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회)

 

제 18 장

 

4

 

리윤재는 일생 어느 한날도 편안히 지내본 일이 없었지만 요즘처럼 눈코뜰새없이 바쁘게 지낸 일도 드물었다. 신문사에 몸이 매인 그가 어학회에서 나선 긴급한 일도 하지 않을수 없었기때문이다.

어학회의 조선어사전원고의 일부가 대동인쇄주식회사에 넘어가 이미 조판이 개시되였다. 이제는 사전원고를 계속 인쇄소에 넘겨주어야 했으니 그 일만 해도 아름찬데 어학회에서는 사전원고를 일체 두벌씩 만들어놓기로 작정했다. 시국이 날로 험악해가는 조건에서 왜놈의 탄압을 예견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 경우에 사전원고를 압수라도 당하면 십년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수 있기때문에 사전원고를 두벌 만들어서 한벌은 인쇄에 넘기고 또 한벌은 깊숙이 감추어두자는것이였다. 이것을 누구보다도 강경히 주장한 리윤재가 신문사에 앉아서 이 아름찬 일을 먼산 불보듯 할수는 없었다. 더구나 자신이 집필한 방대한 원고의 처리를 남에게 맡긴다는것은 일이 아니였다.

그래서 그는 요즘 매일 오후에는 어학회에 나가서 두벌 작성된 원고를 대조하여 잘못을 바로잡기도 하고 마지막손질을 하기도 했다.

9월 초순 어느날이였다. 그날도 그는 사전편찬원 정태진과 둘이서 두벌원고의 대조를 진행하고있었다.

정태진은 원래 입이 무겁고 온후한 사람이여서 리윤재는 그와 사귄지 불과 두해밖에 안되지만 상당히 기맥이 통하는 사이가 되였다.

그날은 왜 그런지 정태진이 안정을 못하고 일하다가 맥을 놓고 평소와는 달리 시국이야기를 꺼내는것이였다.

《환산선생, 요즘 대본영발표라는게 판에 박은 소리뿐입니다. <황군>의 혁혁한 전과요 뭐요 하고 허두는 요란히 떼는데 필리핀, 먄마,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일대를 막 먹어들어가던 5월전과는 딴판으로 전선은 제자리걸음을 하고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수세에 빠졌던 미군이 드디여 콰달카날섬에 상륙했고 미드웨이섬에서는 왜군이 결정적타격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전선의 판국이 전도되는게 아닙니까?》

그러길 바라서 소곤소곤 하는 말이였다. 리윤재도 나직이 말했다.

《6월에 있은 미드웨이섬에서의 왜군의 참패는 사실이요. 왜군이 한계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것이지. 이제 두고보시오. 각 전선에 걸쳐 왜군의 패퇴가 가속도적으로 촉진될거요.》

《그렇게 되면 왜놈의 최후발악도 예견하지 않을수 없는데 우리 어학회도, 이 사전편찬도 유지해낼수 있겠습니까?》

정태진이 오늘 여느때없이 불안해하는것이 바로 이 문제를 생각하고있었기때문이구나 하고 리윤재는 생각했다.

그 또한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있을수 있는 비극적인 운명을 잘 알고있었고 이제는 그것을 거의 육체적으로 느끼고있었다. 그러나 그는 눈가리개를 한 연자방아말처럼 앞만 바라보며 걸어갔다. 전쟁의 광기도, 인생의 유혹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삶의 목표가 흔들린 일이 없었기때문이다.

마음이 유순한 정태진이 지금 자기의 전도에 대하여 불안해하고있다는것을 리윤재는 알았다. 오늘 이 땅에 생을 둔 량심있는 지식인치고 이 불안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없지만 자기 운명에 대한 불안을 어떻게 헤치고 갈것인가 하는것은 오로지 자기자신의 량심과 의지에 달린 문제라고 그는 생각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리윤재가 입을 열었다.

《우리의 운명에 대한 이 불안은 오늘과 같은 현실에서는 어찌할수 없는것이요.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마음을 의지할수 있는 기둥이 있어야 하지요.》

《마음의 기둥!》 하고 정태진이 곧 호응했다.

《그렇습니다. 아인슈타인과 같은 물리학자가 종교에 의거한것이 바로 이 마음의 기둥을 찾으려는것이 아니였을가요. 그런 현실적인 물리학자가 래세와 같은 허황한것을 믿었을리는 없었을테니까요.》

《그럼 선생님은 무엇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습니까?》

《나의 종교도 신앙도 나라의 독립이요. 조선의 독립을 이룩할 힘이 우리에게도 있다는걸 나는 믿고 살지요.》

《옳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선생님을 락천가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정태진은 감동하여 눈등이 붉어졌고 리윤재는 담담히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개인의 운명이 비극적이면 비극적일수록 조국의 운명과 떼여놓고 생각할수 없어요. 조국을 구원하는 길이 우리 개인의 운명도 구원하는 길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조국을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우리가 맞춤법을 통일하고 조선어사전을 만드는것도 민족의 갱생을 위한 길이지만 그것은 조선독립의 성업에서는 하나의 물방울과 같은거지요. 그것만으로는 직접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는걸 나는 생활체험을 통하여 절감했어요.》

《그럼 선생님은 조선독립의 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뜻밖의 물음에 좀 당황한듯 잠시 입을 다물고있던 리윤재가 이윽고 말했다.

《의병투쟁도 독립군운동도 이미 조락하고 온갖 민족주의운동도 왜적에 의해서 괴멸되거나 타락해버린 오늘 항일무장투쟁을 벌리면서 여기에 온 민족이 뭉칠것을 호소한 한 조직의 강령을 보고 나는 조국의 운명을 구원할 길은 이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정태진은 리윤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게 너무도 뜻밖인듯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부르짖듯 말했다.

《그런 조직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그런 조직을 찾다못해 조선어학회에 찾아왔습니다.》

그리하여 리윤재는 그에게 조국광복회와 그 10대강령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그 강령 한구절에 일제의 노예교육을 페지하고 우리 말과 글로써 교육하며 의무적인 면비교육을 실시할것을 주장했는데 나는 이것을 보고 정말 감탄했어요. 민족교육과 민족어에 대한 이런 관심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는가요. 그래서 나는 우리의 어문운동도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항일무장투쟁에 의거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였어요.》

정태진은 자기 심장의 박동에 귀를 기울이듯 수굿이 고개를 숙이고있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선생님이 그런 조직에 관계하신다면 저도 거기에 가입할수 있지 않습니까?》

리윤재는 그의 손을 잡으며 이렇게 말을 맺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민족의 넋을 지켜주시지요. 민족의 넋을 지키지 않으면 조국도 없어요. 민족의 넋을 저버리면 사대주의도 하고 나라도 팔지요. 어떤 시대에 살건, 어떤 사상을 가지든 자기가 조선사람이라는 자각, 이것이 민족의 넋이지요.》

정태진은 묵묵히 생각에 잠겨있었으나 그의 마음속에서는 이때까지 체험해보지 못한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고있었다.

그러나 이튿날 정태진은 어학회에 출근하지 않았다. 다음날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그의 집에 사람을 보내보니 놀라운 소식이 전해왔다. 그저께 밤에 형사들이 들이닥쳐 정태진을 련행해갔는데 그들의 말이 영생녀중 학생들의 비밀결사사건과 관련하여 홍원경찰서까지 가야겠다더라는것이였다.

무슨 도깨비감투인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그렇다고 더 알아볼데도 없었다.

그날 밤 정태진은 형사에게 련행되여 서울역에 나가서 북행렬차를 탔다.

그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몹시 불안했지만 한편 크게 근심하지는 않았다. 자기의 죄가 아니라 남의 죄에 대하여 증언을 하라면 공정하게 말해주면 될게 아닌가, 아무리 경찰이기로 바른말을 아니라고야 못하겠지, 만일 진실을 부정한다면 버티는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정태진은 너무도 천진했다.

하루밤을 기차속에서 불안하게 뜬눈으로 밝힌 정태진은 홍원경찰서에 도착하자 증인으로서 증언을 하는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류치장에 구류되였다.

역한 냄새가 끊임없이 코를 찌르는 변기통옆에서 고립무원에서 오는 불안과 집근심으로 인한 슬픔으로 괴롭게 하루밤을 지낸 그는 이튿날 아침에 야스다에게 불리워 취조실로 끌려나갔다. 옆방에서는 끊임없이 단말마적인 비명소리가 들려 불안한 그의 가슴을 박박 긁는것 같았다.

야스다는 하루밤사이에 야차로 변한듯 했다. 흰종이 몇장과 펜과 잉크단지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책상우에 솥뚜껑만 한 손을 올려놓고 피발선 눈으로 노려보며 짐승이 포효하듯 으르렁거렸다.

《여기선 우리의 요구대로 하지 않으면 병신이 되거나 죽기 전에는 나가지 못한다. 그 종이에 쓰라. 조선어학회가 조선독립을 목적한 비밀결사로서 해온 죄상을 죄다 쓰란 말이다.》

그리고 야스다는 정태진을 혼자 남겨두고 방에서 나가버렸다.

정태진은 기가 막혔다. 조선어학회를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라고 쓸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조선어학회의 활동이 민족운동인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곧 조선독립을 위한 직접적인 활동은 아니다. 철자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사정하고 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어디까지나 합법적인 학술사업이지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활동은 아니다. 아무리 애써도 야스다의 요구대로 자백서를 쓸수가 없었다.

한참후에 들어온 야스다가 한장도 쓰나마나한 자백서를 읽어보더니 정태진을 잡아먹을듯이 쏘아보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새끼, 너 신사적으로 대하니까 이러기냐.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 다시 써.》

이렇게 다시 씌우는게 한도가 있는게 아니였다. 아무리 다시 써도 그 말이 그 말이고 그 식이 장식이였다. 그는 이틀동안에 지칠대로 지치고 고민에 잠겼다.

《정말 더는 쓸게 없습니다. 조선어학회가 한 일은 온 세상이 다 아는 합법적인 학술활동이 아닙니까.》

야스다가 입을 사려물었다.

《좋다. 버티면 버티는것만큼 골병들건 너밖에 없다.》 하고 야스다는 정태진을 옆방으로 끌고 갔다.

정태진은 첫눈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천정에서 드리워진 바줄, 젖은 마루바닥에 여기저기 널려있는 걸레쪼박, 물주전자, 방 한구석에 쌓여있는 몽둥이들, 인간을 육체적으로 말살하기 위한 고문도구들이였다.

그는 옷을 벗기우고 긴 걸상에 반듯이 뉘여졌다. 사지는 결박되고 고개는 걸상 한끝에서 마루쪽으로 드리워졌다. 야스다가 주전자로 코구멍에 물을 쏟아넣었다. 정태진은 처음에는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숨을 쉬지 않을수 없어 물은 자연 코구멍으로 해서 배속으로 끝없이 들어가 그는 끝내 정신을 잃고말았다.

이튿날에도 자백서를 씌웠고 요구대로 쓰지 않았다고 이번에는 《비행기》를 태웠다. 두팔을 뒤로 젖혀서 묶고 나무작대기를 어깨죽지밑으로 가로질러넣은 다음 나무작대기 량끝을 바줄로 매여 천정에 달아올리고 두줄을 비꼬아서 맴을 돌리는것이였다. 어깨죽지가 뒤로 튕겨져 정신이 아찔해지고 매달려서 얼마 안 있어 그는 혀를 빼여물고 사지가 축 늘어져서 반죽음이 되고말았다.

거짓자백서를 씌우는데도 한도가 없었지만 그것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에도 끝이 없었다. 인간을 죽지 않을 정도로 죽음이상의 고통을 주는 이런 악형을 형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는데 그중에서도 야스다는 누구보다도 잔인하고 악착하게 고문을 하는것이였다. 그래서 북부조선에 많이 있었던 적색로조사건들을 다룰 때부터 야스다는 《인간백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고 그래서 고등계형사부장이라는 자리까지 벌었던것이다.

한주일이 지나자 정태진은 지독한 고문으로 이미 자기의 의지를 지탱하기 어렵게 되였다.

고등계주임 나까지마는 형사부장 야스다가 제출한 정태진의 자백서를 읽어보고는 조선어학회사건은 이미 다 먹고 떨어진것이라고 대만족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부랴부랴 이 자백서를 가지고 함남도경찰부 고등과장 미즈노를 찾아갔다.

미즈노는 정태진의 자백서도 읽고 나까지마의 의견도 구체적으로 들은다음 머리가 모자라는 나까지마처럼 속단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어학회사건이 그리 손대기 헐한 사건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그 소재지가 서울이고 검거할 사람들이 대개 사회적지위와 명망이 높은 지식층이기때문이다. 더우기 나까지마가 가져온 자백서에는 조선어학회의 죄목이 렬거되여있지만 그것을 법위반이라고 규정할 증거가 없다. 이를테면 사전은 어느 나라에서나 편찬한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에서 만드는 사전이 유독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의 활동이라고 규정할 구체적인 범행을 들지 못하고있다. 그러니 치안유지법 제1조에 걸수가 없는것이다. 앞으로도 조선어학회사건을 다루는데 있어서 많은것이 그러리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런 방대하고 시끄러운 사건을 도꾸가와시대의 《오까비끼》(구시대의 탐정)같은 나까지마따위가 다룬다는것은 소홀하기 짝이 없는짓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총독부의 비밀지령이 있는 이상 조선어학회사건은 터치지 않을수 없다. 그렇다고 고등과장으로 갓 부임한 자기가 구태여 이 골아픈 사건을 직접 책임질 까닭이야 있겠는가.

그래서 참새 굴레씌울만큼 약은 미즈노는 자기가 갓 부임하여 실정에 밝지 못하다는 구실로 이 문제의 처리를 자기의 부하이고 도경찰부의 고참인 이찌하라경부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쏙 빠지고말았다.

이찌하라는 로회한 경찰답게 그럴듯한 결론을 나까지마에게 주었다.

《이 사건은 성격으로 보아 신중히 다루어야 하겠지만 조선어학회는 한번 때려보는게 좋을것이요. 정태진의 자백에 의하면 조선어학회라는게 민족주의자의 집단임에 틀림없으니 때리면 무엇이 튕겨나올지 모르고 설사 만족할만 한 결과에 이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기회에 조선어학회와 같은 민족주의자의 단체를 철저하게 응징할 필요가 있소. 총독부의 비밀지시도 이런 취지에서가 아닌가 생각하오.》

그리고 이찌하라는 합동수사반을 구성하였다. 그 합동수사반에 홍원경찰서에서는 고등계주임 나까지마 다네조, 고등계형사부장 야스다 미노루, 형사 니이하라 도오데쯔, 형사 이또오 데루모도, 형사 쯔네가와 겐지, 가리야가 들어갔고 함남도경찰부에서는 사찰계주임 미나끼 요시오, 수사계주임 오오하라 헤이꿍, 고등과 형사부장 시바다 다쯔지, 형사 미쯔야마 시게루가 포함되였다.

이 열명에 의하여 조선어학회관계자들에 대한 총검거가 드디여 10월 1일부터 개시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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