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13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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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8월 《동아일보》에 베를린올림픽 마라손경기에서 1등을 한 손기정의 가슴에 단 일본일장기를 지워버린 사진이 실려 총독부 경무국과 경기도경찰부가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미나미 지로가 제8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하기 전날에 있은 일이다.

올림픽 마라손경기에서 손기정이 1등을, 남승룡이 3등을 했다는 소식에 2천만 조선동포가 물끓듯 했다. 그러나 그 환호가 곧 민족적통분으로 바뀌였다. 조선선수들은 조선사람이면서 조선사람으로서 국제경기에 출전할수 없었고 우승을 하고도 그 영광을 조국에 돌릴수 없었다. 나라없는 그들의 가슴에는 일본의 기발이 달려있었기때문이다. 동아일보사에서는 그 일장기를 차마 그대로 신문에 낼수 없었던것이다.

검거선풍이 불었다. 동아일보사 사장, 주필, 편집국장, 사회부장, 사진부장, 서화반원이 잡혀갔다.

이틀후에 미나미총독은 《동아일보》에 무기정간처벌을 내렸다. 이것이 그가 총독으로서 조선사람에게 한 첫 인사였다.

미나미는 총독으로 부임하는 날 훈시문에서 이미 이렇게 늘어놓았다.

《…아시아와 세계의 대세를 볼줄 모르고 고루한 민족주의적편견에 사로잡힌자가 있고 또 공산주의자들의 준동이 있음은 유감한 일이며 이는 하루속히 절멸되여야 한다. 제국 9천만동포가 거국일치 국체관념에 영전하여야 하며 특히 이는 조선에서 가장 요긴한 일이고 반도시정의 근기이다. 신사참배의 려행, 황성요배, 국기게양의 장려, 국가의 존중 및 국어(일본어)보급의 권장 등으로 성과를 거두어야 할것이다.》

너무도 조선민족을 무시하고 위협하는 제일성이였다. 식자가 있는 사람들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분노와 함께 불안을 느끼며 쑤군거리는것이였다.

《이 미나미란 놈이 데라우찌(제1대총독)나 하세가와(제2대총독)처럼 또다시 무단통치를 하려는게 아니야?》

《그럴지도 모르지. 미나미는 조선주둔군사령관을 할 때 이미 조선사람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칠것과 왜말의 상용, 조선고유풍속의 말살을 주장한 놈이니까.》

미나미는 부임하자 경무국장을 미바시로, 학무국장을 시오하라로 바꿔치웠다. 강권정치의 진영을 꾸리는것이였다.

정치에 민감한 사람들은 이 땅에 서서히 밀려오는 저기압을 느끼고 불안해했다.

바로 이러한 때인 1936년 10월 28일에 조선어학회에서는 훈민정음 반포 490돐기념 축하회를 성대히 가지였다. 이 한글날이 더욱 뜻깊은것은 그동안 간난신고를 거듭하여 사정한 표준말을 엮어놓은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을 세상에 내놓게 되기때문이다.

표준말사정은 여러해에 걸쳐 간고하게 진행되여왔다. 그 사정위원은 각 도별로 73명이 망라되였는데 (그중 실지 참가자는 51명이였다.) 그들은 다 우리 사회의 각계의 대표적인 인사들이였다. 1933년부터 시작하여 작성된 초안을 1935년 1월 2일부터 6일까지 충청남도 아산군 온양면 온천리에서 제1독회를 가지였다. 제2독회는 그해 8월 4일부터 9일까지 우의동 봉황각에서, 제3독회는 이듬해 7월 30일부터 8월 1일까지 인천제1공립보통학교에서 열어 토의를 거듭했고 독회와 독회사이에는 수정위원을 뽑아 수정정리를 계속하여 이제야 발표하게 된것이다.

이날 오후 여섯시에 인사동 천향원에 교육계, 언론계, 문예계, 종교계의 인사 130여명이 모였다. 래빈으로서 이채를 띤것은 도산 안창호였다. 그는 1932년에 상해에서 윤봉길렬사의 거사가 있은 후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조선에 압송되여 대전감옥에서 3년 복역하다가 쉰여덟살에 가출옥되여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산에 들어가 병치료를 하던중 서울에 올라와서 한글날축하회에 모처럼 참석한것이다. 그 유명한 코수염을 단정하게 다듬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병색이 짙었다.

축하회 겸 발표식이 개최되였다. 간사장 리만규가 개회를 선언했고 리병기가 훈민정음을 랑독할 때는 모두가 일어섰다. 그 다음 최현배의 기념사에 이어 리극로가 표준말사정경과를 보고했고 이어서 리윤재가 이번에 발표하는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에 대하여 해설했다.

여전히 무명두루마기를 입고 연탁앞에 어색하게 나선 그는 어찌보면 도회지에 처음 나온 촌사람 같았다. 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투박한 경상도억양이였다. 그는 말했다.

《이제 발표하는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은 조선어학회에서 3년전(1933년)부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조직한이래 사정에 애써오던것입니다. …

이 책에서 가장 중대히 처리되여있는 <같은 말>과 <비슷한 말>에 대하여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같은 말>이라 함은 한 사물에 꼭같은 뜻의 말이 있어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것이니, 이것을 전등어라 하며 그 여러개가운데서 하나만 뽑아 표준어로 정하고 나머지는 다 버리는것인데… 가령 <하늘, 하눌, 하날> 이 세개가 전등어인데 <하늘>이 표준어로 작정될 때는 그밖의것은 비표준어 즉 사투리로 돌아가 장차 어느 시기에는 다 도태를 받게 될것입니다. 또 <갈구리, 갈고리, 갈쿠리, 갈코리, 갈구지, 갈쿠지, 갈고랑이, 갈구랑이, 갈코장이, 갈쿠장이> 이렇게 십여개나 되는 전등어도 있으나 그중에서 한개만 표준어로 세우고 그밖의것은 다 치워버리는것입니다. 이렇게 어음으로 조금 차이가 나는것만 있는것이 아니라 <범, 호랑이>라든지 <옥수수, 강냉이>와 같이 소리가 아주 다르면서 뜻이 같은 말도 있습니다.

<비슷한 말>은 얼른 보아서는 전등어로 보기 쉬우나 실지 그 내용을 자세히 따지여보면 거의 같다가도 어느 점으로든지 다른것을 발견할수 있고 또 달리 쓰이는 때도 있으니 이것을 각립어라 합니다. 가령 <잔말, 잔사설, 잔소리> 이 세개가 다 같은 말인듯 하나 <잔말>은 보통으로 쓰는 쓸데없는 말이요, <잔사설>은 늘어놓는 쓸데 없는 말이요, <잔소리>는 듣기 싫은 쓸데 없는 말이라고 각기 달리 해석할수 있는것이며, 또 <데익다, 설익다>와 같이 쓰이는 수도 있으나 <데익다>는 익은듯 하되 익지 아니한것이요, <설익다>는 반쯤 익은것으로 분간이 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들은 어느것이나 다 제가끔 표준어의 자격이 있는것입니다. 그중에도 처리하기 곤난한것은 이렇게 같으면서도 다른 말이 이십, 삼십에 넘는것이 많은것입니다. 이것을 일일이 분석하여 그 다른 점을 나타내기에는 여간 고심이 드는게 아닙니다. 한가지를 례를 들면

 

아롱아롱, 알롱알롱, 아로롱아로롱, 알록알록, 알로록알로록, 알락달락, 알쏭알쏭, 아롱다롱, 알롱달롱, 아로롱다로롱, 알록달록, 알로록달로록, 알락달락, 알쏭달쏭, 어릉어릉, 얼룽얼룽, 어루룽어루룽, 얼룩얼룩, 얼루룩얼루룩, 얼럭덜럭, 얼쑹얼쑹, 어룽더룽, 얼룽덜룽, 어루룽더루룽, 얼룩덜룩, 얼럭덜럭, 얼쑹덜쑹.

 

이러한 말에 다 각기 해석을 붙일 때 반문의 모양이라는 뜻밖에는 다른 뜻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다만 개념뿐이요, 완전한 해석으로는 보기 어려울것입니다. 우리의 사정에서는 특별히 그것이 다 다르다는 뜻을 밝히였습니다. 이를 보면 조선말이 얼마나 형용하는 말의 갈래가 많아 그 미묘한 뜻을 나타내였는가를 가히 살필수 있습니다. 조선말에는 이러한것이 수없이 많아 그 말가운데에는 모두 대소, 후박, 심잔, 강약, 경중, 완급 등 여러가지로 정도의 차이와 어감의 차이가 포함되여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들을 처리하는데는 보통말보다 백배의 노력이 드는것입니다. 그런데 <조선어사전>이란데는 조금만 뜻이 근사한것이면 덮어놓고 전등어로 처리하며 우에 례를 든 <아롱다롱>에 관계된 말 삼십개에 가까운것을 전부 같다고 하여놓았을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표준어를 사정한것은 이것이 다 각기 다르다는것을 찾아내여 낱낱이 그 뜻을 밝힌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이담에 나올 사전에는 그 매 단어의 아래에 각각 달리 해석이 붙게 될것입니다. 그러므로 표준어가 확립되기 전에는 완전한 사전을 만든다는 말을 할수 없을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표준어의 사정은 맞춤법과 한가지로 사전편찬사업의 두가지의 큰 기초공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정의 범위에 든 어휘수가 모두 9 412개이며 이중에서 표준어로 확정된것이 6 111개입니다. 여기에 빠진것도 물론 많을것이나 그것은 다음날 사전에서 다 규정할 작정입니다.》

리윤재는 더 가야 할 먼길을 앞에 놓고 이미 지고온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여가려는듯 조용히 앉았다.

그런데 이때까지 순조롭게 이어오던 축하회가 뜻밖의 사건으로 소연해졌다.

래빈측을 대표하여 안창호가 등단하여 축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원래 뛰여난 연사여서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그의 말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날은 건강이 나빠서 그런지 조용한 목소리로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만난을 무릅쓰고 민족의 만년대계의 초석을 쌓는 성업을 이룩하기 위하여 바친 로고를 치하했다.

그런데 연설의 허두를 끝내기도 전에 림석한 종로경찰서 경관들의 입에서는 《주의!》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안창호는 경관나부랭이 같은것은 외눈으로도 돌아다보지 않고 유유하게 연설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는 연설을 더 계속할수 없었다. 림석경관석에서 불의에 《발언 중지!》소리가 터져나왔기때문이다. 민족주의운동의 거두의 하나이고 갓 감옥에서 나온 그의 연설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을 우려한 경찰이 그의 연설을 아예 막아버리자는 잡도리 같았다.

장내가 웅성거리고 분격한 학생들이 들고일어났다. 허월이 림석경관석을 향하여 소리쳤다.

《발언중지의 리유를 말하시오.》

왜놈경관이 갈구리눈을 해가지고 소리쳤다.

《그건 너희들이 알바가 아니다.》

《리유없는 발언중지란 있을수 없소. 도산선생의 연설을 계속하게 하시오.》

뭇소리가 웨쳤다.

《연설을 계속하게 하라!》

《너희들은 경찰에 대항하고 법에 맞서자는거냐?》

정인선이 침착하게 말했다.

《우리는 법에 맞서는게 아니라 언론을 유린하는 일본법을 모를뿐이죠.》

《뭐, 일본법? 너 이 새끼, 비국민이구나.》

경찰에게는 사리도 론리도 통하지 않는다. 오직 그들의 무제한한 전횡이 있을뿐이다.

경관 둘이 뛰여나와서 학생들의 따귀를 치고 끌어다가 회의장뒤에 꿇어앉히였다.

어수선하고 불유쾌한 가운데 축하회는 끝났다. 경관들은 학생들을 종로경찰서로 련행해갔다.

사람들이 식당으로 자리를 옮겨앉고 만찬회가 벌어졌으나 불쾌한 기분은 가셔지지 않았다.

특히 리윤재는 경찰에 잡혀간 조카 정인선과 여러 학생들의 일이 어떻게 번질지 몰라 불안했다.

우울한 만찬회였다. 그리고 그후 경찰에서는 조선어학회의 일체 집회를 금지시켰으니 이것이 사실은 마지막 한글날축하회이자 마지막 만찬회였다.

리윤재와 김윤경은 안창호와 자리를 같이했다.

안창호는 식사도 얼마 안하고 묵묵히 앉아있었다. 리윤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도산선생, 건강에 류의하셔야 되겠습니다. 신색이 아주 좋지 않습니다.》

안창호는 빙그레 웃었는데 그것은 마음의 아픔을 짓씹는것 같은 웃음이였다.

《수족이 묶인 오늘 나에게 건강이란 너무도 호사스런 말이지요.》

병색이 흐르고 지친듯 한 그의 얼굴에는 오랜 망명과 독립운동으로 파란많은 그의 한생이 비껴있는듯 했다.

《오늘 도산선생의 뜻있는 축사를 듣지 못하고만게 퍽 유감스럽습니다.》 하고 김윤경이 말했다.

《나도 유감스럽습니다.》라고 안창호는 벌써 피로한듯 나직이 말했다.

《하고싶었던 말은 다른게 아니지요. 그동안 나를 포함하여 민족운동을 한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국내에서, 망명지에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습니까. 그들의 일이 다 무익했다고는 할수 없지만 결과를 놓고보면 크게 거머쥘게 없습니다. 그런데 조선어학회에서는 소리없이 큰일을 했습니다. 철자법을 제정하고 표준말을 사정하여 우리 국문의 통일을 이룩해놓았으니 이것은 말살위기에 처한 우리 말과 글자를 지키고 민족재생의 기틀을 마련한것입니다. 말까지 빼앗기면 민족은 영영 망하고맙니다. 여기에 바로 국문운동의 민족사적의의가 있는것입니다. 실력배양을 부르짖어온 내가 오늘은 오히려 여러분의 하는 일이 부럽습니다.》

《도산선생이 애써 육성하신 수양동우회가 오늘 도산선생의 의도에 어긋나게 나간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고 김윤경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나미의 공포정치하에서는 조선의 산천초목도 변색하지 않을가요?》

《그렇다고 흥사단 국내조직의 책임자인 리광수처럼 친일로 기울어질수야 있겠습니까.》 하고 리윤재가 내놓고 말했다.

《리광수.》

안창호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변절은 이미 오랬지요. 상해림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주필까지 하던 그가 귀국해서 무사했지요. 안해 허영숙을 시켜 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와 미리 내통해놓았으니까요. 그때부터 그는 이미 변절자였습니다.》

한참 입을 다물고있던 안창호가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일찌기 로동자와 손을 잡았더라면 리광수와 같은 배신자가 생기지 않았을걸!》

마치 생애를 총화해보는듯 한 회한에 잠긴 말이였다. 한생을 회한속에 바라보는 그는 이미 만년이였다. 그리고 이 잠간의 대화가 그와의 마지막이야기였다. 그는 동우회사건으로 다시 검거되였다가 병으로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겼는데 거기서 환갑이 되는 해에 별세했던것이다.

만찬회를 끝내고 인사동에서 신당리집까지 그 먼길을 터덜터덜 걸어가는 리윤재의 다리는 무거웠다. 세해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표하는 한글날기념식을 끝내고 돌아갈 때는 발걸음이 한없이 가벼웠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중대한 《표준말모음》을 세상에 내놓은 오늘 응당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듯 어깨가 가벼워야 할것인데 그렇지가 않았다. 회한에 잠긴 도산의 창백한 얼굴이 자꾸 눈앞에 사물거렸고 경찰에 련행되여간 학생들의 신상이 념려되였다. 림석경관에게 당당히 항의하던 정인선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것은 귀공자와 같은 그로서는 너무도 새로운 모습이였다. 그런데 그 애가 꽤 견디여낼가? 아무튼 이 일이 확대되지 말아야 할텐데… 그런데 최기봉은 어디 갔을가? 만찬회석상에는 빛도 보이지 않았지. 무슨 급한 일이 생긴 모양이군.

그가 이렇게 번거로운 생각을 되새기며 탑골공원을 지나 종로거리로 나서려는데 앞에서 분주히 걸어오던 사나이가 《선생님.》 하고 불쑥 걸음을 멈추었다. 최기봉이였다.

《만찬회에는 참석한것 같지 않은데 어딜 갔댔소?》

《제가 그런데 낄 계제가 됩니까.》

《별소릴 다하는군.》

《그런데 저, 래일부터 열흘동안 제가 어디 좀 갔다와야겠습니다. 일없겠습니까?》

《그러길 내가 도리여 부탁하고싶을 지경이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제가 갈길이 바빠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어서 그렇게 하오.》

최기봉은 요긴한 말만 하고는 어둠속에 급히 사라져버렸다. 몹시 서두르는게 알렸다.

이튿날 리윤재는 리극로에게 단심이 가정사정으로 열흘동안 려행을 떠났다고 간단히 말해주었다.

열흘후에 최기봉이 저녁 늦게 리윤재의 집으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이전처럼 동냥중복색을 하고있었는데 먼길을 걸어왔고 미처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었는듯 행전이 몹시 더럼타있었고 얼굴은 까칠했다. 리윤재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또다시 동냥중노릇을 했소? 영 환속한줄 알았더니.》

《마음대로 사람들을 찾아다니기에는 이노릇 이상 편리한게 없습니다. 환속을 하든 안하든 상관있습니까.》 하고 최기봉도 웃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눈치채고 동냥중을 단속하라는 지시라도 내리면 어떻거겠소?》

《아직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은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아오?》

최기봉은 나직이 말했다.

《종로경찰서에 저와 통하는 경관이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서 이번에 련행된 학생들의 형편을 좀 알아보았습니다. 학생들이 고생은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사람의 입에서도 그들의 독서회를 지도한게 저였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렇지만 나는 최군의 신변이 아직도 안전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아요.》

잠시 동안을 두었다가 최기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신변의 위험으로 말하면 저보다도 오히려 선생님이 더합니다. 1928년에 공산당이 해체된 후 공산당재건운동을 집요하게 탄압하던 왜경이 이제는 민족주의운동단체에 손을 대려고 하는것이 분명합니다. 미나미란 놈의 잡도리를 보아 모르겠습니까. 그놈의 <황민화>라는 암흑통치에서 성가신것이 민족주의운동단체입니다. 민족주의운동단체에 대한 탄압에서 첫 대상이 어디겠습니까? 크게 잡아서 수양동우회, 흥업구락부와 함께 조선어학회는 탄압을 모면할수 없습니다.》

리치에 맞는 말에 리윤재는 고개를 끄덕일뿐이였다.

마침 늦은 저녁상이 들어와서 검소한 식사를 둘이 말없이 나누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신변에 대한 불안을 가시지 못한채 다시 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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