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10 장

 

3

 

이 땅에 다시 봄이 왔다. 그런데 이해 봄은 좀 류다른 사건으로 가뜩이나 움직이기 잘하는 서울사람들의 마음을 붕 뜨게 했다. 우가끼총독이 리왕궁의 경내인 창경원에서 요사꾸라(등불을 대낮같이 켜놓고 만개한 사꾸라꽃을 구경하는 밤놀이)를 4월 18일부터 허용한다고 발표했기때문이다. 사꾸라를 조선의 왕궁에까지 심게 한것은 사이또총독의 10년간의 《문화정책》의 가장 큰 보람의 하나라고 했다.

《3만의 시민이 창경원에 희동》이라는 신문기사를 보는 리윤재의 눈이 곳곳해졌다. 3. 1인민봉기와 6. 10만세시위의 독립만세소리가 노호처럼 터졌던 이 서울에서 인간들의 자신에 대한 몰각과 정신적붕괴가 이렇게도 빠른가 하고 분격하는 리윤재는 간교한 왜놈 못지 않게 왜색에 물들어가는 우매한 무리들을 더 꾸짖고싶었다.

이 망국풍조에 역행하듯 때마침 세상에 나간 《한글》잡지 2권 1호를 보는 그는 마치 산고를 치른 산모가 자기의 산아를 보듯 마음속으로부터의 기쁨을 느낌과 함께 서글픈 생각 또한 들지 않을수 없었다. 대중판으로 면목을 일신한 잡지는 내용은 차치하고 외형상으로는 오히려 크게 퇴보했다. 8면짜리 신문지를 네겹으로 접어놓은것 같은 크기와 부피이고 표지도 속표지도 따로 없으니 잡지는 꼭 벌거벗은 꼴이다. 누구나 손쉽게 사볼수 있도록 값을 5전으로 떨구느라고 인쇄비를 최대한으로 줄인 결과이다.

이 잡지에서 제일먼저 눈에 띄는것은 표지이자 내용지인 제1면란외에 굵직굵직한 활자로 찍은 글줄이다. 오른쪽에는 《우리 글의 통일은 오직 이 잡지로》, 왼쪽에는 《한자도 빼지 말고 다 읽어주시오.》라고 찍혀있다. 이것은 잡지편집자의 진심의 호소이자 소원이다.

그리고 1면에 《편집내용변경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여쭙는 말씀》이 실려있고 이 새 편집취지를 지체없이 실현하려는듯이 1면의 눈에 가장 잘 띄우는 곳에 설정한것이 《긴급동의》란인데 거기에는 《<이것>이냐, <이걷>이냐》라는 제목의 길지 않은 글이 실려있다. 가장 유식한체 하면서 《이거든 하나님아바지의 말삼이 올시다.》라고 가장 무식하게 말하는 사람이 낯을 붉히지 않을수 없게 하는 내용이다.

고정란인 《한글 바로잡아쓰기 익힘》과 《신문기사의 교정》은 구철자법으로 된 글을 맞춤법통일안대로 교정하여 둘을 대비해보면서 철자법을 익히게 하려는것이다. 이런것을 두고 최현배는 학보가 부녀자에게 《가갸거겨》부터 가르치겠는가고 비웃었지만 한글을 널리 보급하고 누구나 맞춤법통일안대로 글을 쓰게 할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싶은것이 리윤재의 심정이였다.

이와 함께 《새 받침글의 련습》란을 두어 종전에 쓰이지 않던 받침의 어례를 《중등교육 조선어급한문독본》에서 골라 그 사용원리를 해설했다.

이런 고정란들은 맞춤법통일안보급초기에 대중을 계몽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일이였고 기여한바도 적지 않았다.

대중계몽잡지로 편집을 개편한다고 하여 잡지가 통속글만 다룬것이 아니다. 독자에게 문법지식을 주기 위하여 최현배의 《조선말본 강의》를 실었고 조선어교육을 담당한 교사들을 위하여 《보통학교 조선어독본지도례》를 편집했다. 뿐만아니라 《옛말찾기》란을 설정하고 《훈민정음언해》, 《룡비어천가》 등에서 고어를 뽑아 주석을 달았고 그후에 박로철의 《고어원류고》를 련재했으며 한글연구도서해제를 련재하여 우리 나라 고어와 고전연구에 기여했다.

거의 없어져가는 우리 나라 력사를 소개하기 위하여 3권 1호부터 《조선력사강좌》를 설정하고 조선상고사편을 련재한것은 왜적의 조선말살정책에 대한 뻐젓한 도전이였다.

《물음과 대답》란과 기타 지면을 독자에게 널리 제공한것은 통속지로 된 《한글》잡지의 중요한 특색이였다. 이 지면을 통하여 초야에 묻혀있던 한글연구가들이 적지 않게 발굴되였으니 이는 실로 큰 소득이였다.

《한글통일안 보급에 대한 각계 여러분의 말씀》은 그해 년말까지, 즉 2권 9호까지 끌고갔는데 이것은 맞춤법통일안에 대한 사회의 반향을 엿볼수 있게 한것이다.

여기에 실린 전국 문인 48인의 《한글맞춤법 시비에 대한 성명서》와 이 성명서를 지지한 최형우를 비롯한 장춘유지의 성명서 그리고 각계층의 인사 71명의 《말씀》은 맞춤법통일안지지운동에서 한몫을 단단히 했을뿐아니라 한글반대파에게는 가혹하리만큼 된매를 안긴것이였다.

그러나 맞춤법통일안이 나온 후 온 사회가 일치하게 지지환영한것은 아니다. 박승빈일파가 아니라도 각계의 사람들이 자기의 주장을 들고나와 시비를 걸었다. 그중에는 참고할 가치가 있는것도 없지 않았지만 대개가 문외한의 망설이였다.

소설가 김동인은 1934년 8월에 《조선중앙일보》에 련재한 《한글의 지지와 수정》이라는 글에서 통일안이 너무 표음을 극단으로 중시한 결과 많은 례외와 변칙을 두게 한것이 치명적결함이라고 하면서 그 실례를 들고 이런 말을 함부로 썼다.

《조선어학회의 통일안의 큰 결함 하나는 그들이 조선문법에 대하여 너무도 무지하므로 어근에 대한 인식착오가 많은 점이다.》

《조선일보》기자 홍 아무개는 1934년 10월에 이 신문에 낸 《조선어연구의 본령》이라는 글에서 맞춤법통일안도, 박승빈의 주장도 꼭같이 비판을 하고 자신은 철자법에 대하여 《먹어, 먹으니》라고 쓰거나 《머거, 머그니》라고 쓰거나, 《ㅅ가, ㅅ다, ㅅ바, ㅅ자》로 쓰거나 《까따빠짜》로 쓰거나, 《조흐, 조하》로 쓰거나 《좋으, 좋아》로 쓰거나 아무렇게 쓰건 통일만 시키면 그만이라고 해놓고 다음과 같은 말로써 자기의 본색을 드러냈다.

《조선어의 배외주의자들이여! 조선어에 대하여 촌호의 기여라도 원할진대 모름지기 충실한 학도로 돌아가서 과학의 가르치는바를 따르라. 만일 그렇지 못하거든 일찌거니 조선어로부터 물러가라. …근래 신진의 조선어연구가가 많이 쏟아져나오고 거기 대한 일반의 관심도 높아있건만 아직껏 나는 한사람으로부터도 과학적연구방법에 대한 나와의 공명을 듣지 못한다.》

그의 이 폭언이 조선어학회학자들에게 주로 향한것임은 두말할것도 없다. (그의 그후의 글과 행동이 그것을 실증했으니까.) 이쯤 되면 박승빈보다 한술 더 떴다고 아니할수 없다.

이러한것이 맞춤법통일안에 대한 시비의 일단이다.

이 시비와 소란의 바다를 난행하는 배의 키를 잡은것이 《한글》잡지였다. 《한글》잡지는 한글통일운동의 기수였고 박승빈일파와 온갖 시비군과의 대결장이였으며 독자대중과의 토론의 광장이였다.

호를 거듭할수록 《한글》잡지에는 신진들의 진출이 잦아지고 그들속에는 훌륭한 인재들도 있어 한글연구가의 대렬을 보충해갔다. 이것은 새 《한글》잡지의 공적의 하나라 할것이다.

그런 사람의 하나가 김병제이였다. 후날에 우리 공화국의 조선어학계에서 원로의 한사람으로서 원사, 교수, 박사인 그는 가난한 빈농가에서 태여나 한문서당에서 10살까지 공부하였으며 그후 보통학교를 나왔으나 학비를 충당할수 없어 상급학교에 가지 못하였다.

그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가서 우수성적으로 합격되였으나 월사금을 내지 못하여 얼마 다니지 못하고있다가 서울로 가 친구의 주선으로 보성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되였지만 학비와 하숙비를 더는 댈수 없어 1926년에 겨우 3년을 수료하고 고향인 경주로 돌아와 촉탁교원(무자격교원)으로 있으면서 문학에 뜻을 품고 선진적인 도서와 진보적인 문학작품들을 열심히 탐독하였다. 그러던 그가 여름방학때 서울로 올라갔다가 카프작가들인 리기영, 송영, 박세영 등과 알게 되고 그들과 친교를 맺은것이 발단이 되여 1927년에 카프에 가맹하였다. 카프에 가맹한 김병제는 부르죠아문학가인 량주동의 평론 《문제의 소재와 이동을 읽고》에 대한 반박평론을 《중외일보》에 발표하였는데 그가 반박하는 평론을 내자 또다시 그에 대한 비평을 《조선일보》에 《문학상 평면과 립체적견해》라는 제목을 달고 6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그는 이 평론들에서 일제의 식민지통치와 부르죠아반동문학을 신랄히 비판하고 프로레타리아문학을 옹호하고 주장한것으로 하여 일제경찰에 붙들려가 취조를 받고 《불온사상》딱지가 붙어 결국 교원의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후 그는 1928년 일본으로 건너가 니홍대학 문예학과 야간학부 학생으로 토목공사장과 신문, 우유배달을 하며 고학으로 공부하다가 나중에는 병에 걸리고 돈을 내지 못해 졸업증을 받지 못한채 1931년 3월에 귀국하여 《중외일보》교정원으로, 이어 학예부 기자로 일하였다.

이 과정에 그는 《조선지광》잡지에 일본에서 자신이 직접 체험한 조선사람들의 비참한 생활을 담은 단편소설 《떨어진 팔》을 처녀작으로 발표한이래 청년사회주의자의 법정투쟁을 내용으로 한 단편소설 《대변자》를 내놓았으며 계속하여 단편소설 《비장한 소식》을 련이어 발표하였다.

이처럼 그는 처음에 어학이 아니라 문학으로 인생의 첫 발자국을 뗀 사람이였다.

그는 계속하여 《중외일보》에 《문예시감》 등의 평론과 번역소설 《염군》을 70여회에 걸쳐 련재하던중 일제의 탄압으로 이 신문이 무기정간처분을 받게 되자 또다시 실직자로 되였을뿐아니라 진보적인 카프문학활동으로 하여 놈들의 감시의 대상으로 되였으며 결국 일자리를 구하기 힘들게 되였다. 그러던 그가 문학에서 어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것은 당시의 시대적상황에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으로부터 우리말과 글을 지켜야겠다는 자각으로부터 출발된것이였다. 그리하여 그는 3년전부터 원고청탁관계로 리윤재를 찾아다니는 과정에 그의 영향을 받고 조선어연구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였으며 기자생활을 그만두고 배재고보 조선어교원으로 옮겨앉았다.

그후 그의 조선어에 관한 연구론문들이 신문과 《한글》잡지에 나가기 시작하여 신진학자로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지난해에는 드디여 리윤재의 추천으로 조선어학회 회원으로 되였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기로 되였다.

스승이고 은인인 리윤재를 깊이 존경한 김병제는 그를 더 자주 방문하게 되였고 그의 가족과도 곧 친숙해졌다.

키도 맞춤하고 몸집도 맞춤하며 멋쟁이로 생겼으면서도 조금도 건방지지 않으며 행동거지가 자못 세련되여있으면서도 대바르고 고지식하며 례절있고 과묵한 이 착실한 젊은이를 가장 탐탁하게 생각한것은 김해댁이였다. 김해댁이 어디 나들이갔다가 돌아오면 식구도 아니면서 얼른 나가 부축하여 맞아들이는것이 그의 몸에 밴 례절이였으니 김해댁이 좋아하지 않을수 없었다.

배화녀고를 갓 졸업한 순경을 두고 계집애를 스무살이 되도록 시집보내지 못한것을 큰 변으로 여기고있던 김해댁이 하루는 온순한 김병제를 잡아앉히고 쥐여박듯이 따져서 그가 이 훌륭한 가문의 성원이 되고싶다는 실토를 받아내였다.

《원, 별 신랑 다 봤군. 신부가 마음에 들었으면 들었지 장인 보고 장가들고싶다는건 무슨 소리야!》하고 김해댁이 웃었지만 그의 깊은 마음속에서는 너무도 명색없고 가난하여 딸 셋을 어느 하나도 바로 시집 보내지 못한 쓰라린 지난날을 되새겨보는것이였다.

하기 지상한글강습특집으로 편집된 《한글》잡지 2권 5호에서 김병제는 아흡번째 강의 《표준말》을 담당집필하여 선배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였다.

해를 넘겨 1935년에 들어서자 《한글》잡지에 대한 독자의 진출은 더욱 왕성해졌다.

춘천의 신명철은 《독자의 소리》란에 《<선어>를 조선어로》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실었는데 그 한 대목은 이렇다.

《<선어>라는것은 아마 남들이(왜놈들이)지은것일것이다. <선어>가 무엇인가. <일본어>면 <본어>인가, <로시야어>는 <시야어>인가. <선인>이란 또 무엇이냐.》

그리고 《한마디 더》하고 《언문》이라는 말을 페지하자고 주장했다.

사실 우리 나라의 문자의 이름은 발표당시에는 훈민정음이였다.

《백성을 가르치는 정한 소리》라는 뜻이였다. 그런데 그뒤 실록과 기타 문헌들에 《언문》이라는 말이 종종 나타났는데 이는 사대사상에 중독된자들이 자기의 고유한 문자를 중국의 한문보다 낮추어보는데서 나온 말이다. 그런데 박승빈은 저서 《조선어학》에서 《언문》을 조선어의 고유명사라고 주장했다. 주시경이 지어부르고 이제는 널리 일반화된 한글이라는 이름에 대한 반발이였던것이다.

뛰여난 문장가이고 진지한 조선어연구가인 신명철에 대하여 리윤재는 오래동안 글로만 사귀며 호기심을 가졌었다. 퍽 후에 서울에 올라온 신명철은 얼굴이 창백하고 눈에 섬광이 이는듯 한 젊은이였다. 왜놈의 돈을 가지고다니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부득이 만져야 할 경우에는 신문지를 찢어서 그것으로 싸쥐는것이였다. 이런 신명철을 보고 리윤재는 (그의 뛰여난 재주와 과격한 성격때문에 이 왜놈의 세상에서는 무사히 살기 어려운 사람이군.)하고 탄식했다. 그후 신명철은 리윤재의 문하생으로 되여 여러해동안 그의 사업을 협조했는데 그러는 사이에 리윤재의 둘째딸 근화에게 짝사랑을 했지만 고향으로 다시 떠날 때까지 한마디도 내비치지 않은 순정의 사나이였다. 그러한것을 깊이 존경하는 스승에 대한 무례한짓으로 여겼던것이다.

《한글》잡지 3권 8호에는 김룡운이 리윤재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방언조사(호남지방 익산을 중심으로)》라는 글이 게재되였다.

《방언조사》는 전북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그 일대의 방언을 상당히 광범하게 세밀히 조사하고 정연한 체계를 세운 훌륭한 조사보고였다.

누가 시켜도 하기 어려운 이런 일을 스스로 한 김룡운은 조선어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학자가 아니고 배재고보의 한개 학생이였다. 그는 타고난 재주 하나만을 밑천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고학을 했었다. 신문배달, 우유배달, 안한 일이 없었다. 그래도 학비 대기가 어려웠고 먹고 살아가기가 힘들었다. 부득이 학교를 그만두려는 그를 붙들고 리윤재가 호주머니를 털어 학비를 대준적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는 리윤재의 강의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조선어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고 뛰여난 재주를 나타냈다.

리윤재의 집에 이따금 찾아오군 하던 그는 자기와 거의 동년배인 정인선과 사귀게 되였다. 그러나 둘은 모든 점에서 너무도 달랐다. 김룡운이 키가 륙척이고 성격이 아주 적극적이고 활달하다면 정인선은 중키에 몸이 가늘고 아주 내성적이며 귀공자같았다. 둘의 공통점은 타고난 비상한 재주와 학구열이였다. 둘은 만나면 밤을 지새우며 기왕에 읽은 책들에 대하여, 모순에 찬 사회문제에 대하여, 세계의 대세와 민족의 운명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군 했다.

막역한 친구가 되였지만 둘은 어찌할수 없는 빈부의 차이에 의하여 운명이 다르게 번져졌다. 정인선이 배재고보 4학년때 성대 예과에 시험을 치고 합격하여 젊은이들의 선망의 대상인 백선모를 쓰게 되였을 때 김룡운은 부득이한 가정사정으로 학교를 4학년에서 휴학하고 귀향했던것이다.

신명철, 김룡운, 정인선이 앞으로 리윤재와 같이 조선어와 운명을 같이하는 자기희생의 길을 걸어가겠는지 그것은 아직 알수 없지만 어쨌든 그와 같이 민족의 얼을 지키며 어려운 길을 걸어갈 그의 다음 세대였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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