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5 회)
제 1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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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리극로였지만 요즘은 마음속에 위구와 불안이 쌓여갔다.
내외정세가 심상치 않았다. 7. 7사변은 로구교라는 한개 지역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사건이였으나 일본이 노리는것은 전쟁도발이였기때문에 여기에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을 들이밀고 본토에서 5, 6, 10사단을 화북지방에 투입하자 한개 일본병사의 실종사건이 전면전쟁으로 번졌다.
일본침략군은 이미 천진, 베이징을 점령하고 상해로 쳐들어가고있었다. 그 불똥이 당장 조선에 튀여왔다. 모든것을 전시체제로 바꾸고 전쟁분위기고취에 열을 올렸다. 침략전쟁을 일으켜놓고 《동아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대동아공영권을 위하여》 불의를 친다고 했다. 노래도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친다》고 불어댔다. 왜놈들은 하루가 멀다하게 어디를 함락했다, 어디에 입성했다 하고 불어대고 애꿎은 학생들을 내몰아 낮에는 가두행진, 밤에는 등불행진으로 거리를 부글부글 끓게 했다.
전쟁수행에 방해되는것은 무엇이건 없애치울 잡도리였다. 7. 7사변이 일어난지 얼마 안 있어 일본경찰은 하는 일도 없는 흥업구락부에 손을 대여 또다시 검거선풍을 일으켰다. 흥업구락부는 민족주의자들의 단체로서 성원은 리상재, 윤치호, 신흥우(그리스도교청년회 총무), 안재홍(《조선일보》 사장), 최두선(중앙고보 교장), 유억겸(연희전문학교 교무주임) 등 한 50명 되였다. 그 성원가운데 일부는 이미 친일파로 전락되였다. 그들은 윤치호와 유억겸이였다.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조선어학회에서는 간사장 리만규와 간사 최현배가 잡혀갔다.
리극로는 기가 막혔다. 간사 6명가운데서 동우회사건으로 간사들인 리윤재와 김윤경이 잡혀가더니 흥업구락부사건으로 간사 둘이 또 잡혀가서 간사라고는 자기와 리희승 둘이 남았을뿐이다. 게다가 일체 집회의 금지령까지 받고있었으니 어학회지도부의 기능은 마비되고말았다.
왜놈들에 의하여 강요된 어학회의 이 침체상태를 어떻게 타개할것인가 하고 리극로는 마음속으로 모색할따름이였다.
그러던 7월 하순 어느날, 사전편찬실에 마지막비품처럼 자리를 고수하고있던 한징도 돌아가고 텅 빈 방안에 리극로 혼자 남아 하던 일을 계속하고있었다. 락산으로 지는 해가 서서히 꺼져가는 빛으로 방안에 가을의 쓸쓸함을 자아내고있었다. 어디선지 라지오의 군가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이기고 돌아오리라 용감스럽게…》 하고 자못 의기충천하여 웨치던 소리가 차차 김이 빠지더니 마지막에는 《눈시울에 얼른거리는 환송의 기발》 하고 쓸쓸한 가을처럼 애상에 잠긴다. 저도 모르게 침략전쟁의 말로를 예고하는것 같다.
《이 왜놈의 군가야말로 지독한 정신적고문이군. 집요하게도 먹이려 들거던.》 하고 리극로가 머리를 젓고 카드와 원고를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했다.
때아닌 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오.》 하고 그는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것은 뜻밖에도 단심이였다.
《고루선생, 안녕하십니까.》
《아니, 이게 누구요. 그동안 어디 가있었기에 통 보이질 않았댔소?》
《다시 동냥중이 되여 절간들을 편답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의 동료들이 있으니까요.》
《허허허, 그리고 이젠 또 환속이라 이거야말로 파계승(계률을 깨뜨린 중)이군.》
리극로는 의미있게 웃었다.
이렇게 이야기의 뜸을 들인 후 단심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이제 저하고 어디 좀 가셔야 하겠습니다. 고루선생을 꼭 만나고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데?》
《가서 보시면 잘 아는 사람일겁니다.》
《그래?》 하고 리극로가 잠시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대답했다.
《그럼 가보지.》
둘은 종로네거리까지 걸어가서 동대문행 전차를 탔고 동대문에서 다시 청량리행으로 갈아타고 종점에서 내렸다. 교외의 한적한 길을 15분가량 걸어가니 게딱지같은 집들이 총총히 들어선 이름모를 야산이 나타났다. 서울교외에 흔한 빈민촌이였다.
울타리도 없이 따닥따닥 붙은 집들사이의 좁은 길로 한참 올라가다가 모로 꺾인 골목길로 들어가서 막다른 집앞에서 둘이 멎어섰다.
《이게 제집입니다. 루추한 곳에 오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원, 천만에. 내 집도 이보다 나을게 없어요.》
이렇게 둘은 말을 주고받으며 길에서 바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칸반짜리 단칸방에 부엌이 붙어있는 초라한 집이였다. 방안에는 침구를 쌓아올려놓은 궤짝 하나밖에는 아무 가구도 없다. 방아래목에 앉아서 책을 읽고있던 신사복차림의 중년사나이가 벌떡 일어서며 환성을 질렀다.
《고루선생, 안녕하십니까?》
그는 최형우였다. 리극로는 놀라서 솥뚜껑만 한 손으로 그의 갱핏한 손을 덥석 쥐였다.
《아니, 그 멀고 위험한 길을 또 오셨군. 지난해 왔다가신 다음 마음이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적들의 한복판에서 살얼음을 걷듯 하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최형우가 단심을 가리켰다.
셋이 자리를 잡고 앉자 리극로는 최형우와 단심을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두분은 어떤 사이시오?》
《장춘에 오셨을 때 내가 최기봉군에 대해서 이야기한 일이 있었는데 생각이 납니까?》
리극로가 그 큰 눈을 디룩거리다가 말했다.
《아, 생각나요. 그 최기봉군이 바로 이 단심대사란 말이요? 허허, 참.》
《그후 나는 장춘에서 <동아일보>지국장을 하게 되였고 최군은 국내에 들어와 동냥중이 되였습니다. 가는 길이 각각 다른것 같지만 우리는
《허, 희한한 이야기로군.》 하고 리극로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최형우가 말을 이었다.
《
리극로의 얼굴에는 감격의 빛이 어리였다. 그의 심중을 살피듯 지그시 바라보던 최형우가 말을 이었다.
《왜놈의 중일전쟁확대는 우리 나라 혁명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국면을 열어줄겁니다. 민족적대단결에 의한 반일항쟁은 오늘날 우리의 초미의 과제입니다.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반일민족통일전선체인 조국광복회에 망라한다면 이 전민항쟁의 일익을 담당하게 될겁니다. 고루선생,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학회사람들의 정치적동향을 잘 아는 리극로는 이 일이 너무도 엄청나게 생각되여 한참 대답을 못했다.
《그동안 내가 몇분을 개별적으로 접촉해보았습니다.》 하고 최기봉이 말참네했다.
《리윤재선생은
한징선생은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보고 어떤 보수적인 사람도 흠잡을데 없는 민족적인 정치강령이라고 말씀하셨고 정렬모선생은 간도에서 생활하실 때부터 청년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적영향을 많이 받은분입니다. 리윤재선생은 령어(감옥)의 몸이 되셨지만 한징, 정렬모선생 같은분들과 손잡고 조국광복회조직을 꾸릴수 있지 않습니까, 고루선생?》
리극로는 이 말에 놀라서 최기봉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는 최형우를 돌아보고 물었다.
《그래서 조직을 뭇는다면 그 상급은 어디이고 지도는 누가 합니까?》
《그 조직을 령도하는분은
리극로는 자기를
밤이 이슥해서 그 집에서 나온 리극로는 청량리의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며 자기 생애에서 어제와 오늘을 확연히 갈라놓는 중대한 전변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했다.
(이제는 조선어학회가
결심이 서니 초가을의 선기가 그의 가슴속까지 스며드는것 같았다.
며칠후 저녁 텅빈 조선어학회회관 2층 사전편찬실에서 리극로, 한징, 정렬모가 모여앉아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에 최기봉이 참가하여 후날 전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비밀에 묻혀버릴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연설도 토론도 없었다. 비밀리에 의견을 나누고 완전한 의견일치를 보고서야 가질수 있었던 이 비밀회의에서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한몸바치겠다는 확고한 결심 이외에는 요구되지도 않았다.
셋이 조용히 손을 들어 조선어학회에 조국광복회지하조직이 탄생했음을 선포했다. 이 고고성을 들은 사람은 없었지만 그것은
회의는 조용히 끝났다. 너무도 짧은 회의의 너무도 벅찬 흥분으로 사람들은 회의가 끝났는데도 여전히 회의하듯 조용히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