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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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되자 사회의 반응은 예상외로 컸다.

우선 민간신문들이 솔선해서 이를 지지하고 널리 소개선전한것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위하여 아주 다행한 일이였다. 그 당시 사회를 움직여갈 아무런 정치적권력도 자유도 없는 조선사람에게서 민간신문은 유일한 여론의 공기로서 거의 지도력을 행사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총독부관리들도 이것을 잘 알고있었기때문에 민간신문에 대한 감시와 탄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조건에서도 조선사람의 신문들은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제정을 민족사적인 성업의 성취로 환영하고 필봉을 휘둘렀던것이다.

《조선중앙일보》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활자를 새로 고치고 조선어학회의 신철자법을 사설 기타에 부분적으로 도입하다가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후 일정한 기간 준비를 갖추어서 신문전면을 통일안대로 실행하여 신문계에서 봉화를 들었다.

《동아일보》는 모든 독자에게 신철자법의 요령을 알리려고 리윤재가 쓴 《신철자편람》을 그해 4월 1일부터 6월 9일까지 22회에 걸쳐 련재했고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10월 29일에는 《한글통일안대로 본보활자를 갱신》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여 29일부터 이번에 발표된 통일안을 채용하기로 하였다고 선언했고 또 29일부 신문부록으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발행하여 독자에게 배포했다.

《조선일보》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이 발표된 당일에 《한글날》이라는 사설에서 한글을 보급하고 발전시킬 대책으로서 《첫째는 한문을 페지하고 한글을 전용할것, 둘째는 전민중적으로 한글을 배우게 하여 한사람의 문맹이라도 없게 할것, 셋째는 한글을 더욱더욱 연구하여 오늘날보다도 일층 더 완전한 문자를 만들것, 넷째는 로마자보다도 우수한 문자임을 전세계사람에게 널리 알릴것》을 들었다.

이렇게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를 내놓고는 세 신문이 일제히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지지하고 그것을 준용할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실천에 있어서는 편집자들의 견해차이와 새 활자 준비관계로 신문마다 쓰는 철자법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신문지상에서 (《매일신보》는 제외하고) 된시웃(ㅅㄱ, ㅅㄷ, ㅅㅂ따위)이 자취를 감춘것만 해도 하나의 진보라 하겠다.

철자법개혁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조선일보》에 비하여 《동아일보》는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비교적 준용하여왔으나 편집자의 견해에 의하여 처음부터 ㅆ받침을 쓰지 않았고 ㅎ받침(ㄶ, ㅀ 받침도 포함하여)을 한해반이나 써오다가 독자가 좋아하지 않는다는 리유로 쓰는것을 중지하고말았다. 그 독자라는것이 박승빈일파의 작간에 의한것이였다.

신철자법으로 발행된 단행본으로서는 리윤재가 엮은 《문예독본》이 처음일것이다. 리윤재는 조선어학회의 신철자법을 보급하기 위하여 없는 시간을 짜내여 이 책을 엮었고 그것이 고등보통학교들에서 널리 쓰이여 신철자법보급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그후 이름있는 작가들의 소설들과 기타 출판물들이 신철자법으로 나가게 되였는데 이러한 책들의 인쇄를 맡았던 인쇄소들가운데서 특히 통일안이 발표되기 전부터 신철자법에 의한 활자를 준비하고 인쇄를 주문받은 거의 모든 도서들을 신철자법으로 찍어낸 한성도서주식회사는 신철자법보급에 공헌함이 매우 컸다.

수십년간의 간고한 국문운동의 가장 중요한 결실의 하나인 철자법의 통일은 이미 성공의 단계에 들어섰다.

그러나 이 성공이 순탄하게 이루어진것은 물론 아니다. 모든 물체의 운동에는 관성의 법칙이 작용하듯이 사회의 운동에서도 진보에는 보수, 혁신에는 반동이 뒤따르기마련이다.

쑥대밭같이 거칠어진 우리 말과 글을 정리하고 철자법을 통일하는 이 너무도 응당한 력사적흐름에 도전하고 소란을 일으킨것이 역시 박승빈일파였다.

이 일파는 《정음》이라는 기관지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고 조선어학회에 대한 공격과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대한 반대운동을 본격화했다.

《정음》잡지는 매 호마다 조선어학회에 대한 비방중상을 일삼았다. 그러다가 박승빈일파는 명치제과회사에 모여 《조선문기사 정리기성회》라는것을 조직하고 《한글맞춤법통일안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기로 결의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선어학회는 《이를 아예 무시하고 상대로 삼지 아니한다.》고 한 종전의 방침을 일시 중지하고 이 언어도단의 무리에 대하여 포문을 열기로 하였다.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널리 해설보급하고 박승빈일파의 이른바 학설을 비판하는데서 조선어학회의 가장 큰 무기는 《한글》잡지였다. 《한글》잡지는 1권 7호부터 비로소 박승빈일파를 비판하는 글을 싣기 시작했고 1권 8호는 신명균의 《박승빈씨의 소위 경음이란 력사상, 성음상 아무 근거가 없다》, 리희승의 《ㅎ받침문제》, 최현배의 《풀이씨의 끝바꿈에 관한 론》으로써 특집을 하고 편집자는 편집후기에 이렇게 썼다.

《지난해 11월에 동아일보사주최로 한글토론회란것을 열고 개인적자격으로 박승빈씨 대 리희승, 최현배, 신명균제씨의 한글토론이 있었습니다. 여태까지는 자신이 있노라고 하던 박씨는 할수없이 머리를 숙이고말았습니다. 우의 세건의 론문은 그 한글토론회에서 한 연설요지를 정리한것입니다.》

《한글》잡지는 이에 그치지 않고 1권 10호를 《한글맞춤법통일안》특집으로 하고 통일안전문과 함께 통일안에 대한 각 신문의 기사들을 소개했다.

그러나 박승빈일파의 이른바 학설을 분쇄함에 있어서나 갓 제정한 《통일안》을 보급함에 있어서나 가장 요긴한 이 시기에 《한글》잡지는 가장 간고한 길을 걷지 않으면 안되였다.

1권 8호가 1933년 4월 29일에 나간 후 만 석달동안 쉬였다가 같은 해 8월 4일에 9호가 나갔고 또 약 반년동안 휴간했다가 이듬해 1월 25일에야 비로소 10호가 나가고 또다시 기약없이 휴간하고말았다. 중앙인서관의 일상적으로 겪는 재정난으로 리중건의 후의도 더는 지속되기 어려웠기때문이다. 더우기 1933년 4월 8일 조선어학회 제13회 정기총회에서 신명균이 간사장을 최현배에게 넘겨주고 자연 《한글》잡지의 편집 겸 발행인의 명의도 내놓은 후 8호이후의 인쇄를 중앙인서관과 교섭할 사람도 없어졌다.

리윤재는 그후 《한글》잡지 원고보따리를 들고 중앙인서관에 낯간지럽고 눈물겨운 걸음을 수다히 하였으나 10호를 마감으로 더는 잡지를 유지해갈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지고말았다. 인쇄비도 못 버는 잡지로서 돈이 없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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