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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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복실은 태혁이가 어디 혼사말이라도 난게 없는가고 묻자 총각들이란 열이면 열명 다 구봉령에 와서 가정을 뭇겠다는 사람은 없이 자기를 끌어갈 궁리만 한다며 우쭐해서 말했다.
《뭐 바늘 가는데 실 따라가기 마련이라나요. 일없습니다. 전 시집을 못가도 좋아요. 한평생
복실은 일생 혼자 살아갈 처녀처럼 명랑하게 웃어대였다.
작달막한 키에 눈이며 코, 입매가 오목조목하고 이쁘장하게 생긴 처녀! 복실은 여름철 물오이자라듯 하며 나날이 활짝 피여나기만 한다.
《그래도 시집이야 가야지. 아무렴 구봉령의 소문난 처녀도로관리원한테 적중한 신랑감이 없을가.》
태혁은 자강도에 그런 알맞춤한 청년이 없으면 온 팔도강산을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자, 복실이한테 장가드는 총각은 팔자를 고치게 될거라고
했다. 복실이가 자기한테 뭘 볼게 있어 그러는가고 하자 태혁은 입버릇처럼 복실이네집 정주간에 걸려있는 《가족출근부》이야기를 또다시 꺼냈다.
얼마전 도당전원회의때 태혁은 이 고난의 행군시기 복실이네 일가식솔이 풀죽으로 끼니를 에우면서 《가족출근부》까지 만들어놓고 구봉령의 령길을
지킨다며 《이 동무들이 진짜배기요! 참 기특하단 말입니다.》라고 자랑했다. 그날 전원회의에 참가한 성간군당책임비서 리홍덕은 흥분하여 구봉령을
넘어오던 길에 일부러 복실의 집에 들려 그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는 동무네 《가족출근부》때문에 성간군의 위신이 하늘만큼 높아졌다면서 이
고난의 행군시기에도 우리 자강도사람들이 얼마나 참되게 살았는가 두고두고 옛말을 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사실 복실이네가 집안식구들끼리 《가족출근부》를 만들어놓고 엄격히 출근정형을 기록해두지만 협동농장 분조장들이 가지고있는 로력수첩처럼
거기서 무슨 분배몫이 나오는것은 아니였다. 단지
복실은 오래간만에 만난 태혁이와 이런저런 재미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정신에 시간가는줄 모르다가 승용차가 자기네 집옆에 와서 멈춰서자 그의 곁으로 살뜰히 다가앉았다.
《책임비서동지, 오늘 밤은 우리 집에 들렸다 가십시오.》
네모반듯하게 오붓이 널바자를 둘러친 복실이네 집 창문에는 등잔불빛이 불그스름히 어려있었다.
빨간 기와를 얹은 고깔모양의 지붕과 널직한 마당, 두칸 방이 아늑하게 달린 새집… 태혁이가 복실이네 식솔들이 외진 령길에서 수고를 한다며 재작년 성간군 군당책임비서에게 과업을 주어 알뜰하게 지은 집이였다.
복실이네는 일년열두달 령길에 나가 살다보니 오가는 운전사들과 친숙해져 지금은 그 어느 차 운전사도 복실의 집에 들려 한바탕 떠들어대지 않고서는 오금이 쑤시여 구봉령을 넘지 못한다. 말이 구봉령의 외딴집이랄뿐이지 령을 넘나드는 운전사들의 중간정류소로 한시도 조용한 때가 없다. 단지 태혁이만이 복실이네 가정생활을 일껏 관심해주는 일군인데 늘쌍 바쁜 걸음을 하다보니 삼복간 무더운 날에 들려 랭수 한모금 마신 일 없다. 복실이네가 잘살기만 바라는 태혁은 이밤도 처녀의 부탁을 받고 인정이 푹 배인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복실이, 내 이후에 꼭 집구경이랑 하지. 오늘은 들릴새 없어. 정말 바빠서 그래.》
태혁은 어린 아이 달래듯 조용히 타이르고 복실을 집옆에 내려놓았다.
마침 밖으로 나온 운전사가 승용차의 꽁무니에서 복실의 삽자루를 꺼내주었다. 오늘도 자기의 크지 않은 소망을 이루지 못한 복실은 방금전의 쾌활하게 웃던 처녀같지 않게 눈물이 글썽해지고말았다. 그 사랑스런 처녀를 떨궈두고 보름만에 강계에 들어선 태혁은 이제 여기에서 벌어지게 될 격렬한 전투의 장면들을 련상해보자 저도모르게 가슴속이 울렁이였다. 그러나 아직은 이 크지 않은 도소재지에서는 밤의 고요밖에 별다른것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단잠에 들고 거리는 조용했다. 밤정적을 깨치며 장자강의 물소리만이 정가롭게 들려왔다. 자정이 훨씬 넘은 때여서 풍치좋은 장자강언덕우에 관서팔경의 제일루정으로 우뚝 솟은 인풍루며 남산밑의 도당청사도 짙은 어둠속에 잠겨있었다.
7
안해가 몇해동안 고심하던 연구사업을 포기하고 과학원으로 올라간 후에도 최성진은 성실한 남편답게 혼자서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서툰 주부노릇을 한다. 성진기사는 요즘도 자기 가정의 고충을 내색함이 없이 공장의 자동화를 완성하려고 전심전력을 한다. 명철은 기사의 성실성이 무척 부러웠다. 청년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있는 성진이도 그를 친동생처럼 여기면서 끔찍이도 보살펴준다. 오늘도 연통같이 길쭉한 도면말이를 옆구리에 끼고 공장구내길을 헐썩헐썩 걸어오던 성진은 명철이와 만나자 한참이나 장관우부위원장의 딸 은희와의 관계를 끈덕지게 따져물었다.
명철은 기사앞에서 문초를 받는 심정이 되여 진땀을 뽑다가 바빠 죽겠는데 별걸 다 꼬집어 판다며 픽 웃어버리였다.
지금 공장에서는 한동안 쭈그러들었던 자동선개조에 불이 달려 온통 기계를 해체해놓고 야단법석인 판에 엎친데 덮치는 격으로 공장안팎을 완전히 일신하기 위한 생산문화사업까지 겹쳐 벌의 둥지를 헤쳐놓은듯 하다.
어디 쪼물짝하게 처녀들의 치마자락에 매달릴 형편이 되는가. 명철이가 짜장 사내대장부처럼 치부하며 우쭐해도 할 말이 없는 때였다. 그는 아직도 제대군인기질이 물씬물씬 풍기는 청년인데다가 일깨나 제끼는 제관공이다. 푸접이 좋고 사람됨이 대바르다보니 처녀들속에서 인기도 이만저만하지 않다. 굳이 흠이라 하면 너무 더펄더펄하고 밸뚝시가 사나운것이라 할가. 하지만 쇠덩이를 주무르는 로동판에는 명철의 몸에 쩌들어배인 남아다운 성격이 걸맞고 금값에 나간다. 그러나 명철은 아무리 불깐 황소처럼 일밖에 모르며 처녀들을 거들떠보지 않는척 해도 때없이 대보름달처럼 떠오르는 은희의 얼굴을 막을길 없었다. 성진은 그의 마음을 뻔드름히 들여다보며 오금을 박아 말했다.
《명철이, 괜히 얼렁뚱당해버릴 생각일랑 말어. 이건 심중한 문제야.》
《성진형, 터놓고 말하면 나도 골통이 좀 아픕니다. 아무리 은희와 죽자살자해도 장관우부위원장이 땅땅 퇴방놓으며 잡아제끼니…》
명철은 마지못해 자기의 불만을 터뜨리고 멋적게 덜미를 쓸어만졌다.
《내 그래서 하는 말이야. 은흰 욕심이 나는 체네지만 장관우부위원장이 간단한 사람이요? 동무네 사랑이 승산있는 놀음인지 모르겠단 말요. 은흰 어떤 립장이요?》
《우리사이도 끊지 못하고 아버지눈치도 보며 독틈에 끼운 탕관격으로 고달프게 살아가지요.》
《그럴거요. 은희도 맘고생이 많은가봐. 어제보니 얼굴이 홀쭉해졌더구만.》
명철이가 은희를 점찍어둔 후로 성진은 은희를 대하는 태도가 예전같지 않았다. 성진은 어쩌다 공장구내에서 우연히 은희와 만나도 명철이만 못지 않게 그 예쁘장히 생긴 처녀를 살갑게 대해주는 사람이였다. 기사가 자기들의 사랑을 두고 마음을 쓰며 《흠》 하고 코김을 내불자 명철이도 속상해하는 시늉을 짓다가 퉁명스럽에 내뱉았다.
《제길헐, 내 차라리 은희를 단념해버리는게 어떨가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줄 아나? 애당초 성사되지 못할 일이면 이제라도 관둬야지만 한번 맺은 사랑을 끊는다는게 목숨을 내놓는것만치나 힘든 일이요. 덤비지 말구 오늘이라도 은희와 만나서 심중히 의논해보오. 은희도 똑똑한 처녀이니 궁냥이 있을게 아니요. 동무들의 일생문제인데 속대가 없이 시시하게 련애질이나 하지 말구.》
성진의 진정이 담긴 충고를 듣고난 명철은 어쩐지 가슴이 뻐근했다. 애당초 장관우부위원장의 손탁안에 단단히 쥐여있는 딸을 넘겨다본게 잘못된 일처럼 생각된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는데 정말 이제라도 잘 타산해보고 짝이 기울면 깨끗이 물러서는게 옳은 처사가 아닐가? 명철은 그렇게 혼자 강심을 먹다가도 은희와의 련정을 매정하게 끊어버리자니 자기 살점을 도려내는것 같아서 망설이게 되였다. 그렇다고 가망이 없는 일인걸 번연히 알면서 아리숭한 관계를 맺고 세월없이 무한정 시간을 끌수도 없다. 명철은 두루 심중이 복잡하던차에 성진의 당부대로 이날은 밤이 이슥하여 북문교아래의 조용한 유보도에서 은희와 은밀히 만났다.
그들의 아름다운 추억이 깔려있는 강변길이였다.
올해 정초 바로 여기 북천강가에서 두 젊은이의 첫 사랑이 망울졌었다. 명철은 유난히도 푸근한 그 인상적인 겨울밤 햇솜같이 푸실푸실 성글게 날아내리는 눈송이를 즐겨맞으며 은희와 함께 흰눈덮인 강기슭을 걷고 또 걸었던 일이 생생히 떠올랐다. 그날 흥분한김에 장갑도 끼지 않고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숫눈을 차며 다급히 달려온 은희… 아버지를 닮아 꽤 오지랖이 넓고 성격도 쾌활한 은희와 남다른 인연을 맺게 될줄이야 상상인들 했던가. 사실은 그들의 사랑에 다리를 놓아준 사람은 다름아닌 현이였다. 명철은 꿈많은 학창시절과 군사복무의 나날에 사귄 친우들이 많지만 녀동무는 유일하게 현이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씩 현이의 편지를 받은 때면 《귀뿌리 빠진 날》만큼이나 기뻐서 날뛰였다. 그에게는 현이가 소꿉시절의 소중한 동무이자 순결무구한 우정의 상징이였다. 그러던 어느날 군사우편으로 날아온 현이의 편지를 받고 꿈쩍 놀랐다. 뚱딴지같이 편지의 글줄들에 련정비슷한 감정이 미묘하게 흘렀다. 현이가 웬일인가? 그제야 꼼꼼히 살펴보니 어딘가 없이 현이가 쓴 편지같지 않았다. 틀림없는 현이의 필적이였지만 흉내를 낸것처럼 서툴다는것이 대뜸 알리였다. 개성이 또렷한 현이의 부드럽고 차분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명철은 제대되여 기계공장에 입직한 후에야 그때 장기간 대학통신수업을 떠난 현이를 대신하여 은희가 장난삼아 엉뚱하게 써보낸 편지였다는것과 그럴만 하게 두 처녀가 자매처럼 다정히 지낸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처럼 가까운 사이에도 서로의 비밀이 따로 있어 은희는 자기 동무가 명철에게 은근히 애정을 품고 편지거래가 잦은것으로 옥생각했다는것이였다. 은희의 그러한 오해로 명철이가 받은 회답편지를 다른 사람이 썼다는게 들짱나고 그것이 재미나는 웃음거리로 되여 특별히 명철의 호감을 샀던 《장난군처녀》 은희… 현이와 가까운 처녀이면 의례히 자기 마음에도 들리라 생각했었는데 사귀여보니 정말 그랬다. 은희는 청년들이 득실거리는 공무직장 청년동맹비서로 선출된 활달한 처녀였다. 결국 명철은 현이와 제일 친한 처녀를 일생의 둘도 없는 길동무로 삼은셈이였다. 그때 그들의 숫저운 사랑에는 은희아버지의 허락도 그가 정무원에서 철직되여 내려온 사람인 허진규의 아들이라는 께름한 감정도 섞여있지 않았다.… 오늘도 은희는 아버지의 완력에 눌려 마음고생하는 티가 없이 제편에서 먼저 명철의 팔을 살짝 끼며 생긋 웃었다.
《왜 갑자기 만나자고 했어요?》
은희는 유보도우로 둬발자국 옮기다가 갑자기 홱 돌아서며 응석이라도 부리듯 졸라댔다.
《어서 말해봐요.》
《그저…》
명철은 마지못해 무뚝뚝히 대답했다.
《에- 뚝쟁이같이 그게 뭐예요?》
은희가 곱다랗게 눈섭을 찡그리는데도 그의 구겨진 얼굴은 좀처럼 펴이지 않았다.
강계미인으로 소문난 처녀들속에서도 유별나게 인물이 두드러진 은희와 사랑을 약속했다가 남남사이처럼 정을 끊고 갈라지려니 가슴이 뭉청 내려앉는것 같았다. 하기야 은희도 나의 이런 괴로운 마음과 별다를게 있겠는가. 아마 이제와서 아던 정 보던 정 없이 헤여지자고 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기절해버릴런지 몰랐다. 하지만 전혀 승산이 보이지 않는 사랑이면 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깨끗이 단념하는게 옳다. 혹시 은희가 나때문에 꽃다운 청춘을 망쳐버릴런지 누가 알겠는가. 명철은 혼자속으로 그렇게 단단히 벼르면서도 정작 은희와 만나자 떡심이 풀려 한참이나 물소리만 철썩거리는 강변을 터벅터벅 걸었다.
《왜 그래요. 갑자기 만나자 하구선 암말도 없이…》
은희가 앞을 막아서며 안타깝게 팔을 마구 잡아흔들어서야 명철은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은희, 날 원망하오!》
《네? 그게 무슨 말이야요.》
은희가 깜짝 놀라며 두손으로 가슴을 싸쥐였다.
《나같은 잠뱅인 애당초 은희하구 상대가 되지 않는건데… 내가 잘못했소.》
《아니, 누가 뭐랬어요?》
은희는 눈앞의 일이 믿어지지 않는지 구붓한 눈섭을 치켜올리며 또다시 다급히 물었다.
《누군 누구겠소. 다들 그래. 은희가 나보담 몇백배로 낫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소.》
명철은 어떻게 해서나 은희를 설득시키려니 자기의 자존심같은건 안중에 두지 않고 마음먹은대로 툭 터놓고 말했다.
《설사 그렇다면 어떻다는거예요?》
《난 제몸값두 모르고 렴치없이 은희를 맘고생시킬수 없어. 은희의 아버지도 우리의 사랑을 한사코 막아나서는데… 아무리 애써도 안될 일이면 이제라도 동무한테 량해를 구하고 헤여질수밖에 없단 말이요.》
《그게 정말이예요?》
《정말이요.》
《뭐라구요?》
은희는 대뜸 눈물이 글썽하여 흘겨보다가 달려들어 종주먹으로 명철의 가슴팍을 다듬이질하듯 마구 두드려대였다. 그리고는 강물이 출렁이는 어둠속으로 정신없이 달려가는 바람에 명철은 기겁하여 얼른 뒤쫓아가서 그를 와락 그러안았다. 잔뜩 골이 난 은희는 그를 힘껏 떠밀치며 반두안에 든 고기처럼 요동을 쳤다. 연약한 처녀의 몸에 그런 힘이 있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제길 기운이 세다는건… 명철은 꺾쇠같은 팔로 은희를 꽉 껴안고섰다가 처녀가 잠잠해진 후에야 숨을 후 내쉬였다.
《왜 죽고싶어서 그러오?》
《그따위 달콤한 말은 듣기도 싫어요!》
명철의 뚝심에 맥을 싹 다 뽑은 은희가 눈물이 가랑가랑해서 또 한번 흘겨보았다.
《은희, 괜히 성내지 말고 내 말 들으라구. 동무만 괴로운줄 알어? 나한테도 고통스러운 마음은 있어. 이전에 우리 아버지가 정무원에서 일하며 출세욕에 빠져 애매한 사람들을 함부로 걸고드는 바람에 도당책임비서도 피해를 입었지만 난 창피해서 동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어. 서로 사랑한다면서말야. 지금까지 동무의 아버지가 왜 우리 사랑을 완강히 반대한줄 아오? 바로 우리 집안의 그 너절한 내막을 잘 알고있기때문이요. 그러고보면 동무아버지를 나쁘다고 할수도 없잖아?》
명철이는 자기 가슴속 진심을 송두리채 퍼내며 눈굽이 축축히 젖어드는것을 느꼈다. 이상하게 은희만이 좀전과 달리 싸늘한 눈길로 그를 지켜보고있었다.
《이제 와보니 동문 정말 졸장부였군요.》
《뭐라구? 그래 내가 아무리 사내대장부라도 그 엄연한 사실을 어떻게 부정할수 있어?》
은희는 눈물 한방울없이 눈살이 꼿꼿해서 쳐다봤다.
《명철동무, 동문 말해주지 않았지만 난 벌써 아버지한테서 그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어요. 그게 도대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동무의 아버진 아버지고 우린 우리란 말이예요. 난 아버지가 딸의 이 마음을 리해해주지 않는게 속상할뿐이예요. 그런데 동문 뭐예요. 제발 남자로 생겨 속대없이 이랬다저랬다 하지 말아요. 그래 현이아버진 우리의 사랑을 반대할것 같아요? 난 늘쌍 그 생각만 하면 아버지의 악설도 무서운줄 몰랐어요.》
명철은 갑자기 은희의 맵짠 말에 뒤통수가 뗑해나는것을 느꼈다. 자긴 왜 그 생각을 못했던지 알수 없었다. 명철이 자기가 뭔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어 한참이나 물결이 거뭇거뭇 뒤번지는 강물을 향해 멍청히 서있다가 돌아다보니 은희는 어둠속으로 혼자 달려가고있었다. 명철은 그를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맨땅에 펄썩 주저앉으며 두손으로 머리를 꽉 움켜잡았다.
(그래. 은희의 말이 옳다. 난 확실히 소갈머리가 막힌 놈이였어.)
8
(1)
(그럴수가 있는가? 그럴수가…)
태혁은 온밤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던 생각을 되씹으며 승용차의 유리창밖으로 흘러가는 새벽거리에 흐릿한 눈길을 던졌다. 성실이가 연구사업을
중단하고 떠나가버리다니?… 그의 괴로운 마음속에는 재작년 이맘때 성실을 집에 초청하고 즐겁게 하루저녁을 보내였던 일이 어제런듯 다시금 생생히
비껴들었다. 현이가 사랑하는 정서적인 음악이 은은히 흐르는 그 화기애애한 좌석에서 성실은
태혁은 갑자기 승용차가 멈춰서는 바람에 흠칫 놀랐다. 웬일인가 했더니 운전사가 차문을 열어제끼며 고함을 쳤다.
《여, 죽지 못해 그래!》
누군가 교통질서를 위반하고 승용차에 깔리울번 한 모양이였다. 이런 때면 아무리 무던한 운전사도 사나와지군 하는데 그의 앞으로 다가온 작업복차림의 웬 청년이 제편에서 도리여 씨근벌떡거리며 만만치 않게 대들었다.
《말 좀 조심하시오. 난 도당책임비서동지와 만나야 한단 말이요!》
청년이 기세가 등등해서 덤벼들자 운전사가 또다시 그를 무섭게 지릅떠봤다.
《이 친구 봐라. 썩 물러서지 못하겠어?》
《책임비서동지와 만나야 한다지 않소!》
《이거 정말… 별 망나니같은 자식 다 보누만.》
운전사가 성이 나서 문을 쾅 후려닫았다. 그의 모욕적인 언사에 부아가 난 청년은 연신 불한숨을 몰아쉬였다. 꽉 틀어잡은 주먹이 후들후들 떨리고 눈에는 뿌연 물기가 어려 펀들거리였다. 그냥 떡 버티고 선 청년을 묵묵히 바라보던 태혁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운전사동무, 청년을 태우시오.》
《저 망종같은 녀석과 만나시겠습니까?》
《저렇게 억지를 부리는데 별수 있소?》
운전사가 급히 떠나려던 차를 멈춰세우며 문을 벌컥 열었다.
《동무, 오늘 운수가 좋아. 어서 타오.》
청년은 군말없이 차에 타며 태혁에게 굽벅 인사를 했다. 별로 미안해하는 기색도 없는 그의 작업복에서 기름냄새가 물씬 풍겨왔다. 도당에 당도한 태혁은 보름만에 자기 사무실 책상앞에 마주앉으면서 청년에게도 자리를 권했다. 아직 도당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이여서 젊은이와 만날수 있는 얼마간의 시간여유가 있었다.
《어디서 일하오?》
《기계공장 제관공 허명철입니다. 절 모르시겠습니까?》
태혁은 청년의 다부진 몸과 깎아세운듯 한 목덜미, 치붙은 눈섭밑에 옹이구멍처럼 또렷하게 박힌 눈, 보통 감때사납게 생기지 않은 청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만났던 청년인가? 그러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 모르겠소.》
《그럴겁니다. 벌써 10년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전 도당책임비서동지가 정무원에 있을 때 함께 일한 허진규의 아들입니다.》
《으음?…》
태혁은 한손으로 안경테를 잡고 거뭇한 눈섭을 찡긋거리였다. 청년의 말은 그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랜 불쾌한 일을 다시금 상기시켰다.
허진규로 말하면 이전에 그가 운성광산기계공장 지배인으로 내려갈 때 허위자료를 제기한 장본인이였다. 자기의 출세를 위해 상급에 아첨해 동지들을
교묘하게 깎아내린 야비한
《허명철이라… 이제야 죄다 생각나는군. 아이때 보통강바닥에 짜하게 소문난 골목대장말이야. 괜히 우쭐렁거리며 싸움깨나 했지. 방금전에 내 차 운전사와 뚜꿔댄것만 봐두 그 불망나니 명철이가 분명해.》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