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 회)
제 10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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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절대목이 다가오자 가지가지 빚쟁이들의 빚독촉에 정씨는 안절부절을 못했다. 아침부터 각종 세금의 고지서가 날아들더니 뜸할 사이도 없이 수도세를 받으러 오고 낮에 찬거리를 마련하려고 골목 맞은쪽 구멍가게에 들렸더니 주인령감이 통장으로 외상거래한 빚청산을 채근하며 우는소리를 한다. 게다가 근화는 학교에서 교복값을 내란다고 며칠째 울며불며 야단이다.
집안살림살이에는 무능할 정도로 무관심한 리윤재지만 방문밖에서 안해가 받는 빚단련을 그는 말로만 들으며 방안에서 달달 볶이우는 기분이였다.
그는 아직도 학교에 가지 않고 울고 섰는 근화를 불렀다. 벌써 열다섯살이고 녀고학생이지만 워낙 허약해서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근화는 성미도 유순해서 어지간해서는 밸을 부리는 일도 없는데 이번만은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있다. 큰소리를 한번 쳐도 쓰러질것 같은 이 아이를 아버지는 꾸짖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교에서 교복을 꼭 사입으라더냐?》
근화는 고개만 끄덕인다.
《네가 입은 조선옷이 어디가 나빠서 구태여 왜놈의 교복을 입으라는거냐?》
말을 해놓고보니 아이에게 해야 아무 소용없는 소리다. 남이 다 입은 교복을 혼자서 유별나게 안 입을수도 없지 않은가. 근화의 눈에서는 눈물이 쭈르르 흘러내린다. 학교의 요구와 아버지의 주장이 상반되니 중간에서 괴로움을 받는것은 어린 근화뿐이다. 그것을 아버지도 모를리 없다.
《오늘은 그냥 가거라. 래일 아침에 보자꾸나.》
《돈 안 가지고는 오지 말랬는데…》하고 근화가 엉엉 울며 나간다.
시간을 자로 재듯 하며 사는 리윤재지만 돈때문에 딸을 울려놓고 마음이 산란해서 멍청히 앉아있는데 대문소리가 나고 한 사나이와 안해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자, 오늘은 내겠지요?》
《이를 어쩌나. 래일은 꼭 마련해드리겠어요.》
《래일 래일 하는게 벌써 몇번째요. 나도 더는 못해먹겠수다. 래일 와서 전기줄을 몽땅 걷어가겠으니 그런줄 아시우.》
그리고 대문을 탕 닫는 소리가 들린다.
리윤재는 한숨을 후 쉬였다. 모든것이 래일에 달린것 같다. 허나 래일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것도 아니다. 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야 돈이 될만 한것은 하나도 없다. 결국 그의 눈이 서가로 향했다. 여느 책은 짐으로 지고 가서 팔아야 전기세 하나 물지 못할것이다. 좀 값이 나갈만 한 책은 살점을 떼여내기보다 아까운것들이다. 그는 생각다못해 며칠째 싸들고 다니던 《한글》잡지의 원고뭉치를 보에서 꺼내고 그우에 책을 한권한권 쌓아놓기 시작했다.
방에 들어오던 정씨가 보우에 수북이 쌓인 책들을 보자 어이가 없는듯 물었다.
《그걸 팔자고 그래요?》
대답없는 남편을 애처롭게 바라보던 정씨는 《차라리 제 옷가지를 파는게 낫지.》 하며 책들을 도로 책꽂이 빈자리에 꽂고 꺼내놓은 《한글》잡지원고를 보에 싸놓는다.
안해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팔만 한 옷이나 값진 장신구 하나 변변한것이 없다는것을 리윤재가 모를리 없었다.
《저녁까지 내가 좀 마련해보겠소.》하고 그는 한마디 하고는 원고보따리를 들고 집에서 나와버렸다.
그에게 돈을 구하는것이 지금 《한글》잡지를 인쇄하는것만큼이나 힘든 일이였다. 그런데 그 두가지가 동시에 무거운 추처럼 그의 가슴에 매달렸다.
그는 《한글》잡지원고보따리를 들고 오늘은 어디로 가볼가 하고 망설이다가 대동인쇄주식회사가 있는 종로쪽으로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디였다.
대동인쇄주식회사는 광산업으로 거부를 모은 리종만이 민족문화발전에 기여해보자고 세운 인쇄소로서 처음에는 민족고전을 출판할 계획을 내걸긴 했으나 그것은 좀체로 실현되지 않고있었다. 그래도 신철자법을 받아들이는데서는 상당한 성의를 보여 인쇄물의 7, 8할은 불완전하나마 신철자법으로 찍어내고있었다. 리윤재가 《한글》잡지원고보따리를 들고 거기를 찾아가는것도 그 점을 보고 기대를 걸어보기때문이였다.
사장 박인환은 그를 상냥히 맞이했다.
《어떻게 어려운 걸음을 다 하셨습니까. 무슨 저서의 인쇄를 주문하시려는게 아닙니까?》
그는 리윤재와 거의 동년배의 기업인으로서 자리를 보아가며 처신을 림기응변으로 할줄 아는 사람이였다.
리윤재는 들고있던 원고보따리를 책상에 올려놓으며 가식없이 말했다.
《이건 휴간하고있는 <한글>잡지의 원고인데 인쇄를 좀 부탁해볼가 해서 왔습니다.》
《아, <한글>잡지원고예요? 그거야 조건없이 받아들여야 할 잡지지요. 그런데 중앙인서관에서는 어째서 안하게 됐습니까?》
리윤재는 이런 기업인을 상대할만 한 말의 기교를 모른다. 자기의 진실은 남에게도 진실로 되는줄로만 믿는것이였다.
《이런 잡지는 독자도 제한이 있고 발행부수도 적어 노상 적자만 내지요. 그래서 리중건씨에게 많은 페를 끼쳤습니다. 경영난에 허덕이는 중앙인서관에 더 신세를 지기 어렵게 되였습니다. 창간호부터 10호까지 자기희생적으로 인쇄를 맡아준것만 해도 리중건씨의 남다른 후의의 덕분이였지요. 나는 대동인쇄주식회사의 발족취지를 믿고 이 간고한 잡지의 운영을 여기에 의탁해볼 생각을 했습니다.》
박인환은 매우 감심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상냥한 미소까지 지었다.
《매우 갸륵한 일입니다. 이 불경기시대에 그렇게 기업손실을 보면서까지 잡지발간에 힘쓴다는건 보통 독지가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뜻 하나만으로는 해결해드리지 못할 딱한 사정이 있습니다. <한글>지를 찍을만 한 활자가 준비되여있지 못하거던요. 이를테면 쌍받침이 거의 없고 ㅎ받침의 활자는 아예 없습니다. 여느 잡지라면 몰라도 <한글>잡지야 구식활자로 찍을수 없지 않습니까.》
이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정말 맡아주려고 마음만 먹으면 해결 못할 난관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리윤재는 안깐힘을 쓰듯 말했다.
《좀 모자라는 활자야 새로 주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허, 그게 그리 간단합니까. 된시읏 대신 쌍서 한가지만 개선하는데도 수백종의 활자 수만개를 새로 주조해야 했는데요. 맞춤법통일안대로 활자를 완전히 개조하자면 현재 있는 활자만 한것을 몽땅 새로 부어내야 할겁니다. 이거야말로 문자혁명인 동시에 인쇄개혁이지요.》
《그거야 언제건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는 그것을 단행했지요. 그래서 구식철자를 꼭 요구하는 인쇄의 주문은 받지도 않아요.》
《옳습니다. 그러나 인쇄업도 기업이니만치 영리가 목적이지요. 이런 생리를 무시하는 기업이 있을수 있습니까. 활자개혁이 시대의 추세에 맞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것을 번연히 알면서도 단숨에 단행하지 못하는것도 그때문이지요. 3대신문이 맞춤법통일안을 그렇게 열렬히 지지하고 그대로 시행할것을 사회에 공언하고도 오늘까지 질질 끄는것은 바로 이 돈문제때문이겠지요.》
《나는 사실 맞춤법통일안이 나온 후에도 이를 말로만 환영하고 실천에서는 무성의하고 개혁이 부진한 출판인쇄계에 대하여 가장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허허, 너무 노여워마십시오. 이 무서운 불경기나 무사히 넘기면 우리도 생각이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선생을 초빙해서 우리의 발족취지를 관철할 문제를 놓고 의논하게 될는지 알겠습니까.》
리윤재는 그의 말하는 잡도리로 보아 《한글》잡지의 인쇄를 맡을 의사가 전혀 없다는것을 깨달았다. 불비한 활자를 가지고라도 찍어달라고 하면 그는 또 다른 구실을 댈것이다. 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서로를 옹색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리윤재는 원고보따리를 들고 일어섰다.
박인환이 얼른 일어서며 얼굴에 깊은 동정의 빛을 띠였다.
《선생의 고충은 십분 리해됩니다. 나를 너무 노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게 나 혼자의 결심으로 될 일이 아니니까요.》
리윤재가 거리에 나와 시계를 보니 벌써 정오가 다 되였다. 이번에는 하는수없이 한성도서주식회사로 가려고 마음먹었다가 하필 점심시간에 남을 찾아가기가 미안하여 발걸음을 돌려 탑골공원으로 슬렁슬렁 걸어갔다.
설명절대목의 추위는 역시 맵짰다. 목도리도 두르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은 그는 속이 비면서 온몸이 으스스 떨렸다. 이럴 때 눅거리호떡집에라도 들어가 따끈한 차라도 한잔 마시면 좀 낫겠건만 호주머니에는 돈 한푼 없었다.
날씨가 추워 그런지 탑골공원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고 잎떨어진 시커먼 나무도 돌보는이 없이 퇴락해가는 전각들도 침울하게만 보였다. 3. 1인민봉기의 만세소리가 처음 터졌던 유서깊은 이곳이 지금은 페허같이 쓸쓸하기만 하다. 한때는 웅자를 자랑했을 원각사는 집터도 남지 않고 지금은 이끼에 덮인 13층의 탑만이 그 옛날의 편모를 전하는것 같다.
리윤재는 이 추운 날에 실성한 사람처럼 할 일없이 공원안을 어슬렁거리다가 한시간이 실히 지나서야 견지동으로 향했다.
추위에 얼굴이 시퍼렇게 얼어서 방안에 들어서는 리윤재를 보자 한성도서주식회사 사장 김진석은 얼른 일어서서 그를 불이 활활 붙는 난로앞에 앉히고 난로우에서 김을 뿜고있는 주전자에서 따끈한 물을 한고뿌 따라 그에게 주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마시고나니 얼었던 몸이 좀 풀리는것 같았다.
《아니, 무슨 바쁜 일로 이렇게 꽁꽁 얼며 다니시오?》하고 이윽고 김진석이 먼저 말을 꺼냈다.
리윤재는 김진석 하고는 오래동안 책출판관계로 사귀여와서 박인환 하고보다는 한결 허물없이 말할수 있었다.
《내 저 <한글>잡지원고보따리를 들고 요새 여러 인쇄소를 다녀보았는데 어디서나 문전거절을 당했군요. 오늘 이 집이 마지막이요. 저 원고가 살면 나도 살고 저 원고가 죽으면 나도 죽는판이요. 목숨을 건 이런 뜀뛰기를 광대들은 살판뜀이라던가.》
서글프게 웃는 리윤재를 바라보며 김진석은 웃지 않았다. 한참 말이 없던 김진석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사정은 우리도 한가지요. 적자밖에 날게 없는 저런 월간잡지의 인쇄를 맡는다는건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초고를 수십부 거저 찍어주는것과는 성질이 다르지요. 주주들과 전무들이 아우성을 칠게거던. 아, 참 딱한 일이로군.》
리윤재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난로우의 주전자에서 픽픽 뿜어내는 김만을 물끄러미 바라보고있는 그의 눈에는 실망이 가득히 어리였다.
방안에는 이윽토록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더 말해야 아무 소득도 없다는것을 둘은 알고있었던것이다.
노곤해서 조는듯 하던 리윤재가 불쑥 물었다.
《<문예독본>의 인세로 받을게 얼마나 있을가요?》
김진석이 마치 궁지를 모면한듯, 다문 리윤재에게 위안이라도 줄수있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기는듯 반색하며 말했다.
《아, 잊고있었군, 상권 재판의 인세와 하권의 미지불인세를 합하면 한 6백원은 돼요. 오늘이라도 드리리다.》
리윤재가 무릎을 탁 치며 환성을 올렸다.
《됐어요! 우선 그 돈으로 이 잡지를 찍어주시오. 모자라는대로… 제발 부탁하오.》
이 말에 김진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개인의 저서도 아닌 기관잡지를 개인의 돈으로 인쇄한다면 인쇄소의 사장인 자기의 립장은 어떻게 되는가.
《어떻게 그렇게야 할수 있겠어요!》
《아니요, 그렇게 해주시오. <한글>잡지는 사회의 공기이자 나의 살붙이같은거요.》
가슴이 뭉클해진 김진석은 리윤재가 입은 허름한 무명두루마기의 해진 앞섶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숨 섞어 말했다.
《리선생은 공기를 잡숫고 사는거야 아니겠지요.》
《공기나 마시고 살수가 있다면 작히나 좋겠어요. 자, 원고를 받으시오. 더이상 시간을 허비시켜드리지 않으리다.》
리윤재는 원고보따리를 김진석의 책상우에 옮겨놓고 이야기가 다시 빗나갈가봐 저어하듯 방에서 부리나케 나가버렸다.
안도감과 함께 피로를 몹시 느낀 그는 행길을 한참 걸어가다가 문득 무엇인지 잊은것만 같아 우뚝 섰다. 그리고 어쩐지 허전한 한팔을
들어보았다. 그렇지, 원고보따리가 없다. 늘 몸의 한부분처럼 붙어다니던 원고보따리가 없으니 허전할수밖에. 그는 어이가 없는듯 빙그레 웃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참 가다가 생각하니 여전히 무엇을 잊은듯 허전하다. 이번에는 팔이 아니라 마음이 꺼림직하다. 왜 그럴가? 요새 원고보따리를
들지 않은
하늘을 쳐다보니 벌써 술 취한듯 뿌연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있다. 퇴색해가는 석양으로 거리도 누렇게 빛이 바랬다. 모든것이 시들어버린 겨울의 저녁은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이 넓으나넓은 서울에서 리윤재는 어디 가도 돈 한푼 마련할데라군 없다. 하긴 그런것은 생각해본 일도 없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집길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서대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키지 않는 걸음이라 그런지 갑자기 피로가 더 심해지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전차가 아츠러운 쇠소리를 내며 쏜살같이 지나간다. 평생 타지 않는 전차지만 오늘따라 저걸 타면 좀 헐하게 빨리 가겠는걸 하고 그는 생각해본다. 그러나 타자고 해도 차삯 5전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배가 살살 아프고 게울듯 구역질이 나며 자꾸 땅속으로 꺼져들어가는것 같을가. 분명히 허기진것 같다. 그는 오늘 아침에 간단히 요기를 한 후 한성도서에서 김진석이 따라주는 더운물을 한고뿌 마신것외에는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은것이 없다. 그리고 빈속으로 온종일 찬바람을 쏘였다. 허기도 이쯤되면 병이다. 그는 다 온 길을 되돌아설수도 없어 내친김에 힘겹게 걸었다.
그가 간 곳은 리은상의 집이였다. 무관한 사이라 주인을 찾을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가니 리은상은 조용한 서재에서 글을 쓰고있었다.
방에 들어와서 말없이 무너지듯 벽에 기대앉아 눈을 스르르 감는 리윤재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리은상은 놀라서 소리쳤다.
《환산, 웬일이요. 몸이 편찮은게 아니요?》
고개만 흔드는 리윤재의 심상치 않은 거동을 보자 리은상은 얼른 자리를 펴고 그우에 리윤재를 눕혔다. 그러나 눕자마자 리윤재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는 입을 꼭 앙다물고 변소로 내달렸다. 변소에 가닿자마자 그는 왈칵 토했다. 그러나 먹은것이 없는 그에게서 쏟아져나온것은 시커먼 피였다. 심한 토혈이였다.
뒤따라온 리은상이 안해를 시켜 양치물과 세면물을 떠오게 해서 리윤재는 대강 씻고 방으로 들어가 눕자 의식이 혼미해졌다.
한참만에 그가 눈을 떠보니 낯설은 의원이 자기 머리맡에 앉아 인증에 침을 놓고있었다.
도구통마나님(리은상의 어머니의 몸이 매우 뚱뚱해서 그의 오랜 친구인 김해댁이 이렇게 부르군 했다.)이 놋대접에 꿀물을 타가지고 와서 리윤재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이걸 우선 들게. 옛말에도 병자랑은 하랬는데 언제부터 앓는 그 병이 뭐가 아까와서 아직껏 숨겨두나. 이 사람아, 그 많은 식솔을 어쩔려구 제 몸을 그리도 안 돌보나. 군소리말구 래일 이 손진사한테 가서 약 한재를 지어가게. 돈걱정일랑 말구.》
리윤재는 뜨거운것을 삼키며 꿀물을 마셨다. 좀 속이 가라앉고 정신이 드는것 같았다.
의원이 돌아가고 도구통마나님도 안으로 들어간 후 리윤재는 부시시 일어났다. 리은상은 놀라서 그의 팔을 잡아 앉히려 했다.
《이거 왜 이러시오. 괜히 로상에서 봉변을 당할려구. 불편한대로 여기서 쉬고 래일 아침에 가시오.》
리윤재가 이 집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요. 이 밤안으로 가야 할 긴한 사정이 있어 그러오. 정말 안됐군. 》
《허 참, 고집 두.》
마당에서 리윤재는 도구통마나님의 꾸중을 또 한번 들었다. 그러나 그런 꾸중은 들을수록 고마왔다.
대문밖에까지 따라나온 리은상은 리윤재의 손에 잠자코 지전 한장을 쥐여주었다.
리윤재는 10원짜리 지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사양도 사례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해야 그것은 다 빈소리에 지나지 않는것이다. 그의 마음도 살림살이도 속속들이 아는 리은상에게는 그런것이 군더더기에 불과할것이다.
이미 어두워진 거리를 비칠비칠 걸어가는 리윤재는 자기가 어쩐지 역설적인 존재같기만 했다. 6백원이란 큰 돈을 남을 위하여 단번에 내던지면서도 자기는 10원 한장을 남에게서 구걸해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