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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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태혁은 애정에 겨운 눈매로 청년을 바라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그바람에 유년시절의 즐거운 추억속에 잠겨 어깨를 씰룩거리던 명철이가 제법 어른스럽게 말했다.
《철이 없을 때였지요. 전 지금도 현이어머니가 저때문에 속을 태우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현이동무가 학생소년궁전에서 예술체조를 배우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갈적이면 늘쌍 제가 데려다주는 일이 불안하여 걱정하댔지요. 저도 그때 왜 그랬던지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망나니라구 해도 현이동무가 날 싫어하지 않으니 저도 누이동생처럼 아껴주었습니다.》
명철의 엉뚱한 말에 태혁은 빙긋이 웃었다. 성미가 우락부락한 청년의 가슴속에서 현악기의 아름다운 선률처럼 울려나오는 동심세계에 마음이 밝아지는것을 느꼈다. 아닌게아니라 그때 안해는 현이때문에 걱정하며 만날 허진규의 아들과 섭쓸려다니지 말라고 타이르군 했었다. 그 일이 귀찮아서 한번은 현이가 《어머닌 몰라. 명철오빤 망나니가 아니야. 공부도 제일 잘해!》 하고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되였다. 명철이가 군대에 입대한다고 바지런히 뛰여다니면서 위문품을 마련하는 현이를 곱지 않게 보던 안해의 불만에 가득찬 얼굴도…
《그래 언제 제대됐소?》
《작년봄입니다. 군사복무 전기간을 안변청년발전소건설장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주인이 바뀌였더군요. 아버지가 철직되여 만포로 이사를 가고 왕청같은 녀인이 절 맞아줬습니다. 전 그날 동무네 집에 가서 아버지의 과오가 무엇이였는가를 알고 장밤 술을 퍼마시며 분해서 울었습니다. 저희 부모들이 원망스러워 만포로는 찾아가지 않았습니다. 평양에서 한 사날 빈둥거리며 다니다가 강계에 와서 현이동무의 도움으로 기계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이번엔 현이동무가 고민에 싸인 저의 길안내를 해준셈이였습니다.》
태혁은 자기 부모들의 떳떳하지 못한 생활때문에 수치를 느끼는 청년의 심정이 리해되여 고개를 끄덕이였다. 현이와 명철의 관계에서도 그들의
동심이 싹틔워준 깨끗한 우정을 새삼스럽게 감수하였다. 그러한 사실을 현이가 아니라 오늘 허진규의 아들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된
《그후엔 부모들과 만나봤소?》
《한번 집에 찾아가고싶더군요. 저도
태혁은 (이 녀석이 정말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를 덤덤히 바라보았다. 좋게 보면 대바르게 자랐다고 할가. 아이때부터
세차기로 소문난데다가 군대물까지 먹고왔으니 베짱이 자랄대로 자란것만 같았다. 이상한것은 한동안 아무 말없이 앉아있는 그의 눈에 아까
운전사한테서 모욕적인 말을 들었을 때처럼 영문모를 눈물이 어려있는 일이였다. 청년은 그런
《제가 책임비서동지를 찾아온건 다름이 아니라… 저에겐 사랑하는 처녀가 있습니다. 어지간히 큰 간부의 딸입니다.》
태혁은 청년의 그 말에 크게 충격을 받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혹시 이 청년이 나의 딸 현이를 사랑하는게 아닐가? 그런데 명철은 다름아닌 허진규의 아들이다. 보나마나 그래서 나와의 《담판》이 필요했을것이였다. 태혁은 둬모금 담배연기를 들이켰다가 길게 내뿜었다. 한순간에 단마디 명창으로 결정짓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딸의 문제였다. 단지 그가 청년을 마주보기가 멋적은 기분속에서 또다시 명확히 의식한것은 허진규와 그의 아들은 판이하게 다르며 현이가 이 청년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딸의 사랑을 막아나설 권한이 자기에게 없다는 엄연한 사실이였다.
《그런데 제가 철직당한 사람의 아들이라는것이 우리의 사랑을 막아나섭니다. 저희들한테는 도당책임비서동지의 보증이 필요합니다. 저도
자존심이 있는
태혁은 청년의 요구에 어처구니가 없어 그만 담배를 성급히 눌러껐다. 지금은 그의 사랑에 시간을 허비할 사이가 없음을 명철이가 알아들을만
하게 말해주고싶었다. 그렇지만 이것이 한 청년의 일생문제라면… 하는 생각이 다시금 청년을 외면할수 없게 만들었다. 사랑의 본질은 정신의
불이라고 하지 않는가! 청춘기에 뜨겁게 타오르는 그 불이 꺼져버리면 명철이도 마음의 상처를 입고 허둥지둥 청춘시절을 보낼지 모른다. 이
소중한것을 소중하게 여길줄 모른다면 명철의 눈에는 도당책임비서가 일만 일이라고 하는 딱딱한
《그 보증이 누구한테 필요하오?》
《제가 사랑하는 처녀의 부모들을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우리 가정에는 딸을 맡길수 없다고 합니다. 시시해서 사랑이고 뭐고 싹 다 집어던지려 했는데 현이동무가 그것두 사랑인가고, 동무가 그런 한심한 사람인줄은 몰랐다면서 오히려 절 규탄합니다. 그 처녀가 자기와 제일 가까운 동무인데 참을수 없다면서요. 까놓구 말해서 전 아이때부터 현이동무의 말엔 꼼짝 못하는 바보입니다.》
태혁은 그만 허파에 바람찬 소리로 허허 웃었다. 명철이가 너무나도 솔직하게 현이와의 관계를 방불히 드러내보였기때문이였다.
《모를 소리요. 지금 동무의 아버지도 자기 사업을 하지 않소?》
《아닙니다. 어디서 허튼 소리를 듣고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그 처녀의 부모들은 제가 현이동무를 사랑하지 못하는것도 아버지때문이라는것입니다. 그들은 현이동무와 저하구 사이엔 사랑보다 몇곱절 더 뜨거운 우정이 얽혀져있다는것을 리해하지 못합니다. 우정으로 사랑을 뛰여넘을순 있어도 사랑이 우정을 초월할수 없다는 인생진리를 모릅니다.》
《그 처녀의 부모들이란 누구요?》
씨알이 박힌 명철의 말에 감동이 된 태혁이 엄엄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행정위원회 장관우부위원장입니다.》
《뭐라구?…》
태혁은 놀란 눈길로 청년을 마주보았다. 이 풋내기청년이 다년간의 생활을 거쳐 그가 충분히 파악한 도행정위원회 부위원장 장관우의
《그래 장관우부위원장을 만나봤소?》
《안만났습니다.》
《그건 왜? 길고 짧은거야 대봐야 알지. 이제라도 만나보오.》
《싫습니다. 책임비서동지, 더두말고 저하구 사진을 한장 찍어주십시오. 사진기는 제가 가져왔습니다.》
명철은 비위가 좋게 작업복안에서 사진기를 꺼내여 책상우에 놓았다.
태혁은 뜻밖의 요구에 덤덤히 앉아있었다. 이것이 젊은이들의 사랑을 위한 일이면 싫건좋건 응하는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 넌지시 물었다.
《이게 내 보증이란거요?》
《그렇습니다. 도당책임비서동지가 저같은 송사리와 찍은 사진을 보면 장관우부위원장도 눈이 휘둥그래질것입니다. 이 친구가 허진규의 아들이 맞긴 맞아 하구말입니다. 이 사진은 저의 사랑과 인격, 생활을 지켜주는 증거물로 영원히 남을겁니다.》
태혁은 그 말에 드디여 밝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움쭉 일어났다.
《좋소. 동무의 사랑도 성공시키고 장관우부위원장의 마음도 돌려세워보자구!》
《고맙습니다.》
부쩍 사기가 오른 명철이 어느새 책상우에 자동사진기를 세워놓고 렌즈의 초점을 맞춘 다음 얼른 태혁의 옆에 와서 붙어섰다. 조용한 방안에서 사진기가 저 혼자 스르륵거리며 돌아가더니 이어 찰칵소리가 났다. 청년이 그렇게도 바라던 사진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찍혀진것이였다. 그제야 태혁이가 청년이 기름때묻은 작업복을 갈아입지 못한 일을 아쉬워하자 명철은 기쁨에 한껏 부풀어올라서 요란스레 말했다.
《저에겐 이 기름때묻은 작업복이 제격입니다. 그래서 오늘아침 일부러 현장에서 일하던 차림으로 찾아왔습니다. 전 돌아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명철은 굽벅 인사를 하고 으시대며 방에서 힝 나가버리였다. 특별한것이란 아무것도 없는 저 사진 한장이 명철에게 저렇게도 큰 기쁨,
힘으로 된단 말인가. 태혁은 이제 명철이가 저 앙양된 기분으로 자기의 사랑도 쟁취하고 장차로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제관공으로 억세게
자라날것임을 의심치 않으며 금방 그가 바람처럼 사라진 문켠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오늘래일로 당장 중소형발전소건설과 관련한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하고 전투에 진입하기 위한 실제적인 대책들을 취하면 정신을 차릴사이없이 법석 들끓게 될것이지만 그 복잡한 속에서도 태혁은 자기가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할것이
늘쌍 도안의 대소사를 도맡아안고 분주한 나날을 보내는 장관우의 사무실에서는 아침부터 큰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는 태혁이가 방안으로 들어선줄도 모르고 기계공장지배인 주병호와 마주앉아서 한창 역정을 내는 중이였다. 장관우에 못지 않게 배짱이 드센 주병호지배인은 무슨 일때문인지 오늘은 경우가 몰린 사람처럼 박통같은 머리를 숙이고앉아서 뿌옇게 욕사발을 먹었다. 그가 먼저 태혁을 알아보고 일어나서야 장관우도 인사를 차리였다.
《책임비서동무가 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잔뜩 열이 오른 장관우의 목소리는 거세게 울렸다.
《이번에
《그건 어디서 들었소?》
《말두 마십시오. 벌써 만포세멘트공장에 성간군 화물차들이 콱 덮였습니다. 선손을 써서 발전소건설에 쓸 세멘트를 빼내려구…》
태혁은 지난 밤 12시가 넘어서야 성간을 떠났는데 만포세멘트공장에 성간군 화물차들이 들이닥쳤다는 말에 입이 딱 벌렸다. 성간군당책임비서 홍덕이 겉보기엔 느려빠진것 같아도 날쌔다는건 짝이 없었다. 여하튼 이미 성간에는 불이 달렸다니 마음이 흡족했다.
《여기에 앉으십시오.》
태혁은 부위원장이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안경을 추슬러올렸다.
《동무들도 앉소. 그러니 내가 구태여 장관우부위원장한테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구만.》
《웬걸요. 전 우리 도에서 6개월동안에 중소형발전소건설의 본보기를 마련한다는것밖에 모릅니다.》
《그거면 됩니다.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소?》
《다른게 아니구…》
장관우가 주병호를 흘끔 쳐다봤다.
《기계공장의 일이 망태기가 돼서 싫은 소릴 하던 참입니다. 책임비서동무가 출장간사이 자동선이 어디 한걸음이나 추진돼야지요. 설계를 담당한 최성진기사는 가뜩이나 안해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다니 일이 될게 뭔가요. 참, 리미액연구사가 평양으로 돌아갔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알구 있소.》
《래년 농사는 리미액으로 잘 지어보자고 했던 일도 틀려지구. 안팎으로 골탕을 먹는셈입니다. 자동선이 실패하자 굼떠도 수동기대가 제일이라는 잡소리들이 나오지 않나. 정말 죽여줍니다. 공장이 맥을 춰야 발전소도 건설하지요?》
한참이나 얼굴이 시뻘개서 푸르락거리고난 장관우는 성이 좀 풀리는지 나직이 숨을 내쉬였다.
《내 워낙 우는 소릴 딱 질색하는 사람인데… 저 지배인동무네 일때문에 성격을 배리겠다니까요.》
장관우가 기계공장지배인을 마뜩지 않게 흘겨보며 허구프게 웃었다.
《아무렴 장관우부위원장이 그렇게야 되겠소. 보나마나 지배인동무도 속이 상할거요.》
《예. 부위원장동무가 죽일놈 살릴놈 하구 욕질하지만 저도 속이 탑니다. 어젠 너무 화가 나서 최성진이 보구 강계 일등미인을 붙여주겠으니 아예 처와 갈라지고말라구 했습니다.》
주병호지배인이 롱으로 한 말이였지만 태혁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그래 뭐랍디까?》
《허참, 홀아비살림에 구데기가 쓸어도 새끼들이 둘씩이나 달렸는데 리혼이야 어떻게 하겠는가고 웃더군요. 그리군 내 손을 덥석 잡아쥐고서 <지배인동무, 내 처때문에 개망신을 했지만 자동선은 꼭 완성하겠으니 맘 놓으시우.> 하더군요.》
성실이네가정의 불행이 올데갈데 없는 사실이였지만 태혁은 그 말에 눈굽이 시큰해지는것을 느끼며 장관우를 바라보았다.
《됐습니다. 우리한테 곤난한 일이 어디 한두가지요. 그 이야긴 그만하고 기본문제를 의논해봅시다. 이전에 중소형발전소건설에 참가한 기술자, 기능공들이 지금 어디서 무슨 일을 합니까?》
《그때 일은 제가 좀 관여했기에 아는데 별반 남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소형발전소건설대장은 황천객이 된지 오래구 부대장을 하던 림준이라는 동무가 이 주병호지배인네 공장기술준비실에서 기사로 일합니다. 소문난 기능공인 최덕삼로인도 기계공장에 있구요.》
《최덕삼?…》
태혁은 귀가 번쩍 열리였다.
《<강계싸움대장> 로인말이요?》
《예, 기능공으로서는 그 귀신같은 로인의 재간을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좋소. 래일아침 도당에서 건설과 관련한 협의회가 있는데 그 두 사람을 꼭 참가시켜야겠습니다. 구체적인 실무문제는 그때에 토론하기로 하고 부위원장동문 이제 곧 내 방으로 갑시다.》
잠시후 그의 사무실에서는 도당 긴급집행위원회가 열리였다.
회의에서 태혁은 자강도의 전체 당원들과 로동계급에게 주신
9
(1)
태혁을 만나고 도당정문을 나선 명철은 범잡은 포수와도 같은 마음이였다.
명철은 공장으로 돌아오자 여봐란듯이 웃통을 활활 벗어던지고 일판에 뛰여들었다. 숨돌릴 사이없이 불이 번쩍나게 일을 조겨대는 그의 날랜 솜씨에 제관공들은 모두 눈이 휘둥그래졌다. 요즘 제관장에선 명철이밖에 쳐다볼만 한 사람이 없었다.
제관공일이란게 오죽이나 험한가. 언제봐야 두터운 쇠판을 자르고 두드려붙이는 제관작업은 웬간히 뚝심이 세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늘쌍 명철이가 힘든 일을 도맡아하는데도 안타깝게 잔뜩 쌓이기만 하던 일감이 하루사이에 눈에 띄게 푹푹 자리가 났다.
저 녀석이 오늘 필경 무슨 일이 있었군! 그가 세괃게 일을 제끼는 모습을 보고 입을 딱 벌리는 사람들이 그렇게 쑥덕거려도 명철은 귀먹은 사람처럼 아예 들은체 하지 않았다. 워낙 일손을 잡으면 말수가 적은 그가 이따금 함마를 거머잡고 머리우로 휘둘러댈 때면 온 제관장이 통채로 뒤흔들리는것 같았다.
명철은 이날 종일 혼자서 제관장의 밀린 일을 축낸 후 바깥의 수도꼭지를 한껏 틀어놓고 그밑에 엎드려 어푸어푸 입바람을 불었다. 하루일을 마치고 찬물로 땀난 잔등을 적실 때의 쾌감은 제관공이 아니고서는 맛볼수 없다. 그래서 명철은 제관공이랍시고 제멋에 겨워 우쭐대는지 몰랐다. 그의 미끈거리는 몸뚱이에 내돋은 땀방울을 씻어내면서 수도물은 목덜미우로 좔좔 흘러내리였다.
명철은 한참이나 달아오른 몸뚱이를 식힌 후 꺼꺼부정히 엎딘채 꽁무니에 찬 수건을 뽑아 젖은 가슴팍을 문지르다가 얼굴을 들며 피씩 웃었다.
뜻밖에도 옆에 와서 조용히 눈웃음을 짓고 서있는 현이를 알아본것이였다.
《이거 현이동무가 어떻게…》
명철은 덤볐다치며 급히 작업복을 주어입었다.
현이가 제관장에 나타나는 일이란 좀처럼 드물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찾아왔는지 알수 없었다.
《명철동무, 어제밤 은희를 왜 울렸어요?》
은희와 대조적인 현이의 그 나무람이 섞인 목소리는 여간 차분하지 않았다.
명철은 갑자기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런지 알수 없었다. 은희가 깜찍하게 벌써 고해바쳤군! 하는 생각만이 그의 머리속에서 맴돌았을뿐이였다.
《내가 울렸나. 한매 되게 얻어맞았지.》
명철은 자기 속마음을 숨김없이 털어놓고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그의 거칠면서도 인정미가 슴배인 말에 현이는 약간 입을 삐죽해보이고 송곳이를 드러내며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동문 언제봐야 직통배기군요. 은희한테 말이랑 따뜻이 하면서 아껴줘요. 은희가 동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요?》
이럴 때 보면 현이는 철저히 은희의 편이였다.
《알겠소. 내 죽을 때까지 현이동무의 충고를 잊지 않지.》
명철은 짜장 사내답게 말하고 벙긋 웃었다.
《됐어요. 난 바빠서 그러는데 빨리 옷을 갈아입고 은희한테 가봐요. 동무들이 늘쌍 남몰래 만나군 하는 장소가 있잖아요. 오늘은 은희와 만나서 그애가 섭섭해하는 마음을 말끔히 풀어줘요. 그럼 난 가요.》
현이는 한손을 살짝 쳐들어보이고 돌아섰다. 어려서 예술체조를 배우며 세련된 탄력있는 발걸음으로 콩튀듯 저만큼 멀어져가던 현이는 또 한번 명철을 돌아다보면서 생긋 웃었다. 참말로 다정하고 고마운 현이였다. 은희와 자기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제관장에 잠간 들렸다가 저렇게 가군 하는 현이가 아닌가! 그래, 오늘은 현이가 당부한대로 은희와 만나서 노여움을 싹다 풀어줘야지. 하긴 내가 은희앞에서 얼마나 어처구니없이 행동했던가. 일생 두번다시 그런 일이 없을것이라고 말해주자!
명철은 조금후 외출복을 갈아입고 나와서 해가 떨어지는 맞은켠 산마루를 쳐다봤다. 은희를 만나기에는 아직 날이 훤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자 공장구내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차츰 성기여져갔다. 그제야 명철은 느려빠진 걸음으로 공장정문을 천천히 나섰다.
오늘은 은희가 자기와 만나서 뭐라고 할가? 보나마나 아직도 어제밤 일로 앵돌아져 새침하게 대할거야… 명철은 이런저런 궁냥을 하면서 예술학원앞도로로 혼자 터벌터벌 걸어가다가 갑자기 등뒤에서 울리는 승용차의 경적소리에 나자빠질듯 하며 길옆으로 비켜섰다. 무슨 놈의 차가 간 떨어지게 사람을 놀래우는가싶어 마뜩지 않게 흘깃 돌아다보았다. 순간 명철은 저도모르게 우뚝 굳어졌다. 옆에 와 멈춰선 승용차문을 열고 뜻밖에도 태혁이가 내렸다.
《명철이, 퇴근하는 길이요?》
《예. 책임비서동지, 안녕하십니까?》
오늘 아침 금방 태혁이와 만났던 명철은 도당책임비서동지가 무슨 일로 또다시 차를 세웠는지 알수 없어 어리둥절히 인사했다.
그러나 태혁은 그때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사람처럼 발뒤꿈치를 딱 붙이고 긴장히 서있는 그의 아래우를 찬찬히 훑어봤다.
《괜찮아. 제대군인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걸… 요즘 무슨 일을 하오?》
《늘쌍 하느니 그 식으로 쇠판을 주무르면서 씨름질입니다.》
《음. 동무네 공장에서 발전소를 건설하려고 돌격대를 조직한단 말 들었소?》
《예! 알구 있습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