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4 회)
제 1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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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소의 하루일과는 무료하게 흘러갔다. 옆방의 홍명희부수상과 두군하던 장기놀음도 이제는 싫증이 났고 정원에서 떠들썩하게 진행되군 하는 배구경기에도 흥미가 없었다.
평양에 두고온 하많은 일감이 방학세를 괴롭히며 조급증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그런 내색을 하지 말아야 했다. 호실에 드나드는 간호원이 《부상동지》라고 깍듯이 존대해주며 무엇이든 요구만 하면 다 해결해줄것처럼 미소를 남실거리지만 실은 휴양소의 하루일과를 얼마나 착실하게 잘 지키는가를 매일매일 감시하면서 저녁마다 소장에게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치고 그것이 이튿날에는
물론 휴양소에 《쫓겨》온 일군이 자기 혼자가 아니라는것으로 하여 적지 않은 《위안》은 가졌다.
그래서 방학세는 지금 내무성이나 어느 도의 내무부에서 전화라도 걸어주어 그간 제기된 일들을 간단간단히라도 보고해주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있었다. 간호원과의 며칠간의 끈덕진 《사업》끝에 전화는 하지 못해도 걸려오는 전화는 받을수 있다는 양보를 받아냈던것이다.
방학세가 이런 생각에 잠겨 가없이 펼쳐진 가을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는데 간호원처녀가 마침 호실안에 들어와 평양에서 전화가 왔다고 알려주었다.
방학세는 반색을 하며 처녀를 따라 전화기가 있는 직일실로 향했다. 전화는 방학세네 부국장에게서 걸려온것이였는데 목소리가 갈리고 말을 너무 떠듬거리다나니 처음에는 전혀 그의 목소리같지 않았다.
《부상동지, 제 한병혁입니다. 제가 저… 부국장입니다.》
부국장은 벌써 같은 말을 반복하고있었고 방학세는 어느새 짜증이 났다.
《아, 알겠소. 누군 뭐 귀머거리인줄 아오? 말하오. 무슨 일이요?》
방학세는 부국장의 이런 떠듬거림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고 이제 그에게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발생해도 리성을 잃지 말고 헤덤벼서는 안된다는것을 따끔하게 이야기해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때 그의 다음말이 고막을 드렁드렁 울렸다.
《부상동지, 저… 오늘 새벽에
《?!…》
한순간 방학세는 어리벙벙해졌다. 누구인가 잘못되였다는 보고는 틀림없는데 그 이름의 임자가 누구였는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방학세
방학세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저쪽에서는 조바심이 난것 같았다.
《부상동지,
《여보, 당신 정신 나가지 않았소?》
마침내 방학세는 책상을 치며 뛰쳐일어났다. 모진 충격에 책상우의 전화통이 부들부들 떨며 갑자기 팽팽해지는 전화선끝에서 몸부림 쳤다.
방학세는 말하는 사람이 정말 자기 부국장이라고 여길수가 없었다. 그가 어떻게 무슨 마음을 먹고 그런 어망처망한 소리를 지어낼수 있단 말인가. 방학세는 믿을수가 없었다. 부국장도 자기
《내 당신을 가만두지 않겠소. 당신이 정말 내가 알고있는 부국장이라면 오륙이 성성하게 가만두지 않겠단 말이요. 알겠는가?》
그러거나말거나 상대방은 비록 떠듬거리기는 했지만 오늘 9월 22일 새벽에
《그러니 사실이란 말이요? 음?!》
끝내 방학세는 책상우에 떨어져 딱딱한 나무판대기와 아츠럽게 부딪치는 송수화기와 함께 그 자리에 무너져내렸다. 걸상이 밀리며 저만치 나가넘어지고 방학세는 그대로 찬 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았다. 극심한 진통이 몸안의 어느 구석에서인가 시작되여 급속한 전파력을 가지고 현미경으로나 들여다볼수 있는 모세혈관까지 뻗쳐나가 참기 어려운 아픔을 불러일으켰다.
책상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송수화기에서 부국장의 목소리가 그냥 울리고있었다.
《부상동지, 부상동지! 차를 보냈습니다. 인차 거기 도착할겁니다. 그럼 빨리 평양으로 올라오십시오. 제 말을 듣습니까? 부상동지, 부상동지… 부상동지!》
방학세는 그것이 이 세상의 종착점을 울부짖는 단말마적넉두리로밖에 더 들리지 않았다.
방학세로부터 이 비보를 전달받은 홍명희도 그것을 믿지 않았고 남일과 정준택은 몸서리를 치기만 할뿐 차마 그것이 사실인가 따져물어보지도 못했다. 소식을 전해주는 방학세
평양으로 향해가는 차길에 이날따라 돌부리는 왜 그렇게 많고 위험한 구배길은 또 얼마나 자주 나타났던지…
방학세가 당중앙위원회 회의실에 도착했을 때 안에서 울려나오는 추도가의 선률이 복도의 공기를 뒤흔들고있었다.
모여든 조객들이 보였다. 방학세를 비롯하여 휴양지에 가있던 일군들은 차마 그들속에 끼여들 엄두도 못 내고 다만 홍명희만을 등을 떠밀어 앞으로 내보냈을뿐이였다.
앞에 나간 홍명희는 흰 머리를 푸들푸들 떨며 김책의 팔소매를 꽉 틀어잡고 가까스로 몸을 유지하고있었다.
모여든 조객들의 어깨너머로 붉은기폭에 휘감긴 령구와 그곁에 서계시는
《만경대할머님이 손자며느리가 귀하다고 주시였던건데 얼마 차보지 못하고 떠나가누만. 이젠 이걸 더는 벗어놓을 일이 없겠지.》
방학세는 그제서야 꿈이였으면 하였던 이 모든것이 결코 꿈으로 깨여날 일이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문설주를 붙잡는다는것이 곁에 서있던 누구인가의 어깨를 엄청난 힘으로 꽉 붙들었는데 그 역시 꿈속에 잠긴듯 의식이 없는지 어깨가 물어뜯기우는듯 한 아픔에도 불구하고 조각처럼 그냥 서있기만 했다.
그때부터 방학세는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세월이 어떻게 흐르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살았다.
령구가 발인되고
저택안의 마당으로 들어섰지만 선뜻 방안으로 들어갈 용기는 나지 않았다. 이제 부르면 응당히 문이 열리고 봄날같은 미소를 뿌리며 맞아주셔야 할 그분께서 여기에 없다는 자각때문에 속에서 울컥 무엇인가 치밀어올라 입을 싸쥐였다.
푸르싱싱하게 잎을 펼치며 자라오른 남새밭머리에 녀사께서 쓰시던 흙묻은 호미가락이 놓여있었다. 거기서 나오던 싱싱한 남새가 방학세가 이곳에 때없이 찾아와 즐겨먹던 국수의 꾸미거리가 되군 했었다. 그리고 또 저기에는… 톱으로 가지를 썰어 한쪽이 밋밋해진 개암나무가 자라고있다.
《아!》
방학세는 주먹으로 눈앞에 보이는 기둥을 힘껏 쳤다. 길다랗게 내뻗친 그 팔을 누구인가 조심히 붙잡고 흔든다. 안해의 손이였다. 떨리는 그 손이 방학세의 팔목까지 떨게 하며 무엇인가 자꾸만 권하는듯 하다. 무엇을 권하는가, 이제 여기 와서 남편에게 무엇을 강요하려 하는가. 방학세는 누구이든 이 순간에 자기를 건드리는 사람은 용서치 않을 기세로 안해쪽을 향해 사나운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 안해의 안타까와하는 눈길과 부딪쳤고 그의 절절한 속삭임 소리를 들었다.
《이보세요, 지금
방학세는 그제야 저택의 문이 열린것을 보았다. 불빛이 새여나오고 벌려진 문틈사이로
《왜 거기 서있는거요?》
《…》
《왔으면 들어와야지.》
《…》
《들어오오. 적적하던 참인데 마침 잘 왔소.》
며칠사이에 한평생의 풍상고초를 다 겪으신듯 갈리신
방안은 조용했다. 자제분들은 어느 다른 방에 가계시는지 보이지 않고
방학세가 안해와 함께 자리를 잡고 앉은지 얼마 안되였는데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방학세는 이런 날에 함부로 댁으로 전화질을 하는 사람이 계급적원쑤 못지 않게 증오스러웠다. 그래 애꿎은 전화기만 무섭게 노려보고있는데 누구인가 다가가 전화를 받았다.
방학세에게 자리를 권하시던
《누구요? 조국전선 조사위원회에서 온 전화가 아니요?》
《네, 조사위원회 부위원장동무입니다. 그런데 저…》
《됐소. 그 동무들더러 문건이 완성되였으면 내게 보내라고 하시오.》
방학세는 더 참을수 없어
《
《그러지 마시오. 방동무, 며칠전에 내가 은파산지역에서의 적들의 무장침공과 만행에 대한 자료를 종합하라고 조국전선 조사위원회에 과업을 주었댔는데 오늘이 그 수행날자요.》
《그는… 갔소. 떠나간 사람이 이제 내가 일손을 놓는다고 다시 오겠소. 다시는 오지 못하는 그 길을 갔지. …》
쓰라린 회한이 섞인
방학세는 차마 그냥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자기가 때아닌 때 찾아와
아아, 우리 공화국력사의 첫 기슭에 이런 날이 있을줄 꿈에나 상상할수 있었던가. 나붓기는 람홍색공화국기와 울려가는 《애국가》의 선률에도 우리 군대와 내무일군들, 경비대원들이 입고있는 군복에도 녀사의 세심한 지도의 손길이 어려있다. 그분이 없는 이 나라를 우리 어찌 상상할수 있었던가.
이 세상의 모든 곳을 한바퀴 돌아온 메아리런듯 웅글은
《방동무, 간 사람때문에 너무 속썩이지 마오. 나때문에는 더욱 그렇고… 우린 일을 해야 하오. 무엇보다도 나라를 튼튼히 지키고 인민들의 절절한 숙원으로 된 나라의 평화적통일을 이룩해야 하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 결성되고 평화적조국통일에 관한 선언서가 채택되던 날 그가 얼마나 기뻐했는지… 지금도 순결한 웃음을 담고 기쁨에 넘쳐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오. 그는 통일된 나라를 필생의 념원으로 간직하고있었소. 강한 나라, 통일된 나라, 평화로운 나라… 그 념원이 실현되면 그는 영원히 우리곁에 있는것이지. 그가 영영 떠나갔다고 우리가 어찌 생각할수 있겠소.》
방학세는 고개를 들어
그렇다. 일을 하자, 나라를 지키자.
이 나라를 일떠세워야 한다. 이 나라를 좀먹으려는 온갖 인간쓰레기들을 이 신성한 땅에서 영영 쓸어버리고 전쟁의 먹구름도 끄떡없이 물리쳐버릴 일심의 나라, 통일된 나라를 일떠세워야 한다.
방학세는 사무치는 가슴속 충동에 떠밀려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밤이 깊어가고있었다. 밤하늘에서 지금껏 졸고있던 별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