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0 회)

 

제 16 장

 

1

 

2월 하순 어느날 저녁, 조선어학회 회관이 텅 빈듯 한데 사전편찬실에서만은 아직도 일을 하고있었다.

리극로가 완성된 카드를 원고지에 옮겨쓰다가 피곤한듯 말했다.

《효창, 그만하지 않겠습니까?》

한징이 그 말에 어슬어슬해진 창밖을 내다보다가 대답했다.

《그럴가. 어, 춥긴 춥군.》

2월도 거의 다 갔으니 봄기운이 태동하기 시작하나 아직도 꽃샘하는 늦추위가 살을 어이는것 같다. 그런데도 방안에 하나밖에 없는 조그만 난로는 싸늘했다. 땔감이 없는것이다.

리극로가 돌아앉는걸 보니 이야기를 한자리 벌릴 잡도리같다.

《예로부터 조선사람에게는 성을 가는것 이상 모욕이 없었지요. 성을 갈 놈 하면 욕중에서도 가장 된욕이였지요. 역적이나 성을 떼지 않았어요! 그러니 조선사람이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간다는건 조선사람을 몽땅 역적으로 만드는 소위가 아니요? 그런데도 강요에 못이겨 성을 가는 역적질을 하면서도 우리의 성씨제도가 어찌나 뿌리깊은것인지 왜놈성으로 바꾼다고 하면서 본관을 되살려놓는군요. 김해 김씨는 가네우미로, 평산 진씨는 히라야마로, 전주 리씨는 리노이에로 하는 따위이지요. 그래서 미나미가 학무국장에게 본관으로 창씨하는것을 불허하라고 지시했다지 않아요.》

나이탓인지, 추위를 몹시 타는 한징이 추워서 그러는지, 이야기가 너무도 불쾌해서 그러는지 진저리를 쳤다.

정말 지난해는 조선사람에게 참을수 없는 해였다. 총독부의 《황민화》책동이 극단에 이르렀던것이다. 왜놈들이 식민지조선에서 시종일관 추구해온 민족동화정책을 중일전쟁과 더불어 파쑈화한것이 《황민화》책동이다. 파쑈적인 방법으로 조선사람에게 일본정신을 불어넣어 일본화하려는것이다. 그래서 조선사람에게서 말과 글을 빼앗더니 이번에는 조상전래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으려는것이다. 지난 11월에 창씨개명제도가 실시된것이다.

총독 미나미는 창씨개명제를 시행하면서 《강제는 아니다. 그러나 전 반도인이 이 제도에 흔연 호응하기 바란다.》고 듣기 좋게 말은 했으나 호응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협박을 은근히 암시했다.

아니나다를가 학교, 관청, 경찰 어디서나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박해를 가했다. 관청에서는 조선성을 단 아이의 출생신고를 받지 않았고 학교에서는 그런 아이의 입학을 거부했으며 심지어는 창씨개명을 하기 전에는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배급도 주지 않았다. 조선성을 달고있으면 비국민이라고 했다. 아이는 학교에서 강박을 당하고 부모는 자식의 애원에 못이겨 성을 가는 죄를 조상에게 빌었다.

세계에 식민지통치자가 많지만 식민지민족의 성과 이름까지 빼앗은 일은 일찌기 없었다. 조선민족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려는 왜놈의 동화정책은 이렇게까지 무분별하고 란폭한것이였다.

《그런데도 총독부의 어용나팔수들은 창씨개명이 조선사람의 의사의 반영이라고 떠들고있지요. 친일주구들을 시켜 <내선일체> 의 완성을 위하여 조선사람도 일본사람과 같은 씨를 사용하게 해달라는 <청원서>를 총독부에 내게 했으니까요. 그래서 윤치호는 이또로, 최린은 가야마로, 리광수는 한술 더 떠서 가야마 미쓰로로 선참 둔갑을 했어요.》하고 한징이 말했다.

벌써 분개하여 얼굴이 벌개진 리극로가 말을 받았다.

《내가 며칠전에 남대문행 전차를 탔더니 마침 차안에 리광수가 왜놈 옷을 입고 서있더군. 숱한 사람이 있는데서 일부러 <가야마 미쓰로씨가 아니요?> 하고 한마디 했지요. 그랬더니 그는 시치미를 뻑 따고 <향산대사외다.> 하고 대답하는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한마디 더 꼬집었지요. <신궁에 가는가요?> 그랬더니 하는 대답이 <발길이 가는대로 따라가지요.> 합디다. 왜놈에게 코를 꿰인 자신의 정체를 잘 드러낸 말이지요.》

정렬모가 한마디한마디를 만들어 하듯 뜨직뜨직 말한다.

《그 리광수가 지난 2월 20일부 <매일신보>에 <창씨와 나>라는 글을 냈는데 그 한대목이 이래요.》 하고 그는 호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은 신문을 꺼내여 긴 탁자우에 펴놓고 읽기 시작했다.

《<내가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식이름으로 고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것이다. 리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것은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더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믿기때문이다.>》

이때 리윤재가 방에 들어와서 긴 탁자앞에 앉았다. 그는 방금 읽은 신문을 끄당겨 일별하더니 화나는듯 홱 밀어버리고 말없이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정렬모가 말을 계속한다.

《자, 이래요. 리광수가 20년대에 <민족개조론>을 써서 우리 민족성이 허위와 공담을 즐기고 라태하고 신의와 충성이 없으며 용기가 없고 리기적이여서 단결력이 없다고 민족을 모욕하고 민족성개조를 부르짖더니 오늘 왜놈의 품에 안겨 그 주구로 된게 그의 민족성개조의 결과지요.》

《그런자들이 우리 나라의 성씨와 왜놈의 씨라는것의 구별이나 아는지 모르겠군요.》 하고 리윤재가 말을 받았다.

《원래 일본에서 사족이 아닌 평백성에게는 성이라는게 없었지요. 그저 <다로>, <지로>, <사부로>였지요. 명치유신과 더불어 창씨령이 내렸지만 무식한 백성들이 성을 지을수 있어야지. 그래서 관청의 관리들이 성을 등록하러 나가 즉석에서 지어주었는데 집이 논가운데 있다고 다나까, 우물우에 있으니 이노우에, 화전민이라고 히노다, 이래서 생긴게 왜놈의 씨인데 이건 우리의 성씨제도와 여러가지로 다르지요. 우리의 성씨제도는 남자의 혈통을 지키는 전통적인 관습이 반영되여있어 같은 본, 같은 성을 가진 사람끼리는 혼인을 맺지 않고 같은 본, 같은 성이 아니면 양자로 될수 없으며 출가한 녀자도 성을 바꾸지 않게 되여있지요. 그러나 왜놈의 씨라는것은 혈통을 이어가는 사람의 성이 아니라 가문을 이어가는 그 집의 칭호로서 그 집에 들어오는 데릴사위도, 시집오는 녀자도 자기의 성을 버리고 그 집의 성을 달게 되여있어요. 왜놈은 가문을 계승하기 위해서 사촌간에도 혼인을 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기도 하지요. 이런 근친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되고있어요.

이런 민족적전통과 관습을 무시하고 왜놈의 씨제도를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하려는 총독 미나미가 미친 놈이거나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이지요.》

이 방에서는 이렇게 왜놈을 마음껏 욕할수 있는것만 해도 다행이였다. 모두가 뜻이 같은 사람들이였기때문이다. 그전에는 왜놈을 욕이나 하고 개탄하는것으로 그쳤지만 어학회에 조국광복회 지하조직이 나온 후에는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왜놈의 시책에 대한 이 반발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어떤 행동으로든 나타내야 한다는 자각이 생긴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직의 힘이다.

그래서 그날 네명이 모임을 가지고 왜놈의 창씨개명책동을 철저히 배격하며 자신뿐아니라 어학회의 모든 성원에게 영향을 주어 이를 거부하도록 할것을 결정했고 조선어사전편찬을 적극 추진하여 어학회를 끝까지 고수해나갈 결의를 다지였다.

물론 이 모임에서는 결정서도 없었고 회의록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수 없는 세상이였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결정은 어떤 성문률보다 더 확고한것이였다.

밤에 집에 돌아오니 정씨가 희미한 전등불밑에서 아직도 바느질을 하고있다. 가족을 입히기 위한 바느질이 아니라 식구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삯바느질이다. 그래서 리윤재는 언제나 안해에게 빚지고 살아가는 느낌이다.

안해가 상을 챙겨와서 아래목에 묻어놓았던 밥사발을 꺼내고 화로에서 보글보글 끓고있던 된장찌개를 상우에 올려놓았다. 오래동안 써온 은수저는 백통수저로, 놋주발은 사기사발로 바뀌였다. 밥사발에는 고구마를 듬성듬성 썰어넣은 조밥이 담겨있다.

정씨가 미안한듯 말했다.

《오늘이 정월대보름인데 복짬쯤으로 여기고 잡수세요. 그전 같으면 오곡밥을 지었으련만.》

상을 물리자 그제서야 정씨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아까 저녁에 동의 경방단장이란 자가 구장을 데리고 찾아왔더군요.》

리윤재는 그 시답지 않은 놈들의 이야기는 듣고싶지도 않다는듯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경방단이라는것이 지난해 10월에 소방, 수방, 방호 세 단체를 통합하여 재편성하고 도시, 농촌 할것없이 하부말단까지 조밀하게 꾸려놓은 경찰보조기구로서 그 우두머리가 총독부 경무국에 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자들이 근화에 대해서 꼬지꼬지 캐묻더군요.》

《그건 왜?》

《요새 녀자공출이 있다는 말 못 들었어요? <정신대>니 뭐니 하고 녀자들을 전선에 끌어간대요. 이를 어째요?》

(식량공출, 놋그릇공출, 귀금속공출… 그리고 이제는 녀자까지 공출이라. 이거야말로 공출정치로군.) 하고 그는 얼굴에 울기가 치밑었으나 안해에게 화낼 일이 아니라 속으로만 삿대질을 했다.

왜놈들이 중일전쟁발발과 함께 《국가총동원법》을 내놓고 전쟁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적자원을 마구 끌어갈것을 《법》화하더니 이에 근거하여 지난해에는 《국민징용령》을 조작하여 남녀로소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징용이라는 이름아래 끌어다가 보수도 없이 강제로동을 시킬수 있게 해놓았다. 《정신대》란 전선에 널려있는 왜놈병사들을 위하여 끌어가는 성노예라는것은 다 알려져있다. 왜놈들이 저지르는 이러한 인간모욕보다 더한 범죄는 동서고금의 력사에서 있어본 일이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력한 그로서 격분은 탄식으로 변했다.

《어찌겠소. 근화를 한동안 방이골 고모네 집에 보내여 숨어있게 하면 어떨가?》

《거기라고 무사할가요?》

리윤재는 대답없이 사전원고를 펼쳐놓았다. 그러나 근심이 곧 사라지지는 않았다.

남편이 일을 시작하니 정씨도 입을 다물기마련이다. 이제는 아무런 말을 해도 그에게는 마이동풍일것이다.

뒤숭숭한 가운데 정씨는 마음속으로만 방아를 찧었다.

(근화는 빨리 출가시키는게 상책인데 어디 마땅한 자리가 있어야지.)

하긴 마음에 짚이는 대상은 있지만 그것은 혼자의 생각뿐이니 아직 내놓고 말할수도 없다. 그는 혼자 속궁리만 하는것이였다.

그해 봄에 정인선이 성대 법문학부 선과(예과를 졸업하지 않았으나 그만한 학력을 가진 사람들을 시험쳐서 학부에 몇명을 뽑는 제도)에 합격하여 잃었던 학창을 실력으로 되찾았다. 그때 조선사람으로서 뽑힌 두사람가운데 또 하나가 박종식이라는 학생이였다. 둘은 곧 친구가 되였고 박종식이 정인선에게 자주 놀러 왔다. 그는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얼굴이 퍽 잘 생겼는데 입은 옷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온몸에서 새것이란 사각모에 새로 사서 단 대학이라는 모표 하나밖에 없었다. 제주도가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섬마을에서 어부의 자식으로 태여난 박종식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삼촌집에 얹혀살면서 꼴머슴을 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어깨너머공부를 하여 보통학교과정을 마치고 14살때 광주고보에 가서 시험친것이 우수성적으로 평가되여 학교에 입학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나자 학급장으로서 이 투쟁의 앞장에 섰던 그는 왜놈들에게 붙잡혀 6개월동안이나 류치장생활을 했으며 그것때문에 어느 학교에도 갈수 없었다.

그리하여 광주를 떠나 평양으로 간 그는 숭인상업학교에서 공부하면서 학비를 대기 위해 우유배달, 가정교사 등 안해본 일이 없었다. 이 고학생에게는 남보다 뛰여난 실력만이 밑천이였다.

정씨는 속궁리를 하다가 하루는 리윤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인선의 친구 박종식이라는 대학생이 근화에게 어떨는지요. 그런데 그가 배군의 자식이라고 해요. 게다가 부모까지 없는 그를 우리가 맡을수 있을가요?》

배군이라면 그전에 가장 천시하던 신분으로 여기던 그 타성이 정씨의 머리에 지배된것이다.

《여보, 그런 의미에서는 아니지만 내 박종식이라는 대학생과 말해본적이 있었소. 배군의 자식으로 자수성가하여 성대학생이 된 그의 장래가 촉망되는것도 그러하지만 그보다도 선량하고 마음씨 착하고 강직한 성품이 돋보이더란 말이요. 부모가 없으면 우리가 대신해주면 될게 아니요.》

리윤재는 박종식을 첫눈에 벌써 알아맞혔고 이제 안해가 꼭지를 뗀것처럼 그가 근화와 결합되였으면 했다. 그러나 정씨는 나름대로 아무리 대학생이고 성품이 좋아도 부모가 없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는것때문에 마음이 섭섭하였다.

 


감상글쓰기

보안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