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6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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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룡정, 두도구, 이도구, 남양평, 걸만동, 연길, 동불사 등 동만일대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 왜놈기관은 물론 산업교육기관까지 파괴하고 지주집과 곡식낟가리에 불을 지르고있다는것이 각 신문에 보도되였다. 세칭 5. 30폭동이였다. 여기서 좌경모험주의적인 공산주의자들의 사촉을 받은 조선사람들이 선두에 서있다는것이였다.

그 결과 조선사람과 중국사람의 관계가 심히 악화되였고 일제군경들과 그의 사촉을 받은 만주의 군벌이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하고있다는것이 련이어 보도되여 국내동포들의 마음을 몹시 불안케 했다.

제1대 총독 데라우찌의 식민지노예정책에 의하여 농토를 빼앗기고 만주로 류랑해간 백만동포들의 운명을 우려하여 사회계는 물끓듯 했다. 그래서 신문사들과 사회단체들이 실태를 조사하고 만주군벌당국과 교섭을 진행할 대표를 파견하기로 의견을 모았는데 누구를 보낼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파벌관계로 론의가 구구하여 쉽게 결정을 보지 못하고있었다. 그러다가 마침 리극로가 대표로 뽑히였다. 그는 귀국한지 얼마 안되여 어느 파벌에도 관계한 일이 없고 일찌기 브류쎌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로 참가한 경험도 있고 중국말도 잘하기때문에 대표적임자로 인정된것이다.

그리하여 리극로는 신간회의 대표로 신문사들의 소개장과 형평사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의 보증서를 받아가지고 만주로 떠나갔다.

그는 안도, 심양, 장춘, 길림, 돈화, 교화를 찾아다니며 5. 30폭동의 실태와 조선거류민들의 피해정형을 조사했다. 조선사람들의 피해는 전해듣던바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리극로가 찾아간 안도의 한 마을에서는 곡성이 진동했다. 마을의 젊은이란 하나도 남김없이 끌려가 조사도 없이 학살당했고 마을에 남은것은 늙은이와 부녀자뿐이였다. 그야말로 무차별학살이였다.

다른 곳도 이와 다를바 없었는데 어떤 마을은 불까지 질러 마을사람들이 빈손으로 한지에 나앉아있었다. 마적떼의 습격을 받았다 해도 이보다 더하지 않을것이다.

리극로는 피해정형을 세세히 기록해가지고 심양으로 가서 중국 동북군 총사령 장학량과의 회견을 요구했다. 처음에는 잘 응하지 않고 부사령 장작상이 마지못해 만나주었으나 그에게 제시한 조선의 3대신문의 소개장과 철학박사라고 밝힌 그의 명함이 효력을 내였는지 다음날에야 장학량이 회견을 수락해주었다.

장학량은 군벌우두머리다운 무게가 있었다. 태도는 몹시 도도했다. 이 회견을 알선한 부사령과 총참모장도 동석했다. 이 군벌우두머리 셋을 약소민족의 대표자로서 혼자 대상하자니 리극로는 마음이 다소 불안했다.

장학량은 간단히 인사말을 나는 다음 사람을 낮추어보듯 거만하게 도사리고 앉아서 함구무언이였다. 망국노에 대한 멸시라 할가, 이번 란동을 일으킨 조선사람에 대한 분노라 할가 그런 기색이 얼굴에 력력히 어려있었다.

리극로는 흥분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 조선사회계의 한결같은 요청에 따라 만주에 사는 조선거류민의 피해정형을 조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만주군벌당국에 의한 조선인피해가 너무도 크고 참혹한데 대하여 간단히 례를 들어 설명했다.

장학량이 그의 말을 불쑥 중동무이하고 시까스르듯 말했다.

《중국인의 피해정형은 조사하지 않았소?》

《그것도 알아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비조차 할수 없는 근소한것이였습니다.》

《아니요, 만주의 치안을 교란한 그 정치적손실은 무엇으로써도 봉창할수 없는 정도요.》

《그건 인정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한건 인간의 생명입니다. 더구나 무고한 사람들의 생명을 함부로 빼앗는것은 인륜상으로도 허용할수 없습니다. 내가 조사한바에 의하면 희생된 사람의 과반수가 폭동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폭동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무 조사도 재판도 없이 처단하군 했습니다. 이것은 법치사회에서는 있을수 없는 현상입니다.》

장학량은 듣는둥마는둥 코수염만 비비고있었다. 리극로가 안깐힘을 쓰며 말을 이었다.

《왜적이 조선을 먹고 만주까지 먹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있는 이때 공동의 적을 앞에 놓고 조중국민이 서로 죽일내기를 한다는건 바로 왜놈이 바라는바입니다. 조선독립운동의 근거지로 되고있는 만주의 백만 거류민을 독립군의 인적자원으로 보고있는 왜적은 남의 손을 빌어 그들의 소멸을 바라는것입니다. 왜놈은 총사령님의 선친을 비명에 죽게 한 원쑤이고 우리 나라 황후를 궁중에서 살해한 간악무도한 놈들입니다. 이 원쑤를 반대하여 조중국민이 굳게 손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장학량의 아버지 장작림의 폭살사건을 상기시키자 그는 아픈 곳을 찔리운듯 눈살을 찌프렸다. 장학량이 지금 항일기세를 높이고있는것도 그때문일것이다.

장학량이 처음보다 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게 요청할 사항만 말하시오.》

《조선사회계의 일치한 의사를 대변하여 다음과 같은 세가지를 제의합니다.

첫째, 군대에 의한 조선거류민의 무차별학살을 즉시에 중지하며

둘째, 죄있는 사람은 법에 의하여 처리하며

셋째, 조중 량국민의 친선의 분위기를 호상 도모하고 만주에서의 조선독립운동자들의 활동을 지원해달라는것입니다.》

그러자 장학량이 시원히 대답했다.

《못 받아들일 조건은 없는것 같군. 어떻소?》 하고 그가 장작상과 총참모장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묵묵히 응수했다. 반대하지는 않는다는것이다.

《이 협약내용을 우리 국내신문들에 보도해도 일없겠습니까?》 하고 리극로가 오금을 박았다.

《그건 마음대로 하시오.》 하고 장학량이 일어섰다.

장학량과의 이 회견으로 모든것이 완전히 풀리리라고 속단할수는 없지만 어쨌든 교섭에서는 성공이였다.

리극로는 마음이 붕 뜬듯 한 기분으로 심양에서 장춘에 들려 최형우(최일천의 필명)를 만났다.

최형우는 리극로가 만주에 온것을 이미 알고있었고 그의 활동결과를 고대하고있는 참이였다.

리극로는 피해의 조사정형과 장학량과의 협약내용을 이야기하고 그것을 시급히 전신으로 신문사에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내가 장춘<동아일보>지국에 말하여 리박사의 이번 교섭의 성과를 대서특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하고 최형우도 매우 기뻐하였다.

둘은 자리를 옮겨 중국료리집의 조용한 방에서 료리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장대한 체구에 비해서는 술을 못하는 리극로는 독한 빼주 한잔에 벌써 얼굴이 시뻘개져서 기염을 토하기 시작했다.

《내가 장학량에게 군벌당국의 조선인학살을 루루이 강조하고 그것을 막아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했지만 내 마음속으로는 공산주의자의 사촉을 받은 조선거류민들의 란동도 용서할수 없었어요. 제 나라 찾기 위한 싸움에나 나설것이지 무엇때문에 남의 나라 계급투쟁에 끼여들고 남의 장단에 춤을 춘단 말이요.》

잠자코 듣고있던 최형우가 이윽고 말했다.

《5. 30폭동은 중국공산당을 지도하고있는 리립삼의 좌경모험주의가 빚어낸 후과이고 그것을 맹종맹동하고 자기 파벌의 권력장악을 노려 군중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몬 종파사대주의자들의 죄과입니다. 그들은 국내에서 공산당을 말아먹고 만주에 와서도 파벌투쟁만 벌리다가 이제는 1국1당의 원칙에 따라 중국당에 전당해야 하니까 그에 필요한 <공로>를 세우려고 이런 망동을 부린겁니다. 나는 그 파쟁군들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는 보지 않습니다.》

《그럼 그와는 다른 공산주의자가 또 있는가요?》하고 리극로가 다우쳐물었다.

《지금 만주일대에서는 공산주의의 새로운 세력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고있습니다. 청년공산주의자라고 불리우는 그들은 어느 파벌에도 가담하지 않는 순결한 청년들인데 각지의 조선인부락에 들어가 일도 하고 문화계몽사업도 하면서 농민들의 의식을 깨우쳐주고 그들을 차곡차곡 조직에 묶어세우고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는 난관도 희생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자기희생적인 노력에 의하여 마을은 한덩어리로 뭉치고 반제청년동맹에 망라된 청년들은 앞으로 반일무장투쟁의 골간으로 자라나고있습니다.

이것은 파쟁의 희생물로 조락의 길을 걷고있는 독립군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가장 철저한 반일무장력으로 될것입니다.》

이 처음 듣는 최형우의 말에 놀라서 리극로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래 그걸 지도하는게 누구요?》

김형직선생은 아시겠지요?》

《알다마다.》

《그분의 자제인 김성주라는 젊은분인데 나는 그동안 독립군의 거두들도, 이름있는 공산주의자들도 적지 않게 만나보았지만 그 지도력과 인품에서 그를 따를만 한 사람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이와 위성처럼 그이를 둘러싼 청년공산주의자들에 대한 기록을 짬짬이 쓰고있습니다. 》

《그래요?》하고 리극로는 잔뜩 호기심이 동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줄수 없는가요?》

《그럼 한가지 실례를 들지요. 나에게 최기봉이라는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는 3. 1운동후 만주에 건너와서 줄곧 독립군활동을 했습니다. 독립군 중대장을 다년간 했고 그가 오동진사령의 부관을 할 때 나는 서기를 했기때문에 매우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는 과거에 흑하사변을 겪은 후 공산주의라면 채머리를 흔드는 인물이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분오렬되여 파쟁만 일삼는 독립군의 현황에 대해서도 환멸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방황하고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나를 찾아와 현시국을 론하던 최기봉이가 2년전 길회선철도부설반대시위투쟁을 목격했던 광경을 이야기하면서 그 투쟁을 주도한 인물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내 긴말할 사이없이 그를 김성주동지에게 소개해주었지요. 그때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오늘 일제의 식민지로 된 우리 나라에서는 민족해방이 최우선문제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반일애국력량을 총동원하여 일제와 그와 결탁한 지주, 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타도하고 민족적해방과 독립을 이룩하여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 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모든 세력과 손잡아야 한다. 민족주의자들과는 물론 일제를 반대하는 민족자본가까지도 심지어 종교인까지도 우리는 손잡고 나가야 한다. 공산주의자도 민족주의자도 애국애족이라는 점에서는 시발점이 같다. …이 말씀에 최기봉은 감동을 금할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속에서는 커다란 파문이 일기 시작한것 같습니다.》

그리고 최형우는 긴 이야기에 목이 컬컬한지 술잔을 들어 목을 추기였다. 리극로는 자기가 늘 생각하는 의혹에 해답을 얻은듯 바싹 긴장해서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최형우가 말을 이었다.

《그후 그는 독립군생활 10년에 얻은 모든것을 다 버리고 국민부에서 뛰쳐나와 량심이 가리키는 길로 나갔습니다. 금 그는  김성주동지의 지도하에 조직에서 일하고습니다.》

《그럼 최선생은 그분과 어떤 관계가 되는가요?》 하고 리극로가 벼르던 끝에 물었다.

《김성주동지가 오가자에 오셔서 혁명활동을 지도하실 때 나는 그곳 반제청년동맹을 책임지고있었고 지금은 혁명적인 잡지 <농우> 주필로 일하고있습니다.

우리는 그때부터 그이를 민족의 태양이라는 뜻으로 김일성동지라고 불렀습니다.》

《아아, 그렇군요!》 하고 리극로가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는 이제는 술기운이 아니라 마음에 받은 충격으로 얼굴이 상기되였다. 아마 이 길지 않은 대화가 그의 사상에서 하나의 전기로 된것 같다.

그는 귀로에 올라서도 그 생각을 줄곧 했다. 만주일대에서 거대한 풍운을 몰아오고있는 참신한 공산주의세력과 그를 이끌고계시는 젊으신 장군님을 그리며 자기자신에 대하여 돌이켜보았다.

우리도 연구회사업을 혁신해야 하지 않을가.

조선어연구회가 생긴지 어언 10년이 지나갔다. 10년이라는 긴 세월에 비하면 해놓은 일이 너무도 적다. 신철자법을 제정한것은 가장 보람있는 일이였지만 이것이 아직 완성되였다고는 할수 없고 사회에서 널리 쓰이기에는 아직 멀었다. 사전편찬은 시작하자마자 자금난으로 좌절되고말았다.

연구회사업은 정체상태에 빠졌고 국문운동은 저조해졌다.

조선어말살정책으로 시종일관한 총독부의 《정책》에 저항하여 조선어를 지키기 위하여 연구회활동을 활성화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것인가?

그는 지루하고 긴 기차려행을 하면서 줄곧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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