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2 회)

 

제 12 장

 

4

 

그해초에 최기봉이 리윤재를 불의에 찾아와서 말했다.

《선생님, 저를 어학회에 받아주실수 없습니까? 배운게 없는 저는 어떤 심부름이라도 하겠습니다.》

《동냥중이 이제는 보수도 못 받는 심부름군이라.》하고 리윤재는 서글프게 웃었으나 필경 무슨 중대한 사연이 있어 그러리라 생각하고 경리간사인 리극로와 의논하고 그를 《한글》편집실 조수로 받아들였다.

하긴 그때 리윤재에게는 협조자가 절실히 요구되였다. 그해 3월에 리우식, 장현식과 같은 뜻있는 사람들로 사전편찬후원회가 비밑단체로 구성되여 만여원을 적립했고 유명무실하던 사전편찬회는 사전편찬사업을 조선어학회에 이관하고 해체하였으며 조선어학회는 4월 1일부터 사전편찬사업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였다. 맞춤법통일안이 이미 발표되여 널리 쓰이게 되였고 표준말사정도 거의 완성되여 발표할 단계에 이르렀으니 사전편찬의 기초작업은 거의 갖추어진셈이다. 리윤재는 사전편찬위원으로서 사전편찬실무에도 종사해야 하고 《한글》잡지도 발간해야 하니 몸 하나를 둘로 쪼개도 모자랄 형편이였다. 요구되던 협조자가 생기자 그는 《한글》잡지의 원고편집과 교정은 자신이 맡아보고 원고수집, 인쇄소와의 거래, 잡지발송과 같은 일은 최기봉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거의 무보수로 일해야 하는 조건에서 최기봉의 생활을 어떻게 보장해줄것인가 하는것이 그에게 근심이였다.

이 일을 걱정하니 최기봉은 도리여 이렇게 대답하는것이였다.

《저야 정 먹을게 없으면 때때로 동냥중노릇이라도 할수 있지만 지금 선생님의 형편은 저보다 더하지 않습니까.》

사실 그렇다. 리윤재가 마지막으로 시간강의를 맡고있던 중앙고보, 배재고보, 동덕녀고에서 학무국의 지시로 일시에 해임되고나니 그에게 수입이 생길데라곤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 겨울이 닥쳐오겠는데 장작 한차를 살 돈도 없고 김장거리를 마련할 돈도 없다. 이제 곧 식량도 떨어질것이다. 아무리 곤궁에 시달려도 그가 그런것을 남앞에서 입우에 올리거나 낯색에 나타내는 일이 없으니 사람들은 그를 락천가라고 하는것 같다.

그 락천성때문에 고생하는것은 가족들이였다. 정씨는 아침부터 밤까지 삯바느질을 손에서 놓을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아이들의 학비때문에 매일같이 달달 볶이였다. 맏딸 순경은 지난해에 신당리에 이사오기 전에 김병제와 결혼하여 딴살림을 났지만 아직 녀고에 다니는 두 딸은 남처럼 입히지도, 신기지도 못해 어머니의 마음이 편할리가 없었다. 요즘 시어머니가 그리도 즐기던 담배까지 끊고 속이 탈 때는 랭수만 벌컥벌컥 마시니 정씨는 마치 바늘방석에 앉은것 같다.

리윤재는 신당리에서 화동 어학회까지 20리가 거의 되는 그 먼거리를 매일같이 걸어서 다니였다.

그날도 그는 아침일찌기 걸어서 어학회에 출근했다. 삐걱거리는 나무층계로 2층에 올라가면 오른쪽의 세칸쯤 되는 큰방이 사전편찬실이고 왼쪽의 한칸 남짓한 방이 《한글》잡지편집실이다. 두방사이의 벽에 《말씀은 간단히 합시다.》라는 방문이 붙어있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바쁜가를 말해준다.

조선어학회는 2층의 이 두방이 전부이다. 물론 제집이라고 쓰고 사니 남의 집에서 곁방살이를 할 때보다는 한결 낫겠지만 궁상은 여전하다. 월례회나 회원모임이 없는 날에는 학교교원을 겸직하는 회원들이 나오지 않기때문에 이 빈약한 회관조차 비교적 조용하다. 그런데 요즘 멀지 않은 안동별궁에서 왜놈들이 거기다 저희들의 무슨 건물을 짓는다고 고궁을 철거하는 소음과 연장소리가 들려 회관에서 조용히 일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정질을 하는것 같다.

리윤재가 《한글》편집실에 들어가니 혼자 방을 지키고있던 최기봉이 얼른 일어서서 벗어든 모자를 받았다. 리윤재는 그가 보고있던 《한글》잡지 7, 8호 합호를 받아서 보다가 한숨을 쉬였다.

《한글》잡지의 발간은 의연히 간고했다. 1937년 6월호는 하는수없이 또 휴간했고 8월에야 7, 8호를 합호로 내보내게 되였던것이다.

최기봉의 책상우에 그가 읽다가 둔듯 펼쳐진채 있는 신채호의 《조선사연구초》가 문득 리윤재의 눈에 띄였다. 그 책은 신채호가 왜경에게 체포되였다는 소식에 접한 사회계의 비등한 여론에 따라 국내에서 간행한것이다. 그 이듬해에는 《조선일보》에서 《조선사(상고사)》를 련재했고 《동아일보》에서는 《조선상고문화사》를 련재했다. 이렇게라도 하여 학자로서의 신채호의 값어치를 세상에 알리는것이 우리 사회가 고작 할수 있는 석방운동이였던것이다.

그 책을 들어 책장을 넘겨보는 리윤재의 마음속에서는 이미 세상 떠난 신채호의 불우한 말로가 떠오르는것이였다. 신채호는 지난해 3월25일에 려순감옥 독방에서 10년 징역의 만기출옥 1년 8개월을 앞두고 쉰여덟살을 일기로 옥사했던것이다.

우국지사이며 이름난 력사학자인 신채호의 불우한 생애를 돌이켜보는 리윤재의 마음은 아프고 괴로왔다. 그는 베이징에서 신채호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과 가장 불행했던 시절을 함께 지냈기때문이다.

리윤재가 신채호를 만난것은 1921년 베이징에서였다. 이 시기로 말하면 신채호가 10년간의 망명생활에서 가장 활기에 넘치고 행복한 때였다. 그 전해에 마흔살인 그가 베이징대학 학생인 스물여덟살의 박자혜와 결혼했던것이다. 청춘을 고스란히 독립운동에 바치고 외롭고 불편한 망명생활에 시달려온 신채호로서는 안해가 지어주는 밥을 먹고 다림발이 선 옷을 입고 녀자의 손길이 알뜰히 미친 깨끗한 방에서 산다는것은 황홀할만큼 행복한것이였다.

리윤재가 신채호를 직접 만나기 전에는 그의 문장의 웅장함과 불같은 정열과 창끝같은 예리함을 보고 그의 풍모가 출중하리라고 상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그야말로 초라한 샌님이였다. 체구도 빈약하고 얼굴도 잘생긴편이 아니였다. 하얀 얼굴에 머리의 정수리는 뾰족하고 아래턱은 좀 넓어서 어딘지 균형이 없고 선이 뚜렷하지 않은 아이같은 뭉툭한 입술우에 까만 수염이 성기게 나있었다. 그러나 묘한 빛을 뿌리는 그의 커다란 눈만은 류달랐다. 남이 못 보는것을 가려보는 그의 뛰여난 재주도, 세상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그의 고집도 괴벽도 이 눈이 담고있는것 같았다. 자기의 소신에 맞지 않으면 누구의 말도 안 듣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힘을 이 눈이 나타내고있는것 같았다.

리윤재도 신채호의 성미가 매우 괴퍅하다는 세평을 더러 들어왔는데 막상 만나보니 전혀 그런것도 아니고 오히려 상냥하며 진한 충청도억양은 차분하고 친근감까지 느끼게 하는것이였다.

어느날 신채호가 고구려, 발해의 유적지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나라없고 돈없는 학자의 구차함을 말하는것이였다.

압록강류역의 집안현에서 제2환도성의 유적과 광개토왕릉을 비롯한 방대한 고분들을 답사하고 그는 고구려의 웅장하고 찬란했던 문화의 자취를 돌이켜보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로자도 궁핍한 그로서는 광개토왕릉과 그 주변의 제천단을 붓으로 대강 그려 사진을 대신했고 왕릉의 너비와 높이를 발로 재여 측량을 대신하는수밖에 없었다. 만약 돈이 있어 릉을 한개라도 파본다면 수천년전의 고구려생활의 산 모습을 볼수 있으리라는것을 꿈꾸었을뿐이다.

신채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단 하루동안 그 외부에 대한 관찰에 불과하지만 고구려의 종교, 예술, 경제력 등이 어떠했는가 하는것이 눈앞에 방불하여 집안현의 유적을 한번 보는것이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만번 읽는것보다 낫다는 단안을 내렸어요.》

이윽고 그는 이렇게 말을 맺었다.

《나는 력사란 인류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생각해왔어요. 이를테면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투쟁이 력사를 전진시켜왔다고도 할수 있지요. 그러니 지배자의 사관과 피지배자의 력사평가가 어떻게 같을수 있겠나요. 그래서 나는 사대주의자들의 사관도, 유생들의 왕조사중심의 사관도 부정하는거예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는 견지에서 조선력사를 하나 쓰려고 조금씩 준비해왔는데 바로 이거요.》 하고 그가 책장에서 두툼한 원고뭉치를 꺼내보였다. 그것은 조선사통론, 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성고, 인물고 다섯편으로 된 방대한 규모의것이였다.

흔히 학자들이 신채호의 고대사연구에는 실증이 없다고 말하군 하는데 사실은 그의 력사연구가 널리 섭렵한 문헌의 비교연구와 력사유적답사에 립각하고있다는것을 리윤재는 그의 원고를 보고 알았다. 신채호와 같은 뛰여난 학자가 제 나라에 안착하여 학문에만 정진할수 있다면 그의 업적이 얼마나 더 클것인가 하고 그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사실 신채호의 말로는 나라없는 학자의 비참함을 그대로 말해주는것이다.

설명절 대목 어느날 리윤재는 좀 들려달라는 박자혜의 기별을 받고 오래간만에 찾아갔다. 그는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마치 이사가는 집처럼 어수선했다. 박자혜는 울고있는 두살짜리 수범을 둘쳐업고 무슨 짐 같은것을 꾸리고있었고 신채호는 책장앞에 돌아앉아서 원고들을 짚이는대로 꺼내여 쓸것, 못쓸것을 가려내듯 들여다보고는 구겨서 방 한구석에 수북이 쌓아놓고있었다. 이것도 그의 괴벽의 하나이다.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마음에 안 든다고 불살라버린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인쇄중에 있는 원고조차도 후에 부족한 점이 발견되면 인쇄를 중지해달라고 요구한 일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환경정리를 하는것 같은데.》 하고 리윤재가 궁금해서 물었다.

신채호는 창백한 얼굴에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이번에 난 저 사람과 수범이를 서울에 보내기로 했어요. 나는 귀향할 형편이 못되는데 수범이는 말을 배울 나이가 되였으니 제 나라 사람들속에서 말도 배우고 우리 풍속도 익혀야 할게 아니요.》

청천벽력같은 말이였다. 이국의 무심한 하늘아래서 항상 고독감에 시달리다가 마흔이 넘어 안해의 손길의 고마움을 알고 늦게 본 아들의 재롱에서 기쁨을 맛보던 그가 별안간 스스로 가정의 행복을 부셔버리는 이런 결심을 하다니!

그러나 리윤재는 대뜸 그 원인을 깨달았다. 신채호가 상해림정과 결별하고 베이징에 와서 발기한 군사통일촉성회는 독립군부대들을 통일하기 위하여 지난해 4월에 군사통일주비회를 열고 독립군부대들의 통합을 재촉했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독립군부대들이 군사통일주비회에 참가했으나 아직도 많은 독립군부대들이 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기때문에 군사통일주비회는 기대한것보다는 성과가 적었다. 많은 독립군부대들과 독립운동단체들은 그 당시에 추진되고있던 국민대표회의에 더 큰 관심을 돌리고있었다.

국민대표회의는 상해림시정부의 파쟁이 우심해지자 그것을 불신하고 재조직할 목적으로, 또 무장투쟁을 보다 강화하기 위하여 독립군부대들의 통합과 지휘계통의 통일을 실현할 목적으로 1921년 2월에 베이징에서 박은식 등 14명이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내고 발기한것이다. 이것은 신채호의 주장과 완전히 일치하는것이였다. 군사통일촉성회는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신채호는 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이것은 확실히 독립운동에서 새로운 단계로 될것이니 그 실현을 위하여 그는 자기의 모든것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만일 필요하다면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몸과 마음이 자유로와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큰 장애가 가정의 구속이였다. 그래서 그는 단연 자기 가정의 행복을 희생시키기로 한것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한 비장한 결심이였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부터 상해에서 개막되였다. 여기에는 70여개 독립운동단체의 124명의 대표가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여러가지 안건을 무난히 토의했고 상해림시정부의 《대통령(리승만) 불신임안》도 가결했으나 상해림정을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이를 개조할것인가, 아니면 상해림시정부를 완전히 부정하고 새로운 림시정부를 창조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대표들사이에 심각한 대립이 생겼다. 개조파는 안창호, 려운형, 고려공산당 이르꾸쯔크파, 서간도의 독립군대표들이 주동이 되였고 창조파는 윤해를 비롯한 고려공산당 상해파, 원세훈 등 베이징의 독립운동자들, 신채호를 위시한 군사통일촉성회, 김규식을 비롯한 상해림시정부의 일부 인사들이 중심이 되였다.

국민대표회에서 개조파와 창조파의 분렬이 극심해지자 개조파인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들은 분격하여 자기들의 대표인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비서장 배천택 등을 소환해버렸다. 그러자 창조파는 윤해를 의장으로 선출하고 국민대표회의의 주도권을 장악했으며 김규식을 행정수반으로, 윤해를 의회의장으로, 박은식, 리동휘, 문창범 등을 고문으로 하는 창조파의 새 림시정부를 조직하고 1923년 8월 울라지보스또크로 옮겨가서 본격적인 활동을 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쏘련정부는 자기 령토내에서의 조선인민족주의자의 림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출국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창조파의 새 림시정부는 자연히 해산되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이것은 국민대표회의의 완전한 실패임과 동시에 3. 1인민봉기이후에 신채호가 해온 모든 활동의 실패를 의미하는것이였다.

신채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고 좌절감과 허무감에 허덕이며 방황하고있었다. 민족주의독립운동자에게서도, 공산주의독립운동자에게서도 다같이 환멸을 느꼈다. 이것이 그후 그가 무정부주의에로 기울어지게 된 하나의 계기였는지도 모른다.

이 시기에 베이징에 돌아와있던 그는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는 극도의 곤궁에 처해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서울에 보낸 처자로부터는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는 편지만 날아와 그는 더욱더 절망에 빠지고말았다.

의기소침해서 베이징에 돌아온 그는 이제는 처자도 없는 옛집에서 리윤재와 함께 자취하게 되였다. 리윤재가 그 집을 지키고있은것은 신채호부부의 부탁에 의해서였다. 먹는것도 궁핍했고 땅땅 어는 겨울에 땔것이 떨어지는것은 보통이였다.

1924년 정월 어느날 주인집에서 숯불을 얻어다가 방을 다소라도 데우며 자기로 했다. 원래 신채호는 몸이 허약해서 방이 추운데는 질색이였다. 사그라져가는 숯불은 그의 마음에 위안이나 되였을것이다. 그런데 그 숯불때문에 그날 한밤중에 둘 다 가스에 취하여 속절없이 황천객이 될번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방문옆에서 자던 리윤재가 괴로움에 못이겨 태질하다가 발길로 방문을 찼고 그 바람에 찬바람이 쓸어들어 리윤재가 먼저 깨여났다. 그는 머리가 깨여지는것 같고 운신도 할수 없었으나 엉금엉금 기여 안쪽에서 자는 신채호에게 다가가보니 그는 인사불성이였다.

기겁을 한 리윤재는 정신없이 달려나가 의사를 데려왔다. 리윤재가 가스에 더 견딜 힘이 있었다는 이런 요행이 없었더라면 신채호는 구원되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신채호는 정신이 들자 아픈 머리를 끌어안고 《아아, 그대로 영면했더면 도리여 다행이였을걸!》 하고 중얼거리였다.

아침에 둘이 자리를 잡고 앉자 리윤재는 그 말이 생각나서 한마디했다.

《단재선생은 국사연구라는 필생의 과제를 오늘 잊은것 같군요.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주의의 열쇠가 국사에 있다고 한게 선생이 아닙니까.》

신채호는 아직도 골이 쑤시는지, 아니면 아픈 곳을 찔리워서 그러는지 얼굴을 잔뜩 찌프리고있다가 이윽고 말했다.

《패군지장으로서 무슨 말을 더하겠소. 무장투쟁이 유생의 농사가 아니라는걸 깨달은 오늘 내 갈길은 속세를 버리는것뿐이요. 내 생각다 못해 머리를 깎고 중이나 될가 하오.》

리윤재는 놀라서 신채호의 창백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볼뿐이였다.

이것이 력사학자로서의 그의 종말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좌절에서 오는 일시적인 방황인가 하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그는 정치투쟁이 학자인 자기의 농사가 아니라고 말한다. 시운을 타지 못한탓도 있지만 본의아니게 끌려들어간 파쟁에 의하여 그의 죽지는 부러졌고 절망상태에 가까운 정신적위기를 겪게 된것이다.

과연 그는 그해 3월 12일에 머리를 깎고 중이 되려고 베이징교외에 있는 석등암에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승복을 입고 61일간의 재계를 한다고 속세의 번쇄사를 떠나 무아의 경지에 도달할수는 없었다. 조국의 운명에 대한 근심, 국사연구에 대한 뜨거운 정열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다.

드디여 절에서 나온 그는 또다시 국사연구에 몰두했고 그후 무정부주의적인 동방련맹에 관계하여 활동하다가 왜경에게 체포되였다.

복잡한 정치적파동속에서 신채호의 말로는 이렇게도 다난하였다.

《신채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오?》 하고 리윤재가 최기봉에게 물었다.

《이 뛰여난 력사학자가 옳은 정치적령도를 받았더라면 그와 같은 비참한 말로는 겪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최기봉의 말은 길지 않았고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의 말은 리윤재에게 상당히 감명깊게 들리였다.

그것은 최기봉의 체험에서 우러난 말같았다. 그는 독립군생활 10년에 나아갈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옳은 정치적령도를 받아 재생하지 않았던가.

만일 신채호가 실의와 좌절로 방황하던 시기, 그후 무정부주의로 기울어지던 시기에 참된 령도를 받았더라면 그의 만년의 파란곡절은 없을수 있었을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리윤재는 신채호의 비운을 원통해하며 자신을 돌이켜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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