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2 회)
제 1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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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선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3월삼짇날에 근화가 결혼을 한다는것을 알리였으나 아버지에게서는 아무 회답이 없었고 결혼식이 지난후에 어머니 성씨가 불쑥 서울에 왔다.
성씨는 여러 식구가 살아 어수선한 집안을 휘휘 둘러보다가 근화의 인사는 받는둥마는둥 하고 대뜸 물었다.
《어머니는 어디 갔니?》
《방이골에 갔어요.》
《방이골이라니. 거긴 왜?》
그래서 근화는 방이골에 있는 고모부의 과수원을 양도받게 된 경위를 간단히 이야기하고 어머니가 봄 내내 거기에 가서 살다싶이 하며 과수원일도 하고 사이그루로 농사도 짓는다고 말했다.
맞갖지 않은 눈으로 집안을 둘러보던 성씨가 비꼬듯 말했다.
《그러니 이젠 너희가 우리보다 한결 잘살겠다, 과수원까지 있으니.》
《원, 외숙모도!》
《우리는 망했다, 망했어. 그 알량한 량반이 전답을 거의다 불어먹고 정미소도 일본사람손에 넘어가고말았으니 이젠 자식에게 물려줄 재산도 이 집 하나밖엔 없다.》
근화는 외숙모의 우는소리가 곧이들리지 않았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데 아무러면 이 집 하나에 그처럼 명줄을 걸게 되였단 말인가. 외숙모는 원래 재물을 가지고 우는소리를 잘하고 지독하게 린색한 사람이였다.
근화는 자기가 따르는 외사촌 정인선이 어쩌면 그렇게도 부모를 닮지 않았을가 하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정인선은 할아버지의 너그럽고 인자한 성미를 닮았다고 한다.
오후에 대학에서 돌아온 정인선이 방안에 혼자 앉아있는 어머니를 보고 반기며 아버지의 안부부터 물었다.
《별일없다.》
말하기도 싫다는듯 한 어머니의 말투에 정인선은 더 물을념도 내지 못했다.
이윽고 성씨가 들가방에서 사진 한장을 꺼내여 아들앞에 밀어놓으며 말했다.
《자, 봐라. 어떠냐?》
정인선은 사진을 보이는 까닭이 짐작되여 누구냐고 묻지도 않았다.
《어떠냐, 마음에 안 드냐?》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 처녀를 두고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게 있나요.》
《그럼 들어봐라. 얘는 너의 배필감이다. 올봄에 마산에서 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는 마산에서도 첫손가락에 꼽히는 갑부야. 그의 외동딸이지. 그러니 알겠느냐, 네가 그 집에 장가들면 그 많은 재산이 다 어디로 가겠느냐? 나는 그 집과 혼사를 맺기로 작정했다. 너도 딴 의견이 없을줄 안다.》
정인선은 어머니의 지나친 독단이 불쾌했으나 그런것을 일일이 탓하다가는 단 5분간도 어머니와 자리를 같이할수 없다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애써 자기를 누르며 물었다.
《그 갑부라는 사람의 이름이 뭔가요?》
《김윤식이라고 하더라. 도에서도 뜨르르한 명사다.》
김윤식이라면 정인선도 알고있었다. 그는 도평의원이고 《국민총력조선련맹》을 비롯한 여러 친일단체의 간부 한자리씩은 짊어지고있는 특급의 친일파였다. 정인선은 사진의 처녀에 대한 호기심조차 순간에 잃고말았다.
정인선이 침묵을 지키자 성씨는 아들이 자기의 의사에 좇으려 하는줄로 지레짐작하고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번에 내가 올 때 데리고 와서 선이라도 보일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에미가 본게 틀림이 있겠냐. 얼른 서울에서 볼일을 보고 돌아갔다가 곧 데리고 오마. 그땐 아예 약혼을 하고말자.》
흥이 나서 한참 지껄여대던 성씨가 듣는둥마는둥하고 랭담한 얼굴을 하고있는 아들을 피끗 돌아다보고는 말을 뚝 끊고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밸만 나면 벽을 문이라고 내밀고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남의 복장을 터뜨릴 소리만 탕탕 하는 어머니의 버릇을 잘 아는지라 정인선은 소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어머니의 말을 듣는체 해야 했다.
《어머니, 저는 아직 학생이 아닌가요. 결혼은 학교나 마친 다음에 하지요.》
《너는 결혼이 바쁘지 않을수 있지만 너 하나만 믿고 사는 이 에미는 너의 결혼이 한시가 바쁘다. 또 그 처녀가 언제까지나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더냐?》
그 처녀가 기다리고말고는 정인선이 상관할바 아니지만 어머니가 자기의 결혼에 이렇게 갑자기 등이 달아 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그는 생각해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마음을 꿰뚫어본 정인선은 이런 책략결혼은 죽어도 안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들이 자기의 말에 수그러든것으로 생각한 성씨는 자기의 의도를 마저 말했다.
《잔치를 하재도 그래, 살림살이를 하재도 그래 우선 급한게 집이다.
이 집에서야 네가 하숙생이지 어디 주인이냐. 그럴바에야 이 집은 팔아버리고 맞춤한 집을 하나 사야겠다. 앞으로야 처가집에서 네게 고래등같은 집을 하나 사주겠지만.》
이 집을 팔겠다는 말에 정인선은 깜짝 놀랐다. 이 집을 팔겠다는것은 고모네의 그 많은 식구를 갑자기 한지에 내쫓겠다는 말이 아닌가.
《아버지가 이 집을 팔라고 하십디까?》
《그 령감은 셈에 넣지도 말아. 네가 장가를 들면 나도 너한테 와서 살겠다.》
성씨는 남편을 무시했다. 정성택이 재산을 잃은 후 안해의 이런 태도는 더욱 우심해졌다. 성씨는 무엇이건 긁어서 잔소리를 했고 정성택은 그런다고 화를 냈다. 남편이 화를 내면 안해는 독설을 퍼부었다. 이 집문제는 정성택이 선의로 처리한것을 성씨가 남편과 의논도 없이 제멋대로 처리하려는것이다.
이렇게 생각한 정인선은 어머니의 의사에 좇을수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사람의 도리에 어긋나는 그런짓을 해서는 친척간에도 의절하게 될수 있다고 어머니를 설복하려 했다. 그러나 고집이 센 성씨에게 그런 말이 통할리 없었다.
《얘, 쓸데없는 소리말아. 듣자니까 이 집에 과수원이 하나 있다는데 그걸 팔면 이런 집 하나 마련 못하겠니. 너는 걱정도 팔자다.》
정인선도 그 과수원의 눈물겨운 사연을 잘 알고있었다. 아무리 집사정이 급하기로 그 과수원을 판다면 세상떠난 김한규의 의리를 저버리는것으로 될것이다. 그러나 정인선은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자 소용이 없다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그는 영영 입을 다물고말았다.
아들의 이번 침묵은 어머니에 대한 로골적인 불만의 표시라는것을 느낀 성씨는 자리를 차고 일어서며 소리쳤다.
《제 발등의 불을 끄고서야 아비발등의 불을 끈다더라. 남 걱정말고 제살궁리나 해라.》
그리고 그는 방문을 나섰다.
려관에서 하루밤을 묵은 성씨는 이튿날 아침에는 아들한테는 들리지도 않고 곧바로 안방에 들어가 리윤재를 만나 집안이 망했다는 푸념을 한참 늘어놓은 다음 사정이 부득이 하여 이 집을 팔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고 말했다.
리윤재는 정성택의 처지를 정말 딱하게 생각했고 집을 팔겠다는 성씨의 말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는 천성이 남을 의심하거나 남의 말을 곡해하는 일이 없는 사람이였다.
그는 문갑을 뒤져서 정성택이 누이에게 넘겨주었던 집문서를 찾아내여 성씨에게 내주었다.
여기까지는 순진한 그의 마음이 시키는대로 하면 되였지만 이제 이 집을 내주고 새 집을 구하여 이사를 해야 할 일을 생각하니 아뜩하였다.
우선 무슨 돈으로 집을 사겠는가? 서울살이 15년에 저당을 잡히지 않은 온전한 제 집에서 살아본 일이 단 한번도 없었지만 이번처럼 집때문에 앞이 탁 막히여보기는 처음이였다.
그는 그날 오후에 방이골에 갔다. 안해와 의논도 하고 금옥이에게 돈을 얼마간 융통할수 있는가를 알아봐야 했다.
안하던 농사일에 지치고 가무잡잡하게 탄 정씨의 얼굴에는 분노가 어리였다.
《오레미는 원래 그런 사람이예요. 우리를 그 집에서 내쫓자고 하는 노릇이지요. 동생이 그러라고 시켰을리는 만무해요.》
그러나 이제 와서 그런 말은 백번 해야 소용이 없다는것을 깨달은 그는 가뜩이나 괴로운 남편의 마음을 더이상 괴롭혀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곧 말머리를 돌렸다.
《시누이, 세집이라도 얻자면 석달치 집세를 단번에 물어야 할텐데 돈을 얼마간 취해줄수 있어요?》
금옥은 이렇게 된바에야 아예 방이골로 이사하고말라고 강경히 주장했다.
그러나 리윤재는 아직 그럴 형편이 못되였다. 리극로가 총독부 도서과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 조선어사전의 3분의 1의 출판허가를 겨우 받아내였다. 이 사업을 팽개치고 농촌에 은둔할수는 없었다.
금옥은 한숨을 쉬며 오빠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사정이 정 그러시다면 여긴 못 오셔도 광나루쯤에서 집을 구해보시지요. 거긴 집값이 서울의 절반도 안할테니까요. 저한테 돈이 천원가량 있고 동네사람들한테서 좀더 꾸어보지요.》
광나루는 서울과 방이골의 중간에 있고 서울까지는 기동차(기관에 석탄을 쓰지 않고 전력이나 석유 또는 휘발유를 써서 레루우로 다니는 차)가 다니므로 서울에는 통근통학을 할수 있고 방이골에는 40리길을 걸으면 갈수 있다.
금옥의 말을 옳게 생각한 리윤재는 이튿날 아침에 돌아가는 길에 광나루에 들려서 집을 구하려고 더듬어보았다. 집거간군을 통해서 팔겠다는 집에 가보았는데 방 세칸짜리 초가집이였다. 원채는 조그만 방 두개가 부엌에 잇달려있고 방문앞에 빈약한 퇴마루가 있을뿐이다. 별채로 방 하나가 더 있는데 기둥이 기울어서 나무로 떠받치고있었다. 값눅은 집을 구하다나니 이런 집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리윤재는 이 집을 사겠다고 집주인과 약속을 하고 서울로 돌아가서 집값을 구하려고 갈데 안 갈데 없이 돌아다녔다.
그 당시 잡지 《문장》에서는 리윤재가 번역한 박연암의 《열하일기》의 첫 부분인 《도강록》을 련재하고있었는데 여기서 원고료의 몇달분을 선불로 받았다. 막역한 친구인 리은상에게 또 한번 손을 빌렸다.
이렇게 체면을 불구하고 취한 돈에 금옥이 마련해준 돈을 합해서 광나루의 집을 샀다. 그러니 보잘것없는 집을 하나 사려고 또 빚더미우에 올라앉고말았다.
그런데 창신동집에서 제일먼저 나간것은 정인선이였다. 세상살이를 모르는 고모부가 집때문에 돈 구하러 소갈데 말갈데 가리지 않고 다니는것을 차마 눈뜨고 볼수가 없어 어머니에 대한 반발의 표시로 어머니에게 말도 없이 이 집에서 나가고말았다. 그후 어머니는 자기 의사에 따르지 않는 아들에게 학비를 보내주지 않았다. 정인선은 령천동변두리의 눅거리 하숙집에서 곤궁한 생활을 하며 옷가지와 책들을 팔아 하숙비를 물면서도 당장 노다지가 쏟아질 마산처녀가 찾아왔을 때 보기 좋게 거절해보냈다. 발목을 잡아묶던 가정과 절연하다싶이 한 그는 이제는 자기의 소신대로 살아갈것이다.
3월에 결혼한 박종식부부는 돈암동에 세방을 얻어서 나갔다. 그래서 그들은 부엌도 없는 단칸방에서 한데가마밥을 해먹으며 고생길에 들어섰다.
마감으로 리윤재네 이사짐이 이 집에서 나갔다. 오래 대를 이어온 가난한 살림살이라 볼것은 거의 없고 절구통, 매돌, 키 같은 농촌생활에 소용되는 구식세간살이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이 원시적인 세간살이가 은을 내게 되였다. 우차 하나에는 책을 상자에 넣어 가득 싣고 우차 두대에 장농들과 허줄한 세간살이들을 가뜩 실었다. 이 이사짐에서 책들만이 유독 눈에 띄여 이웃사람들이 내다보고 웬 이사짐이 책들뿐인가고 놀라는것이였다.
김해댁은 정씨가 모시고 동대문역에서 기동차로 떠나고 리윤재는 종갑과 종주를 데리고 우차뒤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인 종갑과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종주가 이제부터는 광나루에서 기동차로 통학하게 되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으나 무엇이건 변화를 좋아하는 종주는 우차사이를 왔다갔다하며 눈오는 날의 강아지처럼 들떠있었다. 그런다고 좀 철이 든 종갑은 철부지동생을 침울하게 흘겨보군 했다.
영애는 올봄에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영등포방직공장에 취직했는데 이번에는 사감으로 일하게 되였다. 이사하는 날 그도 공장으로 가고말았다.
그래서 창신동집에서 오붓하게 모여살던 식구들은 산산이 흩어지고 이제는 김해댁과 리윤재부부와 아들 둘만 남게 되였다. 성씨라는 녀인이 가난하면서도 평화롭게 살던 리윤재의 가정을 난파선처럼 뒤흔들어놓고말았다. 그것은 성씨의 재물욕때문이였다.
여전히 빛날은 중절모를 쓰고 무명두루마기를 입은 리윤재는 꼭 쥔 주먹을 곧추 땅을 향해 뻗고 어깨를 움씰움씰하며 우차뒤를 묵묵히 따라갔다. 그는 이 이사짐을 서울에 다시 끌어들인 일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의 마지막락향길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