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 회)

 

제 18 장

 

3

 

전진역은 오늘도 사람들로 붐비였다. 전시경제의 혼란과 붕괴는 철도운행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 제시간에 다니는 렬차는 거의 없고 연착되는 차에는 사람들이 새까맣게 매달려 차를 한번 타자면 일대 모험을 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였다. 그래서 사기 어려운 기차표를 사고도 차를 타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역은 언제나 장마당처럼 와글거렸다.

《허, 이거 칠십리를 걸어와서 이틀째 차를 못 타니 로자를 다 불어먹고 그냥 돌아가게 됐쉐다.》 하고 농사군차림의 로인이 허연 수염을 덜덜 떨며 옆에 앉은 젊은이에게 말했다.

《이젠 예전처럼 하늘소나 타고 다녀야지 하늘소보다도 못한 기차를 어디 믿을수가 있어야지요.》 하고 젊은이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왜 이렇다오, 젊은이. 어디 사고라도 났다오?》

《사고는 무슨 사고예요. 전쟁때문이지요.》 하고 말하던 젊은이는 역구석에서 자기를 지그시 노려보는 시선을 불현듯 감촉하고 한마디 더 하려던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는 기분이 나빠서 자리에서 일어나 개찰구쪽으로 가려는데 구석에서 웅글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이, 이리 와.》

젊은이는 더욱 기분이 나빠 상대자를 쏘아보았다. 시꺼먼 털뭉치를 붙여놓은것 같은 눈섭, 수염자리가 시퍼런 턱주가리. 생김새가 갈데 없는 왜놈이였고 사납고 번들거리는 눈으로 보나, 첫마디부터 반말을 쓰는것으로 보나 사복경찰이 분명했다. 그러나 젊은이도 만만치 않았다.

《당신이 뭐기에 상관없는 사람에게 오라가라 하오.》

털보가 국민복 웃주머니에서 증명서 같은것을 한끝만 슬쩍 들어올렸다가 넣으며 입을 사려물었다. 이젠 신분까지 밝혔는데 그래도 반발할테냐 하는것이였다.

이젠 그자가 형사인줄 뻔히 알면서도 젊은이는 여전히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나는 내 볼일을 봐야겠소.》

《그 볼일이라는게 뭐냐?》

《친구를 마중하러 나왔소.》

《좋다, 나도 그 친구를 마중해주지.》

털보형사는 젊은이를 앞세우고 개표구로 갔다.

털보형사가 젊은이를 불심검문하게 된것은 그에게 무슨 현행이 있어서가 아니라 새파랗게 젊은것이 당국에서 깎으라는 머리는 안 깎고 입으라는 국민복이 아니라 곤색양복을 입고있었기때문이다. 젊은이가 이 비상시국하에서 그런 차림새를 한다는것은 왜놈의 시책에 대한 반발임에는 틀림없었지만 그가 하필 역에서 늘 있지도 않는 왜놈형사에게 걸린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였다.

잠시후에 렬차가 하나 와 서고 려객들이 개표구에서 쏟아져나왔다. 려객들중에서 한 젊은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오, 박병엽, 나왔구나!》

하고 친구에게로 달려왔다.

그러나 박병엽은 형사의 립회하에 친구를 만나야 했으니 그의 기분도 표정도 말이 아니였다. 그는 차라리 침묵을 지켰다.

《왜 그래?》 놀란것은 그의 친구였다.

《넌 누구냐?》 하고 그 대답으로 형사가 물었다.

형사는 그의 주소, 성명, 직업을 묻고 그가 여기에 온 목적을 캐여물은 다음 그는 일단 놓아보내고 박병엽은 홍원경찰서로 련행했다. 무슨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비국민적인 차림새와 말대꾸질이 형사의 직업적의식을 건드려놓았던것이다.

경찰서 고등계취조실에 끌려온 박병엽은 조건도 리유도 없이 구타를 당했다. 잡아온 형사에 두 형사가 더 가세하여 박병엽의 길게 자란 머리칼을 잡아휘젓고 곤색양복을 입은 그의 정갱이와 넙적다리를 마구 걷어찼다.

초벌찜질을 하고 문초를 해보니 박병엽은 일본 명치대학을 졸업하고 귀향한지 얼마 안되는 젊은이여서 무슨 꼬리를 잡을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일단 잡아온 이상 그냥 내놓기는 일본경찰의 위신에 관계되는터에 그가 직업이 없는 지식인이라는데서 행여나 하여 형사부장 야스다 미노루가 형사들을 휘동하여 그의 집을 수색하였다.

가택수색의 결과도 무의미했다. 일본에서 가져온 많은 책에도, 그의 편지들에도 시비를 걸만 한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두 형사는 싱겁지만 하는수없이 그냥 돌아갈 차비를 하는데 야스다만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엇이건 손가락에 집히면 벌레건 종이쪼각이건 뭉개치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그로서 이만한 획득물을 그냥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것이다. 박병엽의 방안에서 더 뒤져볼만 한것이 없게 되자 그는 비여있는 옆방 방바닥에 놓여있는 크지 않은 보따리에 손을 가져갔다. 이것이 야스다의 눈에 띄운것도 하나의 우연이였다.

《그건 내게 아니라 내 녀조카가 맡겨놓은것이요.》 하고 박병엽이 항의했다.

《그래도 좀 봐야겠다.》

《정 보려거든 임자가 온 다음에 그앞에서 보시구려.》

야스다가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일리가 없었다. 피발선 눈으로 무섭게 그를 한번 노려보고는 보를 풀었다. 과연 자질구레한 녀자의 소지품이 나타났다. 교과서 같은 책들속에서 야스다는 두툼한 일기책 두권을 집어들었다. 하나는 표지에 보풀이 인것으로 보아 상당히 오래된 일기책이고 또 한권은 절반나마 쓴것이였는데 거기에는 함흥영생녀자중학교 4학년 박영옥이라고 표지뒤등에 씌여있었다. 그는 일기장을 벌렁벌렁 넘기며 뜨문뜨문 읽어보았으나 학교생활의 빤드름한 이야기가 씌여있을뿐이였다. 더우기 이따금 란외에 교원의 검인이 찍혀있는것으로 보아 학교의 요구로 쓴 일기가 분명했다. 남이 볼것을 전제로 하는 이런 일기에 자기의 속생각이나 남모를 이야기를 쓸 바보는 없을것이다. 그러나 끈질기기가 소힘줄같은 야스다는 이 일기책을 보면서 생각했다. 영생녀중은 미국선교사가 세운 학교이고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교원으로 틀고앉아있던 학교이다. 교장인 미국선교사는 《대동아전쟁》발발과 함께 제 나라로 추방되였고 민족주의를 고취하던 교원들은 대부분 물러나거나 잡아가두었지만 그들의 잔여세력은 아직도 학교에 남아있을수 있다. 이 일기장에 그런 반영이 어느 구석에건 있을수 있지 않을가?

그래서 야스다는 이 일기책 두권을 경찰서로 가지고 갔다. 그날 밤 동료들이 다 퇴근한 다음에도 야스다는 책상에 늘어붙어서 그 일기장을 자자구구 따지며 꼼꼼히 읽어갔다. 표면화되지 않은것에서 무엇을 드러내자는것이니 녀학생의 숨소리에서 그의 마음속을 들추어내자는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다가 야스다는 정말 뜻밖에도 놀라운 글줄에 시선을 박았다.

《국어를 상용하는자를 처벌하였다.》라는 문구를 발견한것이다. 여기서 국어라는것은 일본말을 가리킨것이고 처벌하였다는것은 학교에서 한짓이 틀림없다. 그러니 학교가 반국가적행위를 감행한것이다. 이것은 박영옥이 2학년때 즉 지금부터 2년전에 쓴 일기의 한구절이였다. 그때로 말하면 모든 학교, 모든 기관들에서 《국어(일본어)》상용이 이미 궤도에 오른 때였다.

그런데 《국어》상용자를 처벌까지 한다는것은 완전히 의식적인 행동이 아닐수 없다. 더우기 그 구절이 든 일기의 란우에는 교원의 검인까지 뻐젓이 찍혀있으니 이런 처벌이 학교에서 공공연히 감행되였다는것을 의미한다.

그의 추리는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올라가서 결국 일기의 한 문구로부터 큰 반국가단체의 적발이라는데까지 발전했다.

이 발견에 기분이 붕 뜬 그는 이튿날 아침에 고등계주임 나까지마에게 박영옥의 일기장의 문구를 보이고 하루밤에 무르익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나까지마의 머리속에는 조선어학회사건조작으로 꽉 차있었기때문에 그 방향에서 수사를 진행하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리하여 두해전에 녀학생이 쓴 일기의 문구 하나로 발단된 사건의 수사가 야스다에 의하여 어마어마하게 벌어졌다.

방학에 귀향하여 삼촌인 박병엽의 방에 짐만 맡기고 시집간 사촌언니한테 놀러가있던 박영옥을 찾아내여 경찰서에 련행했다.

형사 셋이 열여덟살짜리 처녀 하나를 가운데 놓고 불고기를 하듯 달달 볶았다.

아무리 따져야 박영옥은 두해전에 일기장 한귀퉁이에 무슨 반국가적문구를 썼는지 상기할수 없었다. 그 반국가적문구의 내용을 대주어도 박영옥은 미덥지 않다는듯 눈만 크게 뜰뿐이였다. 증거물인 일기장의 그 대목을 직접 보여주니 박영옥은 도리여 깜짝 놀라며 《어마나, 그런 처벌은 한번도 없었어요. 내가 언제 이런 장난을 다했을가!》 하는것이였다.

이 천진한 말을 야스다가 믿을리 없었다. 그는 험상궂게 입을 사려물었다.

《얘, 여기가 어딘줄 알고 그따위 허튼소리를 하느냐. 여기서 한마디라도 거짓말을 하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맞아죽고만다. 여기 교원의 검인이 찍혀있는데도 그게 장난이란 말이냐?》

박영옥이 아직은 량심을 속일수 없었다.

《저도 왜 그런 장난글을 썼는지 모르겠어요. 선생님은 그런줄도 모르고 검인을 찍었을겁니다. 일일이 다 읽지는 못하니까요.》

그러자 야스다는 소녀의 머리칼을 손에 감아쥐고 따귀를 후려갈겼다.

겁에 질려 새파랗게 된 처녀에게 야스다가 교원들에 대하여 따지기 시작했다. 이미 자기의 의지를 상실한 처녀는 묻는대로 대답했다.

《조선독립을 선동한 선생이 있지?》

《예.》

《누구냐?》

《…》

《말해!》

《정태진선생.》

이튿날에는 일기장에 이름이 많이 오른 동급생 리성희를 붙들어오고 그를 심문하는 과정에 동급생들인 리순자, 채남순, 정인자가 잡혀와서 녀학생들의 비밀결사사건을 조작할 형틀이 갖추어졌다.

한편 야스다는 녀학생들의 심문에서 일치하게 언급된 교원 정태진에 대한 수사를 진행했다.

조사한데 의하면 정태진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약 2년간 영생녀중에서 교원을 하다가 미국에 건너가서 우스터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콜롬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과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다시 영생녀중에서 9년간 교편을 잡았다. 원래 조선어와 영어를 가르쳤는데 이 두 과목이 다 페지된 후 수학과 공민과목을 담당했고 이 시간에 그는 일본민족에 비한 조선민족의 문화상우월성을 력사자료를 들어 늘 이야기했다는것이다. 그후 그는 영생녀중을 그만두고 서울에 가서 연전동창인 정인승의 소개로 조선어학회에 들어가서 조선어사전편찬에 종사하고있다는것이였다.

이것은 야스다에게 있어서 콜롬부스의 아메리카대륙발견만큼이나 커다란 발견이였다. 홍원에 앉아서 서울의 조선어학회에 수사의 손길을 뻗치고 총검거할 연줄을 찾았기때문이다.

보고를 받은 나까지마는 녀학생의 일기장의 단 한줄의 글줄로부터 발단된 이 엄청난 수확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아마데라스의 도움이라고생각하며 곧 서울에 파견할 야스다를 우두머리로 하는 수사반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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