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 회)

 

제 14 장

 

2

 

조선어학회의 침체상태는 날이 갈수록 더해갔다.

그것이 어느 한사람의 실책이나 무능에 의해서 초래된것이 아니라 총독부의 시책으로,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그렇게 된것이니 소귀신같다는 리극로가 아무리 모대겨야 신통한 수가 없었다.

간사장도 없고 월례회도 못하니 무엇 하나 결정할수도 없고 무엇 하나 집행할수도 없다.

모든 사업이 정지된 어학회에서 아직도 일을 계속하는것은 사전편찬실뿐이고 《한글》잡지는 5권 7호를 마감으로 내고 리윤재가 잡혀간후 이 잡지를 더는 맡으려는 사람도 없다.

눈에 보이는 왜놈의 압박보다도 눈에 띄지 않는 마음속의 좌절이 더 무서운것이라고 리극로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한징, 정렬모와 모임을 가졌다.

조국광복회 지하조직이 생긴 후 처음으로 가지는 비합법적인 모임이였다.

리극로가 먼저 말했다.

《오늘 우리 어학회지도부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였어요. 무엇 하나 결정할수 없고 아무것도 해결할수 없어요. 자멸할 위기에 빠졌지요. 왜놈이 바로 그걸 바라는거예요. 왜놈이 죽으란다고 그저 죽을수야 없는게 우리가 아닌가요. 우리도 살고 어학회도 살릴 방도를 얘기해봅시다.》

성미가 대바른 한징이 치받듯이 말했다.

《자멸할 위기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지도부가 마비되면 새 지도부가 나와야 하고 간사장이 잡혀가면 간사가 그 소임을 맡아해야 할게 아니요. 주인 없이야 무슨 일을 하겠나요. 손을 들어 선거는 못하지만 고루가 간사장의 소임을 맡아해야 한다 그 말이요.》

한징과 정반대로 동작도 말도 굼뜬 정렬모가 한마디한마디 눌러가듯 말한다.

《옳은 말씀이요. 우리 지하조직이 있는 이상 그게 어학회를 이끌어가지 못한다는 리유야 없지요. 사전편찬실이 아니라 어학회를 이끌어갈 생각을 안한건 고루의 잘못이고 그렇게 하도록 떠밀지 않은건 우리의 잘못이요.》

둘의 주먹질에 리극로는 허허 웃고 대답했다.

《간사장소임은 당분간 내가 맡는다치고 휴간하고있는 <한글>잡지는 누구에게 맡기면 좋을가요?》

《왜놈들이 보랍시고 리윤재님이 잡혀간 후도 <한글>잡지를 한호의 결호도 없이 내보냈으면 좋았을걸. 허나 이제야 하는수 없지. 이제라도 잡지를 정인승님에게 맡기면 어떨가요. 그래도 우리가운데서는 출판경험이 제일 많은분이 아닌가요.》 하고 정렬모가 말했다.

《옳은 말씀이요.》 하고 이번에는 한징이 맞장구를 쳤다.

리극로는 난처했다.

《정인승님이 하던 사전일은 누가 합니까? 잡지때문에 사전편찬을 지체시킬수도 없지 않아요.》

《그가 하던 일은 우리가 맡읍시다, 정선생.》 하고 한징이 정렬모를 돌아보았다.

정렬모가 고개를 끄덕이였다. 언제나 그들은 호흡이 맞았다.

이렇게 이날 세명의 모임에서는 지난날 어학회총회에서 결정하던것을 하나하나 결정해갔다. 그리하여 어학회가 생긴이래 처음으로 총회에서 선거를 받지 않고 리극로는 간사장으로, 정인승은 《한글》잡지 발행 겸 편집인으로 되게 되였다.

이튿날 리극로는 지하조직에서 내적으로 토의된 문제를 가지고 리희승간사와 하나하나 합의를 보았고 머리를 흔드는 정인승을 진드기처럼 달라붙어 설복했다. 그리하여 《한글》잡지는 5권 8호 한호만 결호를 내고 다시 나가게 되였다.

미나미의 암흑통치로 조선의 민족운동단체들이 하나하나 궤멸되고 마지막으로 남은 어학회에도 언제 경찰의 마수가 뻗칠지 모르는 이 엄혹한 나날에 어학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시시각각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완강한 의지로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조선어학회를 마지막까지 지켜갔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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