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 회)

 

제 19 장

 

5

 

나까지마 다네조는 너무도 터무니없는 조선어학회사건을 끌어안고 호미난방의 궁지에 빠졌다.

조선어학회사건은 규모가 크다나니 검거자도 많고 검거날자도 오래 끌었다. 1942년 10월 1일에 11명을 검거했고 그해 10월 21일에는 7명을 검거했으며 12월 23일에는 8명을 잡아들였고 해를 넘겨 1월에는 2명을 검거했다. 검거예정자가운데서 두명은 병중이므로 검거하지 못했고 두명은 불구속심문을 했다. 그러니 검거예정자 32명가운데서 28명을 잡아왔으며 심문과정에 증인으로 호출하여 문초를 한 사람이 백수십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거의가 조선사회의 학계, 교육계, 법조계, 언론계, 종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니 조선의 저명한 지식인치고 조선어학회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건의 규모나 대상자로 보아 나까지마 다네조따위가 다루기는 너무도 아름찬 사건이였다. 아름찰뿐아니라 그가 보기에도 조선어학회사건은 터무니없는것이기도 했다.

구속한 피의자들을 넉달동안이나 문초했으나 아직도 심문조서조차 작성하지 못했다. 아무리 조바심을 내고 작성할래야 도저히 작성할수가 없었던것이다. 피의자들에게 자백서를 씌우고 고문을 하고 다시 씌우고 끝없이 되풀이하여 그 자백서가 방대한 량에 이르렀으나 그 어느 자백서에서도 실지로 법에 저촉될 행동으로 규정할만 한 사실이 없었던것이다. 고문으로 범법행위를 《자백》받은 경우에도 그것에 법을 적용할수 있는 증거가 없었던것이다.

경찰이 피의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하여 무엇보다 요구되는것은 이 증거였다. 그러나 《자백》을 시켜놓고 아무리 짜내야 있지도 않은 증거가 나올리 없었다.

나까지마 다네조가 부닥친 또 하나의 애로는 그 많은 피의자들을 고문해서 제각기 《자백》을 받아냈기때문에 그들의 《자백》사이에는 일치되는 내용이 거의 없어 일관된 사건을 구성할수 없는 점이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 터무니없는 사건을 안고 제때에 처리하지 못하여 현재 앉아있는 자리조차 떼우지 않겠는가 하는 근심도 생겼다.

당황한것은 그만이 아니였다. 문초를 직접 담당한 형사들까지도 모여앉으면 이런 정도의 사건으로는 립건이 무리하다는 소리를 자주 하게 되였다. 이럴즈음에 총독부 경무국 외사과장 다찌바나 겐모쓰가 현지시찰차로 홍원경찰서에 내려왔다. 궁지에 빠진 나까지마는 마치 구세주를 만난듯 그에게 매달려 조선어학회사건처리에 대한 차후방향을 물었다. 다찌바나는 한 이틀동안 자백서들을 가져다 료해해보더니 난처한 얼굴을 할뿐이였다.

《이 정도의 심문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경찰서에서 립건할수 있겠는가.》 하고 그는 자백서를 벌컥벌컥 넘기며 짜증기있게 말했다.

《더구나 넉달이 지나도록 조서조차 쓰지 못하는 현 실태에서는 이렇다고 찍어 지시를 줄수도 없다.》

그는 이렇게 책임을 지지 않을 말로 얼버무려버리고 돌아가버렸다.

나까지마는 더욱 난처해졌다. 이렇게도 큰 사건을 벌려놓고 범법행위가 없다고 립건도 못하고 석방한다면 일본경찰의 위신과 체면이 무엇이 되겠는가. 그러나 조선어학회사건관계자들은 례외없이 일본의 통치에 불복하는 민족주의자들로서 경찰의 눈에는 가장 성가신 존재임에 틀림없다. 더우기 전쟁의 판국이 일본에 극히 불리하게 기울어지고있는 오늘 조선내에서 우환거리로, 심지어는 위협의 대상으로까지 되고있는 이 민족주의자들을 없애버리는것은 초미의 문제이다. 그런데 억지로써도 통할수 없는 사실을 가지고 그들을 어떻게 법에 의하여 말살하겠는가? 그는 생각할수록 혼란에 빠질뿐이였다.

그러나 언제나 신의 도움을 믿는 그에게 이번에도 구원의 손길이 뻗쳐졌다. 다찌바나가 꽁무니를 빼고 돌아간 후 얼마 안 있어 총독부 경무국에서 전쟁형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지시가 내렸던것이다.

《요시찰인중에서 위험한 인물로 인정되는자는 모두 검거할것이고 또 이와 같은 사건은 일체 엄중한 조치를 취할것이다.》

이것을 조선어학회사건에 대하여 엄중한 조치를 취하라는 지시로 해석하고 나까지마는 무르팍을 탁 쳤다.

그리하여 조선어학회사건에 대한 조치를 결정하기 위한 함남도경찰부와 홍원경찰서관계자들의 합동회의가 열리였다.

이 회의에서는 조선어학회사건의 립건은 이미 기정사실로 인정되였고 그 립건리유는 다음과 같이 정해졌다.

첫째로,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칭됨으로써 조직도 달라지고 사명도 목적도 달라져서 조선어학회는 표면으로는 학술단체임을 가장하고 실은 민중봉기를 유발하여 독립을 전취하려는 비밀결사로 되였다.

둘째로, 조선어사전편찬사업은 민족정신을 앙양시켜 독립을 전취하기 위한 수단이였다. 108명의 각계 인사들의 발기로 구성된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취지서에 쓴 《조선민족의 갱생》이라는 문구가 이를 실증해준다. 또한 카드에서 《백두산》, 《단군》, 《무궁화》 등의 단어에 대한 주석이 불온하기 짝이 없으며 《경성》(서울)에 대한 주석이 《도꾜》에 대한 주석보다 몇배나 길고 자세한것이 반국가적이다.

셋째로, 조선어학회는 상해림시정부와 련계를 가지고 그 지시에 의하여 사전편찬사업을 했다. 그래서 리윤재가 상해에 가서 림정요인을 만났던것이다.

넷째로,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인 조선기념도서출판관도 문화향상을 표방한 독립운동이였고 리극로가 계획한 양사원도 독립투사의 양성기관이였다.

그밖에 조선어학회가 주동이 되여 3년동안 진행한 한글순회강습회도, 기관잡지 《한글》의 발간도, 심지어는 맞춤법통일안의 제정과 표준말의 사정도 다 치안유지법 제1조의 내란죄에 해당하는것이다.

이렇게 어학회의 모든 학술활동이 내란죄라는것이다. 과연 세계력사가 아직 모르는 억지와 사기의 범죄구성이다.

만일 이 자리에 다소라도 리성이 있는자가 앉아있었더라면 이렇게 말하는자들이 과연 자기의 말을 실지로 믿고있었을가 하고 의혹을 느꼈을것이다. 혹 이 자리에 그런 의혹을 느끼는자가 있었다 해도 일본의 공포정치하에서는 거짓을 거짓이라고 인정하는것만 해도 범죄로 되는것이였다.

합동회의이후 홍원경찰서 고등계형사들만 모여앉은 자리에서 나까지마는 야스다에게 특히 강조했다.

《어떻게 하든 리윤재에게 상해림시정부에서 비밀지령을 받았다는것을 자백시키라. 수단, 방법을 가릴것 없다.》

야스다는 이 어려운 고비가 두번다시 없는 승진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입을 사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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