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 회)

 

제 2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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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9월 중순, 홍원경찰서 류치장에 만 한해동안 구류되여(일본법에도 류치장 구류기간은 15일간이다.) 갖은 고초를 다 겪던 조선어학회사건관계자들 28명이 전원 함흥형무소로 옮겨가게 되였다. 이 28명가운데서 16명은 검사의 기소로 예심에 회부되게 되였고 12명은 기소유예로 석방되게 되였다.

떠나는 날 그들은 경찰서마당에 나가 두줄로 줄을 지어 웅크리고 앉았다. 이런 경우에 말은 절대로 하지 못하며 고개를 쳐들어도 안되였다. 인솔할 형사들은 수갑과 포승, 용수를 날라오는 등 출발준비에 분주했다.

그 짬에 리윤재는 곁에 있는 리희승에게 활달하게 말했다.

《일석, 예심판사앞에서도 일체를 부정합시다.》

이 말에 리윤재를 돌아보던 리희승은 그의 활달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퍼렇다 못해 꺼멓게 죽어가는 그의 낯빛을 보고 바야흐로 무섭게 위협하며 하루하루 다가오는 엄혹한 겨울을 저 상태에서 이겨낼수 있을가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과연 그는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자 그만 앓아눕게 되였다. 함흥형무소에서는 그를 대역무도의 중죄인이라 하여 독감방에 수감했는데 해빛 한점 안 드는 음습한 독감방은 이미 병든 그의 몸을 더욱 괴롭히였다. 그래도 그동안은 정신력으로 지탱해왔으나 이제는 그 힘조차 차차 스러져간다는것을 그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손가락마다 동상과 고문으로 진물이 질질 흘러 숟가락조차 쥐기 힘들었으며 다리도 마비가 오는게 알린다. 그러니 돌아눕기도 어려워 천정만 멍하니 쳐다보며 반듯이 누워있을수밖에 없었다.

수족도 놀리기 어려운 이 중환자에게 누구 하나 시중을 들어줄 사람도 없다.

이 고립무원으로 그는 심한 고독감을 느꼈다. 늘 바삐 돌아가던 사회에서는 때로 정신적공허감을 느낀 일은 있어도 이렇게 고립무원하여 고독감에 시달려본 일은 없었다. 하는 일 없는 옥중생활의 고독은 그의 굳건한 정신을 좀먹는것 같았다. 일을 하고싶다. 다정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고싶다. 사람이 목마르도록 그립다. 이 무위와 고독에 의한 정신적아픔이 고문에 의한 육체적아픔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는것을 그는 느꼈다.

그러니 불면증은 나날이 더 심해져서 남들이 다 자는 이밤에 그는 잠못 이루고 날이 새기만 지루하게 기다린다. 날이 새도 혼자 누워있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사람의 목소리라도 들을수 있지 않는가.

이럴바에야 의식이라도 흐렸으면 좀 나으련만 의식은 피로할수록 더욱 또렷해질뿐이다.

그는 비로소 죽음을 생각해본다. 래세와 령혼을 믿는 사람은 죽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하며 흔히 미화도 하지만 그런것을 생각해본 일도 없는 그는 죽음에 대하여 공포를 느낀 일도 없었고 미화해본 일은 더욱 없었다. 그런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을만큼 그의 육체도 정신도 건강했었다.

그런데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그는 확실히 병과 고독으로 몸도 마음도 허약해진것이다.

일단 죽으면 이 모든 고통이 순간에 없어지겠지만 혹 령혼이 있다면 왜놈이 망하는것을 보지 못하고 죽은 자기의 령혼은 여한을 못 풀어 중천에 떠있을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깊은 밤 그가 적막에 시달리며 괴로운 생각에 잠겨있는데 고요를 뚫고 어디선지 가냘픈 귀뚜라미소리마냥 《똑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귀를 기울였다. 《환산, 환산…》 하고 끝없이 부르는 통방소리가 계속되였다. 그가 회답을 보내려고 겨우 손을 들어 벽에 가져갔으나 아무리 애를 써도 벽을 두드릴수 없었다.

통방소리는 계속되였다.

《단심이 전한다.

백두산이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왜놈은 곧 망한다.

우리는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

리윤재에게는 그 가냘픈 통방소리가 우뢰처럼 들렸고 숨이 죽어가던 가슴이 활랑활랑 높뛰였다.

(아, 저건 고루구나, 단심이 백두산의 소식을 전하려고 이 먼곳까지 찾아왔구나. 단심이 살아있고 고루도 무사하다. 아, 다행하다, 다행하다! 그러니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이 이 감옥에서도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있구나.

경찰이 어학회를 비밀결사로 찍고 해외의 정치조직과 련결시키려고 얼마나 피눈이 되여 날뛰였던가. 그러나 우리의 조국광복회 비밀조직에 대해서만은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목숨으로 비밀을 지켰다. 그러니 우리 비밀조직은 이 인간생지옥에서도 왜적과 싸워 이긴것이다. 조직은 살아있고 우리는 정신적으로 자라났다. 이것이 우리의 귀중한 결실이다.)

이 반가운 생각과 함께 그는 감격에 목이 메였다. 백두산이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백두산은 곧 일성장군님이시다. 조선의 운명을 한몸에 지니신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고무해주신다. 이것을 동지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는 잘 움직이지도 않는 손으로 벽을 두드리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통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벽을 두드리며 부르고 또 불렀다.

《효창, 효창…》

그리고 웨쳤다.

《단심이 전한다.

백두산이 우리를 지켜보고있다.

왜놈은 곧 망한다.》

그리고 그는 몸이 약한 한징을 생각하고 그에게 힘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부르짖었다.

《효창, 효창… 기어이, 살아내야 한다.

조선독립 만세!》

끝내 통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기진하여 축 늘어진 리윤재의 높뛰는 심장속에서 《조선독립 만세!》의 환호성이 끝없이 메아리칠뿐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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