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 회)

 

제 11 장

 

3

 

그해 봄부터 리극로는 조선어학회 회관건축에 몰두했다. 물론 시공은 건축업자에게 맡겼지만 리극로는 설계자이고 건설주로서 건축전반에 걸쳐 관여하지 않을수 없었다. 굉장한 건물도 아니고 보통주택만 한 2층짜리 불로크양옥에 불과하지만 크나작으나 집짓는 품은 이만저만 드는게 아니였다. 게다가 제한된 부지에 집을 바로 앉히자니 리윤재의 집 안채를 불가불 침범하지 않을수 없게 되여 그는 더욱 곤난해졌다.

어느날 리극로가 리윤재에게 미안해하며 말했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더니 어학회집을 짓다가 환산선생의 집을 병신꼴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이 초가집을 자리나 옮길게 아니라 아예 헐어버리고 어학회의 집과 꼭같은걸 하나 더 지었으면 합니다. 환산선생도 이제는 뻐젓한 집을 쓰고 사셔야지요.》

리윤재는 아직 양옥집을 쓰고살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헌 초가집을 헐어서 옮겼댔자 쓸만 한 재목이 얼마 안되여 배보다 배꼽이 큰 역사가 될것 같았다. 하지만 새 집을 짓자니 그럴만 한 돈이 없었다. 리극로가 말을 이었다.

《같은 집 두채를 동시에 지으면 건축비가 좀 절약될게고 이 초가집을 헐어서 목재를 잘 건져 쓰면 돈은 더 적게 들겁니다. 그리고 모자라는 액수는 서서히 변통해보면 되겠지요. 처음에는 어벌이 커보여도 한번 큰마음 먹고 달라붙으면 안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어학회의 일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달변인 리극로의 말에 마음이 동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더우기 그가 리윤재를 위하여 사심없이 권하는 말이니 그는 이것이 좀 분수에 넘치는 일인줄 알면서도 리극로의 권고에 따르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집을 헐고 새로 짓자면 건축비의 마련도 큰일이지만 그동안 이 많은 식솔을 데리고 거접할 집도 문제였다.

한동안 망설이던 그가 일단 결심을 하자 단호하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역시 집문제이니 김한규의 도움을 받을수밖에 없었다.

김한규는 처남이 제살궁리는 안하고 집터도 집도 다 내준것을 나무라면서도 이왕 그렇게 된바에야 자기 집 안채의 두방을 몽땅 내주겠으니 이사하라고 시원스레 말했다. 그리고 그가 집을 소개해준 연고로 면식을 익힌 은행원을 통하여 집문서를 잡히고 은행에서 천5백원을 대부 받게 해주었다.

《돈이 날데도 없는데 그 불같은 돈을 쓰고 제때에 갚지 못하면 어떻게 해요.》 하고 근심하는 안해에게 리윤재는 아무 대답도 못했지만 속으로는 그때쯤이면 《성응 리순신》이 세상에 나가리라고 생각하며 그 인세에 기대를 걸어보는것이였다.

리극로는 정세권에게서 얻어온 돈 3천원과 리윤재가 준 천5백원으로 우선 집을 짓고 보자고 하여 두 집의 건축이 동시에 착공되게 되였다.

리윤재의 일가는 부랴부랴 김한규의 집으로 이사했다. 김한규의 부부가 오붓하게 살던 이 조그만 집에 두 집안의 많은 식구가 함께 살게 되니 그 소란하기가 장마당 같았다. 리윤재가 김한규에게 미안해하면 그는 아량있게 웃으며 말하는것이였다.

《이제야 사람이 사는것 같소. 많은 식구가 벅적거리니 외로움에 지쳤던 내 마음에 활기가 생기는것 같군.》

금옥은 정씨와 함께 이 많은 식구를 먹이기 위한 동자질에 눈코뜰새 없었다. 생활의 주인이 된 그의 마음에는 어느덧 구김살이 가시고 본래의 너그러움과 착함이 되살아났음을 정씨는 똑똑히 보았다.

바로 이 시기의 리윤재의 번거로운 생활과 복잡한 심경의 반영인듯 《한글》잡지 1935년 5월호(3권 5호)가 휴간되였다. 그 원인은 인쇄비의 빚이 루적되여 인쇄소에서 인쇄를 제때에 해주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런대로 건축공사는 진척되여 6월말에는 기본적으로 준공되였다.

회관으로도 살림집으로도 외관상으로는 볼 모양이 없는 사각형의 집이니 성냥갑을 두개 나란히 세워놓은것 같다. 쌍둥이같은 두 집이 한울타리안에 있으니 주소도 똑같이 화동 129번지이다. 외벽에 하게 되여있는 세멘트곰보미장을 못하여 불로크가 그대로 드러나있지만 창문에 유리까지 끼고나니 사람은 거처할수 있게 되였다.

드디여 그해 7월 11일에 조선어학회가 화동 129번지에 이사했다.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1921년에 창립되여 오래동안 집없이 지내다가 8년만인 1929년 9월에야 수표동 42번지 조선교육협회에서 방 한칸을 얻어 곁방살이를 해오다가 이제야 비로소 딴 문패를 붙이고 독립한 호주로 된것이다.

이름있는 조선어학자들을 총 망라하고 이룩한 업적으로 하여 절대적인 사회적권위를 가진 조선어학회가 창립된지 15년동안이나 회관 하나 없이 지냈다는 이 사실은 나라없는 조선민족에게나 있을수 있는 일이였을것이다.

이 회관조차 리극로의 쇠진드기 같은 이악한 노력으로 독지가 정세권에게서 희사받은것이니 이 빈약한 건물이야말로 조선학계의 초라한 모습을 그대로 말해주는것이다.

리윤재일가는 도배를 하느라고 한주일 늦어서 새 집으로 이사했다.

평소에 시어머니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세우는 일이 전혀 없던 정씨가 새집에서 방을 나누는데서는 처음으로 자기의 주장을 세웠다. 부엌에 달린 안방은 살림방으로 자기가 아들 둘을 데리고 거처하고 거기에 달린 채광이 좋은 남향방은 남편의 서재로 했으며 딴 아궁이로 군불을 땔수 있는 마루건너의 방은 시어머니의 방으로, 그 옆방은 두 딸의 방으로 정했다. 2층은 방이 셋인데 가장 큰 방은 맏딸 순경의 신방으로 할 작정으로 아예 그에게 주고 그옆의 작은 방 하나는 지금은 림시로 나가있는 정인선의 방으로 떼여놓고 나머지방 하나는 끊임없이 찾아와서 묵군 하는 문하생들의 방으로 비여놓기로 했다.

학자인 남편의 서재를 꾸려주려는 정씨의 소박한 소원은 그가 이 집안에 시집온지 20년만에야 겨우 이루어졌던것이다.

팔판동 집에서도, 김한규의 집에서도 좁고 옹색하고 소란한데 넌덜머리를 냈던 가족들이 방이 많은 새집의 새생활에 활기를 띠였다. 이 집에 와서 누구보다도 기를 편것은 어린 두 아들 종갑, 종주였다. 1층에도 2층에도 복도가 있고 그것을 련결하는 나무계단이 있어서 두 소년은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1층으로 끊임없이 오르내려 복도의 울리는 소리와 계단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하루종일 멎지 않았다. 그밖에는 모두가 제 방에 들어박혀있으니 넓은 집이 괴괴할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새생활에 활기에 넘쳐있었지만 리윤재만은 근심에 잠겨있었다. 이 생소한 생활이 빚더미우에 올라앉아있다는 불안이 수시로 그를 엄습했기때문이다.

리극로는 천원만 더 내면 건축비는 청산된다고 말했다. 리윤재는 그 계산내역을 보려고도 안했지만 헐은 집에서 리용해 쓴 목재 등의 값으로 건축비를 기껏 낮춘 금액일것이다. 게다가 건물외벽의 미장을 다 끝낼 때까지 아직 시일이 있고 그런 다음에 정세권과 건축비회계를 하겠으니 그동안에 서서히 돈을 마련해보라는것이였다. 그러나 은행에서 단기대부로 쓴 금액의 상환기일이 박두해오자 리윤재는 안절부절을 못하게 되였다.

잠간사이에 여름이 가고 무거운 마음을 더 어둡게 하는 가을이 왔다. 천고마비의 계절, 남산의 단풍을 즐길수 있는것은 근심 없는 사람일것이다. 리윤재는 생각다못해 9월 중순 어느날 한성도서주식회사의 김진석을 찾아갔다.

김진석은 리윤재를 보자마자 난처한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러지 않아도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고싶었는데 마침 잘 오셨군요.》그리고는 말을 머뭇거렸다.

《<한글>잡지때문에 또 성가신 일이 생긴게 아니요?》

《<한글>잡지의 적자발간에 대해서는 우리도 만성화되였다오. 이번에는 그게 아니라 선생의 <성응 리순신>을 총독부 학무국에서 조선사람에게 읽힐 책이 못된다는 리유로 발매금지처분을 내렸어요.》

《그래요?》

어리둥절한 리윤재는 그이상 할말이 없었다.

《그 책에 대한 수요가 높기때문에 우리는 재판준비를 하고있었는데 초판도 다 발매못한채 이런 된벼락을 맞았구려. 선생의 저서야말로 그사람들에 대한 로골적인 저항이 아닌가요. 그런걸 원고검열에서는 아무 말도 없었던것이 이상할 정도요.》

리윤재는 잠시 묵묵히 앉아있었다. 그는 책의 운명을 두고 괴로와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성응 리순신》의 인세에 다소의 기대를 걸었던 그는 암담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다문 얼마라도 돈이 생길데라군 아무데도 없다. 그는 가까스로 말했다.

《내 책때문에 또 기업에 손실을 주어 정말 안됐군요. 하지만 <한글>잡지만은 다시 휴간이 안되도록 도와주시오. 우리도 최선을 다하겠으니.》 김진석이 딱한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선생의 처지가 정말 딱하게 생각돼요. 그렇게야 잡지를 어떻게 경영해내겠어요.》

리윤재는 한성도서에서 나와 안국동 네거리를 걸어가며 줄곧 생각했다.

(이제는 어떻게 할것인가?)

소슬한 가을바람에 가로수의 잎이 지고 락엽이 아스팔트우로 끝없이 굴러간다. 쫓기우는 인생같다. 감빛석양에 물들어 온 거리가 술에 취한것 같다. 한쪽에서는 왜놈의 군가가 하늘에 주먹질을 하는것 같고 한쪽에서는 녀가수의 노란 목소리가 인생을 애곡한다. 도시도 인간도 다 술주정뱅이처럼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이 탁류에 몸을 잠그지 않으려는 리윤재의 행동은 휘친휘친 걷는 그의 걸음걸이처럼 괴이해보이지만 그의 생각은 언제나 현실적이고 건전했다. 조선이라는 이름까지 없애려고 《반도》라고 부르며 엄연히 일본이라는 이름을 두고 《내지》라고 부르게 하는 왜놈의 세상에서 조선어를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한 잡지를 내며 왜적의 침략의 력사를 들추어내고 그 패망을 그린 책을 써낸다는것은 어찌 보면 비현실적인 환상가 같은데가 있으나 학문하는 자세와 립장, 방법에서는 철저히 현실적이였다. 그처럼 생활을 직시하는 그의 태도도 역시 현실적이였다. 그는 새로 지은 집을 팔지 않고서는 지금 처한 궁지에서 도저히 벗어날수 없다는것을 똑똑히 알았다. 가난한자가 아무리 용을 써야 더 잘살수 없다는 그 한계를 그는 이미 뼈저리게 체험했었다. 오를수 없는 나무는 올려다보지도 말랬다. 그래서 그는 《청빈락도》(가난해도 마음편히 산다는 뜻)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있었지만 이것이 패자의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는것도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는 결심하고 김한규를 찾아갔다. 대문에 들어서니 금옥이 달려와서 부축하며 묻는다.

《오라버니 신색이 왜 이래요. 어디 편찮으신게 안예요?》

《일없다. 요즘 나는 너의 환한 얼굴을 보는게 가장 즐겁다.》

《원, 오라버니두.》

그의 목소리를 듣고 김한규가 방에서 뛰여나와 버선발로 대돌에 내려서서 처남을 맞이하며 한마디 했다.

《그러기에 물각유주(모든것에 임자가 있다는 뜻)라지 않소. 어서 들어가기나 합시다.》

처남에 대한 김한규의 존경심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티끌 하나 몸에 묻히지 않고 도고하게 살아가는 처남을 그는 돋보지 않을수 없었다. 처남은 어떻게 보면 투박한 농투산이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준수한 선비같기도 했다. 이것은 농민과 같은 바탕에 높은 학문과 교양을 쌓은 결과라고 그는 생각했다.

처남이 마음은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사리분별은 명확한것이 그때문일것이다. 그래서 그는 처남의 말을 믿기를 자기 마음처럼 했고 그를 위해서라면 무엇 하나 아끼지 않았다.

잠시 덤덤히 앉아있던 리윤재가 불쑥 말했다.

《매부, 새로 지은 집을 좀 팔아주오.》

김한규가 놀라서 소리쳤다.

《그게 무슨 아닌밤중에 흥두깨같은 소리요. 그 집에서 얼마나 살았다고 벌써 팔겠다는거요?》

《빚더미우에 올라앉아서 고대광실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은행빛과 건축비 잔액때문이겠지? 그게 얼마나 되오?》

《2천 5백원이나 되니 내가 무슨 수로 그만한 돈을 마련하겠소.》

김한규도 심각한 얼굴을 하고 생각에 잠겼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 과수원을 팔아서 그 빚부터 메꾸고봅시다.》

《쓸데없는 소리. 나더러 남을 자기의 궁지에 끌어들이는 물귀신이 되라는거요?》

《그럼 집을 팔고는 어떻게 할 작정이요? 그 집이 시가로 한 4천원 나가겠는데 그 돈에서 빛을 갚고 나머지돈으로는 지금 시내에서 오막살이도 사기 어렵소. 그러니 한지에 나앉겠소?》

이번에는 리윤재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생각하다가 말했다.

《시변두리에는 그 돈으로 살만 한 집이 없겠소?》

《잘 더듬으면 있기야 있겠지만, 그럴게 있소. 이판에 아예 나하고 광주로 나갑시다. 과수원 절반을 떼여줄테니 과일나무나 가꾸면서 저술이나 하구려. 내가 가만 보니 처남의 큰 결함은 학자로서 저술에 힘쓰지 않는거요. 학자가 일생에 남길것이 저서밖에 무엇이 더 있겠소. 처남은 사심이 너무 없는게 탈이야.》

리윤재는 매부의 말이 옳다고 생각했고 자신도 그런 전원생활이 그리웠다. 생활에서 그런 여유만 생긴다면 이미 카트도 적지 않게 작성해놓은 고어사전도 끝낼수 있을것이다. 그외에도 쓰고싶은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서 머리를 저었다. 《한글》잡지는 죽으나 사나 끌고가야 하고 이제 결속이 멀지 않은 표준어사정도 끝내야 하며 어학회의 조선어대사전도 편찬해야 한다. (리윤재는 김윤경, 리극로, 리희승, 최현배 등과 함께 맞춤법통일안위원, 표준어사정위원, 조선어사전편찬위원으로서 이 모든 사업에 관계하고있었다.) 이것을 다 포기하면 자기의 삶의 목표를 잃어버리는것으로 된다. 그리고서야 자기 개인의 저술이 무슨 보람이 있는가. 이윽고 그가 시름겹게 말했다.

《내가 <귀거래해여> <돌아가리라>를 부르기는 좀 이르군. 앞으로 언젠가는 매부의 충고에 따르겠소. 당장은 집을 좀 팔고사게 해주구려. 변두리 아무데라도 일없소.》

《원, 사람두!》 하고 김한규가 혀를 끌끌 찼다.

그때 금옥이 저녁상을 들고 들어왔다.

그후 보름사이에 김한규의 주선으로 리윤재의 집이 4천5백원에 팔렸고 그 돈에서 빚을 갚고 남은 돈으로 서울교외인 고양군 한지면 신당리에 방 세칸짜리 초가집을 사게 되였다.

그리하여 10월 초순에, 새 집에 든지 석달도 못되여 리윤재일가는 화동에서 신당리로 이사했다. 온 가족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이사였다.

남편의 서재를 평생 처음으로 꾸려준 정씨의 기쁨도, 널씬한 집에서 맏딸의 잔치를 치르려던 그의 소원도 순식간에 깨지고말았다. 5년동안이나 데리고있던 정인선을 하숙에 내보내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 신당리에는 아직 소학교가 없으니 어린 두 아들은 이미 다니던 재동심상소학교까지 먼거리를 통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래서 리윤재는 매일아침 두 아들을 학교에 데려다줄겸 어학회에 출근했고 저녁에는 아이들의 공부가 끝난 후 퇴근했다. 회의라도 있어 아버지가 늦어질 때에는 두 아이는 어둡도록 뜨락에서 놀며 아버지를 기다려야 했다.

문하생도 이제는 묵을 방이 없었다.

김해댁은 이번 집문제로 너무도 속이 상해서 리극로도 나무랐다.

《그 쇠귀신이 공연히 남에게 배 주고 배속 빌어먹을 노릇만 시켰다니까. 》

그렇지 않아도 리극로의 상심은 컸다.

리윤재는 집에 대한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집문제를 계선으로 그의 생활은 안정을 잃었고 계속 하강선을 긋는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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