쓸었던것이다.

태연한 순종의 빛이 스스로 포박을 지고 장막밖으로 나오는 진의 얼굴에 꺼리낌없이 자리를 잡고있었다.

영무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차라리 진의 눈이 분노의 불길로 치솟거나 증오의 섬광으로 번뜩이였다면 이렇게까지 가슴이 괴로울것 같지 않았다.

더이상 조정의 령을 거역할수 없기에 진은 모든것을 포기했다.

그는 조정내에서 자기를 두고 《반역》을 꾀한다고 말들이 많은것도, 이제는 태왕과 조정중신들의 신임을 잃어버린 자기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었다.

생사를 같이한 벗들에게서조차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독감과 외로움이 진을 감싸안았다.

장막밖에서는 밀물처럼 모여든 군사들이 웅성거리고있었다.

참담한 모습으로 포박을 지고 서있는 진의 모습은 그를 그토록 신뢰하고 따르던 군사들에게 절망감과 비애를 안겨주었다.

영무가 괴롭고 쓸쓸한 감정을 애써 눌러앉히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정의 령으로 이제부터는 내가 모든 대사를 총괄한다. 모두 짐을 싸고 집합하라. 본진에서 루락되는자가 있으면 전령을 띄워 불러올것이다.》

《지금 눈앞에 연나라의 반란군이 진을 치고있는데 대체 어디로 간단 말이오이까?》

연군태수 자형이 참지 못하고 노기가 서린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영무는 자형에게 급히 다가가 분노가 서린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이제 더이상 내 심기를 건드리지 말아라. 나는 조정의 령을 받은 몸이다. 이것이 바로 진을 구원할 유일한 방책이다.》

한참동안 큰숨을 내쉬며 흥분된 심정을 가라앉힌 영무는 자기앞에 모여서있는 무장들에게 부대를 집합시킬것을 명령했다.

장군, 어디로 가시려오이까?》

범양내사 위문이 영무의 기색을 살펴보며 조심히 물었다.

영무의 대답은 간단했다.

《연군으로 돌아간다.》

조정에서 새로 유주자사가 임명되여 내려올 때까지 림시로 유주의 일을 총괄하게 된 영무는 조정의 명령대로 주둔군의 대다수 병력을 료동지방으로 철수시켰다.

조정의 지시대로이면 진나라와 지경을 접한 군, 현을 모두 진나라에 넘겨주기로 되여있으나 영무는 그 실행을 차일피일 미루고있었다.

아무리 조정의 명령이라고 하지만 영무로서도 차마 제 손으로 그럴수는 없었던것이다. 영무는 이제 조정에서 새로 유주자사를 임명하여내려보내면 진과 함께 한시바삐 여기를 뜰 생각이였다.

어떻게 해서든 조정에 올라가는 길로 진을 구원해줄 작정이였다.

하지만 모든것이 순조롭지 않았다.

유주의 주둔군이 거의 모두 철수한 공백을 리용하여 옛 연나라 반란세력이 머리를 쳐들었고 하여 여러개의 군, 현의 행정체계가 마비되였다.

바로 이러한 때 이때까지 지경밖에서 기회만을 엿보고있던 진나라 장수 부염이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유주에 들어왔다.

부염은 겉으로는 유주에 있는 연나라 잔여세력의 소탕을 명분으로 내들었지만 그 기도를 간파하기 어려웠다.

영무는 혼란된 유주의 일을 수습하려고 밤낮을 가림없이 뛰여다녔다.

10여일동안 애쓴 보람이 있어 복잡하였던 유주의 일도 차츰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마비되였던 군, 현들의 질서를 일시 바로잡는 한편 부염에게서는 고구려조정의 차후지시가 있을 때까지 지경밖으로 철수하겠다는 확답도 받아내였다. 연나라 잔적 모용강도 천여명의 기병을 동원하여 멀리 북방으로 쫓아버렸다.

이제는 조정에서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유주자사를 기다리는 일만이 남았다.

연군으로 진의 군사를 철수시킨지 보름째 되는 날이며 유주의 병력을 료서로 떠나보낸지 열흘 되는 10월 30일에 영무가 그토록 고대하던 새 유주자사가 연군성에 도착하였다.

새로 유주자사로 임명되여 내려온 사람은 나이가 예순이 넘은 늙은이로서 복잡한 유주의 대사를 한손에 거머쥐고 쥐락펴락할 무장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수가 없었다.

영무를 만난 첫 대면에 유주의 일은 하나도 묻지 않고 국내성에 두고온 화려하고 풍족한 생활을 못내 그리며 한탄만 하는것이였다.

고구려의 최전방이라 할수 있는 유주에 온것으로 하여 제 신변에만 신경을 쓰는것이였다.

영무는 입이 쓰거워 침묵만 지키고있다가 유주자사의 부임인사가 끝나자바람으로 밖으로 나와버렸다.

조정에서 저런 무능력한 속물을 유주자사로 임명하여 내려보냈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결국 진을 대신할 인물이 저런자였단 말인가?!

아무리 애써 부정을 하려고 해도 조정의 이번 처사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깊어가는 밤, 향방없이 거리를 헤매이던 영무는 어느 한 집 대문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영무는 깜짝 놀랐다. 어느덧 자기도 모르게 진이 연금되여있는 집앞까지 온것이였다. 한동안 망설이던 영무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 대문안으로 발걸음을 내짚었다.

영무는 곧장 마당을 가로질러 사랑채로 다가가서 문고리에 손을 가져갔다가 맥없이 떨구었다.

문틈으로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여나왔던것이다.

분명 저 애들은 진의 아들과 딸일것이였다.

진에게는 어머니를 잃은 어린 아들, 딸이 있었다.

아들은 여덟살이였고 처녀애는 이제 겨우 다섯살에 잡혔다.

아이들의 티없이 맑은 웃음소리는 마치 보이지 않는 포승인듯 영무의 온몸을 사정없이 결박했다.

영무는 진을 만나 자기의 괴롭고 쓸쓸한 마음을 터놓으려던 생각을 털어버리고 맥없이 돌아섰다.

《아저씨, 그 검을 내게 줘요. 이런 나무칼은 내게 필요없어요.》

방안에서 진의 아들이 투정을 부리자 걸걸한 어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네가 커서 무사가 되면 그때 이 아저씨가 진짜 검을 내 손으로 만들어주겠다.》

영무는 목소리의 임자가 하평인줄 깨닫고 깜짝 놀랐다.

한순간 자기가 하평에게 진의 신변을 지킬 임무를 주어 여기로 파견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부지중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지금 진은 무엇을 하고있을가. 홀로 연금되여있으니 끼니를 건느는것은 아닌지.…

그는 어쩐지 하평이가 부러웠다.

자기도 저 방안에 뛰여들어가 온갖 시름을 잊고서 어린 아이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고싶었다.

하평의 다정하고도 쾌활한 목소리가 여전히 문틈으로 새여나왔다.

《맹광아, 봐라. 네 동생 상이는 얌전하게 있는데 넌 계속 성화를 먹이고있구나. 훌륭한 무사가 되려면 그 욕심부터 버려야겠다.》

하평은 이렇게 진의 아들인 맹광을 달래다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영무는 쫓기우듯 급히 밖으로 나와 술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진, 날 용서해주게. 하지만 이제 상경하여 조정에 나가면 그때는 날 리해할수 있을거네. 자네가 루명을 벗으면 떳떳한 걸음으로 찾아가 자네 아들 맹광이와 딸 상이를 내 친아들, 친딸처럼 안아보려네.》

영무는 길가에서 한동안 망설이다가 군영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생각은 진의 자식들에게로 이어졌다.

오래동안 진과 헤여져있은 영무는 진에게 자식들이 있는줄 감감 모르고있었다.

범양에서 진의 병권을 빼앗고 연군으로 돌아온 뒤에야 진에게 어머니를 잃은 자식들이 있었다는것을 알고 죄책감에 시달려왔었다.

이제 진의 자식들앞에서 아버지마저 빼앗는 의리없는 인간으로 보일가싶어 한번도 찾아가보지 못했었다.

영무는 자기대신 가장 믿고 사랑하는 부하인 하평을 진의 집으로 보냈다. 혹시 진의 신변에 화가 미쳐도 그렇고 또 아들처럼 믿고 아끼는 하평을 보낸다면 마음의 짐을 하나 덜어낼수 있으리라 믿었기때문이였다.

영무는 이제와서야 자기가 하평이나마 진에게 보낸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하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하평이 검밖에 모르는 무사인줄 알았댔는데 이제 보니 여간 다정다감한 젊은이가 아니였다.

상관의 마음속 고충을 꿰뚫어보고 진의 자식들을 자기의 살붙이처럼 보살펴주고있는것이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군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던 영무는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어 발길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웬일인지 주위가 대낮같이 밝아졌던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군영의 삼문이 우렷하게 자태를 환히 드러내는가운데 군영의 대문이 무슨 영문에서인지 문짝채로 땅에 나가넘어졌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군사들이 갈팡질팡하며 뛰여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소스라쳐 놀란 영무는 눈을 흡뜨고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다.

군영뿐아니라 이제는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오랜 력사를 자랑하는 연군성이 통채로 불에 타는듯싶었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영무는 한순간 천길벼랑우에서 불붙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굽어보듯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깊은 잠에서 놀라 깨여난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며 집집마다에서 뛰쳐나오는데 이 공포의 혼잡을 키질하듯 곳곳에서 절망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진나라군대가 성문을 열고 쳐들어왔다!》

영무는 곧 벌어진 변란의 위급한 사태를 알아차렸다.

급히 검을 뽑아들고 도독부를 향해 정신없이 뛰여갔다.

새로 내려온 유주자사를 불러내여 변란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불시에 뇌리를 쳤던것이다.

도독부는 텅텅 비여있었다.

영무는 곧장 자사가 있을 정당으로 뛰여들어갔으나 인적기를 찾아볼수 없었다. 정당안을 헤매이며 자사를 찾던 영무의 다급한 시선이 한곳에 머물러섰다. 자사의 지휘탁우에 유주자사의 권한을 상징해주는 검과 인장이 그대로 놓여있었던것이다.

영무는 망연자실하였다.

그렇다면 유주자사란자가 검과 인장마저 내버리고 제 한목숨이 두려워 달아났단 말인가.

검을 든 손을 우들우들 떨던 영무는 울분을 터뜨리며 지휘탁을 힘껏 내리쳤다.

영무는 유주자사의 검과 인장을 덮쳐잡고 밖으로 뛰여나갔다.

이젠 제 혼자의 힘만으로라도 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밖으로 뛰쳐나온 영무의 눈에 마침 저쯤에서 어디론가 밀려가는 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영무는 두주먹을 부르쥐고 그들을 쫓아달렸다.

《서라, 너희들중 누가 유주자사를 보았는가?》

군사들은 그제야 영무를 알아보았는지 주춤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저기 남문쪽에서 유주자사님이 군사를 모아 반격하고있다는 말이 있어 우리도 그쪽으로 급히 가는 길이나이다.》

군사들중 그중 나이가 지긋해보이는 사나이가 한발 나서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영무는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비록 검과 인장마저 버리고 달아난 유주자사라고 해도 생각을 고쳐먹고서 군사들을 지휘하며 반격하고있다니 천만다행한 일인듯싶었다.

영무는 20여명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남문쪽으로 달려갔다.

아니나다를가 남문을 가까이할수록 격전이 벌어지고있는지 함성이 크게 일어나고 창칼이 부딪치는 소음과 비명소리가 돌려왔다.

마음이 조급해진 영무는 군사들과 함께 있는 힘을 다해 남문을 향해 달렸다.

영무는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튀여나와 앞을 막아서서야 걸음을 멈추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평이였다.

혼비백산한 얼굴이였다. 창황중에도 자기를 찾아 헤매였는지 영무를 알아보자 탄성을 지르며 달려왔다.

장군을 찾아 온 성안을 헤매였소이다. 빨리 여길 뜨시오이다.》

영무는 반갑게 소매를 잡아끄는 하평의 손을 몰풍스럽게 뿌리쳤다.

《새로 온 유주자사는 어디 있느냐?》

《예?!》

《남쪽 성문앞에서 교전중이라는 말을 듣고 달려오는 길이다.》

하평은 아예 어리둥절해 한동안 영무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들린 유주자사의 검과 인장을 바라보고서야 영문을 깨달은듯싶었다.

《지금 저기 남쪽 성문앞에서 싸우고있는 사람은 새로 내려온 유주자사가 아니라 구관인 진장군이오이다.》

영무는 그때에야 비로소 꿈에서 깨여난듯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가슴이 무너져내리는듯 하였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오르는듯싶은 격정, 자기자신에 대한 분노…

영무는 그 자리에 쓰러져 목이 터지게 소리라도 지르고싶었다.

아, 내가 이런 꼴이나 당하자고 조정의 명령에 맹목적으로 따랐단 말인가. 진이 옳았구나!

조정간신들의 꾀임에 넘어가 유주까지 내려온 자기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주둔군의 모든 병력을 허망하게 료동으로 보내다나니 피로써 얻은 유주를 잃고 서북전선의 관문을 열어주는 격이 되고말았다.

(옳아, 당연한 일이다. 당초에 진나라의 흉포한 침략무리에게 양보를 해가며 화평을 바라다니… 조정의 잘못된 시책을 바로잡을 대신 제동료나 잡아가두어놓고… 이런 참담한 화를 당할줄 내 어이 몰랐단 말인가.)

영무는 부르쥔 두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사려문 입술에서 빨간 피가 흘러내렸다.

함성이 차츰 가까와왔다.

불과 수백명의 고구려군사들이 적과 싸우면서 이쪽으로 밀리우는 모습이 두눈에 안겨왔다.

영무가 두눈을 번뜩이며 그쪽으로 발걸음을 내짚자 하평이 사색이 되여 급히 영무의 팔에 매달렸다.

장군, 여길 벗어나야 하오이다. 제가 길을 열겠으니 뒤를 따라주소이다.》

영무는 하평의 손을 뿌리치며 충혈된 눈을 들고 벼락치듯 꾸짖었다.

《놔라. 저기에 진장군이 있다. 저기가 바로 내 죽을 곳이다.》

영무는 하평을 밀어던지고는 앞으로만 달렸다.

기세를 올리는 진나라 군사들의 고함소리가 점점 더 가까와졌다.

집집의 지붕을 날아넘는 불길이 벌써 코앞까지 다달았다.

갑자기 좌우에서 시꺼먼 그림자들이 불쑥불쑥 솟아나왔다.

장군, 조심하소이다. 적이오이다. 》

하평이 놀라서 부르짖는 소리에 영무는 걸음을 멈추며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쉬익- 소리를 내며 칼날이 눈앞을 스쳐지나갔다.

영무는 칼을 휘두르다가 실패한자가 비틀거리는것을 검을 휘둘러 베고 뒤에 덮쳐드는자의 배를 힘껏 내찔렀다. 남은 두어명의 적병이 질겁하여 골목안으로 새여버렸다.

영무는 계속 앞으로 달렸다.

마침내 진이 싸우는 골목까지 당도했다.

얼마 안되는 군사들이 끝까지 진의 주위에 모여들어 적들의 집요한 공격을 지탱해내고있었다. 영무는 땅바닥에 널려있는 시체들에 발을 걸채이며 달려가 진의 손을 그러쥐였다.

그는 진에게 유주자사의 검과 인장을 쥐여주며 눈물이 글썽해진 얼굴로 말을 떼였다.

《진, 날 용서해주게.》

진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장군을 원망하지 않소이다. 그러나… 이 검과 인장을 받을수가 없군요. 나는 일개 고구려의 무사로서 싸우고싶소이다.》

영무는 눈물이 앞을 가리워 더는 진의 모습을 자세히 볼수 없었다.

전장만 아니였더라면 진에게 무릎을 끓고 사죄하고싶었다.

《내 간절한 소원일세. 군사들은 지금 유주자사인 자넬 바라보고있네.…》

진은 영무를 바라보다가 결심을 내리고 검과 인장을 받아쥐였다.

싸움에 지치고 상한 군사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영무는 진의 눈길에서 뿜어져나오는 섬광을 보았다.

그가 옛날 전장에서 어깨겯고 싸울 때 늘 보아오던 적에 대한 증오와 분노의 섬광이였다.

《우린 누구인가?》

진은 유주자사의 검과 인장을 높이 쳐들어보이며 군사들에게 소리쳤다.

군사들은 와 함성을 올리며 창검을 추켜들었다.

《고구려사람들이요.》

진의 힘찬 목소리가 또다시 울려퍼졌다.

《그렇다! 우리는 순간의 안락보다 최후의 죽음을 더 떳떳이 여기는 고구려의 남아들이다. 군사들! 물러서지 말라. 부모처자를 지키는 오늘의 싸움에서 우리모두 죽기를 두려워말자!》

진의 용기에 고무된 고구려군사들이 진나라군사들을 향해 과감하게 돌진하였다.

영무는 자기가 죽기에 앞서 한가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영무는 옆에 서있는 하평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너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이 있다. 들어줄수 있겠느냐?》

하평은 울먹이며 영무의 소매자락을 붙잡았다.

장군은 살아서 돌아가야 하오이다. 절 키워주신 장군의 은혜를 만분의 일이나마 갚지 못했는데 어찌 일찌기 몸을 버리시려 하나이까?》

영무는 손을 들어 하평의 두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쳐주며 말했다.

《진에게 자식이 있다는 소릴 들었다. 내가 어리석은탓에 한번도 그애들을 안아주지조차 못했구나.… 그 애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총각애는 맹광이고 처녀애는 상이라고 하오이다.…》

하평이 여전히 울먹이는데 영무는 짧게 당부했다.

《그럼 그 애들을 네게 부탁한다.》

영무는 하평에게 생애의 마지막웃음을 남기였다.

장군!》

영무는 하평의 부름을 뒤에 남겨두고 앞으로만 달렸다. 죽음을 맞받아나가는 진의 곁으로 달려갔다.

영무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웨쳤다.

(하평아, 가거라. 부디 살아 진의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거라. 이것이 나의 마지막부탁이다.…)

피눈물을 삼키며 전장을 떠난 하평은 곧장 진의 집으로 달렸다.

뒤에서는 진과 영무를 비롯한 고구려군사들이 마지막 최후의 결전을 치르고있었다.

온 성안이 피의 란무장으로 변하였다.

성안에 침입한 진나라군사들은 순간에 야수로 둔갑하여 맞다드는 성민들을 고구려사람이건 한인이건간에 무자비하게 죽이였다.

아직도 성안골목의 여기저기에서는 고구려군사들과 진나라군대와의 피의 결전이 벌어지고있었다.

진의 집앞까지 다달은 하평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감을 느끼였다.

싸늘한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벌써 수십여명의 진나라군사들이 대문을 부시고 쓸어들어가는것이였다. 하평은 급히 옆골목으로 빠져 뒤담을 넘어갔다.

적들의 눈에 띄우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뒤채로 돌아갔다.

적들은 앞채에 뛰여들어가 닥치는대로 들부시고 값이 될만한것들을 략탈하기 위해 피눈이 되여 돌아치고있었다.

적들이 앞채에서 략탈에 미쳐 돌아갈 때 한발먼저 뒤채에 뛰여든 하평은 황급히 뒤채부엌아궁이옆에 쌓아놓은 장작단을 와락와락 헤치였다.

아까 하평은 변란이 닥쳤다는것을 알고 영무를 찾아 달려나가기 전에 아이들을 이곳에 숨겨두었던것이다.

헤덤비며 장작단을 헤치던 하평은 서로 꼭 부둥켜안은채 쌔근쌔근 잠을 자고있는 오누이를 발견하고는 후-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그들 오누이는 지금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있는지도 또 자기들의 자그마한 몸에 어떤 운명의 충격이 가해지고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깊은 잠에 들어있었다.

밖에서 적병들의 고함소리가 몰방으로 터져나왔다.

《빨리 뒤채를 뒤져봐라. 혹시 고구려놈이 숨어있을수 있으니 놓치는 구석이 없어야 한다.》

한순간 망설이던 하평은 살벌한 혼잡속에서 단번에 두 아이를 구원하지 못한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먼저 맹광을 둘쳐안았다.

눈을 뜬 맹광이 녀동생의 목을 끌어잡으며 잠투정이 어린 소리로 애원했다.

《아저씨, 상이도 같이 가자요.…》

하평은 순간 온몸의 기운이 스르륵 빠지는 허탈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적들의 야생적인 고함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와서야 펄쩍 정신을 차린 하평은 품속을 더듬어 맹광이에게 주려고 정성들여 깎았던 자그마한 나무칼을 꺼내들었다.

평소의 재간을 다하여 손잡이를 물고기모양으로 솜씨있게 깎아만든 예쁘장한 나무칼이였다.

다 완성되면 맹광에게 주려고 품에 간수하고있었던것이였다.

나무칼의 손잡이를 물고기모양으로 예쁘장하게 부각하여서인지 상이가 늘 자기에게 달라고 조르군 하였었다. 앞일을 기약할수 없다는 생각에 미쳐 하평은 나무칼을 상이의 손에 쥐여주고 몸을 일으켰다.

이것이 상이와의 마지막리별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마음같아서는 오누이 둘을 다 데리고가고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도 못할 극히 위험한짓이였다.

모든것을 운명에 맡기기로 한 하평은 잠든 상이의 손에 나무칼을 쥐여주고 조심히 나무단을 쌓아 가리워놓았다.

(조금만 기다려라.)

결심을 가다듬은 하평은 맹광을 둘쳐안고 문을 박차며 뛰여나왔다.

달빛에 우렷이 드러난 하평의 두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이때 그를 발견한 10여명의 적들이 창검을 휘두르며 쫓아와 한가운데 몰아넣고 에워쌌다.

하평은 맹광을 왼팔로 안고 오른손으로는 검을 빼들었다. 그의 두눈에 분노의 섬광이 번쩍이였다.

노호성을 터뜨리며 뛰쳐나가 앞을 막아선 두명을 순식간에 베여버린 하평의 기상은 징벌을 안고온 지옥의 사자같았다.

이리 뛰고 저리 날며 닥치는대로 치고 베였다.

남은 서너명의 적병이 공포에 질려 손에 든 창검을 줴버리고 달아나버렸다. 하평은 몸을 돌리고 달리던 기세로 단숨에 담을 뛰여넘었다.

여전히 여기저기에서 화광이 충천했다. 바람이 지나치며 매캐한 연기를 멀리에까지 날라갔다.

하평은 추격병들의 눈을 피해 어두운 골목으로 뛰여들어갔다.

갑자기 말탄 기수가 어둠속에서 불쑥 튀여나와 하평을 향해 미친듯이 육박해왔다. 골목길이라 어디 피할데도 없었다.

하평은 이를 사려물고 품에 안았던 맹광을 돌려업고는 그냥 맞받아달리다가 말발굽에 채일 아슬아슬한 순간 옆으로 비키면서 공중 뛰여올라 대바람에 기수를 차던지고 땅에 가볍게 내려섰다.

주인을 잃은 군마가 대가리를 잔뜩 수그리고 사납게 날뛰였으나 하평은 억센 손으로 고삐를 힘있게 잡아채여 말을 제어했다.

맹광을 안고 말에 뛰여올라앉은 하평은 말을 채쳐달렸다.

하평은 조용한 곳에 이르자 맹광을 내려놓고 꼼짝하지 말라는 당부를 하고는 상이에게로 줄달음을 놓았다.

상이가 있던 자리에 도착한 하평은 온몸이 무너져내리는 허탈감에 펄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집은 불에 타고있었고 상이가 있던 자리는 온통 헤쳐져있었다.

적병들이 우글거리는 속에 더 있을수 없다는 생각에 미친 하평은 가슴을 치며 자리를 뜨지 않으면 안되였다.…

하평은 맹광을 업고 싸움의 함성을 뒤에 남겨둔채 말을 몰았다. 376년 10월의 밤의 장막은 피의 력사를 새겨안은채 희붐히 밝아오는 려명에 서서히 밀려나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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