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 회)

 

제 20 장

 

3

 

리윤재는 펀뜩 눈을 떴다. 줄곧 눈을 뜨고 생각하고있은것 같으니 눈을 떴다기보다 와뜰 놀란것 같았다. 그럼 그동안 새빨간 지평선을 향하여 가없는 황막한 땅을 끝없이 걸어간것은 꿈인가, 아니면 생시인가?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생동하고 생시라기에는 너무나 허황하다. 아아, 이것은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니고 저승으로 가다가 삼도천을 미처 건너가지 못하고 이승의 미련이 남아 또 육체의 힘이 남아 되돌아온게 아닐가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럼 여기는 어디인가? 물속같이 괴괴하다. 괴괴한게 아니라 귀를 틀어막은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눈도 무엇을 씌워놓은듯 뿌옇다. 복도천정에 매달린 14촉짜리 백열등이 희미한 달무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만은 또렷해진다. 사그라져가는 숯불의 마지막불꽃같다. 오싹 추위를 느끼자 그는 여기가 감방이라는것을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추위였다. 형무소에서 내준 두루마기 같은 홑옷 한벌을 걸치고 누데기 같은 담요 한장을 덮고 올해따라 류달리 추운 겨울을 지냈다.

형무소에서는 개정치안유지법 제1조에 걸린 대역죄인이라 하여 그를 독방에 감금했으니 앓는 몸에 그 추위는 더욱 참기 힘든것이였다. 그러나 어제 밤까지 그렇게도 괴롭히던 열이 가시고 손발이 서서히 식어가는것은 맨 마루바닥에서 올라오는 랭기때문만도 아닌것 같다. 이 싸늘한 공기속에서도 숨이 왜 이리 답답할가. 벌써 사지가 제구실을 못하는데도 심장만은 살아서 마지막요동을 치는것 같다. 지금 마지막힘을 다하여 높뛰는 이 심장도 미구에 멎으리라는것을 그는 직감했다.

자기의 한생을 돌이켜보니 너무도 엉성하고 빈구석이 많았다. 너무나 많은 일을 잡도리하고 그것을 중도반단한채 가는것이 섭섭했다. 어학회일에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았지만 자기의 일은 어느 하나도 성취하지 못하고 언제나 뒤전으로 미루었다. 고어사전은 어휘를 수집하여 카드를 만들어놓고(이것이면 사전의 절반은 된것이다.) 시간을 못 얻어 더 나가지 못했다.

자기의 문법체계와 철자법리론을 체계화한 저서로 남기지 못했다. 김한규의 권고대로 방이골에 나가 제손으로 곡식도 가꾸고 시간을 얻어 만년을 저술로 보내자던 꿈은 일생 품어온 하나의 공상으로 끝나고말았다.

이 모든것이 자기자신의탓이 아니라 자기의 일생을 짓밟은 왜놈의 혹심한 박해의탓이였으니 말이다.

그가 횡포무도한 왜적의 권력에 항거하여 일생의 말로가 어떠하리라는것을 몰랐을가? 알면서 의를 저버리지 않았으니 그는 자기를 희생한것이다.

인간을 사랑하는 프로메테우스가 그들에게 광명을 줄 때 인간을 증오하는 제우스를 몰랐을가? 제우스의 잔인성과 무서운 보복을 짐작하지 못했을가? 잘 알면서 그에 엇섰으니 그는 자기를 희생한것이다.

인류는 그를 자기희생의 상징으로, 인간해방의 구성으로 최선의 노래로 영원히 구가하지만 프로메테우스는 깝까즈의 상상봉에 묶이워 영원한 고문을 겪어야 했으니 이것이 진정한 희생이다.

리윤재는 죽음을 각오했다. 그렇기때문에 후회하지 않았다. 후회는 약자의 변명이다. 그는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한걸음 나아가면서 물방울이 모여 대하를 이루듯이 자기라는 물방울이 모여 조선독립을 이룩하리라는것을 믿었다. 그러므로 자기를 없애고 대하를 이루는 그라는 하나의 물방울도 거대한것이였다.

이제 문턱에 다가서는 독립을 보지 못하고 가는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백두산의 총성이 울리고 조선독립의 그날이 바야흐로 눈앞에 다가오는듯 했다. 하여 마음은 편안하였다. 가냘프게 남은 마지막생명을 불태우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다가오는 림종을 앞두고 그는 기왕의 모든것을 용서했지만 단 한가지만은 용서할수 없었으니 그것은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는 왜적이였다.

숯불의 마지막섬광도 꺼지자 그의 의식이 차차 흐려지면서 문득 안해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는 이승에서 다시는 보지 못할 불쌍한 안해와 고별하면서 그는 가슴속에서 끓는 눈물밖에는 보낼게 없었다.

자식들을 하나하나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못박힌 가슴을 이승에서는 풀어드릴 길도 없다. 그는 마음속으로 두손을 모두고 빌었다.

(어머니, 먼저 가는 이 불효자식을 용서하시고 부디 여생을 보전하소서.)

마지막불꽃인듯 한순간 또렷해졌던 그의 의식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순간이 닥쳐왔음을 알았다. 림종에 처하여 사람이 흔히 무엇을 생각할가? 보고싶은 자식들일가, 시집 못 보낸 딸근심일가? 아니, 한글학자 리윤재는 이 최후의 순간에 자기 생애를 바쳐 만든 철자법을 생각했다.

이미 아무것도 안 들리게 된 귀에 갑자기 《무덕전》에서 고문받는 사람들의 비명이 울려오더니 그 소리가 곧 어학회에서 철자법을 가지고 론쟁을 벌리는 열기띤 목소리로 변하였다.

(어째서 《읍니다》를 표준어로 정하고 《습니다》도 완전한 말로 인정하여 하나로 통일하지 못했을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그의 입에서는 가냘프게 신음처럼 말이 새여나왔다.

《읍니다… 습니다…》

경찰제모를 쓴 얼굴이 그에게 바싹 숙어지며 귀를 기울이다가 나직이 말했다.

《무슨 말씀이온지? 유언이면 제가 받잡겠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나이는 불현듯 제모를 벗고 허리에 찬 대검을 끌러서 그 옆에 놓고 꿇어앉아서 다시 말했다.

《선생님, 제모를 벗고 검도 끌러놓았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유언을 제가 받잡겠습니다.》

그러나 리윤재는 경련을 일으키며 《음.》 소리를 한번 지르고 두눈을 부릅뜬채 기척이 없었다.

간수가 그의 코밑에 손을 대보니 이미 숨이 끊어져있었다.

《선생님, 눈을 감으십시오.》 하고 그는 손으로 리윤재의 부릅뜬 눈을 쓸어내렸다. 허공을 노려보며 원한만을 담고있던 그의 동공이 닫겨졌다.

간수는 일어서서 시계를 보았다. 새벽 5시였다. 두해전에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1943년 12월 8일이였다.

가족, 친척, 친우 누구 하나도 보지 못한 리윤재의 림종을 지켜준 이 사나이는 강범모라는 간수였다. 그는 벌어먹기 위하여 비록 왜놈의 경찰복을 입었을망정 량심은 버리지 않고 조선어학회사건수감자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편의를 극력 봐주었는데 이날 밤근무를 서다가 새벽에 리윤재의 독방에서 새여나오는 신음소리를 듣고 달려왔던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리윤재에게는 의식이 없었다.

그해는 추위도 례년에 없이 심한데다가 전시를 빙자하여 형무소의 급식량을 극도로 줄여 수감자들은 극단한 영양실조로 함흥형무소에서 매일과 같이 대여섯명씩 죽어나가 겨울 두달동안에만 해도 벌써 360명이나 죽었으니 리윤재는 그 희생자가운데 하나였다.

눈을 감은 리윤재앞에 맨머리바람으로 꿇어앉아 비통한 생각에 잠겨있던 강범모가 이윽고 일어섰다.

독감방에서 돌보아주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세상을 떠난 리윤재의 최후의 이야기가 그후 세상에 알려지게 된것은 이 강범모에 의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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