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8 회)

 

제 15 장

 

2

 

10월 하순이니 벌써 낮에는 늦곡식이 여물기를 재촉하듯 뙤약볕이 내려쪼이다가도 밤이 되면 더위는 씻은듯이 가시고 선기에 몸이 오싹오싹해진다. 가을하늘이 맑아져서인지 별빛도 유난히 령롱하다.

령천행 길에서 안산쪽으로 올라가는 둔덕에 높다란 벽돌담장을 넓게 둘러친 서대문형무소가 독립문을 내려다보며 복마전처럼 도사리고있다.

이승과 저승을 갈라놓은듯 꽉 닫긴 육중한 철문앞에는 이 깊은 밤에도 사람들이 여전히 웅게중게 모여서있다. 춘하추동을 가리지 않고 이 철문을 사이에 두고 수감자와 함께 옥살이를 하는 가족들이다.

오늘 밤에 출옥한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아침부터 철문앞에서 기다리는데 밤이 깊어가는데도 철문안에서는 쥐죽은듯이 기척이 없다.

밤 10시, 작은 철문옆에 있는 경비실의 문이 열리고 간수 둘이 나와서 작은 철문앞에 다가섰다. 이제 시작하나보다 하고 사람들이 군침을 삼키며 기다리는데 안에서는 여전히 기척이 없다. 한참만에 안에서도 웅성거리더니 안의 건물앞에 나와서 간수가 호명하는대로 사람들이 하나씩 나와서 작은 철문으로 다가온다. 그러면 간수가 또다시 명단을 보며 한사람한사람을 확인하고 작은 철문을 열어준다. 그 작은 철문으로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사람들이 죽음의 집에서 인간세상으로 첫 발걸음을 내딛는것이다. 수양동우회사건으로 검거한 사람들을 일년이상이나 미결수로 두고 재판이나 하며 질질 끌다가 싱겁게도 기소유예라는 명색으로 쫄금쫄금 석방하는것이다.

드디여 리윤재가 철문을 나섰다.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있던 종갑과 종주가 총알처럼 아버지에게 달려갔다. 두 아이는 무등 기뻤다. 그리고 감옥철문앞에서 얼굴이 종이장처럼 새하얀 아버지를 본 이 류다른 상봉은 그들의 일생을 통하여 잊혀지지 않을것이다.

리윤재는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언덕길을 비칠거리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제일먼저 뛴것은 어두운 하늘을 떠이고 우뚝 솟은 독립문이였다. 사대주의의 상징같은 영은문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1897년에 독립협회가 세운 이 화강석문은 오늘도 여전히 자주독립의 정신을 고취하고있다. 독립문을 바라보는 리윤재의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 뭘 생각하나?》하고 종주가 아버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하고 그는 두 아이의 손을 꼭 쥐였다.

그전에 어학회에서 신당리집으로 돌아갈 때 이렇게 두 아이의 손을 잡고 흔히 《푸른 하늘 은하수…》 하고 조용조용 노래를 불렀었다. 그때처럼 노래라도 부르고싶다. 이제는 무슨 말을 하건, 노래를 하건 못하게 막을자가 없다. 이 값비싼 자유, 더없이 소중한 가정의 단란을 누가 다시 빼앗아갈가봐 저어하듯 그는 두 아이의 조그만 손을 다시 꼭 잡았다.

그는 얼마전에 감옥에 면회온 안해에게서 창신동으로 이사했다는 말을 들었다.

창신동집은 정성택이 인선을 위해서 산 집인데 저당잡혀있던 리윤재의 집사정이 딱해지자 정성택이 그 집을 팔아 빛을 갚게 하고 누이네 가족을 창신동집으로 이사시켰던것이다.

리윤재가 창신동집에 와보니 집이 너무도 훌륭한데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한평생 이만큼 값나가는 집에서 살아본 일이 없었다. 어느 한집도 집값에 몰려 저당을 잡히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하긴 이 집도 제집은 아니지만.

아담한 대문을 들어서니 몸채와 아래채, 바깥채에 둘러싸인 반듯한 마당에 꽃밭이 꾸려져있는데 거기에 누가 심었는지 무궁화 한그루가 키높이 자라 이 늦은 가을에도 마지막꽃을 남기고있다.

분합문을 열고 아른아른 윤이 나는 대청에 올라서니 건너방문이 드르륵 열리며 김해댁이 허둥지둥 달려나온다.

리윤재는 어머니를 보고 마루에 엎드렸다.

《불초자식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래 몸은 성하냐?》

《예.》

아들의 어깨를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눈에서는 쌓이고쌓인 시름을 가셔내듯 눈물이 흘러내렸다.

늦게 기별을 받고 늦어와서 기다리다못해 한잠 자고난 김한규가 안방에서 달려나오며 소리쳤다.

《처남, 허허허.》

《매부구려, 하하하.》

둘은 호탕한 웃음으로 의사를 소통하는것 같았다. 리윤재는 김한규와 같은 호협한 사나이와 다시 만나는것이 더없이 반가왔다. 김한규는 리윤재와 같은 참된 인간이 없다면 이 황무지같은 세상에서 살기가 더 괴로울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하는 일도 성격도 취미도 달랐지만 모든것이 가식으로 차있는 세상에서 가식을 모르는 진실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서로 호흡이 통했던것이다.

그들이 안방으로 자리를 옮겨앉자 김한규가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처남, 이제야말로 <귀거래해여>를 부를 때가 되지 않았소? <전원장무어늘>(전원이 바야흐로 황페하거늘)이 아니라 <인간장무 어늘>(인간이 바야흐로 황페하거늘)이니 말이요.

이번에 아예 이사짐을 떠싣고 나랑 방이골로 갑시다. 우리 그 큰 과수원을 다루기가 힘에 겨웁소. 그 절반을 뚝 떼여주겠소. 농막으로 지은 빈집도 과수원 한복판에 있소. 과수를 가꾸어 생도를 해결하고 근심없이 저술을 하구려. 서울에 무슨 미련이 있겠소. 먼지와 쓰레기와 쪽발이의 게다짝소리에 넌더리가 나지 않았소? <안능히 신지찰찰로 수물지문문자호아!>(어찌 깨끗한 몸에 속세의 더러움을 입힐가보냐!)》

리윤재의 병색이 짙은 창백한 얼굴에는 홍조가 어리였고 딴세상을 꿈꾸듯 그의 눈에는 애수가 비끼였다.

《그렇게 하면 작히나 좋겠소. 광주는 원래 나의 본관의 땅이라 대대로 선조가 묻힌 곳이고 방이골을 이웃한 송파는 백제의 도읍터로 유서깊은 곳이요. 과수원에서 멀리 바라보이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으로 치욕을 남긴 곳이지만 우리에게 언제나 력사의 거울이 되여줄것이요. 이런 곳에서 제 손으로 심고 가꾼 낟알을 먹고 과수를 가꾸어 생계를 도모한다면 여생에 한이 없을거요. 그런데…》

불쑥 말을 중동무이한 처남을 나무라듯 김한규가 소리쳤다.

《그런데 어쨌단 말이요? 지나친 겸양은 자신에게 손해밖에 줄게 없고 고집은 자신에게도 해로운거요. 내가 바라는건 뜻맞는 친구를 맞아 늘그막의 외로움을 달래자는것밖에 없소.》

리윤재는 매부의 진정에 코마루가 찡해졌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는 아직 자기가 할 일을 다 못했소. 어학회의 조선어사전편찬은 민족의 성업이자 나의 필생의 숙원이며 이 사전이 완성되면 왜놈들이 아무리 란도질을 해도 우리 말과 글자는 보존될것이요. 결국 민족을 지키는 일이지. 우리가 십년이 넘도록 침식을 잊으면서 맞춤법을 통일하고 표준말을 사정한것도 결국은 이 사전에 귀결될거요. 이 사전편찬만 끝내면 내가 어디든 가겠소. 내 스스로 매부를 찾아가 마가리라도 빌어쓰겠소.》

《그때는 이미 내가 저승에 가서 처남을 원망하고있을거요.》하고 김한규가 서글프게 웃었다.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김병제가 드디여 말참네했다.

《고모부님의 말씀이 아버님을 생각해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아버님은 어학회와 사전편찬을 위해서 한걸음도 물러서지 않을것입니다. 비록 자기의 고어사전의 완성도 중요하지만 어학회에서 결정한 사전편찬을 하루빨리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님.》

리윤재는 자기의 생각과 일맥상통한 사위 김병제의 대바른 소리에 감복하였다.

《옳은 말이다. 하루빨리 사전편찬을 끝내는것이 선차이다. 지금처럼 왜놈들이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날뛰고있는 이때에 사전원고를 깊숙이 숨겨놓아야 할것 같다. 원고를 잘 건사했다가 우리 대에 해빛을 보지 못하면 후대에 가서라도 세상에 내놓아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되면 그것이 후대를 위해,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놓은것으로 되지. 안그렇나.》

리윤재가 김병제에게 한 말에 김한규는 자책을 느끼며 말하였다.

《과시 처남은 의인이요. 아니, 의인이라기보다 자기로서의 신조가 있는 참인간이요. 처남의 그 억센 의지가 담긴 말을 들으니 정말 생각되는바가 많소. 처남같은 사람은 이 험악한 세상에 그리 흔치 않다고 보오. 그리고보면 내가 처남에 비하면 발바닥에도 가지 못하는 옹졸한 인간에 불과하오.》 하고는 눈을 슴벅이였다.

그러자 리윤재는 《아니요, 처남도 의인중의 의인이요.》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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